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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 11월 20일 을묘 7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창경궁에서 즉위하여 명정전 첨하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다

창경궁(昌慶宮)에서 즉위하여 명정전(明政殿) 첨하에서 여러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종친 및 문무 백관들은 모두 명정전의 동서쪽 뜰로 나아가고 통례가 태화문 밖에 나아가 나오시기를 청하였다. 시각은 이미 캄캄하여 촛불을 밝히고 나오는데 태복(太僕)이 승여(乘輿)를 올렸으나 상이 물리치고는 타지 않고 간신히 걸어서 어좌(御座)의 옆에 이르러 차마 앉지 못하고 오랫동안 국궁(鞠躬)하고 서 있었다. 승지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자리에 오르신 뒤에라야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에 오르지 않으시니 예식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억지로 자리에 올라 앉았으나 오히려 불안한 자세였고 너무 애통하여 눈물이 비오듯이 떨어지자 좌우의 뜰에 있던 여러 신하들도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예식이 끝나자 상이 또 걸어서 여차에 들어가 면복(冕服)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

사신은 논한다. 즉위하기를 청했으나 상이 대답하지 않아 아랫사람들이 한창 민망할 때에 대사성 이준경(李浚慶)이 앞에 있던 우찬성 성세창(成世昌)을 보고 나아가 묻기를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고 사군(嗣君)께서는 거둥하지 않으시니 대례를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성세창이 답하기를 ‘권정례(權停禮)로 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겠다.’ 하였다. 성세창이 계획하는 일은 거의 다 생각이 없이 하는 일이어서 사림이 비난하고 업신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105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161면
  • 【분류】
    왕실(王室) / 역사-사학(史學)

○卽位于昌慶宮。 御明政殿簷下, 受群臣賀。 宗親及文武百官, 皆就于明政殿東西庭, 通禮詣泰和門外, 啓請出次。 時, 日已昏黑, 明燭乃出。 太僕進輿, 上却而不御, 艱難行步, 至御座之側, 不忍當尊, 良久鞠躬而立。 承旨進前而啓曰: "陞座然後, 群臣得以陳賀。 今不陞座, 難以成禮。" 上於是黽勉陞座, 而猶不安御, 哀痛之極, 泣下如瀉, 左右在庭群臣, 莫不嗚咽流涕。 禮畢, 上又步入廬次, 釋冕服反喪服。

【史臣曰: "當啓請卽位, 上不答, 群下方悶之際, 大司成李浚慶見右贊成成世昌在前, 趨而問曰: ‘今日已暮, 嗣君不起, 大禮將何爲?’ 世昌答曰: ‘以權停禮行之不妨。’ 世昌之料事, 類皆不思, 士林譏侮之。"】


  • 【태백산사고본】 53책 105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161면
  • 【분류】
    왕실(王室)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