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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02권, 중종 39년 3월 17일 을묘 4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풍가이의 죄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아침에 금부의 당직(當直)에게 명을 기다리게 한 것은, 만일 풍가이(豊加伊)를 무거운 죄로 논할 경우 내가 사형을 감하도록 명할 적에는, 마땅히 즉각 처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무겁지 않은 율(律)로 【장 일백(杖一百) 유 삼천리(流三千里)인데, 여인은 유형(流刑)의 경우 속바친다.】 논단했으므로 아뢴 대로 윤허한다."

사신은 논한다. 풍가이는 졸(卒)한 효정 옹주(孝靜翁主)의 여종이다. 옹주가 평소에 애호했기 때문에 부마(駙馬)에게 첩을 삼도록 하였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었다. 계묘년094) 에 죄를 받아 함흥(咸興)으로 귀양갔을 때에 옹주가 두 차례나 대궐에 나아가 죄가 없음을 진달(陳達)했었는데, 상이 ‘부녀자로서 질투가 없는 것은 진정이 아니다.’고 하며 합문(閤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물러나왔다고 했다. 풍가이는 국문을 당하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한마디도 착란한 말이 없었다. 시종과 간관이 논계하고 차자를 올린 뒤에 옥관(獄官)이 ‘조정이 너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이렇게 하니 상께서도 물론을 알고 계실 것이다. 네가 비록 자복하더라도 반드시 참작해서 조처할 것인데 어찌 딱하게도 이처럼 형벌을 받는가?’ 하니, 대답이 ‘조정에서는 비록 그렇게 하여도 상께서 노여움을 풀지 않으시는데, 어찌 감히 자복하겠는가. 또한 비자(婢子)로서 상전을 능멸했다는 이름을 얻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했었다. 풍가이는 글을 조금 알았다. 그의 손가락이 끊어졌기에 물어보니 ‘어머니가 아플 때 끓여서 약에 타서 먹였다.’고 했었다. 아아, 어찌 자기 어버이에게 효도한 사람이 자기 상전에게 그처럼 불공(不恭)하였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52책 102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5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사법(司法) / 인물(人物) / 신분-천인(賤人) / 윤리(倫理) / 역사-편사(編史)

○傳于政院曰: "朝使禁府當直待命者, 以豐加若論以重罪, 而予命減死, 則當卽有處置故然也。 今以不重之律 【杖一百, 流三千里, 流則女人贖。】 論斷, 故依允。"

【史臣曰: "豐加者, 卒孝靜翁主之婢也。 翁主常愛之, 故許令駙馬作妾, 而未嘗有妬忌之念。 在癸卯年, 受罪謫咸興時, 翁主嘗再詣闕, 以陳無罪, 上以爲婦人而無妬忌, 非情也, 使不得入閤門之內, 故退去云。 豐加當鞫, 顔色不亂, 無一語錯亂。 及侍從、諫官論箚之後, 獄官語曰: ‘朝廷之救汝如此, 自上亦知物論。 爾雖承服, 必有斟酌, 何苦受刑若此?’ 對曰: ‘朝廷雖如此, 上怒未解, 何敢承服? 且以婢子, 得凌轢其主之名, 不如死矣。’ 豐加稍解文。 且斷手指, 問之, 則因母病, 斷以和藥云。 嗚呼! 豈有孝於其親, 而不恭於其主至是哉?"】


  • 【태백산사고본】 52책 102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5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사법(司法) / 인물(人物) / 신분-천인(賤人) / 윤리(倫理)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