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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실록 1권, 인종 1년 윤1월 23일 병술 3번째기사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대간이 능호·전호를 고칠 것을 청하다

대간이 아뢰기를,

"낮은 것을 높은 데에 원용하지 않는 것은 만고에 떳떳한 도리이므로 해와 달처럼 밝은 것이어서 미묘하여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닌데, 대신 등이 구차하고 간략한 데에 편안하여 반드시 일마다 예에 맞게 할 필요가 없다 하면서 이미 정한 의논을 고치기를 꺼리니, 자기 생각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른다는 논에 어긋납니다. 위에서는 학문이 고명하시니 경중과 존비 사이를 반드시 털끝만한 것까지도 분별하실 것인데 어찌 대왕이 후비(后妃)의 능호(陵號)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지 않은 줄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대신의 의논에 끌려 예에 따라 결단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서운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능과 전의 호를 빨리 고치소서."

하고, 헌부가 또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 의주(儀註)에 ‘각도(各道)의 대소 사신(大小使臣) 및 외관(外官)의 공복은 백관의 공복과 같다.’ 하였고, 세종 때의 예조의 계목(啓目)에 ‘태종(太宗)의 상제(喪制) 삼년 안에는 각품(各品)에 제수된 뒤에 사은(謝恩)할 때에는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쓰고 각도의 관찰사(觀察使)·절제사(節制使)· 수령(守令)이 배전(拜箋)할 때와 대소 수령이 명을 맞이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한다.’ 하였는데, 이미 그대로 윤허하셨습니다. 이제 예조의 사목(事目)에 고쳐 부표(付標)한 데에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뒤 삼년 안에는 탄일(誕日)·정조(正朝)·동지(冬至) 및 모든 하례(賀禮)와 각도에서 교서(敎書)를 맞이하거나 배전(拜箋)·수전(受箋)할 때에 모두 길복(吉服)을 쓴다.’ 한 것은 예문(禮文)에 맞지 않으니, 《오례의》 의주와 세종 때의 전교에 따라 사목을 고치소서. 예문에는 ‘상관(喪冠)·상복(喪服)은 다 베[布]를 쓴다.’ 하였는데, 이제 의득(議得)할 때에는 ‘베로 겉을 싸거나 풀로 만든 것도 다 무방하다.’ 하였습니다. 요즈음 습속이 사치하여 상례(喪禮)를 모르므로 상복까지도 다 고운 것을 숭상하는데 이 의논이 한번 나오면 도하(都下)에서 서로 다투어 백초립(白草笠)을 만들 것이니 매우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백초립은 예전(禮典)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이니 일체 금단하소서."

하고, 간원이 또 아뢰기를,

"대왕의 발인 때의 반차(班次)에는 궁인(宮人) 20인이라고만 하고 빈(嬪)과 숙용(淑容)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며 성종 대왕의 발인 때의 의궤(儀軌)에는 궁녀만을 말하였으니, 존귀한 명부(命婦)167) 는 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빈과 숙용이 모두 수반(隨班)하게 되면 의례(儀禮)의 제도에 어긋날 뿐더러, 존귀한 내명부(內命婦)가 야차(野次)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지극히 미안하고 지공(支供)하는 폐단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정은 그지없더라도 예를 어길 수는 없으니 빈과 숙용은 수반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어찌 능과 전의 호에 관한 일이 과연 논한 바와 같은 줄 모르겠는가. 선조 때의 성주(聖主)들께서 효성이 모자란 것이 아닌데도 여러 조에서 구호(舊號)를 그대로 따랐고, 당초 대신이 의논하여 정할 때에도 전례에 따라 아뢰었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다. 어제 다시 의논할 적에도 또한 범연하게 헤아려 그대로 정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재상의 의논을 따랐을 뿐더러 전부터 여러 조정이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제 고칠 것 없다. 국상의 졸곡 뒤 삼년 안의 상제에 대해 예조가 사목을 마련하고 단자(單子)를 대내로 들였는데, 내 생각에도 미안하게 여겨지나 서두를 일이 아니므로 머물러 두었었다. 이제 논한 바가 지극히 마땅하니 아뢴 대로 하라. 동지·정조 및 대전 탄일(大殿誕日)의 전문(箋文)을 삼년 안에는 모두 봉진(封進)하지 말게 하였는데 이 내용을 정원도 알고 있으라. 백초립은 금지하라. 빈과 숙용이 수반하는 일은 세조 때부터 있었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194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간쟁(諫諍) / 의생활(衣生活)

  • [註 167]
    명부(命婦) : 봉작(封爵)을 받은 부인. 궁중에서 봉사하는 여관(女官)으로서 봉작받은 사람을 내명부(內命婦)라 하고, 왕녀(王女)·왕비모(王妃母)·대전유모(大殿乳母)·왕세자녀(王世子女) 및 종친(宗親)·문무관(文武官)의 아내로서 봉작받은 사람을 외명부(外命婦)라 한다.

○臺諫啓曰: "卑不援尊, 萬古常道, 昭如日月, 非微眇難知之事, 大臣等安於苟簡, 不必事事合禮, 憚改已定之論, 有異捨己從人之意。 自上學問高明, 輕重尊卑之間, 必辨析毫釐, 豈不知大王冒襲后妃陵號之不可? 牽於大臣之議, 不以禮斷之, 臣等不勝缺望。 請速改陵殿之號。" 憲府又啓曰: "《五禮儀》註云: ‘各道大小使臣及外官服, 與百官服同。’ 世宗朝禮曹啓目: ‘太宗喪制三年內, 各品除授後謝恩, 用白衣、烏紗帽、黑角帶; 各道觀察使、節制使、守令陪箋時, 及大小守令迎命時, 亦如之。’ 已依允。 今者禮曹事目改付標內, 國喪卒哭後三年內, 誕日正至及凡干賀禮, 各道迎敎書拜箋、受箋, 竝用吉服, 不合於禮文, 請依《五禮儀》註及世宗朝傳敎, 改事目。 禮文內喪冠、喪服, 皆用布, 今者議得時, 布裹草造, 皆無妨云。 近者習俗奢侈, 不知喪禮, 雖喪服, 皆以精細爲尙, 此議一出, 都下競造白草笠, 至爲不美。 白草笠, 不載禮典, 請一切禁斷。" 諫院又啓曰: "大王發引時班次內, 只稱宮人二十, 不言嬪及淑容。 成宗大王發引儀軌內, 只言宮女, 其無命婦之尊貴者, 可知。 今者嬪及淑容, 竝皆隨班, 非徒失儀禮之制, 以內命婦之尊, 久留野次, 至爲未安, 其供頓之弊, 亦爲不貲。 情雖無窮, 不可違禮, 嬪及淑容, 請勿隨班。" 答曰: "予豈不知陵殿號之事, 果如所論乎? 先朝聖主孝誠, 不爲不足, 累朝因循舊號, 當初大臣議定之時, 據例以啓, 故從之。 昨日更議, 亦非偶然計而仍定。 此非徒從宰相之論, 自前累朝如此, 今不須改。 國喪卒哭三年內, 禮曹喪制事目單子入內, 予意亦以爲未安, 而非汲汲之事, 故留之矣。 今所論至當, 如啓。 正至及大殿誕日箋文, 三年內, 幷勿封進, 此意, 政院亦知之。 白草笠, 禁之可也。 嬪、淑容隨班, 自世祖朝有之, 不允。"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194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간쟁(諫諍)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