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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102권, 중종 39년 4월 18일 병술 1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계복을 청리하고 남쪽 지방의 왜변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다

계복(啓覆)을 청리하였다. 【부여(扶餘) 죄수 이우음동(李于音同)이 그의 외모(義母) 효양(孝養), 그의 아우 삼산(三山)과 공모하여 아비를 살해한 죄이다. 삼복(三覆)인데 율(律)대로 하게 하였다.】 영사(領事) 홍언필(洪彦弼)이 아뢰기를,

"남쪽 지방의 왜변(倭變)은 근래에 없던 일로 성이 포위까지 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입구(入寇)할 계획을 오래한 것입니다. 조방장(助防將)을 급작스럽게 보내어 인심을 동요시킬 것은 없지만, 각 포구(浦口)의 진장(鎭將)은 마땅히 따로 더 가려서 차임해야 하고야 서울에 있는 장사(將士)도 마땅히 미리 가려 두어 의외의 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또한 듣건대 왜인들이 자못 활쏘기에 익숙하다니, 신의 생각에는 이로부터 국가가 번번이 노략질을 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때 돌입하여 싸운 상황과 사상자의 숫자를 관찰사 및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로 하여금 자세하게 다시 계문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비록 경관(京官)을 보내더라도 첨사와 만호 및 군사들이 반드시 바른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고 한갓 소란하게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평한 지 오래여서 변방 일이 해이된 때에 왜인들이 성을 포위하였으니 우연한 노략질의 유가 아니다. 사세가 반드시 동쪽을 공격하다가 서쪽을 치게 될 것이어서 매우 우려스럽다. 또 이미 성을 포위하고 사로 싸웠다면 사상자가 반드시 많았을 터인데, 계본(啓本)에는 죽은 자가 한 사람이고 화살에 맞아 상처난 자가 8∼9 사람이라고만 했다.

남쪽 지방의 변장(邊將)들이 무릇 바다에서 고기잡고 해초(海草) 뜯다 파선(破船)한 일도 오히려 또한 숨기고 계문하지 않는데 하물며 이런 일에 있어서이겠는가? 내 생각에는 은닉한 폐단이 있었을 듯하기에 특별히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자세하게 추문하게 하고, 또한 나의 놀라와하는 뜻도 보이고자 한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정옥형(丁玉享)이 아뢰기를,

"성이 함락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신은 그들이 장차 다시 크게 출동하여 침구하려고 우선 먼저 경동(驚動)시켜 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쪽을 공격하다가 서쪽을 치는 것은 과연 성상께서 염려하신 것과 같으니 방비하는 제반 일을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倭)의 서계(書契)를 보건대, 불공(不恭)한 말이 많이 있었고 사신(使臣)의 말도 또한 공손하지 못했었으니, 점차 사단을 일으키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홍언필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그럴 리가 없지도 않습니다."

하고, 정옥형은 아뢰기를,

"근래 왜인들을 너무 후하게 접대하자 그들의 기세가 점점 교만해지므로 상하가 우려해 왔습니다. 종당에 어찌될는지 알 수 없었는데 과연 이런 변이 발생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번의 석류황(石硫黃) 일도 역시 서로 거슬리게 되었었다. 【안심 동당(安心東堂)이 자기 나라로 돌아간 뒤에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시켜 우리 나라에 "내가 올 적에 석류황을 제포(薺浦)에 놓아두고 돌아왔다."고 했었는데, 조정(朝廷)이 찾아보았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교린(交隣)의 일은 지나치게 후히 하는 것도 부당하지만 또한 너무 박하게 할 수도 없다. 대우를 중도(中道)에 맞게 한다면 자연히 변방의 염려가 없어질 것이다."

하였다. 지사(知事) 이기(李芑)가 아뢰기를,

"그전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의 사신 붕중(弸中)이 나왔을 적에 신이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있으면서 보니, 활 쏘는 것을 보고선 기뻐했고 방포(放砲)하는 것을 보고서는 두렵게 여겼었는데, 지금은 방포하는 것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활 쏘는 것을 보고서는 ‘우리 나라에도 이와 같은 것이 있지만 정밀하지 못할 뿐이다.’고 했습니다. 활쏘기 배운 일을 놓고 보면 조짐이 염려스럽습니다. 대저 옛 제작(制作)을 글 속에서만 보는 것은 눈으로 보고서 쉽게 익힐 수 있는 것만 못하기에, 신이 앞서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방포와 같은 군사 기밀의 은밀한 일은 보여주지 말기를 바랐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전에는 노략질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병력(兵力)이 우리보다 약했기 때문입니다.

앞서는 선위사(宣慰使)의 말이라 하더라도 또한 감히 어기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선위사의 말만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심상한 서계(書契)에도 또한 업신여기는 뜻이 많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도 반드시 믿을 만한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겠기에 매우 염려됩니다. 만일 후히 주는 것이 변방의 환란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옛부터 이웃 나라끼리 누가 서로 주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일 형세가 서로 대적할 만하면 마침내는 서로 삼키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니, 그들이 활쏘기를 점차로 익히어 형세가 서로 대적할 만하게 된 것을 보면, 어떻게 후환이 없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금(金)나라 사람들이 처음에는 활쏘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한 사람이 중국에 들어가 활쏘기를 배우고 갔는데, 드디어 중국의 근심거리가 되었었습니다. 지금 왜인들이 배를 타고 들락거리므로 장차는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니, 앞으로 남쪽 지방의 변이 마침내는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변방을 침범하였을 적에도 만일 잘 예방하고 있었다면 반드시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마는, 평소에 심상하게 왕래하는 왜선이 많았었기 때문에 바다에 떠 오는 배가 20여 척이나 되어도 경동(驚動)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방비가 엄격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수(烽燧)와 후망(候望)을 조심해서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데, 경오년에도 역시 그랬던 것이다."

하였다. 이기가 아뢰기를,

"남쪽 지방의 일을 신은 알지 못합니다마는, 북쪽 지방은 비록 갖가지로 엄중하게 신칙하여 심지어 기항(其項) 이상에 돈대(墩臺)는 쌓아놓고 오히려 봉수를 거행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낮에는 집에 있다가 저물어져서야 의례적으로 거행합니다. 하물며 남쪽 지방은 해이된 지 오래이니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경오년의 일도 이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고, 정옥형은 아뢰기를,

"봉수는 중요한 일로 진실로 군사의 작전에 관한 것인데, 요사이 사방을 후망하지는 않고 거화(擧火)만 하니 허위가 심합니다."

하고, 홍언필은 아뢰기를,

"따로 단속을 가해야 합니다. 지난번 상참(常參)에서 봉수의 일을 하지 않음을 어전(御前)에서 진달했었는데, 왜변의 발생이 바로 그날 있었습니다. 봉수의 일이 매우 허술합니다."

하고, 이기가 아뢰기를,

"이번에 군사를 출동하여 변방을 침범한 것은 공동(恐動)하려는 술책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병력(兵力)이 넉넉하므로 변방의 진(鎭)을 함락시키려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먼저 방비를 갖추어야 환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요사이의 장사(將士)들은 오히려 경오년만도 못하여 쓸만한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금군(禁軍)은 더러 활쏘기에 능한 사람이 있어도 당상(堂上)으로 있는 사람은 들어 볼 수가 없습니다. 위장(衛將)인 사람은 거지반 노쇠한 사람이니 갑자기 조석(朝夕)사이에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임권(任權)은 아뢰기를,

"일본(日本)에 살고 있는 왜인들은 말할 것이 없지만 대마도(對馬島)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데도 그들의 서계(書契)를 보면 거만한 말이 매우 많아 경멸하는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 얼마 전에는 준마(駿馬)를 요구하기까지 했었는데, 준마를 요청하는 짓은 예전에도 없던 일입니다. 또 ‘쌀이나 콩을 제급(題給)하는 것은 곧 보통 사람들을 대우하는 방법이니 세견선(歲遣船)154) 을 더 배정해주기 바란다.’는 등 교오(驕傲)한 말이 많았으니 딴 마음이 있어 그런 것인가 싶습니다.

지금 관(館)에 머물러 있는 소이전(小二殿)이 무역(貿易)하는 상품(商品)도 해조(該曹)가 이미 짐작해 놓았는데, 조그마한 단자(單子)에 써서 본조(本曹)에 진소(陳訴)하기를 ‘호초(胡椒)와 단목(丹木)을 용뇌(龍腦)의 예에 의하여 당초부터 그전의 값으로 마련해 놓았는데, 다시 헤아려보니 옛 값은 적고 새 값은 많다. 새 값으로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궤향(饋享) 때에 말하려던 것입니다.

또 지난번에 평성장(平盛長)이 잃어버린 짐바리에 든 은냥(銀兩)은 다소를 알 수 없는데, 수직(守直)은 사람들에게서 이미 면포(綿布) 50여 동(同)을 받아내고도 또 부족하다고 하면서 계속 더 받아내고 있습니다. 우리 백성을 침학하면서까지 반드시 수를 채워주려고 하니, 안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소원대로 일체 어기지 않고 다 해주고 있어 전연 주도권(主導權)이 없으니 매우 온편하지 못합니다."

하고, 이기가 아뢰기를,

"주도권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은 국가가 체면이 매우 가벼워지는 일입니다. 남쪽 지방의 쌀과 베가 모두 왜인들에게 돌아가버려 이 때문에 온 경상도가 장차 버린 땅이 되겠으니, 신은 그윽이 우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노들이 잃어버린 짐바리를 한결같이 그들의 말대로 함은 과연 뒤폐단이 있을 것이니, 이미 받은 것만 주도록 하라."

하였다. 홍언필이 아뢰기를,

"소추(小醜)들이 성(城)을 포위한 것 때문에 갑자기 거절하는 말을 하는 것은 마땅치 못합니다. 좀도둑 같은 짓은 큰 나라의 체면상 포용해야 하고, 우리의 변방 방비를 굳게 해야 할 뿐입니다."

하고, 정옥형은 아뢰기를,

"이번의 일은 일본 본토 왜인들의 소위가 아니고 반드시 대마도 왜인들의 소위일 것입니다."

하고, 이기는 아뢰기를,

"소위 국왕(國王)의 사신이라는 자나 대내전(大內殿)155) ·소이전(小二殿)의 사송(使送)인 왜인들은 모두가 대마도의 왜인일 것입니다. 군자(君子)는 그럴 듯한 방법에는 속는 법이니 그들에게 속은 것은 당연하나, 실지는 이러한 것입니다.

평소 포작선(鮑作船)156) 을 노략질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이번에 군사를 일으켜 성을 포위한 것은 도주(島主)가 모르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엄중한 말로 통유(通諭)하고 겸하여 침구한 왜인들을 잡아 보내도록 하여, 그들이 답변하는 말을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홍언필이 아뢰기를,

"변장(邊將)의 계본은 진실로 그대로 믿을 수가 없으니, 비록 경관(京官)을 보내 추문하더라도 또한 방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담당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기는 아뢰기를,

"이번의 작은 변으로 인하여 특별한 조치를 가한다면 국가의 복이 될 것이고, 변방에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반드시 배나 더하여 방비를 굳게 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진실로 큰일이니 마땅히 다시 의논하여 하겠다."

하였다. 이조 판서 신광한(申光漢)이 아뢰기를,

"요사이 왜변(倭變)이 잇따라 발생하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습니다. 전에 여기와서 노략질했을 적에는 【신축년에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송거(宋琚)가 해내(海內)의 섬들을 순찰하러 갔을 적에 유포(留浦) 왜인(倭人)들이 어두운 밤을 타 한 배 안의 사람을 모조리 죽였었는데, 조정이 대마도로 하여금 범죄한 왜인을 잡아 보내도록 하였다가 잡아 보내자 상으로 쌀과 콩을 주었었다.】 접대를 허락하지 않을까 하여 공순(恭順)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단지 ‘너희가 능히 그들의 괴수를 잡아왔으므로 접대를 허하는 것이다.’고만 했어야 하는데 쌀과 콩으로 상을 주어 그들의 오만한 마음을 열어주었으므로, 도리어 쌀이나 콩을 제급(題給)하는 것은 공로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라 하여 세견선(歲遣船)의 수를 더 배정해 주기를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이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곧 군사를 일으켜 성을 포위한 것으로, 공동(恐動)하려는 계략임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대저 당초 접대할 때에 그들의 뜻을 헤아려 보아 처리했어야 되는데, 그들의 요구대로 해주면 백년을 가도 일이 없게 될 것이라 여겨 모든 접대하는 일을 되도록 그들의 뜻에 맞추느라 자주 조정의 의논을 변경하면서까지 따라 주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겁내는 듯하게 되어 이와 같은 오만을 순치(馴致)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선위사(宣慰使)의 말조차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고 불공(不恭)한 짓을 하는 일이 많습니다.

비록 고기잡고 해초(海草) 뜯는 배 2∼3척에서 노략질해 갔더라도 놀랄 만한 일인데, 이번은 군사를 일으켜 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오만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겁을 준다면 두 번 다시 저지를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엄정(嚴正)하게 대비하면서 더욱 우리의 변방 방비를 굳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권벌(權橃)은 아뢰기를,

"비록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지만 또한 오만해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전에는 객사(客使)가 요구할 일이 있으면 모두를 선위사에게 청했었고, 비록 패만한 말을 하는 수가 있더라도 통사(通事)가 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제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이약해(李若海)가 선위사일 때에는 객사가 ‘만일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내년의 오늘이 되더라도 돌아갈 수 없다.’고 했으니, 그들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심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마땅히 방비(防備)를 해야 할 뿐인데, 요사이의 조정이 하는 일이 약점을 보이는 것인 듯하여 매우 온편치 못합니다.

장차 국가에 큰일이 있는데 6년을 잇따른 흉년 때문에 크게 걱정스럽습니다. 지난해에도 추곡(秋穀)이 성숙(成熟)할 가망이 있다가 마침내 폭우(暴雨)의 장마로 피해를 입어 민간이 극도로 곤궁한데, 상하(上下) 사람들이 신축년157) 에 경황없어 하던 것처럼하지 않고 모여서 술마시기를 그전처럼 하니, 신은 진실로 민망하게 여깁니다. 굶주리던 끝에 또 사변이 발생하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조처할 수 있겠습니까?

각 고을의 잔약과 피폐도 요사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김해(金海)·웅천(熊川)·동래(東萊) 등의 고을은 모두 연해변(沿海邊)의 중요한 진(鎭)인데 장차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김해와 같은 고을은 남쪽 지방의 큰 진이라서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게 된다면 장사(將士)들이 논병(論兵)158) 을 반드시 이 곳에서 하게 될 것인데 해마다 흉년이 들어 더없이 피폐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팔도(八道)의 각 고을의 잇따른 흉년에 시달려 잔약해지지 않은 데가 없는데, 올해는 또한 봄비가 잦기는 하였지만 나중에 어떨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조정에서는 잇따른 흉년에 젖어 심상하게 보고 있으니 자못 방심하는 듯합니다. 천운(天運)이 괴리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니 다시 더욱 반성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봄에 큰물에 지면 여름이 가무는 법이라 지금 봄비가 잦기는 하지만 나중을 보장할 수 없기에, 이미 각도(各道)로 하여금 비오는 때를 틈 타 제때에 곡식을 파종하도록 했거니와, 올해에도 또 흉년이 든다면 민생이 매우 염려스럽게 될 것이다."

하였다. 권벌이 아뢰기를,

"지난번 왜인들을 조심해서 공궤(供饋)하지 않은 것 때문에 수령들을 파직시켰었는데, 왜인들이 오갈 적에 더욱 공갈하므로 수령들이 거개 모두 두려워하고 겁내며 파직될까 싶어 극력 조처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폐단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하고, 지평(持平) 이언침(李彦忱)은 아뢰기를,

"시역(弑逆)의 변은 어느 시대라고 없겠습니까마는, 이번 이우음동(李于音同)의 한 집안은 삼강(三綱)의 도리가 여지없이 무너진 것으로 예전에도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풍속이 야박해지고 나빠지는 것을 분명하게 아무 일의 소치라고 지적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상께서는 다시 더욱 두렵게 여기시면서 ‘한 지아비라도 제곳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은 죄가 나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강상(綱常)의 변이 서로 잇따라 발생하기 때문에 상하가 심상하게 보면서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금 위에는 성명(聖明)하신 임금이 계시고 아래에는 삼공(三公)이 있는데 풍습을 고치고 세속을 혁신시키는 일을 누구에게 맡기고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풍속의 미악(美惡)은 치도(治道)의 오륭(汚隆)에 달려 있고 치도의 오륭은 사기(士氣)의 성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사기가 쇠미해진 지 이미 오래되어 경연(經筵)에서도 충성스러운 말과 정직한 논을 들어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지난번에 기묘년159) 사람들의 일을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이 서로 글을 올려 논계한 것은, 물론(物論)이 ‘조광조(趙光祖)가 잘못한 일이 어찌 헌장(憲章)을 변란(變亂)한 죄뿐이겠는가? 상께서 죄준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다만 본 마음은 간사한 것이 없었던 것인데, 같은 때에 죄를 입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미 조정으로 돌아왔지만 지하(地下)의 썩은 뼈는 유독 성상의 은덕을 입지 못하고 있으니 왕정(王政)에 있어서 어떻게 되겠는가.’고 여기고 있어서입니다. 직첩(職牒)을 추급(追給)하는 것이 이미 죽은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26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아직 그의 본심을 시원하게 씻어주지 못하고 있으므로 아랫사람들의 심정이 이를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실속이 점점 처음만 같지 않습니다. 무릇 경연에서 아뢰는 말도 허심 탄회하게 받아주시지 않고 모두 마지못해 들으시어, 마치 속으로는 편치 못한 뜻을 가지며 겉으로만 애써 따르는 듯하시니, 또한 간하는 말을 들어주고 거스르지 않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조광조의 일은 이미 물론을 들었다. 다만 한때에 괴수라 하여 죄를 준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미 주었지만 유독 조광조에게는 주지 않은 것이다. 조정의 공론이 이러하니 직첩을 주기가 어찌 어렵겠는가. 그러나 이미 빼앗고 나서 도로 준다면 시끄럽지 않겠는가? 강상에 관한 큰변이 생기는 것은 교화가 밝지 못한 소치일 것이니 상하가 다시 더욱 근심하고 유념해야 할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102권 62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6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외교-왜(倭) / 윤리(倫理) / 무역(貿易) / 사상-유학(儒學) / 농업-농작(農作)

  • [註 154]
    세견선(歲遣船) : 대마도에서 연례(年例)로 우리 나라에 보내오는 배. 대마도는 고려 때부터 우리 연해변(沿海邊)을 침략하는 왜구(倭寇)의 소굴이므로 세종 때에 정벌했었지만, 강경책으로는 후환을 근절할 수 없으므로 회유(懷柔)하기 위해, 배 60척을 삼포(三甫)에 보내와서 곡물을 받아가게 했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작란이 심해져 삼포 왜란·을묘왜변(乙卯倭變) 등을 일으켰으므로, 선척 수효와 왕래하는 포구를 제한했었다.
  • [註 155]
    대내전(大內殿) : 우리 나라에 사자(使者)를 보내오던 일본 호족(豪族)의 하나. 그의 가보(家譜)에 의하면 백제 성명왕(聖明王)의 셋째 아들 임성(林聖)이 일본으로 건너가 주방주 길부군 대내(周防州吉敷郡大內)에 살면서 대내씨(大內氏)가 되었다고 한다.
  • [註 156]
    포작선(鮑作船) : 국가의 각급 제사에 쓰는 어포(魚鮑)를 떠서 말리는 어선.
  • [註 157]
    신축년 : 1541 중종 36년.
  • [註 158]
    논병(論兵) : 작전.
  • [註 159]
    기묘년 : 1519 중종 14년.

○丙戌/聽啓覆。 【扶餘囚李亏音同, 與義母孝養、其弟三山同謀, 殺害其父罪。 三覆依律。】 領事洪彦弼曰: "南方變, 近來所無, 至於圍城, 是必入寇之計久矣。 助防將則不可遽送以動人心, 各浦鎭將, 所當另加擇差, 而在京將士亦宜預選, 以備不虞。 且聞倭人頗習弓箭云, 臣恐自此國家每被其寇抄也。 其時突入相戰節次及殺傷多寡, 令觀察使及兵、水使, 詳悉更啓爲當。 雖遣京官, 僉使、萬戶等及軍士, 必不直言, 徒爲騷擾而已。" 上曰: "昇平日久, 邊事解弛之時, 倭人至於圍城, 非偶然寇抄之比。 勢必衝東擊西, 至爲可憂。 且旣圍城相戰, 則其死傷必多, 而其啓本云, 死者一人, 逢箭而傷者八九人云。 南方邊將之事, 凡海採船致敗, 尙且匿不以聞, 況於此乎? 予意似有隱匿之弊, 故欲特遣敬差官, 詳悉推問, 且以示予驚愕之意。" 兵曹判書丁玉亨曰: "其不至陷城幸矣。 臣未知其更將大擧入寇, 而姑先驚動耶? 衝東擊西, 果如聖慮, 防備諸事, 不可不措置。" 上曰: "見書契, 多有不恭之言, 使臣之語, 亦不遜順, 無乃漸起釁端而然乎?" 彦弼曰: "上敎當矣。 不無其理。" 玉亨曰: "近來待太厚, 其勢漸驕, 上下憂念。 不知其終當如何也, 果有是變矣。" 上曰: "近者石硫黃之事, 亦爲相忤。【安心東堂入其國之後, 使對馬島主言于我國曰: "吾行, 棄置石(杻) 〔硫〕黃於薺浦而還。" 云, 朝廷索之, 竟無置處。】 交隣之事, 雖不當過厚, 亦不可太薄。 待之若得其中, 則自無邊患矣。" 知事李芑曰: "昔者國王使臣弸中之出來時, 臣爲軍器僉正見之, 視射弓則喜焉, 觀放砲則懼焉。 今則見放砲而不懼, 見射弓則曰: ‘我國亦有如此之事, 但不精耳。’ 云, 以學射之事見之, 其漸可慮。 大抵觀古制於文字之間, 不若目見之易習, 故臣前爲兵曹判書時, 以爲放砲軍機隱事, 願勿許見者, 以此也。 古之所以不爲寇盜者, 以其兵力, 弱於我也。 雖宣慰使之言, 亦不敢違越, 今則非徒不從宣慰使之言, 尋常書契, 亦多凌轢之意, 其材必有可恃故然也, 至爲可慮。 若以厚賂爲不生邊患, 則自古隣國, 誰不相賂? 勢若相敵, 則終不能不相呑噬。 觀其漸習弓箭, 勢若相敵, 則安保其無後患耶? 昔者金人, 初不知射事, 一人入中原, 學射而去, 遂爲中國之患。 今倭人乘船出入, 將無不學, 則他日南方之變, 終至於不測也。 頃者犯邊之時, 若能預防, 則必未能入, 而船尋常往來者多, 故浮海而來者, 至於二十餘艘, 不爲驚動, 此防備不嚴之致也。" 上曰: "烽燧、候望之事, 不謹故如此, 而庚午年亦然矣。" 曰: "南方之事, 臣所不知, 北方則雖百端嚴勑, 至封其項以上墩臺, 而尙不擧行, 晝常在家, 至暮而例擧矣。 況南方解弛日久, 無足怪者。 庚午之事, 亦無異於此也。" 玉亨曰: "烽燧重事, 實關軍政, 而近來不爲通望而擧, 其爲虛僞甚矣。" 彦弼曰: "另加檢擧爲當。 頃於常參, 進告烽燧無事於御前, 而變之作, 乃在其日, 烽燧之事, 至爲虛疎。" 曰: "今此擧軍犯邊之事, 出於恐動之謀耶? 抑兵力有餘, 欲陷邊鎭耶? 雖未可知, 在我當先有備, 乃克無患。 近來將士等, 猶不及於庚午年, 頓無可用之人, 禁軍則雖或有能射者, 而在堂上則無聞焉。 爲衛將者, 老衰居半, 卒有警急, 起於朝夕, 則不知何以應之也。 此深可慮者也。" 禮曹判書任權曰: "倭人之居日本者則已, 如對馬島, 則資我國以生, 而觀其書契, 甚多倨傲之辭, 似有輕蔑之心。 近者, 至求駿馬, 駿馬之請, 自古所無。 又以爲, 題給米、太, 乃待常人之道, 請加定歲遣船云, 語多驕傲, 恐有異心而然也。 今留館小二殿貿易商物, 該曹已爲斟酌, 而書小單子, 陳訴於本曹曰: ‘胡椒、丹木, 依龍腦例, 初以古價磨鍊。 更計之, 舊價小, 而新價多, 請更以新價爲之。’ 云。 此則欲於饋享言之矣。 且前者平盛長所失卜駄之銀兩, 多少未可知, 守直人處, 已徵綿布五十餘同, 又以不足, 加徵不已。 侵虐我民, 必欲充數以給, 無乃不可乎? 從其所願, 一切不違, 專無操縱之權, 至爲未便。" 曰: "操縱在彼, 國體至輕。 南方米、布盡歸於, 以此慶尙一道, 將爲棄地, 臣竊憂之。" 上曰: "倭奴所失卜駄, 一從其言, 果有後弊, 只以已徵之類給之可也。" 彦弼曰: "以小醜圍城之故, 遽發謝絶之言爲未當。 鼠竊狗偸之事, 大國之體, 在所包容, 固我邊備而已。" 玉亨曰: "此非深處倭人所爲, 必對馬之所爲也。" 曰: "凡所爲國王使臣、大內小二使送諸, 皆對馬。 君子可欺以其方, 當受其欺矣, 其實則如此也。 常時抄竊鮑作之船則已矣, 今至於起軍圍城, 島主不可不知, 當嚴辭通諭, 兼令拿送犯, 以觀其答辭何如?" 彦弼曰: "邊將之事, 固不可盡信, 雖遣京官推問, 亦無妨。 但不見可以擔當者矣。" 曰: "因此小變, 別爲措置, 則國家之福也。 邊方恐懼之心必自倍, 而防備可得而固也。" 上曰: "此實大事, 當更議爲之。" 吏曹判書申光漢曰: "近者變連發, 必有其源。 前者來此作賊, 【辛丑年, 永登浦萬戶宋琚巡審海島時, 留浦倭人, 乘夜暗, 盡殺一船之人, 朝廷令對馬島捉送犯倭, 而捉送, 故賞賜米太。】 恐不許待, 致其恭順。 其時但曰: ‘爾能捉其渠魁, 故許待。’ 云可也。 至賞米、太, 以開驕心, 反以爲題給米、太, 非待功之道, 請加定歲遣船數, 而朝廷不從, 則便卽起軍圍城, 其恐動之謀, 卽此可知。 大抵當初接待之時, 量意處之當矣, 謂之任其所求, 則可以百年無事, 凡所接待, 務極稱意, 屢變廷論以從之, 似若畏刼, 馴致驕敖如此。 至於宣慰使之言, 略不聽從, 多爲不恭。 雖掠海採二三艘而去, 足爲駭愕, 今至於起軍圍城, 其驕可知。 若示畏刼, 則將無復可爲, 待之宜以嚴正, 益固我邊備爲當。" 左參贊權橃曰: "雖不可輕敵, 亦不可使驕敖。 古者, 客使凡有所求, 皆乞於宣慰使, 雖有悖慢之言, 通事以爲不可傳而止之。 頃者, 李若海之爲宣慰使也, 客使言曰: ‘若不從吾言, 則雖來年今日, 不可還去。’ 其〔侮〕 我國之心甚矣。 在我但當防備而已, 近來朝廷之事, 似爲示弱, 深爲未便。 且今國家有大事, 大可懼者, 六年連凶。 前年似有秋成之望, 竟爲暴霖所害, 民間極苦, 而上下之念, 不如辛丑年之遑遑, 會飮如舊, 臣實悶之。 飢饉之餘, 復有事變, 則將何以措之? 各官殘弊, 比來尤劇。 金海熊川東萊等邑, 皆沿海重鎭, 將不可支矣。 至如金海, 南方巨鎭, 脫有警急, 則將士論兵, 必於此地, 連歲凶荒, 十分困弊。 不徒此也。 八道各官困於連歉, 無不彫瘁, 今又春雨雖頻, 未知厥終何如也。 朝廷狃於連歉, 視爲尋常, 頗似放心。 天運乖戾, 甚爲可懼, 更加省念。" 上曰: "春澇則夏旱, 今春雨澤雖數, 難保厥終, 已令各道, 乘其雨水, 趁時播穀矣。 今年又歉, 則民生極爲可慮。" 曰: "頃者, 以倭人不謹供饋之故, 至罷守令, 倭人往來, 尤爲恐嚇, 守令等率皆畏刼, 怵於罷遞, 盡力措辦, 弊將何極?" 持平李彦忱曰: "弑逆之變, 何代無之? 但此李于音同, 一家之內, 三綱之道, 淪滅無餘, 自古所未曾有。 風俗之薄惡, 不敢的指爲某事之致。 然自上更加惕然, 以爲 ‘一夫之不獲, 罪在厥躬’ 則爲當。 綱常之變, 相繼而出, 故上下以爲尋常, 不以爲怪。 今者上有明主, 下有三公, 移風易俗, 任之于誰而不爲加念乎? 風俗之美惡, 由於治道之汚隆; 治道之汚隆, 由於士氣之盛衰。 近來, 士氣衰微已久, 至於經幄之間, 亦不聞忠言讜論, 可爲寒心。 頃者己卯人之事, 侍從、臺諫交章論啓者, 物議以爲, 趙光祖誤爲之事何限? 其變亂之罪, 自上罪之固當矣。 第以心本無邪, 而一時被罪之人, 皆已還朝, 地下朽骨, 獨不霑聖恩, 其於王政何如? 追給職牒, 何關於已死之人? 至于今二十六年之久, 而尙未昭雪其本心, 下民之情, 以是疑焉。 近來納諫之實, 漸不如初。 凡於經幄所啓之言, 不爲虛心聽納, 而皆出勉强, 若內懷未便之意, 而外則勉從者, 亦異於從諫弗咈之道矣。" 上曰: "趙光祖事, 已聞其物情矣。 但一時以爲魁首而罪之, 與他人有間, 故他人則已給之, 而獨不給光祖也。 朝論如此, 給職何難? 第已奪而還給, 則無乃騷擾乎? 綱常大變之出, 職是敎化不明之致, 上下更加憂念可也。"


  • 【태백산사고본】 52책 102권 62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6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외교-왜(倭) / 윤리(倫理) / 무역(貿易) / 사상-유학(儒學) / 농업-농작(農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