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에 나아가 왜인들의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하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요사이 남쪽 지방에는 왜변이 있고 서쪽 지방에도 달자들이 풀만 우거지면 방산 등지에서 노략질을 계획한다니, 서쪽과 남쪽의 방어를 우연만하게 해서는 안된다. 장수도 가려 놓고 군사도 조련해 놓고 식량도 족하게 하는 것이 당면한 지금의 시급한 일이다. 조정의 계책은 언제나 의외의 변이 조석(朝夕)사이에 생길 것처럼 해야한다."
하였다. 영사(領事) 윤인경(尹仁鏡)이 아뢰기를,
"이번의 사량진(蛇梁鎭) 왜변(倭變)은 성을 포위까지 했지만 마침내 이득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고 사람이 상하지도 않고 성도 온전했으니 또한 다행한 일입니다. 불의에 성을 포위하였으니 만일 만호(萬戶)가 용렬한 사람이었다면 반드시 성이 함락되어 국가가 모욕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량진 만호 【유택(柳澤).】 의 일은 조처를 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 적당하게 대응하여 장수를 죽이고 성을 함락할 수 없게 하였으니 또한 우연만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사량진 만호가 방비한 일은 비록 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갑자기 불의의 변을 만났는데도 능히 이처럼 한 것은, 듣건대 유택은 곧 나이 젊은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이라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사량진에서 변방을 침범한 왜인들을 대마도주를 시켜서 잡아보내도록 한다면 거짓 꾸미는 짓이 없지 않을 것이고 또한 혹은 공로를 내세울 수도 있다. 다만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우리 나라에 귀순한 사람이니 이번에 마땅히 서계(書契)를 만들어 깨우치기를 ‘이번에 왜인들이 크게 군사를 출동시켜서 성을 함락하려는 술책을 부렸는데 네가 도주(島主)이면서 어찌 알지 못했겠는가.’고 하여, 엄중한 말로 책한다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평소에 해채선(海採船)을 노략질한 것 같은 경우는 말할 것이 없지만, 이는 크게 2백여 인이나 출동시켜 바다를 뒤엎어 입구(入寇)했으니 도주가 반드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조정 의논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거절하고 왕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도주를 깨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주는 귀순한 지 이미 오래이고 국가의 은덕이 매우 중했으므로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대저 국가에서 왜노(倭奴)와 야인(野人)을 접대함이 같지 않습니다. 예조(禮曹)가 음식을 접대할 적에 야인들은 비록 진소(陳訴)하더라도 통사(通事)들이 소리쳐 금지하여 말을 하지 못하게 하지만, 왜인들은 비록 오만한 말을 하더라도 그렇게 대우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서 하는 말을 반드시 전하고 일찍이 금하거나 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오만을 순치(馴致)시키게 된 것입니다. 듣건대 지금 관(館)에 머물러 있는 왜노들도 불공(不恭)한 짓을 하는 조짐이 많다고 합니다."
하고, 사간(司諫) 경혼(慶渾)은 아뢰기를,
"요사이 조정의 일을 보면 왜인들을 접대함이 너무 지나칩니다. 요청하는 사건은 마땅히 국가의 계책을 참착하고 요량하여 한 번 결정한 다음에는 비록 백 번을 요청하더라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주도권(主導權)이 우리에게 있게 되어, 그들이 무례한 말을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번 국왕(國王)의 사신 수축(受竺)·계원(稽圓)이 왔을 적에 상품의 무역(貿易)을 청하자 처음에는 비록 그 수량을 줄여 사기로 허락했었지만, 그 뒤 패만(悖慢)한 언사가 많이 나오자 다시 의논하여 개정해서 마치 외구(畏懼)하는 듯하여 국가의 체면이 자못 중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여론이 매우 분개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의논하여 수량을 정했던 것인데, 왜(倭)사(使)가 포소(浦所)161) 에서 본 서계(書契)에는 ‘절반은 무역하기를 허락한다.’고 해놓고는 실지로 무역한 서계와 달랐으므로 돌아가면 반드시 죄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진소(陳訴)한 것이다. 대개 그 서계에 모호하게 회답했었기 때문에 이를 구실삼아 우리 나라의 형편을 엿본 것이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분명하게 해야 하고, 한번 정한 다음에는 과연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국왕의 사신이 오랫동안 포소에 머물러서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남쪽 지방의 화포(貨布)는 한번 사신(使臣)을 치르고 나면 그만 다 없어지고 맙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경혼은 아뢰기를,
"요사이 통사들이, 왜인(倭人)이 하는 말은 비록 소소한 것이라도 모두 전달하고 있으니 지극히 외람된 짓입니다. 그 왜인들이 만일 외람된 술책이나 패만(悖慢)한 말을 할 경우 통사들이 ‘그런 일은 전할 수 없다.’고 하여 엄중한 말로 금지한다면, 거의 조금은 그치게 될 터인데도 전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또 듣건대 왜인들이 모두 통사들에게 많은 뇌물을 준다고 합니다. 만일 그들이 저들과 마음을 같이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으로 손쉽게 그런 많은 뇌물을 주겠습니까?
또 일로(一路)로 데리고 올 적에 수령(守令)들의 접대가 후한지 박한지를 통사들을 시켜 살피게 하므로 이에 따른 폐단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으면 고의로 왜인들을 충동하여 화를 내게 하니 매우 지나치고 심한 짓입니다. 몇몇 사람을 적발하여 징계한 다음에야 두려워하여 그치게 될 것입니다.
이약해(李若海)가 선위사(宣慰使)가 되었을 적에 일찍이 통사를 불러 ‘무역(貿易)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이미 그 수량을 정해 놓았는데 네가 어찌 감히 그렇게 왔다갔다 하느냐.’ 했는데, 수축(受竺) 등이 와서 이약해에게 고하기를 ‘우리들은 오로지 선위사만 믿고 있는데 선위사의 말이 그러하니 실망을 견디지 못한다.’ 했습니다. 이는 반드시 즉시 누설하여 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공모(共謀)와 사주(使嗾)가 대개 이와 같은 것이 많으니 이와 같은 일은 법사(法司)가 살피고 단속하여 누설하고 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통사들이 평소에 조정에서 의논한 말을 누설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만일 일로에서의 작폐(作弊)를 이용하여 검거(檢擧)하여 죄준다면 객인(客人)을 박대하는 폐단이 있게 될 듯하다."
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객인들이 오가는 일로에서의 일과 각 고을이 조심해서 접대하지 않는 것을 향통사(鄕通事)로 하여금 살피게 하므로, 외방(外方)의 수령들이 만일 더러 법대로 접대했으나 그들의 뜻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객인들이 집접 예조(禮曹)에 호소하게 합니다.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속는 수가 많으니, 이 뒤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들이 객인들의 접대를 잘한다고는 할 수 없다. 지난번에 대간(臺諫)이 갔다 올 적에도 외방의 수령들이 오히려 또한 박대했었는데, 하물며 객인들이겠는가? 객인들이 박대하는 것 때문에 화내는 일이 없지 않으니 통사들을 시켜서 단속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경혼이 아뢰기를,
"만일 외람된 짓을 하는 통사들을 징계하고 박대하는 수령들을 단속한다면 두 가지가 다 완전하게 되고 국가의 일도 잘 될 것이나, 그렇지 않고 한갓 수령들만 단속하고 통사들이 사주(使嗾)하는 것을 듣고도 한결같이 왜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면, 끝없는 뒤폐단이 생길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유인숙(柳仁淑)이 아뢰기를,
"왜변이 반드시 오늘날에 일어날 것을 조야(朝野)가 생각해 온 지 오래입니다. 이번에 소추(小醜)들이 한 짓을 보건대, 우리 나라의 실정을 자세히 엿보고서 틀림없이 우리 나라가 두려워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독기를 부려 그처럼 패만(悖慢)한 짓을 한 것입니다. 이에 앞서 안심 동당(安心東堂)이 왔을 적에, 무릇 무역(貿易)하는 일에 대해 여러 차례 조정 의논을 변경하여 그의 요구를 따라 준 것은 혹시라도 분심을 품고 변방의 환란을 저지르게 될까 싶어서 되도록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만 힘쓰고 원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오만과 방종이 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요사이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청구하는 모든 것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고 있는데, 신의 생각에는 그들이 필시 먼저 공동(恐動)하여 조정을 위협한 다음에 다시 청구하여 기필코 들어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사이 매우 후하게 접대했는데도 거만하게도 국가의 은혜를 이처럼 저버렸으니 신의 생각에는, 이 기회에 단호하게 거절하고자 한다면 말이 또한 순탄해지고 저 왜노들도 자연히 오만한 짓을 못하게 될 것으로 여깁니다.
경오년162) 에 난이 생긴 뒤로는 식견 있는 사람들은 또한 통호(通好)를 가벼이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조정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고,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또한 사신 【붕중(弸中).】 을 보내어 요청했기 때문에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감히 이처럼 오만하지는 않았었는데 요사이는 능멸하는 짓을 한결같이 이렇게 하니, 신은 그윽이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전에는 국가의 저축이 궁핍하지 않았고, 국왕의 사신을 더러 거절하지 않았어도 무역(貿易)하는 수량이 요즘처럼 많지 않았었습니다. 지금은 남쪽 지방의 화포(貨布)가 한번 사신을 겪고나면 그만 여지없이 탕진됩니다. 이약해(李若海)도 ‘지금 남쪽 지방에 남아있는 화포는 모두 쥐가 쏠아 쓸 수 없는 것이니, 만일 이제 또 사신이 온다면 수용(酬應)할 수 없을 것이다.’ 했습니다. 이웃 나라를 기쁘게 해야 하는 것 때문에 국가의 저축을 다 털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교린(交鏻)하는 일은 한 가지의 잘못 때문에 경솔하게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먼저 엄중한 말로 도주(島主)에게 타이르기를 ‘만일 또 다시 그와 같은 짓을 하면 반드시 용서하지 않고 끊어버리겠다.’ 하고 서서히 그들이 답하는 것을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비록 거절하겠다고 하더라도 끝내 거절하지 못할 것이니 우선 타이르고 나서 하는 것을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고, 유인숙이 아뢰기를,
"대내적으로 출동하여 성을 포위한 것은 큰 변입니다. 만일 이번에 두려워하여 위축하는 모양을 보인다면 국가의 위엄을 손상하는 일이어서 매우 불가합니다. 또한 교린의 도리는 마땅히 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음식 대접하는 것도 원래 일정한 법이 있었기 때문에 왜인들이 감히 더하거나 덜하지 못했습니다. 요사이는 통사(通事)들이 객인(客人)들을 교사(敎唆)하여 지적하게 하므로 수령들이 이미 파출(罷黜)될까 두려워하고, 또한 조정이 후대하려는 뜻을 짐작하고서 되도록 사치스럽게 마련하여 더욱더 존대하니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만일 이제는 한결같이 전의 법대로만 하고 더 후하게 하지 않는다면 객인들 역시 감히 박하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윤인경이 아뢰기를,
"객인들이 음식 대접 때문에 화내는 것이 아니라, 몰래 가지고 간 사물(私物)의 짐바리가 너무 무거우므로 수령들이 더러는 민폐(民弊)를 생각하여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강현(姜顯)은 아뢰기를,
"거절하자는 유인숙의 말이 지당합니다. 남쪽 지방의 장사(將士)들과 조정의 뜻도 모두 그러합니다. 단지 통사들이 객인들과 내통하여 말을 전해 주는 죄만 처벌하는 것은 말단적인 일입니다. 요사이 조정이 왜인들을 너무 후하게 대우하였으므로 오만 방종해지게 하다가 마침내 이처럼 폐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남쪽 지방의 장사들이나 조정의 아랫사람들 뜻이 모두, 경오년의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의 변이 있게 된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번에 또 거절하지 않는다면, 남쪽 지방의 저축은 한정이 있는데 그들의 한없는 욕심은 채울 수가 없어, 남쪽 지방의 뒷날의 환란이 장차 경오년의 것보다도 크게 될 것입니다.
비록 교린은 해야 한다고 하지만, 왜노들은 변사(變詐)를 헤아릴 수 없으므로 이웃 나라로 접대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견시(犬豕)로 대해야 하는데, 우리 나라로서는 교린하는 것 때문에 후대하므로, 그들이 감히 교활하게 간사한 짓을 하여 이처럼 크게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남쪽 지방의 화포(貨布)가 이미 떨어져 장차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약해(李若海)가 선위사(宣慰使)일 적에 동래(東萊)와 김해(金海)에 저장된 왜(倭)료(料)163) 를 모두 써버리고 다시 웅천(熊川)에 저장된 것도 써버렸으니, 후일에 사신이 오게 된다면 왜료를 어디에서 가져올 것입니까?
수축(受竺)·계원(稽圓) 등이 포물(布物)을 점퇴(點退)한다는 구실로 짐짓 지체하고 있는 것도 포소(浦所)에 둔 양료(糧料)를 많이 가지고 가려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데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위사 이약해가 비록 낱낱이 계달(啓達)하지 않았었지만, 모욕받은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전에 오준(吳準)이 선위사일 때에는 【무자년에 일본 국왕의 사신 일악 동당(一鶚東堂)이 왔을 때임.】 왜인들이 칼을 내밀며 앞에 서서 말하기를 ‘당신은 사명(使命)을 받고 나온 사신이라 해칠 수 없고 우리가 마땅히 당신 앞에서 통사(通事)를 칼로 찌르겠다.’ 하고, 떠들면서 난동하므로 오준이 놀라 의자에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저들이 사신 앞에서 그처럼 협박했으니 그들의 교만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용납하여 모욕받은 것은 헤아리지 않아서 마치 우는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하느라 되도록 마음을 달래듯이 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우려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거절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왜인들에게 주는 미포(米布)를 방어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엄격하게 방비하게 한다면, 저 왜인들의 장기(長技)는 단지 물 위에서뿐이고 육로(陸路)에서는 장기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장기와는 다투지 않고 성을 튼튼하게 하고서 굳게 지킨다면, 한갓 해양(海洋)사이에 출몰하여 양식을 가지고 멀리 왔을 뿐 아니라 사세가 스스로 피폐해져 한두 해가 되지 않아서 장차 복종하기를 애걸할 겨를도 없게 되고 다시는 나쁜 짓 하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무사(武士)와 변장(邊將)들이 지극히 분개하여 원망하여 모두 거절하였으면 합니다. 한갓 대신의 뜻만이 아니라 추요(芻蕘)164) 의 말도 또한 마땅히 참작해서 미리 뒤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만일 거절할 수 없다고 하여 당장만 편하려고 힘쓰면 마침내는 반드시 큰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를 접대하는 도리는 마땅히 원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요 용이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동래현(東萊縣)이 그전에는 그다지 피폐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여지없이 조잔해져 인물(人物)이 줄었다고 합니다. 이 고을은 곧 부산진(釜山鎭)이 소재한 곳이고 수사(水使)가 오가며 방비하고 있는 곳입니다. 만일 선위사가 내려가면 또한 여기에서 오래 머무는데, 이처럼 피폐하니 지대(支待)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조정이 따로 회복(回復)시킬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오년의 왜(倭)란(亂) 뒤에 왜인들이 계속해서 안골포(安骨浦)에서 노략질하다가 돌입(突入)하여 성을 포위하였는데, 그때의 웅천 현감(熊川縣監) 【소기파(蘇起坡).】 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었기에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아 드디어 좌절되었었고, 또 유담년(柳耼年)이 병사(兵使)이고 이안세(李安世)가 수사일 적에 왜인들이 다시 입구(入寇)하였다가 적을 내려다 보며 맹렬히 활을 쏘아대자 패하고 후퇴하여 그들의 기세가 굽혀졌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일본이 또한 사신 【붕중(弸中).】 을 보내어 청했기 때문에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너무 경솔하게 허락하고 세견선(歲遣船)의 척 수 작정도 또한 너무 많게 하여 지금까지 폐단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 용이하게 고칠 수는 없으나 너무 후하게 접대하여 교만해진 것을 조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쪽 지방의 방어는 비록 어려운 듯하지만 사실은 용이합니다. 후망(候望)을 잘하고 관방(關防)을 조심해서 지켜 우리 변방의 방비를 굳게 한다면, 왜구(倭寇)들이 온다 하더라도 나쁜 짓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수(烽燧)하는 일을 허위(虛僞)로 한 것이 오래이기에 지금 추문(推問)하려고 해도 또한 어렵다. 다만 봉수를 분명하게 한 다음에야 조정에서 변보(邊報)의 완급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이렇게까지 허위로 하고 있다. 뒤폐단이 있을 일이기 때문에 이미 경차관(敬差官) 【권철(權轍).】 을 시켜서 추문하게 했다."
하였는데, 윤인경이 아뢰기를,
"봉수하는 일은, 밤에는 불로 변방의 일을 알리고 낮에는 연기(煙氣)로 서로가 알려야하는 것이 법에 특히 엄중하게 되어 있는데도 요사이는 여러 가지 일이 해이(解弛)되었습니다. 이는 하루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니, 추문하는 것은 또한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유인숙이 아뢰기를,
"저번에 사량진(蛇梁鎭)의 성(城)이 함락되지 않은 것은 또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대저 각 포소의 수군(水軍)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대개 적으니 비록 많더라도 또한 어디다 쓰겠습니까? 사량진의 싸움이 인시(寅時)에서 사시(巳時)까지 갔으니, 서로 어울려 방어하는 군사 중에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찌 한 사람만 죽이고 말았겠습니까? 바야흐로 지금 군액(軍額)이 줄어들어 오히려 수도 채우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는 특히 신이 본 것에 따라 아뢰는 것입니다.
또 요사이 한 가지 폐습(弊習)이 있습니다. 육진(六鎭)의 부사(府使)는 변방의 중한 직임이기 때문에 옛부터 모두 당상관(堂上官)으로 가려 보냈었는데, 지금은 나이 젊으면서 현달한 품계에 오른 사람은 모두 기피(忌避)할 꾀를 부리므로, 전부터 당상관인 자가 나가는 법은 전혀 없고 거개 모두 새로 당상관에 제수받은 사람을 차임하여 보내니 지극히 합당하지 못합니다. 또 무신(武臣)은 누구나 한번 육진에 들어갔다 온 다음에야 재임(再任)하지 않은 것이 이미 격례(格例)가 되었는데 인재는 한정이 있으므로 가려서 임용하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같은 진에 재임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만일 다른 진이라면 안 될 것이 뭐 있겠는가?"
하였는데, 유인숙이 아뢰기를,
"옛적에는 더러 한 사람이 육진에 두루 임용되는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혹시라도 재차 가게 되면, 모두 혼자만 고생해야 하느냐는 한탄을 가지므로 폐단이 이미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경혼(慶渾)이 아뢰기를,
"풍속이 야박함은 역시 까닭이 있는 것이니, 대개 풍속의 순후와 경박은 사습(士習)이 좋거나 나쁜 것에 달렸습니다. 기묘년 시절에 성상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하시고 현명한 선비들이 또한 배출되어 상하가 같은 마음으로 함께 다스리는 도리를 일으켜 갔습니다. 다만 사람들 모두가 현명한 것은 아니었고 일을 점차적으로 하지 못하여 마침내 변란을 야기시켰기 때문에 죄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물정(物情)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사림(士林)들 사이에서는 모두 기절(氣節)이 있었기 때문에 죄를 얻게 된 것이라고 여겨, 조금이라도 저촉되거나 기휘(忌諱)되는 말이 있으면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부형들이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이나 자제들이 부형에게서 교훈받는 것이 모두 ‘네네’ 하고 부드럽게만 하는 것을 숭상하여 퇴폐한 것이 풍습이 되었습니다. 한번 여기에 이르자 조정 안에도 그만 사기(土氣)가 없어지고 묵은 풍습이 한층 더 고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더러는 대신(大臣)이 탐오하고 부도(不道)한 짓을 해도 【심정(沈貞)과 김안로(金安老) 등의 일을 가리킨다.】 규탄하여 바로잡지 못하다가 국가 일이 이미 잘못된 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어나 바로 잡으려 하여, 국가의 명맥(命脈)을 손상하는 일이 또한 많았습니다.
기묘인(己卯人)들이 지나치게 과격하여 중도에서 벗어난 짓을 한 죄는 벌준 것이 더러는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권세를 잡은 신하들이 모두 간사한 속임수를 품고서 기묘인들이 다시 나오게 된다면 자기들의 일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여겨 점점 더욱 막고 금했기 때문에 공론이 더욱더 시행되지 못하여, 그들의 사(邪)가 없는 본심이 지금까지 온 세상에 밝혀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이 서로 글 올리기를 마지 않았던 것이니, 만일 이번에 하교하시기를 ‘조광조 등을 처음에는 과격한 것 때문에 죄주었으나 본심은 진실로 사가 없었기 때문에 도로 작첩(爵牒)을 주는 것이다.’ 한다면, 물정이 통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102권 68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7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註 161]포소(浦所) : 해안(海岸) 지방 또는 강변(江邊) 지방의 선박들이 착발(着發)하기 좋고, 외국인과 교역(交易)하기 편리한 포구.
- [註 162]
○戊子/御朝講。 上曰: "近來, 南方當有倭變, 西方亦有㺚子等草密則寇抄方山等處之計云, 西南防禦, 不可偶然。 擇將、鍊兵、足食, 當今之急務。 朝廷之計, 常若有不(虛)〔虞〕 之變, 生於朝夕可也。" 領事尹仁鏡曰: "今此蛇梁 倭變, 至於圍城, 竟不得利而還, 不傷人而全城, 亦爲多幸矣。 不意圍城, 而萬戶若庸劣之人, 則必至陷城而辱國也。" 上曰: "蛇梁萬戶 【柳澤】 事, 不可謂善措。 然善於臨機應變, 使不得殺將陷城, 亦不偶然也。" 仁鏡曰: 蛇梁萬戶防備之事, 雖不可謂善也。 卒遇不意之變, 而能如此者, 聞柳澤, 乃年少有武才之人, 能射而却之也。" 上曰: "今此蛇梁犯邊之倭, 令對馬島捉送, 則不無誣飾, 而且或要功。 但對馬島主, 歸順我國者, 今當爲書契諭之曰: ‘今者, 倭人大擧兵爲陷城之計, 爾以島主, 豈不知之乎?’ 嚴辭以責則何如?" 仁鏡曰: "上敎至當。 常時如剽掠海採船則已, 此則大擧, 以至二百餘人闌海入寇, 島主必知之。 朝議欲乘此機會, 拒絶不通云。 然不可不先諭島主, 島主歸順已久, 國恩深重, 而如此爲之, 必有其由。 大抵國家待倭奴、野人不同。 禮曹饋餉時, 野人則雖有陳訴之言, 通事等呵禁止之, 使不得言; 而倭人則雖有傲慢之辭, 以爲不可待之如此, 有言必傳, 不曾禁沮, 故馴致驕傲。 聞今留館倭人, 亦多不恭之漸矣。" 司諫慶渾曰: "近來見朝廷之事, 接待倭人太過, 所請之事, 當酌量國計, 一定之後, 雖百請不從, 則操縱之權在我, 而彼不以無禮之辭敢加矣。 頃者, 國王使臣受竺、稽圓之來也, 請貿商物, 初雖省約其數而許買, 其後言辭多有悖慢, 旋議改定, 似若畏懼然, 國體殊爲不重, 輿情憤甚。" 上曰: "已議定數, 而倭使留浦所, 見書(啓)〔契〕 , 則過半許貿云, 而其所貿之數, 有異書契, 歸必獲罪, 故强爲陳訴。 蓋其書契, 矇矓回答, 故得以藉口, 而窺我國淺深。 自今當分明爲之, 而一定之後, 果不可輕改也。" 仁鏡曰: "國王使臣久留浦所之弊至多。 南方貨布, 一經使臣, 便爲掃蕩安有如此之事乎?" 慶渾曰: "近來通事等, 倭人所言, 雖小皆傳, 至爲猥濫。 彼倭人等, 若生汎濫之計, 及悖慢之言, 通事等以爲如此之事, 不可傳也云, 而嚴辭禁之, 則庶有小戢, 而通事則專不如此。 且聞, 倭人等皆重賂於通事云, 彼若不與之同心, 則何故輕施其重賂乎? 且其一路率來時, 守令接待厚薄, 使通事致察, 因而爲弊。 少有不滿, 故激倭人, 使之發怒, 至爲過甚。 摘其一二而懲之, 然後庶可畏戢矣。 李若海之爲宣慰使也, 嘗招通事而言之曰: ‘貿易之事, 國家已定其數, 汝何敢如此往復乎?’ 受竺等, 來告于李若海曰: ‘吾輩專恃宣慰使, 而宣慰使之言如此, 不勝缺望。’ 云。 此必卽時漏通故也。 其通謀縱臾, 蓋多類此, 如此之事, 法司察而糾之, 使勿漏通爲當。" 上曰: "通事等, 常時漏通朝議之言則有之, 若以檢擧一路, 因緣作弊罪之, 則恐有薄待客人之弊也。" 仁鏡曰: "客人往來一路之事及各官不謹接待者, 使鄕通事致察, 而外方守令, 若或率之以法, 待之不滿其意, 則使客人, 自訴于禮曹, 我國受欺者多矣。 今後, 請使不得如此可也。" 上曰: "守令等接待客人, 不可謂善也。 頃者, 臺諫往還, 外方守令, 尙且薄待, 況於客人乎? 客人等不無以薄待之事怒也, 不可不令通事檢擧也。" 慶渾曰: "若懲其濫猥之通事, 而檢擧薄待之守令, 則兩全而國事得矣。 不然, 徒爲檢擧守令, 而聽其通事之縱臾, 一從倭人所願, 則恐或後弊之無窮也。" 同知事柳仁淑曰: "倭變之必發於今日, 朝野之間, 計之久矣。 觀此小醜, 窺我國淺深, 必以我國爲畏之也。 是以敢肆萬毒, 悖慢如此。 前者安心東堂之來也, 凡貿易之事, 屢變朝議, 從其所欲, 慮或懷憤, 以生邊患, 務欲悅意, 不計遠慮, 致使驕縱至此。 近者對馬島主, 凡有求請, 屢却不許, 臣意必其先爲恐動, 以刼朝廷, 然後復有求請, 而使之必從也。 近雖待之至厚, 而慢負國恩如此, 臣意欲乘此機會, 截然拒絶, 則言亦順矣, 而彼倭奴等, 自不能驕傲也。 庚午年生亂之後, 識者亦不欲輕許納款, 而然時朝議不一, 而日本國王亦遣使 【弸中。】 請之故許之。 然猶不敢如此驕傲也。 近來凌轢一至於此, 臣竊恥之。 古者, 國儲不至貧乏, 而國王使臣雖或不賓, 貿易之數, 不至如近日之多。 今則南方貨布, 一經使臣, 便蕩然無餘。 李若海亦曰: ‘今者南方遺在之貨布, 皆鼠破不可用。 今若又有使臣之來, 則將無以應之矣。’ 奈何以悅隣之故, 而傾國儲以給乎?" 上曰: "交隣之事, 不可以一失而輕絶也。 予意先以嚴辭開諭于島主曰: ‘又若如此, 則必絶不饒’ 云, 而徐觀其答辭何如?" 仁鏡曰: "雖曰拒絶, 而終未能拒絶, 則姑爲開諭, 以觀所爲爲當。" 仁淑曰: "大擧圍城, 爲變大矣。 今若示畏縮之狀, 則虧損國威, 甚不可也。 且交隣之道, 當爲厚矣。 然古者, 飮食之事, 自有定規, 故倭人等不敢增損。 近來, 通事等敎誘客人, 使之檢擧, 守令等旣畏罷黜, 又揣朝廷厚待之意, 務爲侈辦, 尊待有加, 爲弊不貲矣。 今若一切遵其舊規, 不至加厚, 則客人等, 亦不敢以爲薄也。" 仁鏡曰: "客人等, 非以饋餉發怒也, 潛挾私物, 卜駄太重, 守令等或計民弊而不許之故也。" 持進官姜顯曰: "柳仁淑拒絶之言至當。 南方將士及朝廷之意皆然。 若只罪通事等交通客人傳語之罪, 則末務也。 近者, 朝廷待倭太優, 使之驕縱, 卒受其弊如此。 南方將士及朝廷下人之意, 皆以爲庚午年處置, 不得其宜, 故致有此變。 今又不拒, 則南方之儲有限, 溪壑之慾難盈, 南方後日之患, 將復大於庚午年者矣。 雖曰交隣, 倭奴變詐難測, 不可待之以隣。 當以犬豕遇之。 在我國, 則以交隣之故厚待, 而敢爾狡詐, 大肆欺辱, 至於如此。 今則南方貨布已竭, 將至於無可奈何, 臣不知何以爲之也。 李若海之爲宣慰使也, 盡用東萊、金海所儲倭料, 而復用熊川所儲, 他日若有使臣之來, 則倭料出於何處也? 受竺、稽圓等憑藉點退布物, 故爲遲緩者, 欲多䝴留浦糧料而還。 當受而不受, 宣慰使李若海雖不一一啓達, 其受辱之狀, 不可勝言。 昔吳準爲宣慰使時, 【戊子年國王使臣一鶚東堂來時。】 倭人等, 露刃前立曰: ‘汝則奉命之臣, 不可害也。 吾當手刃通事於爾前。’ 叫噪爲亂矣, 吳準驚愕, 落于交倚云。 彼使臣之前, 刼之如此, 其驕傲可知, 而假借待之, 不計受辱, 如啼兒止哭, 務在悅意, 臣竊憂之。 臣意莫如拒絶, 而以資倭之米、布, 頒給于防禦軍士, 而嚴加防備, 則彼倭人之長技, 只水上而已, 陸路非所長也。 我若不爭其長技, 而堅城自固, 則徒自出沒於海洋之間, 贏糧遠來, 勢必自弊, 不出一二年, 將乞服之不暇, 無復有可爲之事。 方今武士、邊將, 至爲憤惋, 皆欲拒絶。 不徒大臣之意, 芻蕘之言, 亦宜斟酌, 預防後弊。 若以爲不可拒絶, 而務爲姑息, 則終必有大患矣。" 上曰: "待夷之道, 當爲遠計, 不可容易也。" 仁鏡曰: "臣聞東萊之縣, 昔不甚弊, 今則十分凋瘵, 人物殘耗。 此縣乃釜山鎭所在, 水使往來防備之處。 宣慰使若下去, 則亦長留于此, 而如此疲弊, 恐難支待。 朝廷不可不另爲蘇復之策也。 庚午年倭亂之後, 倭人連續作賊於安骨浦, 突入圍城, 其時熊川縣監, 【蘇起坡。】 能射者也, 死傷頗多, 遂見挫, 而又柳聃年爲兵使, 李安世爲水使時, 倭復入寇, 臨敵大射, 敗衂而退, 其勢旣屈。 然後日本亦遣使 【弸中】 請之, 故許之。 然其時許之甚輕, 酌定船數, 亦爲過多, 貽弊至今。 今雖不可容易改之, 然接遇太驕, 不可不節。 南方備禦, 雖似爲難而實易。 言若善於候望, 謹守關防, 固我邊備而已, 則倭寇雖來, 無能爲者矣。" 上曰: "烽燧之事, 久成虛僞, 今欲推之亦難矣。 第以烽燧分明, 然後朝廷得知其邊報之緩急, 而今之虛僞至此。 後弊所關, 故已令敬差官 【權轍】 推之矣。" 仁鏡曰: "烽燧之事, 夜以火報邊, 晝以烟氣相通, 在法尤重, 而近來萬事解弛, 非一日而然矣。 推之恐亦難也。" 仁淑曰: "彼蛇梁之不至於陷城, 亦幸矣。 大抵各浦水軍等, 能知操弓者蓋寡, 雖多亦奚以爲? 蛇梁之戰, 自寅時至巳時, 相接防禦之軍, 若有能射者, 則豈止殪一人而已乎? 方今軍額凋耗, 尙不能充數, 況望其有才乎? 此特因臣所見而啓之也。 且近來有一弊習。 六鎭府使, 邊方重任, 故自古皆以堂上官擇遣。 今則年少而登躡顯秩者, 皆生厭避之計, 無一人以舊爲堂上而去者, 率皆以新授堂上者差遣, 至爲不當。 且武臣一人, 入六鎭後不再任, 已成格例, 人材有限, 擇任亦難矣。" 上曰: "再任一鎭, 則不可也, 若他鎭, 則有何不可?" 仁淑曰: "古則或有一人徧任六鎭者, 而今則若或有再往者, 皆懷獨賢之嘆, 弊已如此。" 慶渾曰: "風俗之薄, 亦有由矣。 蓋風俗之淳漓, 由於(土)〔士〕 習之美惡也。 己卯之時, 自上勵精圖理, 賢士亦爲輩出, 上下同心, 共起治道。 第以人不能皆賢, 事未嘗有漸, 卒致變亂, 故罪之。 然物情未知其由, 士林之間, 咸以爲有氣節之故而獲罪, 少有觸諱之言, 不敢出口。 父兄所以敎子弟, 子弟之所以受於父兄者, 皆以唯唯軟熟爲尙, 頹靡成習, 一至於此。 朝廷之上, 亦頓無士氣, 積習轉痼, 因而大臣或有汚貪不道之事, 【指沈貞、金安老等也。】 莫能糾正, 及國事已誤, 而後始起而救之, 損傷國脈, 亦已多矣。 彼己卯之人, 其矯激過中之罪, 罪之或宜矣, 而其後得權之臣, 皆懷邪譎, 恐己卯之人復出, 則有妨於其事, 漸益錮禁, 公論尤爲不行, 使其無邪之本心, 至今未表于一世。 是以侍從、臺諫交章而不已也。 今若下敎, 以爲: ‘光祖等, 初以過激罪之, 然心實無邪, 故還給其爵牒。’ 云, 則庶乎有快於物情矣。" 上不答。
- 【태백산사고본】 52책 102권 68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7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註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