조정에 공포한 대행왕의 유교
영의정 윤인경이, 중전이 언문으로 쓴 대행왕의 유교를 주서(注書) 안함(安馠)에게 주어 승정원(承政院)에 보이니, 승지(承旨)·사관(史官) 등이 둘러 앉아 펴서 읽고 누구나 다 통곡하였다. 곧 문자로써 번역하여 별지에 써서 조정(朝廷)에 공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행왕께서 임종 때에 전교하기를 ‘내가 우연히 이 병을 얻어서 부왕(父王)께 종효(終孝)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죄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산릉(山陵)은 백성의 폐해를 덜도록 힘쓰고 반드시 부왕과 모후(母后) 두 능의 근처에 써야 한다. 상장(喪葬)의 모든 일은 되도록 소박하게 하고 상례도 일체 예문을 따르게 해야 한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말할 일이 있거든 반드시 대신에게 의논하여 일체 그 말을 들어야 한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오래 있던 사부(師傅)와 요속(僚屬)도 많이 있으니, 어찌 내 뜻을 아는 사람이 없겠는가. 송종(送終)하는 모든 일은 절대로 사치하지 말도록 하라.’ 하셨는데, 반복하여 백성의 폐해를 더는 것을 생각하고 전교하셨다. 망극한 중에 전교하신 것을 들었으므로 죄다 기억하지 못하여 대강만을 전한다."
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나도 어찌 오래 살 수 있겠는가. 위급하게 되면 어느 겨를에 처리할 일을 알리겠는가. 대행왕의 능소(陵所)를 정한 뒤에 그 같은 언덕 안에 나를 묻을 곳도 아울러 정하는 것이 내 지극한 바람이다. 대행왕을 위하여 정한 경역이 길면 상당(上堂)·하당(下堂)을 만들어야 할 것이고, 모자란다면 합장(合葬)하는 것도 전례가 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아, 애통하다. 대행왕의 유교를 차마 볼 수 있으랴. 백성을 사랑하는 염려를 성회(聖懷)에서 늦추지 아니하여 병환이 위독하신데도 한탄하여 ‘백성이 마침내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훙서할 때에도 백성의 폐해를 덜라고 분부하셨으니, 대개 중종의 상이 있고 나서 산릉의 일이 겨우 끝나자, 잇달아 네 중국 사신의 일로 온 나라 백성의 재력(財力)이 이미 다한 데에 성념(聖念)이 근간(懃懇)하여 마지않았으니 어찌 이 때문에 더욱이 마음이 타지 않았겠는가. 하늘이 나이를 더 주어 그 인심(仁心)·인정(仁政)을 우리 동방에 크게 펴게 하였다면, 그 치화(治化)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늘이 동방을 돕지 아니하여 우리 백성이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아, 애통하다.
또 사신은 논한다. 훙서할 때에 ‘일체 예문을 따르라.’고 훈계한 까닭은 어찌 나라의 일이 예(禮)에 어긋나는 것이 심한 것을 늘 보았고 중종의 상 때에 어긋난 일이 더욱 많아 깊이 한탄한 나머지 이렇게 분부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대렴·소렴을 미리 하고도 염하는 것을 돌보지 않고 궁인에게 맡겼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분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사신은 논한다. 대행왕은 평시에 눕거나 기대어 피로해 졸은 적이 없고 늘 한 방에 바로 앉아 있는 것이 담담하여 마치 서생(書生)같았고 편찮을 때에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증세가 위증하여져서야 비로소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였으므로 측근의 신하들이 비로소 그 병환이 깊어진 것을 알았다. 경회루(慶會樓)에 벼락치던 날에는 대행왕의 증세가 이미 위독하였는데, 측근 신하가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물었으니 ‘마음이 안정된 지 이미 오랜데 무슨 놀랄 것이 있겠는가.’ 하고, 또 ‘어느 곳에 벼락이 쳤느냐?’고 묻자, 측근 신하가 성려(聖慮)를 놀라게 할 것이 염려되어 숨겨서 말하기를 서쪽에 벼락이 친 듯하나 아직은 확실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미안하다는 뜻을 재상에게 말하고 싶다.’ 하였다. 또 늘 측근 신하에게 말하기를 ‘음식을 조절하고 약을 먹으면 권제(權制)를 따르지 않더라도 지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권제를 따르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하였고, 정신을 잃게 되어서는 스스로 헛소리를 하였는데, 번번이 경연(經筵)에 관한 일을 말하거나 청강(聽講)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소리였다. 초하룻날 밤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났을 때에 정염(鄭𥖝)이 들어가 진맥(診脈)하려는데 궁인(宮人)이 손을 끌어내니, 대행왕이 이미 말은 못하게 되었으나 마음속에는 매우 싫어하는 듯이 손을 움츠리고 내놓지 않았다. 윤임(尹任)이 곁에 있다가 그 뜻을 알고서 궁인을 뿌리쳐 보내고 나아가 손을 끌어내니, 정염이 그제야 진찰하였다. 아, 이 몇 가지 작은 일로도 대행왕의 수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82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25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語文學)
○領議政尹仁鏡, 以中殿諺書大行王遺敎, 付諸注書安馠, 示于承政院。 承旨、史官等環坐披讀, 莫不痛哭。 卽飜以文字, 書于別紙, 布諸朝廷, 其書曰:
"大行王臨終時傳曰: "予偶然得此病, 至不得終孝於父王, 罔極之情, 何能盡說? 山陵則務除民弊, 須於父王、母后兩陵近處用之。 喪葬諸事, 宜從朴素, 喪禮, 亦令一從禮文。 毋謂予亡, 幸有可言之事, 須議于大臣, 一聽其所言也。 自在東宮, 久遠師傅及僚屬, 亦多在焉, 豈無知予意者乎? 送終諸事, 愼勿奢侈。" 反覆以除民弊事爲念而傳之。 罔極之中聞之, 故不能盡記, 只傳大綱爾。
仍傳曰: "予亦何能久存乎? 若至危急, 則何暇告其處置之事乎? 大行陵所旣卜之後, 就其一壠之內, 竝卜予所葬之處, 是予至望。 爲大行所卜之域, 若長則宜作上、下堂, 不足則合葬, 亦有古例。"
【史臣曰: "嗚呼痛哉! 大行王遺敎, 可忍觀哉? 愛民之念, 不弛聖懷, 病革歎曰: ‘生民終何如也?’ 臨薨, 又以除民弊爲敎, 蓋以中宗喪後, 山陵纔畢, 繼以四天使之役, 一國民生財力已盡, 聖念之懇懇不已, 夫豈非以是而尤切于中也? 天假之年, 使其仁心仁政, 大展於吾東, 則其治化烏可量哉? 天不佑東, 使吾民, 不得蒙至治之澤。 嗚呼痛哉!"】
【又曰: "臨薨戒以一從禮文者, 豈非常觀國事, 失禮之甚? 中宗之喪, 尤多舛亂, 尋常歎恨而敎之如是乎? 嗟乎! 大小之斂徑行, 而不顧縱橫之布, 委之於宮人, 在廷之臣, 其可謂不負其敎乎?"】
【又曰: "大行王平時, 未嘗偃倚倦睡, 常端坐一室, 淡然若書生, 雖在未寧, 亦不少怠, 及至證重, 始或臥或坐, 左右始知其病深也。 當雷震慶會樓之日, 大行王證勢已革, 左右問: ‘無乃驚動乎?’ 曰: ‘心定已久, 何驚之有?’ 且曰: ‘震之何處耶?’ 左右恐動聖慮, 諱言曰: ‘西方似震, 而時未的知。’ 曰: ‘未安之意, 欲言于宰相。’ 又嘗語左右曰: ‘節食服藥, 雖不從權, 意可支持, 竟至於此。 今雖從權何益?’ 及不省人事, 自發虛語, 每稱經筵間事, 或以不聽講, 爲歎恨之聲。 初一日夜, 絶而復蘇之時, 鄭𥖝將入診脈, 宮人引出其手, 大行王雖已未言, 意甚惡之, 縮手不出。 尹任在旁, 知其意揮去宮人, 就引其手, 𥖝於是診之。 嗚呼! 因此數事之小, 而大行王所養之大, 可見矣。"】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82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25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語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