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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104권, 중종 39년 9월 26일 임술 2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가덕도 축성사 방호의가 복명하여 단자를 올리다

가덕도 축성사(加德島築城使) 방호의(方好義)가 일을 끝내고 복명(復命)하였다. 이어서 단자(單子) 【*】 를 올리고 아뢰기를,

"신이 저 곳에 가서 형세를 갖추 보고는, 평시에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방어가 허술해지지 않겠으나 가덕도에 진을 설치하였어도 수호를 잘 하지 않으면 아마도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듣고 본 것에 따라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하고, 또 가덕도의 그림을 바치고 아뢰기를,

"우도의 웅천(熊川) 등 각진(各鎭) 및 좌도의 다대포(多大浦) 등은 대마도(對馬島)와 상대하였습니다. 대마도의 형세를 고로(古老)에게 물었더니, 그 길이는 5일정(日程)401) 이고 너비는 반 일정이며, 저 왜인들은 도사지도(陶沙只島)에서 떠나 목도(木島)·남매서(娚妹嶼)를 거쳐 가덕도에 닿는데, 목도에는 우물이 있고 배도 감출 수 있으므로 반드시 여기에서 쉬고 전산포(前山浦)를 지나 구불구불 둘러서 제포(薺浦)로 들어갑니다. 경오년의 변란 때에는 왜노가 가덕에 병선(兵船)을 몰래 감추었다가 불의에 제포·부산포·다대포·영등포(永登浦)를 나누어 공격하고 돌아갔다 합니다. 이제 가덕에 성을 쌓았으나 배를 감출 곳이 없으므로, 항구에 돌을 던져 넣어 바다와 같게 높이고 그 위에 나무로 울짱을 만드니, 그 안에 배 1만 척을 감출만합니다. 가덕부터 웅천까지는 한강(漢江)과 같은 것이 셋입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아뢴 뜻은 알았다. 정부(政府)가 합좌(合座)할 때에 병조(兵曹)·비변사(備邊司)와 같이 의논하여 아뢰라."

【*단자는 다음과 같다. "신이 웅천(熊川)에 가서 가덕도 사면의 적이 들어오는 첫길과 몰운대(沒雲臺)·절영도(絶影島)의 안팎 및 왜인을 접대하는 부산포(釜山浦) 등을 두루 들러 친히 살폈습니다. 무릇 적에게 대응하는 형세와 설험(設險)하여 방비하는 등의 일 및 듣고 본 바를 모두 다음에 벌여 적겠습니다. 1. 가덕도의 사면 둘레는 수로(水路)로 60리이고 북쪽 가의 양장곶(羊腸串) 아래 끝부터 미곶(未串) 끝까지 육로로 25리이며 너비는 5리 또는 10리 또는 1리도 되는데, 산이 둘러섰고 골짜기가 높고 험하며 초목이 무성합니다. 동남면은 돌벼랑이 깎은 듯하며, 적의 배가 닿을 곳은 양장곶·활포(闊浦)·수락포(水落浦)·대항(大項)인데, 그 가운데 관방(關防)이 가장 긴요한 활포·수락포는 돌로 쌓아 길을 막는 공역(功役)이 많지 않으므로, 병사(兵使)·수사(水使)와 같이 의논하여 가을걷이 뒤에 두 진(鎭)의 수군(水軍)으로 편의에 따라 쌓기로 의논을 정하였습니다. 1. 성을 쌓는 군사들이 가을걷이가 닥쳐서 밤에는 돌을 줍고 낮에는 성을 쌓기를 바라므로, 백성이 바라는 대로 밤낮을 계속 일하여 기한 안에 쌓는 일을 끝냈습니다. 1. 가덕 봉수(加德烽燧)·응봉(鷹峯)에서는 대마도(對馬島)를 가까이 내려다보아 산천의 형상을 환히 굽어볼 수 있고 왜인의 배가 드나드는 상황을 또렷이 알 수 있으므로 연대(烟臺)를 설치하였으며, 또 갈마봉[加乙磨峯]은 안골포(安骨浦)·웅천·금단곶(金端串)의 봉수와 서로 응합니다. 1. 우도(右道)의 남해(南海)·미조항(彌助項)·상주포(尙州浦)·평산포(平山浦) 등의 진보(鎭堡)는 전라도와 경계가 잇닿은 곳인데, 주장(主將)의 수영(水營)은 거제(巨濟)의 한 모퉁이에 있어서 서로 멀리 떨어졌으므로 제때에 서로 구원하기 어려우니,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를 당상관(堂上官)인 무신(武臣)으로 가려 차출하여, 남해 및 상주포 등 세 진보를 통속(統屬)시켜 그 지휘에 따라 군마(軍馬)를 정제하여 제때에 변고에 대응하게 하고, 또 사량(蛇梁)·당포(唐浦)도 아울러 구원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좌도(左道)의 형세는 수영이 해운보(海雲堡)에 있어서 북으로 동래(東萊)와 5리 떨어지고 서쪽으로 부산포와 15리 떨어졌으므로, 동래의 군졸을 거느리고 부산포와 다대포(多大浦)를 구원하고, 또 양산(梁山)·울산(蔚山)·좌병영(左兵營)이 뒤에서 이어 구원합니다. 1. 우도의 형세는 가덕도의 두 진(鎭)이 좌도의 목과 같은 곳에 있는데 안골포·웅천·제포(薺浦)가 자물쇠가 되고 지세포(知世浦)·옥포(玉浦)·조라포(助羅浦)가 가덕(加德)·천성(天城)과 서로 구원하며, 김해(金海)·창원(昌原)·우병영(右兵營)이 뒤에서 이어 구원합니다. 거제는 섬이 가장 많은데 수사와 미조항 첨사가 서남을 누르고 진주(晉州)·곤양(昆陽)·사천(泗川)·하동(河東)·고성(固城)·진해(鎭海)가 뒤에서 이어 구원합니다. 이러한 절목(節目)을 미리 정하여 방비하면, 왜놈이 듣고 보기에 놀라고 두려워할 바가 있을 뿐더러 바닷가에 사는 백성이 해채(海採)로 업을 삼아 살아 가는 데에 길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1. 좌도의 부산포는 왜노를 접대하는 긴요한 곳이므로 첨사가 반드시 적절하게 대응하고 군졸을 통솔하면서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지고서야 군졸의 사기도 회복될 것이며, 왜인의 짐을 나를 때에 외람한 폐단을 없애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 위엄과 명망이 있는 당상관을 가려 차출하여 왜인을 접대하게 하여 언어로 수작할 때에 적절히 함을 잃지 않게 함으로써 그 마음을 눌러 복종시켜서 교만하고 방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왜관(倭館)은 절반 이상이 무너져서 왜(倭)사(使)가 보기에 일의 체모가 매몰하니, 편의에 따라 고쳐 짓고 왜관 밖은 둑을 높이고 해자를 깊이 파서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곳을 막는 등 전보다 더 조치하여 출입을 방지해야 하고, 조만간에 제추(諸酋)의 사송(使送)을 접대하게 되면 관사(館舍)가 좁을 것인데, 만약에 한데에 있게 하면 원망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품을 것이니, 편의에 따라 더 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경향(京鄕)의 통사(通事)들이 몰래 경상(京商)을 끌어들여 왜관 근처에 사는 백성의 집에 붙여 두고 틈을 타서 몰래 무역하는데, 무역하는 무거운 짐을 나르는 값을 왜인과 나누어 쓰고는 왜인의 물건이라 핑계하여 버젓이 나르므로 백성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왜관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중개하여 장사하는 이익이 지극히 많으므로 정이 골육과 같아져 국가의 비밀한 군기(軍機)까지도 서로 가르쳐 주니, 지극히 마음 아픕니다. 웅천 성밑에 사는 백성은 본디 농토가 없고 오로지 왜인의 물건을 장사하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므로 그 무리가 매우 많은데, 만약에 부산포에서 왜인을 합하여 대접한다면 그 근처로 옮겨 살아 여전히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아울러 특별히 사목(事目)을 마련하여 엄하게 금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다대포는 왜인들을 출입시키는 요충지인데 성이 낮고 군사의 수가 적어서 전에 경오년의 왜변(倭變) 때 장졸(將卒)이 동래로 들어가서 겨우 그 화를 면하였는데, 이제 적왜(賊倭)의 소굴인 가덕도에 진을 설치하여 엄하게 방비하더라도 적왜가 만약에 사신이라 핑계하고 몰운도(沒雲島)에 정박하였다가 불의에 틈을 타서 함부로 들어와 성을 포위한다면 지극히 염려스러우니, 위 포(浦)의 진장(鎭將)은 무재(武才)가 있는 당상관으로 가려 차출하여 군관을 많이 거느리게 하고 도내(道內)의 한량(閑良)도 아울러 호세(戶稅)를 갈음하여 부방(赴防)하게 하여, 한편으로 본진(本鎭)을 방수(防戍)하고 한편으로 다른 진을 구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가덕·천성 두 진은 섬에 새로 설치하였을 뿐더러, 웅천·김해·양산·밀양의 허다한 백성이 해채의 이익이 많으므로 날마다 고깃배 수백 척이 모여서 청어를 잡는데, 지금 우도의 바닷가 각 고을의 고깃배가 바다를 덮고 밤낮으로 잡습니다. 전에 적왜가 틈을 타서 죽이고 약탈한 것이 수없이 많았으나, 백성들은 이익을 탐내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수호하는 방도를 잘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병사·수사와 같이 의논하여, 도내의 무재가 있는 한량을 두 진에 각각 50명씩 호세를 갈음하여 부방시키기로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104권 56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137면
  • 【분류】
    건설-건축(建築)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역(軍役) / 군사-병참(兵站) /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교통-수운(水運)

〔○〕 加德島築城使方好義竣事復命。 仍以單子【"臣初到熊川 加德島, 四面賊路初程。 沒雲臺、絶影島內外及倭人接待釜山浦等處, 遍歷親審。 凡應敵形勢設險防備等事及所聞所見, 幷開錄于左。 一, 加德島四面周廻, 水路六十里, 北邊羊膓串下端至未串枝, 陸路二十五里, 廣或五里, 或十里, 或一里。 山勢周遭, 澗谷峻險, 草木茂盛。 東南面, 則石崖如削, 賊船依泊處。 羊膓串、濶浦、水落浦、大項, 其中關防最緊, 濶浦、水落浦, 石築遮路, 功役不多。 故兵、水使同議, 秋收後以當兩鎭水軍, 隨宜造築事, 議定。 一, 築城軍等, 秋收事迫, 欲夜則拾石, 晝則築城, 故從民願, 晝夜通役, 期限內畢築役。 一, 加德烽燧鷹峯, 臨壓馬島, 山川形狀, 昭然俯見, 倭船出入之狀, 歷歷可數, 故烟臺設築。 又加乙磨峯, 則與安骨浦、熊川、(金端串) 〔金丹串〕 烽燧相准。 一, 右道南海 彌助項尙州浦平山浦等鎭堡, 乃全羅道連界之地, 主將水營在巨濟一隅, 相距隔遠, 趁時相救爲難, 請彌助項僉使, 以堂上武臣擇差, 使南海尙州浦等三堡統屬, 隨其指揮, 整軍馬, 趁時應變。 且令蛇梁赤梁唐浦, 竝救援何如? 一, 左道形勢, 左水營在(雲海堡)〔海雲堡〕 , 北距東萊五里, 西距釜山浦十五里, 率東萊軍卒, 救釜山多大浦, 又令梁山蔚山左兵營, 繼援于後。 一, 右道形勢, 加德島兩鎭在左道喉舌之地, 安骨浦熊川薺浦, 作爲關鍵, 知世浦玉浦助羅浦, 與加德天城, 互相救援, 金海昌原右兵營, 繼援于後。 巨濟, 島嶼與最多, 水使與彌助項僉使, 控制西南, 晋州昆陽泗川河東固城鎭海, 繼援于後。 如此節目, 預定防備, 則不但奴, 聞見有所警懼, 沿海居民, 海菜生業, 永爲無患。 一, 左道釜山浦, 接待倭奴緊重之地, 僉使須應得宜, 撫禦軍卒, 恩威幷行, 然後軍卒亦蘇復, 至於倭人卜物, 輸轉之時, 無猥濫之弊。 所關非輕, 有威望堂上官擇差, 接待倭人, 言語酬答, 不失其宜, 鎭服其心, 使無驕縱, 何如? 一, 倭館過半頹圮, 於使所見, 事體埋沒, 隨便改造。 館外高墻深塹, 拒柴水場, 倍前措置, 以防出入早晩。 諸酋使送接待, 則館舍狹窄, 若使露處, 必懷怨憤, 隨便加築, 何如? 一, 京鄕通事等潛引京商, 接於倭館近處居民之家, 乘隙潛貿。 所貿負重, 物貨輸轉之價, 與倭人分用, 托以物, 公然輸轉, 不但民不堪其苦, 倭館近處居民等, 牙保興販之利至重, 故情同骨肉, 至於國家秘密軍機, 亦相敎諭, 至爲痛心。 熊川城底居民, 本無田土, 專以興販物資生, 厥類甚多。 若於釜山浦合待倭人, 則必移接于近處, 如前作患, 幷別設事目, 嚴禁何如? 一, 多大浦, 出入諸咽喉之地, 城卑軍少, 前於庚午年變, 將卒投入東萊, 僅免其禍。 今於賊倭窟穴, 加德島設鎭嚴備, 賊倭若托稱使臣, 依泊沒雲島, 乘其不意, 闌入圍城, 至爲可慮。 右浦鎭將, 以有武才堂上官擇差, 多率軍官, 道內閑良, 幷代稅赴防, 一以防戍本鎭, 一以救援他鎭, 何如? 一, 加德天城兩鎭, 非但新設絶島, 熊川金海梁山密陽, 許多居民, 海採利重, 漁船日集數百, 靑魚捉得時, 右道沿海各官, 漁船蔽海, 晝夜捕捉, 前此賊倭, 乘便殺掠, 不知其數。 然而居民等貪於漁利, 不畏被殺, 守護之方, 不可不重。 故與兵、水使同議, 道內閑良有武才者, 兩鎭各五十名, 代稅赴防事。"】 啓曰: "臣往彼地備觀形勢, 以爲平時若能如此, 則防禦不至虛疎, 加德島旣設鎭, 而護守不如是, 恐有後悔, 故隨所聞所見, 而啓聞如(左)〔右〕 。" 且進獻加德島圖形而啓曰: "右道熊川等各鎭, 及左道多大等浦, 與對馬島相對。 聞對馬島形勢於古老人, 其長至於五日程, 其廣半日程, 彼發自陶沙只島, 經木島娚妹嶼, 抵于加德, 木島有井泉, 且可藏船, 故必休憩于此, 過前山浦迤邐, 而入于薺浦。 庚午之變, 倭奴密藏兵船於加德, 不意分擊薺浦釜山多大永登而還。 今築加德, 無藏船處, 故於港口投石, 高與海等, 因於其上, 樹木爲柵, 其內可藏船萬餘隻也。 自加德熊川, 如漢江者三矣。" 傳曰: "啓意知道。 政府合坐時, 與兵曹、備邊司, 同議以啓。"


  • 【태백산사고본】 53책 104권 56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137면
  • 【분류】
    건설-건축(建築)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역(軍役) / 군사-병참(兵站) /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교통-수운(水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