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간 이윤경 등의 군주의 치도 등에 관한 상소
대사간 이윤경(李潤慶) 등이 상소하기를,
"천하의 일이 많기는 하나 반드시 그 요령이 있으므로, 그 요령을 터득한다면 조처 하는 것은 간략하여도 미치는 것은 넓으며 힘을 쓰는 것은 적어도 공을 이루는 것은 많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진실로 그 요령을 먼저 터득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자신을 닦는 자는 더욱이 그 요령을 몰라서는 안 되는데, 학교를 숭상하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길을 넓히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이요 학문을 강구하는 일을 힘써서 마음을 바루는 것이 자신을 닦는 요령입니다. 그러므로 군주가 된 이는 반드시 그 마음을 바루어서 그 몸을 닦고, 학교를 숭상하여 이륜(彝倫)을 펴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여 치적(治績)을 성취시켜야 태평의 터전을 열고 화락한 정치를 이루어서 제왕의 할 수 있는 일이 끝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질로 효우(孝友)하고 온공(溫恭)한 덕을 도타이 하셨으므로, 천명을 새로이 받아 온갖 법도가 예에 맞으시니, 무릇 혈기가 있는 무리는 누구나 모두 목을 늘여 잘 다스려진 정치를 바랍니다. 신들이 어리석고 무식하기는 하나 간쟁(諫諍)하는 벼슬에 있으니, 마음이 충성을 다하는 데에 간절하다면 마땅히 절실히 요령을 먼저 거론하여 성덕(聖德)을 이끌어 치도(治道)를 넓히기 위한 일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서경(書經)》에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희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여야 그 중도를 잡으리라.’ 하였습니다. 대개 마음이란 모든 이치를 총괄하고 온갖 변화에 대응하여 한 몸의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기(形氣)에 나타나는 것은 공정하기 어렵고 사사롭기 쉬우므로 위태하고, 성명(性命)에 근본하는 것은 어둡기 쉽고 밝기 어려우므로 희미하니, 반드시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지켜야, 움직이고 고요히 있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절로 알맞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혹 그렇게 하지 못하면 성색취미(聲色臭味)와 안일하려는 욕심이 마음 사이에 섞이므로, 이 마음의 영명(靈明)이 날로 더욱 어두워져서 심신(心身)이 어지러워지고 시비(是非)가 어그러져 뜰 안이나 한 발 사이도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명(聖明)한 제왕은 반드시 학문을 강구하고 자기를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요(堯)의 흠명(欽明)340) 과 순(舜)의 준철(濬哲)341) 과 탕(湯)의 율률(慄慄)342) 과 문왕(文王)의 극명덕(克明德)343) 이 다 학문을 강구하고 자기를 닦는 실상입니다. 이 때문에 청명(淸明)이 몸에 있어 지기(志氣)가 신명과 같고 말과 행동이 다 법도에 맞아 거조(擧措)가 적절하였으므로, 구관(九官)344) 이 많이 모여서 사흉(四凶)이 제거되고, 이윤(伊尹)이 한 번 등용되어 모든 비리가 물러가고, 경사(卿士)가 서로 겸양하여 우예(虞芮)가 질성(質成)하였으니,345) 태평한 교화와 집집이 봉작(封爵)될 만한 풍속은 그와 같이 양성하여 성취한 데에 어찌 그 근본이 없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한(漢)나라의 고제(高帝)·문제(文帝)·광무제(光武帝)와 당(唐)나라의 태종(太宗)과 송(宋)나라의 태조(太祖)·인종(仁宗)도 다 뜻이 있는 군주였으니, 당(唐) 우(虞) 삼대(三代)의 정치를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왕으로서 자기를 닦는 학문이 없으면, 영명(英明)한 자질과 공검(恭儉)한 덕이 있더라도, 지혜가 선(善)에 밝지 못하고 지식이 이치를 연구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여, 사냥·토목(土木)·성색(聲色)·화리(貨利)의 욕심과 도사(禱祀)·갑병(甲兵)346) 의 일까지 마음속에서 서로 싸워서 마음이 그 밝음을 잃게 되니 소강(小康)의 정치를 이룬 것도 다행한 일인데, 어떻게 제왕의 정치를 의논하는 데에 끼겠습니까.
그러므로, 군주가 된 이가 이제(二帝)347) ·삼왕(三王)348) 의 정치를 구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이제·삼왕의 학문을 강구해야 하는데, 이른바 학문이란 것은 정밀하고 전일한 것을 뜻하며, 힘을 쓰는 방도에는 또한 반드시 근본이 있습니다. 대체로 경(敬)이란 것은 한 마음의 주재(主宰)요 온갖 일의 근본이어서 학문의 종시(終始)가 되는 것입니다. 의관(衣冠)을 바루고 첨시(瞻視)를 높이는 것은 그 밖을 공경히 하는 것이요, 보지 못하는 곳에 삼가고 듣지 못하는 곳에 두렵게 여기는 것은 그 안을 공경히 하는 것입니다. 움직이고 쉬는 사이에 수양하는 것이 있어 마음이 고요히 허정(虛靜)하며, 혹 글을 읽어서 도의를 강명(講明)하거나 사물을 응접하여 그 당부(當否)를 처리하거나,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시비를 가려 오늘 한 사물을 궁리하고 내일 한 사물을 궁리하며, 침착하게 음미하고 찾되 두루 미쳐 사리의 그렇게 된 까닭과 마땅히 그래야 되는 까닭에 대하여 무엇이나 환히 알게 되면, 내 지식이 두루 정밀하고 적절하여 사물이 와 닿을 때에 시비의 참된 것과 호오(好惡)의 미묘한 것도 마음과 눈 사이에서 도피할 수 없어서 다 그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타나는 실상이 이미 이러하고 나서 잠시 사이나 조용히 홀로 있는 가운데에 한 생각이 떠오르면 곧 살펴서 반드시 성현의 마음에도 과연 이러한 생각이 있었겠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옳아서 옛일에 어긋나지 않으면 생각을 할 뿐 아니라 용감히 결단하여 그 생각을 극진히 해야 하고, 그를 때에는 끊을 뿐 아니라 또한 용감히 결단하여 능히 제거해야 합니다. 한 마디 말을 하고 한 가지 일을 하여도 어느 것이나 다 그렇게 하여 생각마다 서로 이어받아 조금도 끊기는 일이 없이 진실이 쌓이고 힘쓰는 것이 오래 되어 고요히 있을 때는 허명(虛明)하고 움직일 때에는 정직하면 조용히 중도에 맞아 능히 그 중도를 잡을 수 있어서, 요(堯)가 구족(九族)을 화목하게 한 것과 탕(湯)이 잘못을 고치되 주저하지 않고 간언을 따르고 거절하지 않은 것과 문왕(文王)이 백성들을 품어서 보전하고 홀아비·홀어미에게 은혜를 내려 살고픈 마음이 있게 한 아름다움이 다 이루어지고 치도(治道)가 잘 행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이 그 덕을 밝히고 악한 것이 변하여 선이 되게 하는 정치가 어찌 당(唐) 우(虞)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제왕의 학문은 이러할 따름이니, 성명(聖明)께서 유의하신다면 국가가 다행하겠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상서학교(庠序學校)를 설치하여 가르치는 것은 다 인륜을 밝히는 방도이다.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고 작은 백성이 아래에서 친목한다.’ 하였습니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에 성(性)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기품(氣稟)이 얽매고 물욕(物欲)이 가리면 윤리를 어지럽혀 간사한 데에 빠지게 되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이 때문에 옛 성왕(聖王)이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어 천자(天子)의 원자(元子)부터 서인(庶人)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다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15세에 태학(太學)에 들어가게 하여 진작하여 가르쳐서 그 성(性)을 회복시킵니다. 그러므로 인륜이 밝아지고 나서 정치가 융성하고 풍속이 아름다와졌으니, 이것이 삼대(三代)의 가르침의 방법이었습니다. 국가에서 경중(京中)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349) 을 설치하고 외방(外方)에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스승을 두고 생도를 두어 가르치니, 그 좋은 규모와 아름다운 뜻은 삼대의 성대한 것보다 못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선비들은 자기를 닦는 학문이 없고 사람들은 효제(孝悌)의 행실이 없어 풍속이 날로 글러가고 도리에 어긋나고 어지럽히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니, 얼마 안 가서 다 짐승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삼대의 가르치는 도구는 있더라도 삼대의 가르치던 도리는 잃은 것입니다.
지금 부형이 된 자는 자제가 겨우 말을 가리는 것을 보면 곧 장구(章句)의 학문과 문구를 꾸미는 글을 가르치며 인사(人事)를 알기 전에 이록(利祿)으로 유도하므로, 사모하는 것은 과거급제요 바라는 것은 부귀이며 옛사람의 학문하는 도리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떼 지어 웃고 헐뜯습니다. 학관(學官)이 된 자는 현우(賢愚)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만 구차하게 채우므로, 가르치려 하더라도 가르칠 방법을 전혀 모르는데, 더구나 태연히 아무 걱정도 하지 않으니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선비가 그 학문을 잃고 이륜(彝倫)이 무너지는 것은 선비의 죄가 아닐 것입니다. 참으로 호걸의 선비가 아니라면 어떻게 문왕(文王)의 감화에 의하지 않고 진작 될 수 있겠습니까.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 세도(世道)가 부박한 것도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예전에 정명도(程明道)가, 풍속을 바로잡고 어진 인재를 얻는 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라 하고, 또 스승을 가려서 학문을 강구하는 것이 풍속을 착하게 하고 인재를 기르는 근본이라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명도(明道)가 학제(學制)를 논한 것이 가장 근본이 있으니, 이것을 읽고 일찍이 개연(慨然)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은 참으로 학교를 세워 선비를 양성하는 근본입니다. 그 베푼 방법과 상세한 절목(節目)이 대개 서책(書冊)에 갖추어 있으니 거행하고 조치할 따름입니다. 삼대의 정치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삼대의 학문을 열어야 하고, 삼대의 학문을 열려면 명도의 말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 제도를 죄다 따를 수는 없더라도 경의(經義)에 정통하고 학술(學術)에 깊어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널리 가려서 학교의 책임을 맡겨야 합니다. 사람을 얻는 것을 힘써야지 관원을 반드시 갖출 것은 없으니 다른 직임에 있는 자라도 본관(本官)으로서 학직(學職)을 겸임(兼任)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현의 학문을 닦고 밝히고 쇠퇴한 풍습을 고치기에 힘쓰며 덕행을 앞세우고 문예(文藝)를 뒤로 하여, 선(善)을 따르는 마음이 절로 자라고 이록(利祿)을 좇는 생각이 절로 없어지며 자신을 반성하고 실천하는 자가 많아지고 부박하고 외식(外飾)하는 자가 적어져서, 풍기(豊芑)에 은택이 깊게 하고350) 역복(域樸)을 화성(化成)하게 한다면351) ‘훌륭한 많은 선비가 이 왕국(王國)에 나도다.’라는 것이 어찌 문왕(文王) 때만의 아름다움일 뿐이겠습니까. ‘아름다운 많은 선비 때문에 문왕이 편안하다.’라는 것이 오늘에도 반드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은 퇴폐가 더욱 심하니, 또한 반드시 학업이 있는 자를 널리 가려서 귀천에 얽매이지 말고 늠급(廩給)352) 을 후하게 내어 가르치는 데에 전념시켜서 어린이들이 강습(講習)을 성취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옛사람의 가숙(家塾)353) 의 법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교화가 일어나지 않고 풍속이 아름다와지지 않는 것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유의한다면 국가에 다행이겠습니다.
《서경(書經)》에 ‘널리 철인(哲人)을 구한다.’ 하고, 또 ‘현재(賢才)를 임관(任官)하고 마땅한 사람을 좌우에 두며, 어렵게 여기고 삼가며 화합하고 한결같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대체로 군주는 하늘을 갈음하여 만물을 다스리는데,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아서 홀로 다스릴 수 없으므로, 반드시 뛰어난 사람을 두루 구하여 천위(天位)를 함께 하고 천직(天職)을 돌보아야 합니다. 어렵게 여기고 삼가면 소인(小人)이 멀어지고 화합하고 한결같으면 군자(君子)가 가까와지니, 그러고서야 명철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서 초야에 버려진 어진 사람이 없을 것이고 여러 공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어올 수 없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방도를 품었으나 영달을 바라지 않고 산림에 숨어 있는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세상에 탕왕(湯王)·문왕(文王) 같은 이가 없으면 차라리 말라 죽고 묻힐지언정 나오지 않을 것이나, 군주가 능히 정성을 미루어 찾고 예(禮)를 다하여 부른다면, 세상을 잊기로 결심한 자가 아닌 이상 어찌 차마 자신만을 깨끗이 하려고 지금 군주가 함께 다스리려는 정성을 저버리겠습니까. 다만 어진 사람을 구하는 길이 넓지 못하고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정성이 독실하지 못한 것을 걱정할 따름입니다.
향삼물(鄕三物)354) 로 만백성을 가르쳐서 빈흥(賓興)355) 하는 것이 주(周)나라의 어진 사람을 구하는 방법이며, 현량 방정(賢良方正)356) 이니 효렴 역전(孝廉力田)357) 이니 명경 무재(明經茂才)358) 니 하는 것이 한(漢)나라 때의 어진 사람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주나라 빈흥은 의논할 것도 없고 한 나라의 취사(取士)도 길이 많았으나, 선유(先儒)는 오히려 그 넓지 못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금세(今世)의 취사는 과거(科擧)의 한 길이 있을 뿐이니 한 세상의 영재(英才)를 죄다 얻기는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를 오게 하려면 어찌 상레(常例)를 따르고 구규(舊規)를 따르는 것만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에 공경(公卿)·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어진 사람을 뽑는 방도를 널리 의논하게 하여 유일(遺逸)을 널리 찾아서 차례를 뛰어넘어 대우를 한다면, 삼대(三代)의 성대한 일만은 못하더라도 한 시대의 선비 중에 어진 사람을 내버렸다는 한탄은 없어질 것입니다. 더구나 새로 왕업을 이은 청명(淸明)한 때에 한(漢)나라에서 했던 하찮은 일도 오히려 뒤밟지 못하겠습니까.
우리의 중종 대왕(中宗大王)께서 일찍이 정치하는데 먼저 힘쓸 일에 뜻을 두어, 중외(中外)에서 천거하게 하여 한 과(科)를 베푸셨습니다. 죄다 마땅한 사람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한 시대의 인재가 또한 뽑혔으므로 성대한 일이라 일컬었는데, 곧 당시의 잘못된 의논에 헐뜯겨서 문득 그 과방(科榜)359) 을 삭제하였습니다. 저번에 시종(侍從)의 말에 따라 그 과방을 회복하려 하셨으나 또 전과 같은 논의에 배척되어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다 한때의 아랫사람이 순종하지 못한 죄이지 실로 선왕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또 예전부터 과거를 베풀었다가 도로 삭탈한 일은 없었으니, 이제 만약에 이 과방을 회복하여 쓸 만한 자를 거두어 쓴다면, 사기(士氣)를 진작하고 격려하여 풍성(風聲)을 더욱 세우는 데에 반드시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고 또한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길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 어진 사람은 국가의 이기(利器)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되 어진 사람을 얻지 못하면 요(堯) 순(舜)일지라도 잘할 수 없으니 이것은 형세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주의 직무 중에 어진 사람을 찾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없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유의하시면 국가에 다행이겠습니다.
신들이 오늘날의 사세(事勢)를 보건대, 가생(賈生)이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길게 한숨을 쉴360) 때보다 심한 것이 있습니다. 도리를 무너뜨리고 의리를 손상하며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좀먹는 것을 두루 글로 거론하기 어려우니 우선 그 가운데에서 큰 것을 추려서 말하겠습니다. 지금 인륜이 밝지 않고 풍속이 날로 무너져서 조정에 기강이 서지 않고 염치가 아주 없어져서 뇌물이 버젓이 행해지므로 인심이 혼란하고 경박하여 사습(士習)이 투박하고 퇴폐하여, 높은 행실을 가리켜 화(禍)를 밟는 위기(危機)라 하고 소학(小學)을 재앙을 부르는 흉기(凶器)로 여기며, 앞다투어 남과 다른 것을 버리고 오로지 뇌동(雷同)하는 것만 숭상하며, 성명(性命)·도덕(道德)을 이야기하는 자는 반드시 남은 버릇이라는 비난을 얻고 효제(孝悌)·충신(忠信)을 말하는 자는 거짓 행실이라는 헐뜯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온 나라 안이 다 이러하여 그것이 그른 줄 모르는 까닭을 대체로 무오년361) 에 한 번 무너지고 기묘년362) 에 다시 꺾인 데다가 삼흉(三凶)이 또 따라서 깍아 없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참화를 보고 기절이 꺾여서 인욕(人欲)은 날로 방자해지고 천리(天理)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전형(銓衡)하는 곳은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가려야 하는데도 오직 재상(宰相)의 간택만을 받아서 직질(職秩)의 높낮이를 주의(注擬)하는 차례로 삼으니, 현능(賢能)하고 절의 있는 선비가 있더라도 어떻게 그 사이에 끼일 수 있겠습니까.
경중(京中)이건 외방(外方)이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사치를 서로 숭상하여 낭비가 더욱 많아지므로, 백성의 힘이 날로 쇠약해져 떼도둑이 일어나고 변란이 따라서 일어나니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변방의 고을에서 장수나 목수(牧守)의 직책을 맡은 자는 백성을 어루만지고 돌보는 데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가혹하게 거두어 들이는 것만 힘써 피부를 깎고 골수를 뽑아 한편으로는 제 집을 살찌우는 데에 채우고 한편으로는 경사(卿士)의 욕망을 충족시켜 뒷날에 천발(薦拔)이 될 밑거리로 삼습니다. 이 때문에 탐오한 자가 청렴한 자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어진 자가 되어, 변변치 못하고 염치 없는 무리가 앉아서 현직(顯職)이 되어 본디부터 제가 차지할 자리인 듯이 합니다.
옥송(獄訟)에 있어서도 뇌물을 주지 않는 일이 없으므로 탐오하고 간사한 것이 끝없이 성해지니, 이것은 실로 난망(亂亡)의 조짐입니다.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여 패가(敗家)하고 유리하여 길에서 억울함을 외치고 산골짜기에 숨는 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으니 백성이 고달픈데도 나라가 위태롭지 않은 일은 없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아마도 전하께서 백성의 고통이 이토록 극도에 이른 것을 모르시는 듯합니다. 혹 아신다면 소간(宵旰)363) 의 근심이 풀릴 때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형세는 마치 사람이 기거(起居)·음식은 잘하더라도 위급한 병증이 이미 심복(心腹)에 맺혀서 만금(萬金)의 양약(良藥)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체로 습속(習俗)이 어그러진 것과 쌓인 폐단은 갑자기 고치기가 쉽지 않을 듯하나, 변화시키는 기틀은 실로 군주의 마음에 근본이 있습니다. 군주의 마음이 한번 바로잡히면 천하의 일에 바로잡히지 않는 것이 없고, 군주의 마음이 한번 비뚤어지면 천하의 일에 비뚤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표(表)364) 가 바르면 그림자도 곧고 물의 근원이 흐리면 흐르는 물도 더러운 것과 같으니 그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능히 정일(精一)한 학문을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바루어, 성현의 가르침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선왕의 정치를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주 대신을 불러서 치도(治道)를 강구하여 힘써야 할 뜻을 아뢰게 하고, 시신(侍臣)의 진대(進對)에 있어서도 부드러운 낯빛과 부드러운 말을 내려서 의리를 변석(辨析)하고 시비를 논란하여 평일에 학문에서 얻은 것으로 바룰 수 있다면, 사람에게 본받아 선을 행하는 것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근규(近規)에 얽매이지 않고 중구(衆口)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결단해서 행하여 학교의 정사(政事)를 닦아서 뛰어난 선비를 만들고, 어진 사람을 부르는 길을 넓혀서 영준(英俊)을 오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인륜이 밝아지고 풍속이 아름다와지며 기강이 서고 염치가 일어나서 나라의 근본이 더욱 튼튼해지고 국맥이 더욱 길어져서 종사(宗社)의 경사가 같이 전하여 그지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병을 고치는 만금의 양약이고 이른바 그 요령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서 겨울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나며 해에 이(珥)가 있고 달이 붉으며 흰 무지개가 해를 꿰고 별이 이변을 보이며 가뭄이 빌미가 되고 있습니다. 무릇 재변이 나는 것은 깊고 오묘하여 그 응하는 것을 확실하게 가리킬 수 없을 듯하나, 신들이 논한 오늘날의 폐단도 이것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늘이 위에서 노하고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가 크게 경계할 바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일에 전하께서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신들의 말이 실정에 적절하지 못한 듯하나 치평(治平)을 이루는 요령은 또한 이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을 버리고 달리 찾는다면 아마도 몸을 수고롭히고 힘을 다하여도 마침내 그 보람을 얻지 못하고 위망(危亡)의 형상이 조석(朝夕)에 당장 나타날 것 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여 받아들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제 상소한 뜻을 보니, 헌부(憲府)가 아뢴 바와 대개 서로 같은데, 지극히 마땅한 이치와 지극히 공정한 논의가 피차에 차이가 없다. 내가 덕이 없고 어리석더라도 어찌 홀로 모르겠는가. 본원(本源)이 맑지 않으면 선정(善政)은 나올 길이 없고, 배양(培養)에 방도가 없으면 사습(士習)은 그 바른 것을 얻기 어려우며,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넓지 않으면 반드시 빠뜨리고 정체하게 될 것이다. 은미한 곳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을 따름이니 내가 여기에 대하여 마음을 두고 살펴야 하겠고, 학교의 장(長)에 마땅한 사람을 얻고 사진(仕進)하는 길을 넓힐 수 있는 것도 또한 조정으로 말미암으니, 이 뒤로 조치를 마땅하게 한다면 그 다행함이 어떠하겠는가. 요즈음 경석(經席)에서 대신이 유일(遺逸)을 천거하자는 말을 하였으므로, 이미 정부와 해조를 시켜 천발(薦拔)하게 하고 바야흐로 고대하고 있다. 다만 현량과(賢良科)를 회복하면 그 사이에 반드시 쓸 만한 인재가 있을 것이니 어찌 양사(兩司)가 이렇게 논하는 것을 헤아리지 않겠는가마는, 우리 부왕(父王)께서 일찍이 혁파(革罷)하고 끝내 회복을 윤허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감히 고치겠는가. 또 재이가 일어나는 것은 실로 내가 덕이 없어서 부른 것이니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어찌 조금이라도 풀렸겠는가. 가뭄이 매우 심하고 나라에 큰일이 많아서 백성이 견뎌내지 못하니 매우 답답하고 염려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23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
- [註 340]흠명(欽明) : 심신을 삼가고 도리에 밝음.
- [註 341]
준철(濬哲) : 깊은 지혜.- [註 342]
율률(慄慄) :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모양.- [註 343]
극명덕(克明德) : 능히 덕을 밝힘. 총명한 덕.- [註 344]
구관(九官) : 중국 상고(上古)의 국정(國政)을 맡은 아홉 관사(官司). 곧 사공(司空:총섭(總攝))·후직(后稷:농사)·사도(司徒:예교(禮敎))·사(士:형옥(刑獄))·공공(共工:백공(百工))·우(虞:산택(山澤))·질종(秩宗:제사)·전악(典樂)·납언(納言).- [註 345]
경사(卿士)가 서로 겸양하여 우예(虞芮)가 질성(質成)하였으니, : 질성은 송사를 물어서 화평을 이룬다는 뜻. 주대(周代) 초기에 우·예 두 나라가 전토(田土)의 경계를 다투어 결판이 나지 않으므로 "서백(西伯:문왕)은 인인(仁人)이니 가서 묻자." 하고 서백의 땅에 들어가 보니, 경작하는 사람은 밭두둑을 양보하고 길 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사(士)는 대부(大夫)에게 양보하고 대부는 경(卿)에게 양보하였다. 우·예의 임금들이 ‘우리는 소인이니 군자의 조정에 갈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함께 물러가서 서로 양보하여 다투던 전지를 한전(閑田)으로 하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 호생(好生).- [註 346]
갑병(甲兵) : 전쟁.- [註 347]
이제(二帝) : 요(堯)·순(舜).- [註 348]
삼왕(三王) : 우(禹)·탕(湯)·문무(文武).- [註 349]
사학(四學) : 한성부(漢城府)의 오부(五部) 중에서 북부(北部)를 제외한 네 부에 각각 하나씩 둔 학당(學堂). 곧 중부 학당·동부 학당·남부 학당·서부 학당의 종칭.- [註 350]
풍기(豊芑)에 은택이 깊게 하고 : 《시경(詩經)》 문왕유성(文王有聲)에 "풍수(豊水)에 풀[芑]이 있으니, 무왕(武王)이 어찌 일하지 않으랴. 그 자손을 위한 꾀를 끼쳐, 공경할 아들을 편하게 하니, 무왕은 아름다운 임금이다." 하였다. 이 시의 대의는, 호경(鎬京)의 풍수가 윤택하여 풀이 나니, 무왕이 어찌 여기에서 일하지 않으려 하겠는가. 여기에 도읍하여 자손을 위한 원대한 계책을 남겨서, 앞으로 공경하여 삼가서 사업할 아들과 후손을 보전하게 하니, 무왕은 훌륭한 임금이라는 것이다. 풍기에 은택이 깊다 함은 이 시에 보이는 일처럼 은택이 깊다는 뜻이다.- [註 351]
역복(域樸)을 화성(化成)하게 한다면 : 《시경(詩經)》 역복(域樸)에 "무성한 드릅나무[域:떡갈나무라는 설도 있음] 떨기[樸]는 땔 나무로 하여 쌓는다. 아름다운 임금은 좌우가 좇는다." 하였다. 이 시의 대의는, 무성한 두릅나무 떨기는 베어서 땔나무로 쌓아두었다가 쓰는 것처럼 아름다운 문왕(文王)에게는 사방 사람이 그 덕을 사모하여 쫓는다는 것이다. 역복편(域樸篇)은 문왕이 사람을 잘 등용하는 것을 기려 읊은 것이라 한다. 따라서 어진 인재가 많은 것을 역복이라 한다. 역복을 화성하게 한다 함은 사방의 백성이 쫓고 어진 인재가 많도록 한다는 뜻이다.- [註 352]
늠급(廩給) : 늠료(廩料)의 지급. 관창(官倉)의 곡식으로 봉료(俸料)를 주는 것. 늠급을 후하게 낸다 함은 봉료를 넉넉히 준다는 뜻이다.- [註 353]
가숙(家塾) : 주대(周代)에는 스물 다섯 집을 여(閭)라 하며, 여로 들어가는 어귀에 세운 문을 여문(閭門)이라 하고 여문 곁에 당(堂)을 두어 덕이 있는 사람을 가려 이 당에 있게 하고 백성의 스승으로 삼게 하였는데, 이 당을 가숙이라 하였다. 곧 스물 다섯 집인 마을의 학당(學堂)이다.- [註 354]
향삼물(鄕三物) : 백성을 가르치는 세 가지 일. 삼물(三物)과 같음.- [註 355]
빈흥(賓興) : 주대(周代)에 사인(士人)을 등용하는 제도. 삼물(三物)로 가르쳐서 향대부(鄕大夫)가 우수한 선비를 뽑아 음주례(飮酒禮)로 빈객(賓客)을 삼고 나서 임금에게 글을 올려 천거하였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 주(注).- [註 356]
현량 방정(賢良方正) : 한 문제(文帝) 때의 현량하고 방정한 자를 천거하게 하여 임금이 친히 책문(策問)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 [註 357]
효렴 역전(孝廉力田) : 효렴(孝廉)은 한 무제(漢武帝) 때에 비롯한 선거(選擧)의 과목(科目). 부모를 잘 섬기고 청렴한 행실이 있는 자를 군국(郡國)에서 천거하게 하여 등용하였다. 역전(力田)은 한 혜제(漢惠帝) 때에 비롯한 선거 과목. 농사에 힘쓰고 풍교(風敎)를 조성(助成)할 자를 선거하여 향관(鄕官)에 등용하였다. 효제(孝悌:弟는 제(悌)로도 씀)와 함께 선거하였으므로 효제 역전(孝悌力田)이라는 이름이 있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 《통전(通典)》 선거(選擧) 역대제 상(歷代制上).- [註 358]
명경 무재(明經茂才) : 명경(明經)은 한 무제 때에 비롯한 선거 과목. 학문이 정통하고 행실이 닦이고 경서(經書)에 대하여 박사(博士)에 알맞은 자를 선거하여 등용하였다. 무재(茂才:才는 재(材)로도 씀)는 한대(漢代)에 비롯한 선거 과목이나, 그 근원은 주대(周代)의 빈흥(賓興)에 있다 하겠으며, 본디 수재(秀才)라 하던 것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휘(諱)를 피하여 무재(茂材)라 고쳐 불렀다. 천하의 재능이 우수한 선비를 선거하여 등용한 것인데, 당대(唐代)에는 명경(明經)·진사(進士) 등과 함께 여섯 가지 과거(科擧)의 하나로 고정되었으며, 송대(宋代)에는 이 이름의 과거가 없어짐에 따라 다른 뜻으로 전용(轉用)되기 시작하였다. 《통전(通典)》 선거(選擧) 역대제 상(歷代制上), 《당서(唐書)》 선거지(選擧志).- [註 359]
과방(科榜) : 과거(科擧)의 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명단. 방은 표찰(標札)로 급제자의 이름을 적은 표찰을 제시하기 때문에 방이라 한다.- [註 360]
가생(賈生)이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길게 한숨을 쉴 : 가생은 한 문제(漢文帝) 때의 가의(賈誼). 나이 20여 세에 임금이 불러 가장 젊은 박사(博士)가 되었으므로 가생이라 한다. 양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로 있을 때, 흉노(凶奴)가 강성하여 변경을 침범하고 제도가 문란하여 제후왕(諸侯王)이 영토를 넓혔으며 회남왕(淮南王)·제북왕(帝北王)이 다 모역(謀逆)으로 주벌(誅罰)되는 등 정세가 어렵게 되자, 가의가 상소하기를 "신이 사세를 생각하건대, 통곡할 것이 한 가지이고 눈물을 흘릴 것이 두 가지이고 길게 탄식할 것이 여섯 가지이며, 그밖의 사리에 어긋나고 도리를 손상하는 것으로 말하면 두루 글로 거론하기 어렵습니다……치안(治安)하는 계책을 아뢰니, 상세히 가려 보소서."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치안책(治安策)이다. 《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 [註 361]
무오년 : 1493 연산군 4년.- [註 362]
기묘년 : 1519 중종 14년.- [註 363]
소간(宵旰) : 소의 한식(宵衣旰食)의 준말.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해가 진 뒤에야 저녁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히 애쓰는 것을 말한다.- [註 364]
표(表) : 일구(日晷:해시계)의 복판에 새우는 기둥. 이 기둥의 그림자의 길이와 방향을 재어 시각·절기를 헤아린다. 표가 수직으로 서고 곧발라야 계측(計測)이 정확하므로, 모범의 뜻으로 쓴다.○大司諫李潤慶等上疏曰:
天下之事雖多, 而必有其要, 苟得其要, 則所操者約, 而所及者廣, 用力少而成功多。 是故治國者, 固不可不先其要, 而修身者, 尤不可不知其要。 崇學校、廣賢路, 治國之要也; 務講學、以正心, 修身之要也。 故爲人君者, 必正其心, 以修其身, 崇學校以敍彝倫, 進賢才以凝庶績, 然後開太平之基, 臻雍熙之治, 帝王之能事畢矣。 殿下以聰明睿智之資, 敦孝友溫恭之德, 新服厥命, 百度中禮, 凡有血氣之類, 莫不延頸, 以望至治。 臣等雖愚陋無識, 職忝諫諍, 心切效忠, 則宜先擧切務之要, 以導聖德, 熙廣治道者, 所不能自已也。 伏願殿下留意焉。 臣等謹按, 《書》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蓋心者, 該括衆理, 酬酢萬變, 爲一身之主者也。 然而發於形氣者, 難公而易私故危; 原於性命者, 易昧而難明故微。 必精而察之, 一而守之, 然後動靜云爲, 自無不中。 苟或不然, 則聲色臭味安逸之慾, 雜於方寸之間, 此心之靈, 日益昏暗, 而身心顚倒, 是非錯謬, 庭除之內, 跬步之間, 亦將不得以理矣。 是以聖帝明王, 必以講學修己爲本, 堯之欽明, 舜之濬哲, 湯之慄慄, 文王之克明德, 皆講學修己之實。 是以淸明在躬, 志氣如神, 聲律身度, 擧措得宜。 故九官濟濟而四凶去, 伊尹一擧而諸枉退, 卿士相讓而虞、芮質成, 時雍之化, 可封之俗, 其所陶鑄成就者, 豈無其本而然哉? 至於漢之高ㆍ文ㆍ光武、唐之太宗、宋之太祖ㆍ仁宗, 亦皆有志之君, 非不欲唐、虞三代之治也。 然而無帝王修己之學, 則雖有英明之資, 恭儉之德, 智不能明善, 識不足窮理, 而遊畋土木聲色貨利之欲, 以至禱祀甲兵之事, 交戰於中, 而心失其明矣。 成小康之治, 亦已幸爾, 尙何與議於帝王之治哉? 故爲人君者, 欲求二帝三王之治, 必先有以講夫二帝三王之學。 所謂學者, 精一之謂也, 而用力之方, 則亦必有本。 夫敬者, 一心之主宰, 萬事之根本, 而爲學之終始者也。 正衣冠尊瞻視, 敬其外也, 戒愼不睹, 恐懼不聞, 敬其內也; 動息有養, 湛然虛靜, 而或讀書講明道義, 或應接事物而處其當否, 或論古今人物而別其是非。 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 沈潛玩索, 涵泳從容, 其於事理之所以然, 與其所當然之故, 莫不曉然, 則吾之知識, 周遍精切, 而事來物接, 是非之實, 好惡之極, 亦難逃於心目之間, 而皆得其眞矣。 所發之實旣如此, 而須臾之頃, 幽獨之中, 一念纔萌則輒察之, 必思夫聖賢之心, 亦果有如是之念乎? 果爲是而不悖於古, 則非徒念之, 當致勇決而極其念。 若非也, 非徒絶之, 亦當致勇決而克去之。 至於一言之發, 一事之作, 無不皆然, 念念相承, 無少間斷, 而眞積力久, 靜虛動直, 則從容中道, 允執厥中。 而堯之親睦九族, 舜之任賢勿貳, 去邪勿疑, 湯之改過不吝, 從諫弗咈, 文王之懷保小民, 惠鮮鰥寡, 衆美畢得而治道擧矣。 然則昭明於變之治, 豈獨見於唐、虞哉? 帝王之學, 如斯而已, 惟聖明之留意焉, 則國家幸甚。 孟子曰: "設爲庠序學校以敎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 天生烝民, 性非不善, 氣稟之拘, 物欲之蔽, 不至於亂倫理而陷邪僻者, 鮮矣。 是以古之聖王, 建學立師, 自天子之元子, 以至庶人之子, 皆八歲而入小學, 十有五而入大學, 作而敎之, 以復其性。 故人倫旣明, 而治隆俗美, 此三代之所以爲敎也。 國家內設成均四學, 外設鄕校, 有師有生以敎之, 則其良規美意, 似無讓於三代之盛矣。 然而士無爲己之學, 人乏孝悌之行, 俗流日非, 悖亂相繼, 則幾何其不胥以爲禽獸也? 然則雖有三代敎之之具, 而失三代所以爲敎之道也。 今之爲父兄者視子弟, 僅辨語言, 輒敎章句之學, 雕篆之文, 未解人事, 先誘利祿, 所慕者科第, 所希者富貴, 一有談古人爲學之道, 則群笑而醜詆之。 爲學官者, 不擇賢愚, 苟充其位, 雖欲敎之, 固不知所以爲敎, 況加之以恝然耶? 然則士失其學, 彝倫攸斁, 非爲士者之罪也。 苟非豪傑之士, 則何能不待文王而興哉? 習俗之不美, 世道之浮靡, 亦勢之致然也。 昔程明道, 以正風俗、得賢才爲治天下之本, 而又以擇師、講學爲善俗、育才之本。 朱子曰: "明道論學制, 最爲有本, 讀之未嘗不慨然發嘆也。" 嗟乎! 此誠立學造士之本也。 其施爲之方, 節目之詳, 蓋具於方策, 特擧而措之耳。 欲興三代之治, 必開三代之學; 欲開三代之學, 當如明道之言。 今雖不能悉依其制, 宜廣擇精經深術可爲師表者, 以任學校之責。 務在得人, 不必備官, 雖居他任者, 亦以本官, 兼帶學職。 修明聖賢之學, 務革委靡之習, 先德行而後文藝, 使從善之心自長, 而利祿之念自去, 反躬踐實者多, 浮夸外飾者少, 豐芑澤深, 化成棫樸, 則思皇多士, 生此王國, 豈獨專美於文王? 而濟濟多士, 文王以寧者, 未必不見於今日也。 至於童蒙之學, 廢弛尤甚, 亦必博選有學業者, 不拘貴賤, 厚資廩給, 俾專其敎, 令幼稚之輩, 得遂講習。 此則古人家塾之法也。 如此而敎化不興, 風俗不美者, 無是理也。 惟聖明之留意焉, 則國家幸甚。 《書》曰: "敷求哲人。", 又曰: "任官惟賢才, 左右惟其人, 其難其愼, 惟和惟一。" 蓋人君代天理物, 幅員之廣, 兆民之衆, 不可以獨理, 故必旁求俊彦, 與之共天位治天職。 難愼則小人遠, 和一則君子親, 夫然後明良相得, 野無遺賢矣, 而庶績其凝矣。 古人云: "才不借於異代。" 夫負超卓之才, 蘊經濟之道, 而不求聞達, 肥遯山林者, 豈無其人? 若世無湯、文, 則寧枯槁埋沒, 而莫之出矣。 人主苟能推誠以訪之, 盡禮以招之, 非果於忘世者, 寧忍潔身, 以孤時君共理之誠耶? 但患求賢之路不廣, 而好賢之誠不篤耳。 以鄕三物, 敎萬民而賓興之, 周家之所以求賢也; 曰賢良方正, 曰孝廉力田, 曰明經茂才, 漢世之所以求賢也。 周之賓興, 無以議爲; 漢之取士, 亦多其路, 而先儒猶病其未廣也。 然則今世之取士, 只有科擧一路, 而盡得一世之英才, 不亦難哉? 欲致斥弛之士, 豈循常襲舊而能之乎? 今若令公卿大臣, 廣議取賢之道, 博求遺逸, 待以不次, 則雖不如三代之盛擧, 一時之士, 庶無遺賢之嘆矣。 況當始初淸明之際, 顧不能蹈漢家糟粕耶? 我中宗大王嘗有意於爲治先務, 乃令中外薦擧, 設爲一科。 雖未能盡得其人, 一時人才, 亦多與選, 號稱盛擧, 而旋爲汚俗之議所毁, 遽削其榜。 頃以侍從之論, 欲復其榜, 又爲前論所格而不果, 此皆出於一時之在下者, 不能將順之罪, 而實非先王之意也。 且自古未嘗有設科而還奪者, 今若許復此科, 收其可用者而用之, 則其於振勵士氣, 益樹風聲, 未必無補, 而亦廣賢路之一大助也。 嗚呼! 賢者, 國家之利器, 爲國而不得其賢, 則雖堯、舜不能, 此勢之必至也。 故人君之職, 莫大於求賢, 而求(道)〔賢〕 之道, 又莫先於開廣其路。 惟聖明之留意焉, 則國家幸甚。 臣等竊觀, 今日之事勢, 有甚於賈生之痛哭流涕長太息也。 敗道傷義, 病民蠧國者, 難徧以疏擧。 姑撮其大者言之, 則當今人倫不明, 風俗日敗, 朝廷之上, 紀綱不立, 廉恥頓喪, 賄賂公行, 故人心淆薄, 士習偸靡, 指高行爲蹈禍之危機, 以《小學》爲召孽之凶器, 爭去崖異, 專尙雷同。 談性命道德者, 必獲餘習之譏; 言孝悌忠(倍)〔信〕 者, 未免僞行之誚。 擧國靡然, 莫知其非者, 蓋由一毁於戊午, 再挫於己卯, 三兇又從而剝喪之。 目覩慘禍, 氣節摧折, 人欲日肆, 而天理或幾乎熄矣。 銓衡之地, 爲官擇人, 而唯取宰相之簡, 以職秩高下, 爲注擬次第, 雖有賢能節義之士, 尙何容列於其間哉? 中外上下奢侈相尙, 浮費彌廣, 民力日耗, 群盜竊發, 變亂隨作, 亦不可不慮。 加以邊鄙州縣之間, 任將帥牧守之責者, 無復有意於撫御存恤, 惟務掊克, 剝膚搥髓, 一以充肥其家, 一以中卿士之欲, 以爲他日薦拔之資。 因此而貪者爲廉, 愚者爲賢, (闒葺)〔闒茸〕 無恥之輩, 坐致顯秩, 若固有之。 至於獄訟之間, 無不以貨將之, 貪邪滋熾, 靡有紀極, 此實亂亡之徵也。 民不聊生, 破家流離, 號冤道路, 竄匿山谷者, 不可勝數。 《書》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民旣困悴, 而國不危者, 未之有也。 臣等竊恐殿下, 未知生靈之戚, 一至於此極也。 如或知之, 則宵旰之憂, 當無時可弛也。 今日之勢, 如人之雖善於起居飮食, 而危迫之証, 已結心腹, 自非萬金良藥, 則不可爲也。 夫習俗之訛, 積累之弊, 雖若未易遽革, 而轉移之機, 實本於人主之心。 故人主之心一正, 則天下之事, 無有不正; 人主之心一邪, 則天下之事, 無有不邪。 如表端影直, 源濁流汚, 其理有必然者。 殿下倘能沈潛精一之學, 以正其心, 以聖賢之訓爲必可信, 先王之治爲必可致, 數召大臣, 切劘治道, 俾陳當務之意。 至於侍臣進對, 亦賜和顔溫語, 辨析義理, 論難是非, 質以平日所得於學問者, 則取人爲善, 莫大於此。 而不狃滯於近規, 不遷惑於衆口, 斷以行之。 修學校之政, 以造髦士; 廣招賢之路, 以來英俊。 如此則人倫明, 風俗美, 紀綱立, 廉恥興, 而邦本益固, 國脈益長, 宗社之慶, 永流無彊矣。 此乃今日醫疾萬金良藥, 而所謂得其要者也。 近者災異疊見, 冬雷地震, 日珥月赤, 白虹貫日, 星辰示異, 旱魃爲祟。 凡災變之生, 雖若幽遠, 而未可的指其應, 臣等所論今日之弊, 亦足以致此也無疑矣。 天怒於上, 民怨於下, 有國者之所大戒也。 然則敬天勤民之實, 殿下其可不盡心乎? 嗚呼! 臣等之論, 雖若迂遠, 而致治之要, 亦未有過此者, 若舍是而他求, 則竊恐勞身竭力, 終不得其效, 而危亡之形, 立見於朝夕也。 伏願殿下留神採納焉。
答曰: "今觀疏意, 與憲府所陳, 大槪相同, 至當之理, 至公之論, 無間彼此。 予雖寡昧, 豈獨不知? 本源不淸, 則善政無由以生; 培養無方, 則士習難得其正; 用人不廣, 則必至遺滯。 屋漏之不愧, 在我而已, 予當存省於此。 而學校之長得其人、仕進之路得其廣, 亦由於朝廷, 自今以後, 措之得宜, 則其幸如何? 近者經席大臣, 有擧遺逸之言, 故已令政府該曹薦拔, 予方苦待。 但復賢良之科, 則其間必有可用之才, 豈不量兩司所論如此, 惟我父王, 曾已革罷, 竟不許復, 予安敢改哉? 且災異之作, 實予否德所召, 敬畏之心, 曷嘗少弛? 旱暵太甚, 國多大事, 民不堪生, 甚用憫慮。"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23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
- [註 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