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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02권, 중종 39년 4월 17일 을유 2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이조가 전 전라도 관찰사가 계문한 효행자들의 상직 문제를 아뢰다

이조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송인수(宋麟壽).】 가 계문(啓聞)한 효행이 특이한 사람들을 직(職)으로 상을 주라고 명하셨는데, 생원이나 진사인 사람은 자급(資級)이 상당한 직에 서용할 수 있습니다마는, 유학인 사람은 음취재(蔭取才)149) 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 중에 삼관(三館)150) 에 있는 사람 【박한충(朴漢忠).】 만은 차례대로 예천(例遷)151) 하게 되어 있으니, 상직(賞職)은 어떻게 해야 할지 취품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는 곧 권장하느라 하는 일이니 상례에 구애될 것 없다. 음취재의 유무와 예천 같은 것은 모두 헤아릴 것 없다. 해조(該曹)가 살펴서 하라."

【계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주(全州)에 사는 유학(幼學) 유승적(柳承績)은 효성을 타고났다. 3세에 자모(慈母)가 세상을 떠났었는데 5세에야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고서 애통해 하며 끊임없이 사모하였었다. 장성해서 항시 그제라도 복을 입으려고 했는데 풍병이 들어 여러해가 되도록 낫지 않았다. 나이 50이 되자 여년(餘年)이 짧아 당초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신축년에 이르자 어머니의 묘소에다 여막(廬幕)을 치고 제복(祭服)을 갖추고서 아침 저녁으로 한결같이 초상 때처럼 곡읍(哭泣)하고 3년 동안 죽을 먹었으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복을 벗자 부모의 화상을 그려놓고 더욱 근신스럽게 제사하여 종신토록 하려고 기약했었다. 지난 연산(燕山)조(朝)에 김 숙원(金淑媛)의 아비 생불(生佛)이 세력을 믿고서 아버지의 전답과 노비를 빼앗으려 하여 결박해 놓고 난타하여 장차 죽게 되었는데, 승적이 몸을 솟구쳐 상대를 치고서 탈출시켰었다. 이런 효행(孝行)은 고금에 드문 것이다. 유학 최응사(崔應泗)는 전주 사람인데 천품이 온화하고 순탄하여 누구와도 다투는 일이 없고, 효심(孝心)이 순수하고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똥을 맛보며 울부짖었었는데 병이 드디어 나았다. 어머니가 죽자 자기가 친히 염습(斂襲)하여 모든 것을 한결같이 예법대로 하였고, 친히 제물을 마련하여 아침 저녁으로 영위(靈位)에 곡을 했었다. 여막이 집과의 거리가 겨우 1리였는데도 3년을 죽만 먹으면서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늙은 아버지를 기쁜 안색(顔色)으로 봉양하여 곁에서 모시며 정성(定省)152) 하고 처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자 애통하는 마음이 더욱 돈독하여 한결같이 어머니 상사 때처럼 하였고, 전후 6년간 여묘살면서도 한 번도 여막 밖으로 나가지 않았었는데, 비난하는 말이 전혀 없었다. 유학 김익한(金翼漢)은 역시 전주 사람이다.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고 몸가짐이 단아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성인(成人)처럼 애통해 하였고, 어머니를 섬김에는 안색과 뜻을 살피어 맞추었으며, 자기 집에 대한 정부(征賦)를 서둘러서 처리하여 어머니가 모르게 했다. 어머니가 풍병을 얻어 오래 병상(病床)에 있었는데 약 시중을 조금도 게으름없이 하고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기거(起居)할 때 반드시 친히 부축하였으며, 병이 위독하게 되자 똥을 맛보아 위태하게 된 것을 알고서는 눈을 맞으며 목욕하고 울부짖으면서 기도하니, 병세가 또한 조금 뜸했었다. 어머니가 죽어서는 죽만 먹으며 거상(居喪)했는데 본디 병이 많은 사람이라 너무나 쇠약하므로 친척들이 물러가 보호하기를 권했지만 또한 듣지 않았었다. 모든 상사 일에 힘을 다해 성심으로 마련했고 장사지내고 난 뒤에도 처자가 의탁할 데가 없어 추위와 굶주림으로 절박한 지경에 빠졌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상(大祥)을 치른 뒤에는 신주를 종가(宗家)로 보내고 별도로 지방(紙榜)을 만들어놓고 아침 저녁 상식(上食)을 올리며 한결같이 거상할 때처럼 슬퍼했다. 그 아버지가 가난하다고 종가의 텃밭을 아들에게 나누어 주자, 김익한이 동복(同腹) 형제들에게 말하여 모두 장손(長孫)에게 주고, 또한 따로 받은 밭을 내어 형들에게 주었으며, 봉사(奉祀)하는 종들이 모두 죽자 건장한 종으로 채워주고 자신은 노약자만 차지하였다. 참으로 독실한 효성과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 난 것이었다. 나주(羅州)에 사는 생원(生員) 정문손(鄭文孫)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를 섬김에 뜻을 살피어 순종하여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의 나이가 90여 세에 항시 누워있고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친히 변기(便器)를 처리하고 종을 시키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돌아간 뒤에는 정문손의 나이 70이 넘었으면서도 아침 저녁의 상식을 몸소 거행하기를 게으름없이 하고 쇠약해지고 병들이었을 때도 일찍이 자제들에게 시키지 않았고, 여묘사는 3년 동안에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유학 곽거인(郭居仁)고부(古阜)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여섯 차례나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 정성과 공경이 극진하였고 부모의 상사를 만나서는 6년을 여묘살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복을 벗은 뒤에는 삭망(朔望)이면 반드시 제사하였고 새로 난 것을 구득하면 반드시 올렸었다. 형과 아우과 모두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예사로이 슬퍼하지 않았고 상장(喪葬)의 모든 일을 한결같이 부모의 상장 때처럼 했으며, 사당(祠堂)에 부제(祔祭)하였다. 아우 거의(居義)의 아내 조씨(曺氏)가 미처 집이 없었는데 울안에 따로 집 한 채를 지어주고 보호하여 매우 독실하게 돌보았으므로 조씨가 은혜에 감동하여 그의 아들을 양육하여 가업(家業)을 전해주려고 했지만 곽거인이 허락하지 않고서 그의 매부(妹夫) 송충량(宋忠良)의 딸을 양육하기 권하였고, 조씨가 또 밭과 종을 나누어 곽거인의 아들에게 주려고 해도 곽거인이 굳이 사양했었다. 흉년을 만나서는 이웃 사람들을 구제하여 돌보기를 자기 가족처럼 하고, 전답이 없는 곤궁한 족속이 있으면 자기 밭을 빌려주고서 오래도록 찾지 않았었다. 생원(生員) 나응허(羅應虛)김제(金堤) 사람이다. 성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평소에 효도와 우애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어버이를 섬김에는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아우 3명이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했으며, 아버지 상사를 만나자 아우 3명과 함께 여묘사는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또 어머니의 상을 만나자 여묘살았다. 여묘살 적에 어린 아들이 병으로 장차 죽게 되어 아버지가 보고 싶어 매우 애처롭게 불렀었지만 그래도 가보지 않았고, 전후의 초상과 장사를 한결같이 예법대로 준행했었다. 그의 아버지 안세(安世) 및 조부 보중(甫重)이 대대로 효도와 우애하는 가법(家法)을 전해 왔었는데, 나응허 때에 와서는 더욱 독실하므로 온 고을 안이 효우 세가(孝友世家)라고 했었다. 진사(進士) 구두남(具斗南)능성(綾城) 사람인데, 아버지가 죽은 이튿날 태어났다. 장성하자 애통과 사모가 더욱 극진하여 매양 기신(忌辰)을 만나면 10일 전부터 목욕 재계하였으며, 어머니 오씨(吳氏)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뜻과 안색을 살피어 봉양했었다. 손위 누이 둘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이미 노쇠하여 재산과 전답을 분배할 적에 구두남을 치우치게 사랑하여 더 많이 주려고 했지만 구두남이 굳이 사양하며 자기 몫의 전답을 나누어 누이들의 생업(生業)을 돕게 하였고, 두 누이들이 먼저 죽자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여 두 생질을 한결같이 자기 자식처럼 교회(敎誨)했다. 어머니의 상사를 만나서는 애통해 하다 뼈만 남았고 초상 장사를 예문대로 하였으며, 여묘사는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복을 벗자 신주(神主) 받들기를 생존한 이 섬기듯 하여 나아갈 적에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뵈었으며, 모든 제사 때면 기일 전부터 목욕 제계하기를 오래갈수록 더욱 삼가서 했다. 또 수업(受業)하던 스승을 위하여 그의 기일(忌日)에 반드시 제사하였고, 관아(官衙)의 문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기를 비록 눈이 내리는 어두운 밤이라도 더욱 경건하게 하고 변하지 않으므로, 향리(鄕里) 사람들이 모두 칭찬했다. 전 군기시 봉사(軍器寺奉事) 박한충(朴漢忠)진원(珍原)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박씨(朴氏)가 몹쓸 병을 얻어 온갖 약이 효과가 없자 오른손 네째 손가락을 끊어 술에 타 드렸는데,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진사 정언충(鄭彦忠)태인(泰仁) 사람인데, 성질이 본디 순진하고 효성스러우며 행신이 소탈하고 말이 적고 학술(學術)에 밝았다. 아버지의 상중에 있을 때 아버지의 묘소에 갈 적이면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았고, 어머니의 상사를 만나면서는 삼년을 여묘살며 아침 저녁으로 곡하고 전(奠)할 때 제물을 친히 보살폈고, 집이 가난하여 처자가 굶주렸지만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장구(葬具)와 석물(石物)도 극력 실정에 맞게 하되 모두 혼자 마련하고 동복(同腹)들의 힘을 빌지 않았었는데, 온 고을이 흠모했었다. 전 훈도(訓導) 김칭(金稱)금산(錦山) 사람이다. 부모가 생존했을 때는 마음을 다해 효성으로 봉양했다. 나이 20때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똥을 맛보았고 죽고 나서는 염습(斂襲)과 빈소(殯所)와 제사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하였으며, 삼년을 여묘살며 죽만 먹었다. 아버지의 상사를 만나서는 나이가 60이 다 되었는데도 친히 밥을 지어 먹었고, 치상하는 모든 일을 한결같이 어머니의 상사 때처럼 하였으며, 옷을 풀지 않고서 자고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복을 벗은 지가 지금 9년인데도 삭망(朔望) 때의 제사를 한결같이 거상할 때처럼 했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102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9면
  •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 [註 149]
    음취재(蔭取才) : 음관 취재(蔭官取才)의 약어. 곧 부조(父祖)의 공로에 의해 벼슬한 사람들을 시험보이는 것.
  • [註 150]
    삼관(三館) : 성균관·교서관·승문원.
  • [註 151]
    예천(例遷) : 준례대로 전임시킴.
  • [註 152]
    정성(定省) : 혼정 신성(昏定晨省)의 약어. 곧 밤이면 잠자리를 보아 편히 잘 수 있게 하고 새벽이면 편히 잤는지를 살펴보고 묻는 것.

○吏曹啓曰: "前者, 全羅道觀察使 【宋麟壽。】 啓聞孝行卓異之人。【全州居幼學柳承績, 孝誠出天。 三歲慈母棄世, 行年五歲, 始知母死, 哀慕不已。 及長, 常欲追喪, 風疾纏綿, 歲久未差。 年及五旬, 恐其餘年日短, 未遂初志。 歲在辛丑, 結廬母墳, 備祭服, 哭泣朝夕, 一如初喪, 啜粥三年, 一不到家。 喪畢, 圖父母形像, 益謹祭祀, 期以終身。 往在燕山朝, 金淑媛父生佛恃勢, 欲奪其父田民, 繫縛亂打將死, 承績挺身手歐得脫。 其孝行, 罕出古今。 幼學崔應泗居全州, 天質和順, 與物無競, 孝心純至, 事親無違。 其母病劇, 嘗糞號泣, 疾遂愈。 母死, 親自歛襲, 凡事一遵禮制, 親執祭物, 朝夕哭位。 其廬幕距家纔一里, 而三年啜粥, 一不到家。 色養老父, 定省侍側, 不顧妻子。 父歿, 哀傷愈篤, 一如前喪, 前後居廬六年, 一不出廬外, 人無間言。 幼學金翼漢, 亦全州人。 性行純粹, 持己端雅。 少時其父亡, 哀傷如成人, 事母, 承顔順旨, 一家征賦, 奔走處置, 不使母知之。 母得風疾, 長在床褥, 湯藥無少懈, 坐臥起居, 必親挾持, 及病劇, 嘗糞知其必危, 冒雪沐浴, 號泣祈禱, 病亦少間。 及歿, 啜粥居廬, 素多疾病, 羸弱增劇, 親戚勸之退保, 亦不聽, 凡喪事, 竭力誠備, 旣葬之後, 猶不食鹽醬。 家業伶(行) 〔仃〕, 奴僕盡逃, 妻子無托, 凍餒切身, 亦不還家。 大祥之後, 返主宗家, 別爲紙疊, 朝夕哀奠, 一如居廬時。 其父嘗貧, 分割宗家基田, 以給諸子, 翼漢告于同腹, 盡給長孫, 又出別得之田, 以給諸兄, 其奉祀奴婢皆死, 以壯奴充給, 自占老弱。 孝悌友愛之篤, 出於天性。 羅州居生員鄭文孫, 父早沒, 事母順旨, 未有少違。 母年九十餘歲, 常臥不起, 親奉溷器, 不使侍婢。 及沒, 文孫年過七十, 朝夕之奠, 躬行不怠, 雖衰病, 未嘗以子弟代焉, 居廬三年, 一不到家。 幼學郭居仁, 居古阜。 自少志學, 六擧不中。 事親極盡其誠敬, 及遭父母喪, 居廬六年, 一不到家。 終制後, 朔望必祭, 得新物必薦。 兄弟皆無子而死, 哀毁異常, 凡喪葬, 一如考妣, 袝于祠堂。 弟居儀曺氏無家, 別構一舍於墻內, 護恤甚篤, 曺氏感恩, 欲養其子傳家業, 居仁不許, 勸養其妹夫宋忠良女, 曺氏又欲分其田民, 與居仁之子, 居仁固辭。 遭年凶, 賑恤隣人如己家, 有窮族無田地, 借與己田, 久而不推。 生員羅應虛, 金堤人。 性剛直好學, 平生以孝友爲己任, 事親無所不至。 有弟三人, 友愛甚篤, 遭父喪, 與弟三人, 廬墓三年, 一不到家。 又丁(外)〔內〕 艱居廬, 有少子病將死, 欲見呼父甚哀, 猶不往見, 前後喪葬, 一遵禮制。 其父安世及祖甫重, 世以孝友傳家, 至應虛愈篤, 鄕中稱孝友世家。 進士具斗南, 綾城人。 父死翼日乃生, 及長, 哀慕愈極, 每遇忌辰, 前期十日, 沐浴齋戒, 事母吳氏至孝, 承順色養。 有二姊, 母旣老病, 當分財田, 鍾愛斗南, 欲優給, (十南)〔斗南〕 固辭, 割己田, 許姊資業。 二姊先沒, 哀傷如喪親, 敎誨二甥, 一如己子。 及丁母憂, 哀毁骨立, 葬祭如禮, 廬墓三年, (三)〔一〕 不到家。 服闋, 奉神主如事生, 出必告, 反必面。 凡祭, 前期齋沐, 愈久愈謹。 且爲受業師, 忌日必祭, 過官門必下馬, 雖雨雪昏夜, 益虔不變, 鄕里咸稱。 前軍器寺奉事朴漢忠, 珍原人。 其母朴氏得惡疾, 百藥無效, 自斷右手第四指, 和酒以進, 母病乃瘳。 進士鄭彦忠, 泰仁人。 性本純孝, 行己簡默, 明於學術。 丁外憂, 省(父)〔墓〕 時, 過家不入, 及丁內艱, 廬墓三年, 朝夕哭奠, 躬執祭物。 家貧, 妻子餒飢, 小無動念。 葬具石物, 極稱其情, 皆獨辦, 不賴同腹, 一鄕欽(墓)〔慕〕 。 前訓導金稱, 錦山人。 父母生時, 盡心孝養。 年二十, 母病嘗糞, 旣沒, 斂殯祭祀, 一從《家禮》, 廬墓三年, 啜粥。 及父喪, 年將六十, 親自炊爨, 凡治喪, 一如母喪, 寢不解衣, 一不到家。 服闋, 于今九年, 朔望祭祀, 一如居喪之時。】 命賞以職, 如生員、進士之人, 則可敍用於資(汲)〔級〕 相當之職矣; 幼學, 則不爲蔭取才者多, 而其在三館者, 【朴漢忠】 當以次例遷爲賞職, 何以爲之? 取稟。" 傳曰: "此乃勸奬之事, 不必拘於常例也。 蔭取才有無及例遷, 皆不可計也。 該曹察而爲之。"


  • 【태백산사고본】 52책 102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9면
  •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