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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 11월 15일 경술 12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유시에 상이 환경전 소침에서 훙하다

유시(酉時). 상이 환경전(歡慶殿) 소침(小寑)에서 훙(薨)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은 인자하고 현명하여 세상에 뛰어난 자질로 혼암(昏暗)한 폐조(廢朝)의 시대를 당하여 효도와 우애를 독실히하고 신하의 도리에 극진하였다. 폐주(廢主)의 난정(亂政)이 더욱 혹독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황천(皇天)의 돌보심으로 천명(天命)이 돌아오게 되었다. 신민의 추대를 사양할 수가 없어 드디어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귀신과 사람이 모두 기뻐하고 종묘와 사직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중흥한 공적은 너무도 높아서 어떻게 이름지을 수 없다. 즉위한 이래 학문에 있어서는 정일(精一)의 묘리(妙理)를 궁구했고, 뜻은 당(唐)·우(虞)의 다스림에 간절하여 백성을 언제나 불쌍히 여겼고 간언(諫言)을 따르는 데 어김이 없었다. 재위 39년 동안에 치도(治道)를 이루기 위해 근심하고 괴로와한 것이 모두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현주(賢主)라 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인자하고 온화함은 넉넉했으나 과단성이 부족하여 진퇴(進退)시키고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현·불초(賢不肖)가 뒤섞이게 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군자와 소인이 번갈아 진퇴함으로써 권간(權奸)이 왕명을 도둑질하여 변고가 자주 일어났고 정치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재변이 중첩해서 일어나 삼한(三韓)의 신민이 끝내 다시는 삼대(三代)의 정치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는 탄식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옛것을 좋아하고 선을 즐기는 정성으로 만일 함께 일을 할 만한 신하를 얻어서 일을 맡기고 소인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였다면 군신이 덕을 함께 하고 시종 서로 신임하여 완성된 미덕을 이루었으리니, 그 치적이 융성함과 공업의 성대함이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사신은 논한다. 신은 상고하건대, 중종 대왕은 공검(恭儉) 인자(仁慈)하시어 재위 40년 동안에 안으로는 성색(聲色)을 즐기는 일이 없었고, 밖으로는 사냥하며 즐기는 데 빠진 적이 없었다. 즉위한 이래로 힘써 치도(治道)를 강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바라보고 태평을 기약했는데 신하의 보좌를 받을 즈음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처음에는 기묘년에 징계되고 나중에는 정유년에 실수하여430) 조정이 조용하지 않고 붕당을 지어 서로 모함함으로써 드디어는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마음이 잠시 열렸다가 끝내 닫혀지고 말았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조광조(趙光祖) 등이 옛것을 사모한다는 이름만 있었고 옛것을 사모하는 실상은 없이 한갓 번잡하게 고치는 것만 일삼았으며 점차로 개선해 나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배척만을 힘써 자신의 흉중에 품은 생각을 대폭적으로 실행하려 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삼대(三代)의 정치가 진실로 이러한 것인가. 그후로는 비록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누가 혹 앞에서 진술하더라도 전후로 징계된 바 있어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청납(聽納)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아무리 슬기 있는 사람도 뒤끝을 잘 맺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을 추구해보면 모두가 기묘년 사람들이 단서를 열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인후한 성덕으로 부지런하고 공손하게 상국을 정성으로 섬기고, 오랑캐를 도로써 통솔하며, 백성들의 질고를 잘 알아 크고 작은 고통을 어루만져 구휼함에 힘입어 나라 안이 소생되고 원망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중흥의 성군이라고 할 만하다. 묘호(廟號)를 중종(中宗)이라 하였으니 그 또한 이 때문인가 보다.

사신은 논한다. 상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진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를 내치고 박빈(朴嬪)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431) ,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105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157면
  • 【분류】
    왕실(王室)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註 430]
    기묘년에 징계되고 나중에는 정유년에 실수하여 : 기묘년은 곧 조광조(趙光祖) 일파에게 참화를 입힌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말하고, 정유년의 실수란 정유년인 중종 32년 김안로(金安老)의 농간으로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형제를 유배시킨 일을 가리킨다.
  • [註 431]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 진성군은 성종(成宗)의 서자로, 중종 2년(1507)에 모반을 꾀했던 이과(李顆)의 추대를 받았다 하여 간성(杆城)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고, 신비(愼妃)는 중종의 초비(初妃)였으나 친정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중종 반정을 반대했다 하여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에게 피살되자, 반정 후 7일 만에 궁에서 쫓겨나 서인이 되었다. 박빈(朴嬪)은 곧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종 22년(1527) 세자를 저주한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變)이 일어나자 경빈 박씨의 아들 복성군 미(福城君嵋)가 의심을 받고 귀양갔는데, 결국 이들은 중종 28년(1533), 박빈 소생인 혜정 옹주(惠精翁主)의 남편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와 함께 세자 저주의 진범으로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이것이 모두 김안로의 계략이라는 것이 드러나 신원(伸冤)되었다.

○酉時, 上薨于歡慶殿小寢。

【史臣曰: "上以仁明出世之資, 値廢朝昏曀之時, 篤行孝友, 克盡臣道。 廢主亂政愈酷, 民苦塗炭, 皇天眷顧, 歷數有歸, 臣民推戴, 辭不獲已。 遂正位九五, 神人胥悅, 宗社有托。 中興之功, 巍巍乎其難名也。 自卽位以來, 學究精一之妙, 志切之治, 視民如傷, 從諫弗咈。 三十九年之間, 其所憂勤圖治, 無非畏天愛民之政, 眞所謂希世之賢主。 惜乎! 仁柔有餘, 而剛斷不足, 去就用舍之際, 未免有雜揉之失。 君子小人, 互相進退, 權奸竊命, 變故屢生, 治不加進, 災孽荐作, 使三韓之臣, 終不得復見三代之治, 有君無臣之嘆, 曷有極乎? 以如此好古樂善之誠, 如得可與有爲之臣而任之, 不使小人間之, 君臣同德, 終始相信, 以成旣濟之美, 其治效之隆, 功業之盛, 豈止於此而已哉?"】

【史臣曰: "臣按中宗大王, 恭儉慈仁, 四十年間, 內無聲色之娛, 而外無遊畋之失。 卽位以來, 勵精求治, 朝野想望, 太平可期。 而倚毗之際, 不得其人, 始懲於己卯, 終失於丁酉, 以至朝廷不靜, 朋比相傾, 遂使好賢樂善之心, 暫開而終閉。 此無他, 趙光祖諸人, 有慕古之名, 而無慕古之實, 徒事紛更, 不思漸摩之有道, 唯務排斥, 大行胸臆於其間, 三代之治, 固如是乎? 自是厥後, 雖有嘉言善行, 或陳前席, 而懲前戒後, 未嘗虛懷聽納, 所謂雖有智者, 無以善其後矣。 究厥所失, 皆己卯之人啓之也。 尙賴聖德仁厚, 勤謹孜孜, 事上國以誠, 馭蠻狄以道, 知民疾苦, 撫恤痒痾, 境內以蘇, 怨咨以息, 可謂中興之聖主。 廟號中宗, 其亦以是歟。!"】

【史臣曰: "上, 仁柔有餘, 而剛斷不足, 雖有有爲之志, 而無有爲之實。 好惡不明, 賢邪混進, 故四十年間, 治小亂多, 竟不見小康之效, 悲夫!"】

【史臣曰: "上, 仁慈恭儉, 則出於天性, 然優游不斷, 牽於下人。 殺甄城, 而兄弟之好缺; 黜妃、殺朴嬪, 而夫婦之好滅; 殺福城君唐城尉, 而父子之恩乖; 多殺大臣, 誅戮相繼, 而君臣之恩薄, 惜哉!"】


  • 【태백산사고본】 53책 105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157면
  • 【분류】
    왕실(王室)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