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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실록 1권, 인종 1년 1월 24일 무오 3번째기사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이조 참의 홍춘경이 지은 대행 대왕의 지문

이조 참의 홍춘경(洪春卿)이 대행 대왕의 지문(誌文)을 지어 바쳤는데, 그 글에,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휘(諱)는 모(某)058) 이니 성종(成宗)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성종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맞아들이고 즉위하여서는 비(妃)를 봉하였으나 아들이 없이 승하하셨다.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올려서 비로 삼으니 곧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딸인데, 세자(世子) 이융(李㦕)을 낳았다. 비는 성품과 행실이 정숙하지 못하였으므로 폐출하고, 또 숙의 윤씨를 올려서 비로 삼으니 곧 우의정 윤호(尹壕)의 따님이시다. 홍치(弘治)059) 원년060) 3월 5일(기사)에 대왕이 탄생하셨는데 진성 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하였다. 젊어서부터 뛰어난 재질이 있으므로 성종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다.

갑인년061)성종이 승하하시고 사군(嗣君)이 도리를 잃어 종사(宗社)가 기울려 하였으므로, 병인년062) 9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원종(朴元宗), 전 참판(參判) 성희안(成希顔),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순정(柳順汀)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내세우고 자순 왕비(慈順王妃)의 분부를 받아 사군을 폐출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고 대왕을 사제(私第)에서 맞아들이니, 대왕이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 못하여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하였다. 드디어 교서를 내려 무릇 죄없이 귀양간 자를 다 소환(召還)하고 억울하게 형륙(刑戮)을 당한 자를 다 포증(褒贈)하며 백성을 해치는 정사를 없애고 선왕의 구정(舊政)을 회복하시니, 조야가 다시 살아난 듯이 손뼉치고 춤추었다.

학교를 수명(修明)하고 절의(節義)를 숭장하여 진실로 한 가지 선행만 있어도 포장하지 않은 것이 없고, 청백(淸白)하거나 충의(忠義)한 사람의 후손까지도 다 거두어 서용하셨다. 학식이 높고 덕이 큰 선비를 널리 뽑아서 경연(經筵)063) 에 두고 하루에 세 번씩 진강(進講)하게 하였고 밤에 또 소대(召對)하여 경의(經義)를 논란하고 치도(治道)를 토론하셨으며, 홍문관에 소병(素屛)064) 을 내려 역대 임금의 잘 다스린 도리를 쓰게 하여 관람(觀覽)에 대비하였다.

정묘년065) 3월에 행학(幸學)066) 하여 횡경 문난(橫經問難)067) 하였다. 8월에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인쇄하여 펴내게 하셨다. 임신년068) 8월에 궐정(闕庭)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고, 6월에 숭의전(崇義殿)069) 에 관원을 보내어 소뢰(小牢)070) 로 제사하였는데 숭의전은 곧 고려 왕씨(王氏)의 사당이다. 주계(酒戒)를 지어 뭇 신하에게 내려서 경계하게 하셨다.

정축년071) 5월에 왕이, 세자가 3세에 능히 학문의 방향을 알았으므로 손수 잠사(箴辭)072) 를 써서 경계하셨는데, 모두 옛 성현의 격언이었다. 모비(母妃)께서 편찮으시자 왕이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고 탕약은 반드시 친히 살피는가 하면 몸소 후원(後苑)에서 기도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병환이 나으셨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된 것이라 하였다. 왕이 행학하여 경의를 강론하고 해가 기울어서야 파하였는데 분부하기를 ‘학교는 교화의 근원이요 인재의 부고(府庫)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이보다 중한 것이 없다. 내가 이제 정성을 다하여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느라 주야로 염려하여 왔다. 이제 토전(土田)과 노비(奴婢)를 내려 인재를 양육하는 밑받침으로 삼게 한다.’ 하셨다.

경진년073) 4월에 세자를 책봉하였고, 신사년074) 5월에 황제가 태감(太監) 진호(陳浩) 등을 보내어 책명(冊命)을 내렸다. 임오년075) 10월에 세자의 관례(冠禮)를 치르고 국내에 사령(赦令)을 반포하셨는데, 국본(國本)을 중하게 여겨서인 것이다. 계미년076) 에 명하여 《언해소학(諺解小學)》을 인쇄하여 중외에 펴내게 하셨는데, 여염의 아낙네와 아이들도 다 알 수 있게 하려 한 것이다. 9월에 도이(島夷)가 중국 땅을 침범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표류하여 우리 경계에 이르렀으므로 변장(邊將)이 이들을 참획하여 아뢰었다. 왕께서 신하를 보내어 참획한 부괵(俘馘)을 죄다 중국에 바치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겨 칙서(勅書)를 내리고 물건을 내려 포장하였다.

무자년077)여주(驪州)에 행행(行幸)하여 영릉(英陵)078) 에 제사하고 고을 백성의 전조(田租) 반을 줄여주셨다. 경인년079) 8월에 모비께서 승하하시자 상제(喪制)를 한결같이 예문(禮文)대로 하였고 늘 외합(外閤)080) 에 거처하셨는데, 뒤에 대신이 대내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끝내 따르지 않으셨다. 갑오년081) 8월에 대사례(大射禮)082) 를 거행하였다. 을미년083) 8월에 개성부(開城府)에 행행하여 제릉(齊陵)084) 에 제사하셨으며 이튿날 행학(幸學)하여 취사(取士)하고 쌀 1백 곡(斛)을 내렸다. 경자년085)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산천(山川)에 두루 빌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자 왕이 연(輦)086) 을 버리고 여(輿)에 타고서 햇볕을 쐬며 친히 풍운단(風雲壇)에 나아가 비시니, 드디어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

갑진년087) 겨울 10월에 왕이 병이 나서 11월 14일에 위독해지니 좌의정 홍언필(洪彦弼)과 우의정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침실에 들어오게 하고 분부하기를 ‘내병이 심하니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한다.’ 하셨다. 이튿날 15일(경술)에 정침(正寢)에서 승하하니 향년 57세였다.

왕은 인자하고 충효하며 학문에 힘쓰고 옛것을 사모하셨다. 바른말을 받아들이는 데에 부지런했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았으며, 제사하는 일에 더욱 부지런하여 삼가고 공경하였으며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시종 한결같았다. 인재를 배양하여 문교(文敎)가 크게 일어났고 대신을 존중하고 예우하여 나라의 일은 반드시 함께 의논한 뒤에 시행하셨다. 종척(宗戚)을 사랑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고 왕자(王子)를 훈계함에는 의로운 방도를 다하였으며 교만하고 사치한 습관이 없으셨다.

경술(經術)이 있는 선비를 많이 모아 성리학(性理學)을 강명하되 밤낮으로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사냥과 음악·여색을 즐기지 않았고 진기한 물건을 좋아하거나 분수에 안 맞게 사치하는 일이 없으셨다. 재위 39년 동안에 백성이 생업을 즐기게 되었고 인구가 날로 번성하였다. 도이(島夷)와 산융(山戎)088) 이 의리를 사모하여 귀순하였으므로 변환(邊患)이 없어서 전쟁을 몰랐다. 치평(治平)을 이루는 아름다움이 장차 큰 규모에 오를 것인데 팔음(八音)이 문득 그치니 팔음(八音)이 문득 그치니089) 아아, 슬프다.

우리 전하께서 양암(諒陰) 중에 슬프고 그립기 그지없어 신하들을 거느리고 존호(尊號)를 휘문 소무 흠인 성효(徽文昭武欽仁誠孝)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중종(中宗)이라 올렸는데, 난(亂)을 다스려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여 중흥시킨 공덕이 상종(商宗)·주선(周宣)090) 과 아름다움을 짝하기 때문이다. 을사년091) 2월 모갑(某甲)에 고양(高陽) 고을의 모원(某原), 곧 장경 왕후(章敬王后)가 묻히신 희릉(禧陵)의 오른 쪽에 모시고 드디어 그 능호(陵號)를 그대로 썼다.

당초 왕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신수근(愼守勤)의 딸을 맞아들였는데 신수근에게 죄가 있었기 때문에 폐출하였다.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올려서 비(妃)로 삼았는데, 곧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따님이시다. 신미년092) 효혜 공주(孝惠公主)를 낳으셨는데,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을해년093) 2월 15일에 우리 전하를 낳으시고 이어 병이 나서 3월 2일에 승하하셨다. 정축년094) 에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따님을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전하가 동궁(東宮)에 계실 때에 우의정 박용(朴墉)의 따님을 맞아들여 빈(嬪)으로 삼았는데 즉위함에 미쳐 비로 봉하였고, 왕비(王妃) 윤씨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로 삼았다. 대비께서 한 아들과 네 딸을 낳으셨다. 효순 공주(孝順公主)능원위(綾原尉) 구사안(具思顔)에게 하가하고, 의혜 공주(懿惠公主)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에게 하가하고, 경현 공주(敬顯公主)영천위(靈川尉) 신의(申檥)에게 하가하였고, 이환(李峘)경원 대군(慶原大君)에 봉하였고 별좌(別坐) 심강(沈鋼)의 딸을 맞아들였으며, 다음 딸은 어리다.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한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이미(李嵋)복성군(福城君)에 봉하였고 현감(縣監) 윤인범(尹仁範)의 딸을 맞아들였으며, 혜순 옹주(惠順翁主)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에게 하가하고, 혜정 옹주(惠靜翁主)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에게 하가하였다.

희빈 홍씨(熙嬪洪氏)가 두 아들을 낳았다. 이영(李岭)금원군(錦原君)이고 도사(都事) 정승휴(鄭承休)의 딸을 맞아들였으며, 이완(李岏)봉성군(鳳城君)이고 정랑(正郞) 정유인(鄭惟仁)의 딸을 맞아들였다.

숙원 홍씨(淑媛洪氏)가 한 아들을 낳았는데 이희(李㟓)라 하고 해안군(海安君)이며 참봉(參奉) 신홍유(愼弘猷)의 딸을 맞아들였다.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두 딸을 낳았다 정순 옹주(貞順翁主)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에게, 효정 옹주(孝靜翁主)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에게 하가하였다. 숙용 안씨(淑容安氏)가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다. 이거(李岠)영양군(永陽君)이고 현감 안세형(安世亨)의 딸을 맞아들였으며, 이초(李岹)덕흥군(德興君)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세호(鄭世虎)의 딸을 맞아들였으며, 정신 옹주(靜愼翁主)청천위(淸川尉) 한경우(韓景祐)에게 하가하였다.

숙원 이씨(李氏)가 한 아들을 낳았는데 이기(李岐)라 하고 덕양군(德陽君)이며 참의(參議) 권찬(權纘)의 딸을 맞아들였다.

숙용 김씨(金氏)가 한 딸을 낳았는데 숙정 옹주(淑靜翁主)이며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에게 하가하였다."

하였다. 상이 지문을 정원에 내렸다가 뒤에 다시 들여오도록 명하고는 전교하기를,

"좋다고 분부한 뒤에 다시 영릉(英陵)·선릉(宣陵)095) 의 지문을 가져다 살펴보니 영릉의 지문에는 왕손을 죄다 실었는데, 이제 대행 대왕의 지문에는 빠뜨리고 싣지 않았으므로 내 마음에 의심이 된다. 또 반정(反正)할 때에 대신과 아랫사람들이 건의하여 추대한 것이요 왕비의 분부를 받은 것이 아닌데 이제 이 지문에는 자순 왕비의 분부를 받들어 폐출하여 연산군으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아마도 마땅하지 않을 듯하다. 원상(院相) 【 윤인경(尹仁鏡).】 과 다시 의논하라."

하니, 윤인경이 아뢰기를,

"먼저 박원종이 앞장서서 대의를 세운 것을 말하고 다음에 자순 왕비의 분부를 받들어 폐출하여 연산군으로 만든 것을 말하였으니, 대신이 추대했다는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폐립(廢立)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어세(語勢)가 이러한 다음에야 명분이 바르고 말이 사리에 맞습니다. 자순 왕비의 지문에도 신하들이 후(后)의 분부를 받들어 성궁(聖躬)을 도왔다 하였는데 그 또한 이런 의의인 것입니다. 또 무릇 상례(喪禮)는 모두 갑인년096) 의 전례대로 하였는데 선릉의 지문에는 왕손을 싣지 않았으므로 이제도 본떠서 싣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왕비의 분부를 받았다는 말은 알았다. 영릉의 지문에는 왕손을 실었는데 선릉의 지문에는 싣지 않은 까닭은 갑인년에 왕손이 아직 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다시 의논하라."

하니, 윤인경이 아뢰기를,

"갑인년에 왕손이 아직 나지 않은 것은 신이 미처 살피지 못하였으니 다시 살펴서 입계하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187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역사(歷史) / 어문학(語文學)

  • [註 058]
    모(某) : 역(懌).
  • [註 059]
    홍치(弘治) :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 [註 060]
    원년 : 1488 성종 19년.
  • [註 061]
    갑인년 : 1494 성종 25년.
  • [註 062]
    병인년 : 1506 중종 원년.
  • [註 063]
    경연(經筵) : 임금이 신하와 함께 경사(經史)를 강독하고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자리. 아침·낮·저녁으로 하루에 세 번 여는 것이 상례인데, 각각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이라 하며 조강을 특히 경연이라 부를 때도 있다. 이 밖에 밤에 여는 야대(夜對)와 불시(不時)로 여는 소대(召對)가 있는데, 이것도 경연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 [註 064]
    소병(素屛) : 흰 명주를 바른 병풍.
  • [註 065]
    정묘년 : 1507 중종 2년.
  • [註 066]
    행학(幸學) : 임금이 성균관에 거동하는 것. 본문에 "3월에 행학하여 횡경 문난하였다." 하였으나, 《중종실록》 2년 3월 28일(신미) 기사에는 "알성례(謁聖禮)를 오는 가을로 물려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하였고 이달에는 행학한 일이 실려 있지 않다. 이 지문(誌文)의 연월일과 《중종실록》에 실려 있는 연월일 사이에 서로 다른 것이 많다. 이를테면, 지문에는 임신년(중종 7년) 8월에 궐정에서 양로연을 베풀었고 을미년(중종 30년) 8월에 개성부에 행행하여 제릉에 제사하고 이튿날 행학하여 취사(取士)하였다 하였는데, 《중종실록》에는 양로연 사실이 임신년 8월에 보이지 않고 계유년(중종 8년) 9월 4일(기사)에 근정전(勤政殿)에서 친히 양로연을 거행하였다 하였으니, 두 해를 잇달아 베풀었는데 한 해의 사실만을 적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매년 거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한편이 착오일 듯하고, 제릉 친제(親祭) 사실은 9월 15일(계유)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 또한 8월과 9월에 잇달아 거행할 수 없는 일이므로 어느 한편이 착오일 것이다.
  • [註 067]
    횡경 문난(橫經問難) : 경서의 내용에 대해 논란하는 것.
  • [註 068]
    임신년 : 1512 중종 7년.
  • [註 069]
    숭의전(崇義殿) : 고려의 네 임금 곧 태조(太祖)·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을 모신 사당으로 경기 마전(麻田)에 있다.
  • [註 070]
    소뢰(小牢) : 희생으로 양과 돼지를 쓰는 것인데 그 희생 또는 그 제사의 뜻으로 쓴다. 태뢰(太牢)의 대(對)로 태뢰에는 소[牛]를 더 쓴다.
  • [註 071]
    정축년 : 1517 중종 12년.
  • [註 072]
    잠사(箴辭) : 경계하는 글.
  • [註 073]
    경진년 : 1520 중종 15년.
  • [註 074]
    신사년 : 1521 중종 16년.
  • [註 075]
    임오년 : 1522 중종 17년.
  • [註 076]
    계미년 : 1523 중종 18년.
  • [註 077]
    무자년 : 1528 중종 23년.
  • [註 078]
    영릉(英陵) : 세종(世宗)과 세종의 비(妃)인 소헌 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능. 여주(驪州) 성산(城山) 즉 지금의 여주군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垈里)에 있다.
  • [註 079]
    경인년 : 1530 중종 25년.
  • [註 080]
    외합(外閤) : 바깥 합문(閤門:금중(禁中)으로 통하는 문). 상주는 상기(喪期)를 의려(倚廬:중문(中門)밖의 담에 나무를 걸치고 풀을 이어 만듦)에서 지내는 것이 예(禮)이다. 외합에 거처한다는 말은 금중으로 통하는 중문 밖에 설치한 의려에서 거처한다는 뜻이다.
  • [註 081]
    갑오년 : 1534 중종 29년.
  • [註 082]
    대사례(大射禮) : 임금이 신하들을 크게 모아 함께 활쏘기를 시험하여, 맞힌 자에게는 상주고 맞히지 못한 자에게는 술을 마시게 하는 의례(儀禮). 성균관에서 거행하는 것이 상례이며, 따라서 문묘(文廟)에 제사하고 혹 취사(取士)를 아울러 거행하기도 한다.
  • [註 083]
    을미년 : 1535 중종 30년.
  • [註 084]
    제릉(齊陵) : 태조(太祖)의 비(妃)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능. 경기 풍덕(豊德) 북쪽 속촌(粟村) 즉 지금의 개풍군(開豊郡) 상도면(上道面) 풍천리(楓川里)에 있다.
  • [註 085]
    경자년 : 1540 중종 35년.
  • [註 086]
    연(輦) : 탈것의 하나. 임금의 탈것에는 말[馬] 외에 대련(大輦)·소련(小輦)·소여(小輿)가 있다. 여(輿)의 만듦새는 대개 가운데에 의자가 있고 그 양가에 앞뒤로 걸친 멜대가 있어 전후 좌우에서 메고 간다. 연(輦)은 여와 비슷하게 만들고 위에는 복판이 높은 반구형(半球形)의 덮개가 있고 사면에 발[廉]을 드리웠다. 연을 버리고 여를 탔다는 말은 한데에 몸을 드러냈다는 뜻을 내포한 말이다.
  • [註 087]
    갑진년 : 1544 중종 39년.
  • [註 088]
    산융(山戎) : 야인을 가리킴.
  • [註 089]
    팔음(八音)이 문득 그치니 : 팔음은 종(鐘)·경(磬)·현(絃)·관(管)·생(笙)·훈(壎:흙으로 병처럼 만들고 여덟 구멍을 낸 부는 악기)·고(鼓)·축어(柷敔:축은 위가 트인 팔면체의 나무통 속에 자루를 장치하여 음악을 연주할 때에 맨 처음 울리는 악기. 어는 나무로 만든 엎드린 범의 형상 등 위에 27개의 요철(凹凸) 부분이 있어 연주가 끝날 때에 이것을 채로 긁어 소리 내는 악기) 등 여덟 가지 악기인데 임금이 승하했다는 뜻이다.
  • [註 090]
    상종(商宗)·주선(周宣) : 모두 중국 고대의 현명한 임금으로 나라를 중흥시켰음. 상종은 상 중종(商中宗)의 약칭으로 상(商:뒤에 은(殷)으로 고침)나라의 제9대 임금인 태무(太戊)임. 국도(國都) 박(亳)에 상곡(桑穀: 뽕나무와 닥나무)이 함께 아침에 나서 저녁에 두 손으로 잡을 만큼 컸는데, 요사한 것은 덕(德)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 덕을 닦으라는 재상 이척(伊陟)의 말에 따라 태무가 덕을 닦는 바 상곡이 말라 죽었다 한다. 어진 사람들을 등용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제후(諸侯)가 귀순하여 다시 중흥하였다. 주선은 주 선왕(周宣王)의 약칭. 선왕은 여왕(厲王)의 난정(亂政) 뒤에 즉위하여 잘 다스리려는 뜻을 품고 재변을 당하면 반성하고 행실을 닦으며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유풍(遺風)을 따랐으므로 나라가 잘 다스려져서 제후가 다시 주나라를 종주로 삼게 되었고, 사방의 오랑캐를 평정하였으므로 주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일컬어 진다.
  • [註 091]
    을사년 : 1545 인종 1년.
  • [註 092]
    신미년 : 1511 중종 6년.
  • [註 093]
    을해년 : 1515 중종 10년.
  • [註 094]
    정축년 : 1517 중종 12년.
  • [註 095]
    선릉(宣陵) : 성종의 능.
  • [註 096]
    갑인년 : 1494 성종 25년.

○吏曹參議洪春卿製進大行大王誌文, 其辭曰:

恭惟我中宗大王, 諱某, 成宗第二子也。 成宗在潛邸, 聘領議政韓明澮之女, 及卽位封爲妃, 無子薨。 陞淑儀 尹氏爲妃, 卽判奉常寺事起畎之女, 生世子。 妃性行不淑, 廢之, 又陞淑儀 尹氏爲妃, 卽右議政之女。 弘治元年戊申三月己巳, 誕生大王, 封晋城大君。 少有異質, 成宗特奇愛之。 歲甲寅, 成宗薨, 嗣君失道, 宗社將傾, 丙寅九月, 知中樞府事朴元宗、前參判成希顔、吏曹判書柳順汀, 首建大義, 承慈順王妃敎, 廢爲燕山君, 迎大王於私第, 大王牢讓不獲, 卽位於景福宮。 遂下敎, 凡非罪流竄者, 悉皆召還, 枉被刑戮者, 咸加褒贈, 除害民之政, 復先王之舊, 朝野抃舞, 如獲重生。 修明學校, 崇奬節義, 苟有一善一行, 無不褒奬, 至於淸白忠義之後, 亦皆收敍。 博選鴻儒碩士, 置諸經幄, 日三進講, 夜又召對, 論難經義, 商確治道, 下素屛於弘文館, 書歷代帝王爲治之道, 以備觀覽。 丁卯三月幸學, 橫經問難。 八月, 命印頒《三綱行實》。 壬申八月, 行養老宴于闕庭, 六月, 遣官以小牢, 祀崇義殿, 殿卽高麗 王氏之廟也。 命製酒戒, 賜臣工以警之。 丁丑五月, 王以世子三歲, 能知學問向方, 手書箴辭以戒。 皆古聖賢格言也。 母妃未寧, 王晝夜侍側, 湯藥必親, 躬禱後苑, 未幾疾瘳, 人以爲誠孝所感。 王幸學講論經義, 日昃而罷。 敎曰: "學校, 風化之源, 人才之府, 爲國之道, 莫重於此。 予今竭誠圖治, 夙夜軫念。 今賜土田臧獲, 以爲養育人才之資。" 庚辰四月, 冊封世子, 辛巳五月, 帝遣太監陳浩等, 來錫命。 壬午十月, 行世子冠禮, 頒赦境內, 重國本也。 癸未, 命印《諺解小學》, 宣布中外, 欲使閭巷婦人小子, 皆得以知之。 八月, 島夷犯上國地, 而搶擄人民, 漂到我界, 邊將俘斬以聞。 王遣臣悉獻俘馘, 帝嘉之, 降勑賜物褒美。 戊子, 幸驪州, 祭英陵, 賜州民田租之半。 庚寅八月, 母妃薨, 喪制一依禮文, 常處外閤, 後大臣請還大內, 王竟不從。 甲午八月, 幸學行大射禮。 乙未八月, 幸開城府, 祭齊陵, 翌日幸學取士, 賜米百斛。 庚子夏大旱, 徧禱山川不雨, 王去輦乘輿, 曝日親禱于風雲壇, 遂得三日雨。 甲辰冬十月, 王有疾, 至十一月十四日, 疾大漸, 召左議政洪彦弼、右議政尹仁鏡, 入臥內敎曰: "予疾甚, 欲傳位于世子。" 翌日庚戌, 薨于正寢, 享年五十七。 王仁慈忠孝, 力學慕古。 勤於聽納, 存恤民隱, 尤勤祀事, 寅恭祗畏, 誠意終始不替。 培養人才, 文敎大興, 尊禮大臣, 國事必與謀議而後行。 撫愛宗戚, 皆得其歡心, 敎戒王子, 盡其義方, 無有驕奢之習。 多聚經術之士, 講明性理之學, 夜以繼日, 亹亹忘倦, 無遊畋聲色之娛, 絶玩好奢靡之事。 在位三十九年, 民人樂業, 生齒日繁, 島夷山戎, 慕義歸順, 邊境無虞, 不識兵革。 致治之美, 將陞大猷, 而八音遽遏, 嗚呼慟哉! 我殿下(下)諒陰在疚, 哀慕罔極, 率群臣上尊號曰, 徽文昭武欽仁誠孝, 廟號中宗, 以其(拔)〔撥〕 亂反正, 中興功德, 儷美商宗周宣也。 乙巳二月某甲, 安厝于高陽治之某原, 卽章敬王后所厝禧陵之右, 遂仍號焉。 初王在潛邸, 聘愼守勤之女, 以守勤有罪廢之。 陞淑儀尹氏爲妃, 卽領敦寧府事汝弼之女。 辛未, 生一女, 曰孝惠公主, 下嫁延城尉 金禧。 乙亥二月二十五日, 誕我殿下, 仍有疾, 越三月二日薨。 歲丁丑, 聘領寧敦府事〔領敦寧府事〕 尹之任女爲妃。 殿下在東宮, 聘贈右議政朴墉之女爲嬪, 及卽位封爲妃, 尊王妃 尹氏爲王大妃。 大妃生一男四女。 曰孝順公主, 下嫁綾原尉 具思顔; 曰懿惠公主, 下嫁淸原尉 韓景祿; 曰敬顯公主, 下嫁靈川尉 申檥; 曰, 封慶原大君, 娶別坐沈鋼女; 次女幼。 敬嬪 朴氏生一男二女。 曰, 福城君, 娶縣監尹仁範女; 曰惠順翁主, 下嫁光川尉 金仁慶; 曰惠靜翁主, 下嫁唐城尉 洪礪熙嬪 洪氏生二男。 曰, 錦原君, 娶都事鄭承休女; 曰, 鳳城君, 娶正郞鄭惟仁女。 淑媛 洪氏生一男。 曰, 海安君, 娶參奉愼弘猷女。 淑媛 李氏生二女。 曰貞順翁主, 下嫁礪城尉 宋寅; 曰孝靜翁主, 下嫁淳原尉 趙義貞淑容 安氏生二男一女。 曰, 永陽君, 娶縣監安世亨女; 曰 德興君, 娶知中樞府事鄭世虎女; 曰靜愼翁主, 下嫁淸川尉 韓景祐淑媛 李氏生一男。 曰, 德陽君, 娶參議權纉女。 淑容 金氏生一女。 曰淑靜翁主, 下嫁綾昌尉 具澣

上以誌文下于政院, 有頃更命入內, 傳曰: "敎可後, 更取英陵宣陵誌文考之, 則英陵誌文, 悉載王孫, 而今大行大王誌文, 闕而不載, 予心疑焉。 且反正之時, 大臣與群下, 建議推戴也, 非承王妃之敎也, 今誌文, 承慈順王妃敎, 廢爲燕山君, 此語恐似不當。 其與院相 【尹仁鏡】 更議之。" 仁鏡啓曰: "先稱朴元宗首建大義, 次言承慈順王妃敎, 廢爲燕山君, 可見大臣推戴之意。 且廢立, 不可爲言, 故言勢如此而後, 名正言順也。 慈順王妃誌文, 亦稱群臣奉后敎, 翊扶聖躬, 亦此義也。 且凡喪禮, 一依甲寅年故例, 而宣陵誌文, 不載王孫, 故今亦倣而不載矣。" 答曰: "承王妃敎之言知之。 英陵誌文載王孫, 而宣陵誌文不載者, 得非甲寅年, 王孫未生故耶? 更議之。" 仁鏡啓曰: "甲寅年, 王孫生未生, 臣未及考之, 臣當更考入啓。"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187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역사(歷史) / 어문학(語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