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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 5월 4일 정미 2번째기사 1543년 명 가정(嘉靖) 22년

유진동의 패륜 사건에 대해 인륜이 바로 잡히도록 교화에 힘쓰라는 상소문

홍문관 부제학 유진동(柳辰仝) 등이 상소를 올렸다.

"성인은 인륜의 지극함입니다. 대저 사람에게 큰 윤리가 다섯이 있는데 오직 성인만이 제대로 다할 수 있기에 만민의 위에 임금이 스승이 되어 천하 강상의 중임을 맡아 표준을 바로잡아 아래를 통솔합니다. 그러므로 아비와 자식으로 말한다면 그 효성을 지극히 하여 천하의 아비와 자식의 분한이 여기에서 결정되게 하고 남편과 아내로 말한다면 그 분별을 지극히 하여 천하의 남편과 아내의 분한이 여기에서 결정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특히 그 천성이 고유한 바로 그만둘 수 없는 양지(良知)를 인하여 새롭게 정하였을 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교화를 밝히면 풍속이 아름다와져 인륜이 더욱 두터워지고 이것을 가지고 선비의 습성을 바로 잡는다면 기절(氣節)이 확립되어 인륜이 더욱 돈후하여지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요(堯)·순(舜)의 도는 넓고 넓어 제대로 이름할 수 없지마는 그 근본을 찾아본다면 효제(孝悌)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록 사나운 사람이라도 자식을 보면 어여삐 여기고 심지어 강보에 쌓인 어린 아이까지도 아비를 보면 우니, 이것이 사람의 참 인정이고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욕에 구애되고 이해에 가려져서 그 은의(恩義)를 해치게 되는 경우가 혹 있는 것이지 어찌 천륜을 없애고 인리(人理)를 끊어 금수와 다를 바가 없게 되어 끝내 구원하지 못하는 데야 이르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이변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아비를 살해하였다는 옛말은 들었으나 그런 사람은 보지 못하였고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였다는 옛말은 들었어도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찌 천고 이륜(彝倫)의 큰 변이 일시에 전하의 백성들에게서 아울러 발생할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사람의 마음과 하늘의 이치가 여기에 이르러 남김없이 모두 끊어졌으니 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우리가 먹을 수 있겠습니까? 생명이 있는 이는 누가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살펴 보건대 전하께서 임어하신 지 40년이 되어 갑니다. 인도(人道)의 기강을 잡고 인간 표준을 건립하는 데에 그 지극함을 사용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교화가 백성에게 미쳐 당연히 효자가 끊이질 않고 여인이 정숙한 현상을 보일 것인데 도리어 악역의 무리가 서로 이어 나오니 백성의 도덕은 어디에 있고 사물의 원칙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신들은 삼가 의혹됩니다. 황천(皇天)이 강충(降衷)하신 이치가 균등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까. 아니면 전하의, 인륜을 후하게 하는 교화가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까. 《역경》에 ‘나의 생활을 관찰함은 백성에게서 관찰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백성 풍속의 아름다움과 악함을 관찰하여 내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여기에서 어찌 맹성(猛省)하여 인심과 세도(世道)를 위하여 한 차례 개탄을 발하지 않습니까. 대벽(大辟)082) 을 실시하여 왕법(王法)을 밝히고 심지어는 그 집을 무너뜨리고 그 집터에 못을 만들기까지 하였으니 귀신과 사람의 공노(共怒)를 통쾌하게 하기에, 왕화(王化)의 큰 수치를 씻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우(大禹)에게 보게 한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일입니다. 또한 당(唐)·우(虞)083) 의 조정에서도 이러한 변이 있었는지 어떤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이란 풍화(風化)의 주인이니 주인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어떻게 가정을 바로잡을 것이며, 가정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국가를 어떻게 바로잡겠습니까? 이래서 《대학(大學)》전(傳)에 ‘한 집안이 인(仁)하면 한 나라가 인에 흥기된다.’고 하였으니, 무릇 인이란 것은 모든 선(善)의 으뜸입니다. 본성으로 보아 당연한 것과 직분상 당연히 하여야 할 것이 모두 이 인에서 발생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곧 유약(有若)084) 이 이른바, 효제(孝悌)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맹자(孟子)가, 임금이 인하면 누구도 인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을 교육하지 못하고 제대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이가 있겠습니까? 윗사람이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면 백성이 효도에 흥기된다고 한 것이 바로 증자(曾子)가 이른바, 가정을 가지런히 하고 국가를 다스린다는 대지(大旨)입니다. 그리고 그 강령(綱領)은 진실로 명명덕(明明德)·신민(新民)·지지선(止至善), 이 세 가지에 있으니, 전하께서 한 나라의 효도를 흥기시키고자 한다면 이 세 가지를 버리고 다시 무엇으로 말미암겠습니까? 여기서 《대학(大學)》 이란 《소학(小學)》의 성공을 거두는 것이고 진실로 천하를 평치하는 율령(律令)이며 격례(格例)인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대학》도 본디 한걸음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학문하는 공부의 차례를 반드시 무시하거나 빠뜨리거나 하지 못할 점이 있는데 오늘날 건의하는 이들은 유독 《이륜행실(二倫行實)》만 들어서 인심의 악함을 구원할 수 있고 인심의 선함을 흥기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륜은 충분히 삼강(三綱)의 미비점을 보충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이 책은 진실로 도움이 없지 않으며 이 말도 유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나 여덟 살이 되면 쇄소 응대(灑掃應對)의 절차를 밝히는 것이 바로 삼대(三代)의 성법(成法)인데 한갓 먼저 이륜에 종사하고자 했다면 이미 옛사람의 학문하는 데 차례 있음을 어기어 등급을 뛰어넘고 차례를 무시하는 폐단을 면하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오늘날 《소학》 말하기를 꺼리는 것을 신들이 진실로 알고 있습니다. 기묘년 간에 연소한 신진 사류(新進士類)가 오활하고 광견(狂狷)한 자질로서 옛것만 좋아하여 뜻을 높이는 마음만 가지고, 또 전하의 선을 좋아하는 정성을 믿고, 왕자(王者)도 반드시 한 세대를 지난 뒤에야 인(仁)할 수 있다는 것을 헤아리지 아니한 채 ‘삼대의 지치(至治)를 날짜를 정하여 기다릴 수 있다.’고 하며, 오직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이 학교에 있고 가르치는 방법은 또한 《소학》에서 시작하여 《대학》까지 도달하는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이리하여 그 사이에 《소학》을 주장하여 펴니 사람들은 나아갈 방향을 알았고 전하께서도 그 때문에 존중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장한 이는 비록 털끝만큼도 사특한 생각이 없었다 하더라도 따르는 이들이 혹 마땅한 사람이 아니어서 자신에게 절실한 학문은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궤격(詭激)한 습성만 숭상하여 소요스럽고 촉박한 폐단이 없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소학》의 교육이 본디 그러하였던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이가 잘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찮은 허물을 확대시켜 사림(士林)을 일망 타진하고 아울러 그 책마저 비난하니 마치 송(宋)나라 때의 위학(僞學) 금지085) 와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아, 장군이 패전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어찌 병서(兵書)를 거행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겠으며, 의사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의서(醫書)를 사용하기 어렵다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소학》에서 익히지 아니하면 흩어진 마음을 거두거나 그 덕성을 배양할 수 없다는 주희(朱熹)의 말이 어찌 우리를 속인 것이겠습니까. 돌아보건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맹자는, 삼대의 학문이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밝힌다고 하는 것은 강론하여 그 이치의 소이연(所以然)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배운다 배운다고 하는 것이 입으로 읽고 귀로 듣는 것을 말함이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보니, 전하께서 경연에 나아가거나 국학(國學)에 행행하셨을 때 강론하는 것은 정령(政令)과 사무의 도구에 불과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도 기송(記誦)과 사장(詞章)의 고루한 것에 지나지 아니하며 아래에 있는 자들도 역시 ‘요(堯)·순(舜)의 도리가 아니면 감히 제왕의 앞에 진달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누가 제대로 천리(天理)를 인심에다 밝혀서 몸소 실행하여 마음으로 터득한 경지에서 귀에 젖고 눈에 익게 하겠습니까? 신들은 전하의 학문이 아마도 꼭 지극히 올바르고 지극히 성실한 것에서 나오지 않은 것인 듯싶습니다. 이미 그 배우는 도리와 가르치는 근본이 잘못되어 천하의 대방(大防)이 무너졌으므로 명색이 사류(士類)라는 이들도 민이(民彝)와 물측(物則)에 관계되는 바를 힘쓰지 아니하여서 군신·부자·형제·부부의 사이에 서로 그 도리를 다하여 패려함이 없게 하는 이가 적습니다. 심지어 붕우의 도리도 폐지되고 빠뜨림이 심합니다. 비록 어쩌다 책선(責善)하거나 잘못을 주의라도 주면 병을 숨기듯 꺼리는 마음을 품고 마침내는 서로 소원해 지는 욕됨을 초래하게 됩니다. 완석(完席)에서 일의 시비를 거론하고 사람의 잘잘못을 논의하면 곧장 전파, 누설되어 아름다운 점은 무시되고 비방만 퍼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로야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화복(禍福)에 동요되지 않기를 책망할 것이며, 이런 상태로야 일을 논의할 때 어떻게 조정에서 다투어 굽히지 않기를 책망하겠습니까? 붕우란 이러한 윤리를 유지하는 것인데 책선하고 인을 돕는 역할도 쓸데없어져 폐지 되었으니, 군신·부자·형제·부부 네 가지 도리가 독립하여 오래도록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효제(孝悌)가 인심에서 발생하여 의젓하게 도의의 정당함이 되는 것은 기절(氣節)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인륜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기절을 배양하는 것이며 기절을 배양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인륜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기절이란 효제에서 나오는 것인데 국가에 중대하게 관계됩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 사습이 어떠하다고 여기십니까? 혼란한 세상 투박한 습속에 젖어서 부형이 가르치고 명령함이나 사우(師友)가 강론하고 밝힌 것이 모두 아부하거나 줏대없는 처신으로 당세에 잘 보이게 하는 것으로써 일신의 좋은 계책으로 삼는 것입니다. 말할 책임이 있는 이는 ‘남의 단점을 적발하여 그걸 곧음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고 관직의 책임이 있는 이는 ‘혼자만 잘나서 물의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돌아가며 서로 다짐하여 묵묵함이 습관으로 굳어지니 나랏일은 주인이 없고 백사(百司)는 기강이 없습니다. 대신이 된 이는 국가를 위하여 건명(建明)할 일념(一念)을 모르는 바는 아니겠지만 단지 전일의 참혹함을 목격하였기에 위험이 자신에게 닥칠까 두려워하여 깜깜하게 어리석은 듯 여유있게 포용하는 듯, 사기(事機)의 관건을 살피지 아니하며, 용사(用捨)하는 것에 무관심하며, 그럭저럭 날짜나 보내고 그저 그렇게 몸이나 보존하니, 그 명철한 지혜는 대단하다 하겠으나 인륜을 부지하여야 하는 재상의 책임은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원수(元首)와 고굉(股肱) 같다는 비유가 있으니, 한몸이 되어 사이가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위아래의 사이는 정으로 믿고 뜻이 합하여, 말하면 들어주고 계획을 올리면 따라 준 연후에야 장구한 치안(治安)의 계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唐)·우(虞)·삼대(三代)의 임금이 직(稷)·설(契)086)이윤(伊尹)·여상(呂尙)087) 의 도움을 얻어 정신이 집중되고 서로 마음이 맞아 더욱 도를 빛낸 것입니다.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믿지 못한다면 위아래의 사귐과 덕업의 이룩됨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근래 목민관(牧民官)을 보니 대부분 자주 교체되므로 전송하고 맞이하는 폐단이 진실로 백성들에게 관계되는데 대간은 말하기 어렵고 오직 대신이 아뢸 수 있으나 한번 아뢰어 윤허하지 아니하면 곧 입을 다물고 물러납니다. 이 한 가지 일로도 그 나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신 대하는 도리가 과연 서로 기뻐하여 천재 일우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는지 모를 일입니다. 대저 기절(氣節)을 주장하는 것은 임금의 책임이고 기절을 부지시키는 것은 재상의 일입니다. 오늘날 위에서는 믿을 바가 없고 아래에서는 의지할 바가 없으니, 선비된 이들이 누가 즐거이 삶을 버리고 의리를 따르는 것으로 스스로 작정하여 쉽사리 한 세상의 어려운 일을 해내겠습니까. 문왕(文王)이 없더라도 흥기할 수 있는 호걸 같기를 어찌 사람마다에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잘잘못으로 오늘날의 경계를 삼지 않으십니까. 고조(高祖)는 효행을 무익하다고 여겼다가 마침내 선비의 기절이 쓸어버린 듯 사라지고 아첨하는 것이 습성화하여 다투어 부명(符命)088) 을 바치는 자들이 있게 되었고, 한 나라의 국운이 바뀌었습니다. 광무제(光武帝)는 천자로서 양구(羊裘)를 벗삼으니089) 모두들 명망을 조심스레 지키어 절의를 서로 기대하게 되어 목숨을 잃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이가 있게 되니, 후한의 기업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들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왕업을 계승하심으로부터 여러번 변고를 겪었는데 주운(朱雲)처럼 난간을 부러뜨린 이는 누구이며 신비(辛毗)처럼 옷깃을 당긴 이090) 는 누구입니까? 그러니 가령 불측한 재앙이 암암리에 숨어 있다 한들 전하는 어디에서 알 수 있겠습니까? 간관이 혹 시정(時政)의 절실한 폐단을 통분하게 여기어 장주(章奏)로 간곡하게 아뢰는 것이 있다 해도 한 차례 열람하고는 끝내 아무런 실시함도 없고 말이 피부에 닿게 절실함이 있어도 비답도 내려주지 아니하시니, 이것이 어찌 제왕이 하문하는 걸 좋아하고 좋은 말씀에 절한다는 아름다운 뜻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말씀드려야 할 것을 신들이 진실로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백성 이륜의 괴멸됨이 이와 같다면 천리(天理)의 미미함을 일으켜 도화(道化)의 융성함을 회복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송(宋)나라 신하 채양(蔡襄)이 ‘삼황(三皇)·오제(五帝)의 시대에는 충효(忠孝)가 대부분 천성에서 연유되었는데 삼황·오제 후에는 충효가 대부분 권장하는 것에서 연유되었다.’ 하였고, 진관(陳瓘)은 ‘저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살해하는 것은 항상 옳지 못한 것을 본데에서 시작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그 옳지 못한 것을 보았을 때 그 기틀이 매우 은미하였는데도 마침내 속죄할 수 없는 큰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니, 그렇다고 당초에 어찌 시역(弑逆)할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만일 이러한 때에 그 병이(秉彝)의 참됨을 격동시키고 선하지 못한 동기를 징계하였다면 비록 지극한 효성, 지극한 충성은 못 되더라도 역시 효경(梟獍)의 악함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권장하는 것이 참으로 위로하고 찾아오게 하며 바로잡아 곧게 하는 것보다 어려움을 알겠습니다. 이것은 단지 왕정(王政)의 중요한 것만 논의한 것이고 만일 삼강(三綱)의 근본과 만화(萬化)의 근원을 추구해 본다면 어찌 임금의 한 몸 밖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인륜의 지극함으로 황극(皇極)의 덕을 세울 수 있어 이미 그 준칙이 섰다면 가정에서부터 조정으로, 조정에서부터 사방에까지 미쳐 온 나라의 국민을 병이의 천성으로 배양하고 개도합니다. 그 배양된 가운데로 나아가서 양지(良知)의 단서를 열어주며 그 양지로 안 단서를 인하여 자신에게 반성하여 그 앎을 확실하게 한다면 사람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바가 비록 기질과 물욕의 가리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초연히 그 본체의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병이라는 것 또한 사람마다 동일하게 부여받은 바이고 나에게만 부여된 사사로움이 아니니, 저 일반인들이 동일하게 이것을 부여받고서도 각자가 제대로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어찌 측은해 하며 구원할 길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성탕(成湯) 이, 백성에게 잘못 있음은 나 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하였으니, 제왕의 덕으로 자신에게 되돌리는 것만큼 요긴한 것은 없습니다. 진실로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반드시 내 자신에게 부여된 것을 미루어 동일하게 부여받은 선(善)을 격동시킨다면 저들도 이러한 마음을 동일하게 가져 흥기할 자들의 천리의 참됨이 자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효성을 부자간에 행할 수 있으며 도리를 부부간에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군신·장유·붕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당연한 이치를 얻을 것이므로 선인이 자연히 많아지고 기절이 세워질 것입니다. 기절이 세워지면 인륜이 자연히 펴질 것입니다. 이 어찌 천리의 큰 다행이며 국가의 큰 복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답하였다.

"이 상소를 보니 매우 절실하고 타당하다. 어버이를 시해하고 지아비를 살해함은 옛날에는 드문 일인데 근래 잇따라 나오니 이것은 내가 제대로 교화하지 못한 잘못이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38년 동안 다스림의 감화는 보이지 아니하고 변고만 예사롭지 아니하여 내가 매번 한스러워하고 있다. 그리고 《소학》은 사람을 가르치는 근본인데 과연 기묘년 후에 《소학》까지 폐지하였으니 매우 부당하다. 기절(氣節)을 부식(扶植)하는 것은 임금이 당연히 생각할 바이다. 근래 인심과 사습(士習)이 예같지 않음을 위아래에 누구인들 걱정하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이 상소의 말이 다스림의 체통에 크게 관계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100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67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註 082]
    대벽(大辟) : 사형.
  • [註 083]
    당(唐)·우(虞) : 요순의 나라 이름.
  • [註 084]
    유약(有若) : 공자의 제자.
  • [註 085]
    송(宋)나라 때의 위학(僞學) 금지 : 주자(朱子)의 학문을 위학으로 몰아 금지시킨 일. 송 영종(宋寧宗) 때에 한탁주(韓侂胃)가 용사(用事)를 하는 데 주희(朱熹)가 그를 간사하다고 주달하였더니 한탁주가 그것에 원한을 품었다. 당시 주희를 도학(道學)의 영수(領袖)로 삼고 있었는데 그것을 인하여 도학을 위학이라고 배척하였다. 대체로 탐독방사(貪黷放肆)한 것이 바로 인간의 진정이고 염결호수(廉潔好修)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하면서 주희의 관작을 삭탈하고 위학(僞學)의 당(黨)으로 몰아 등용을 금지시켰다. 《송사(宋史)》 권37 영종본기(寧宗本紀) 권474 한탁위전(韓侂胃傳).
  • [註 086]
    직(稷)·설(契) : 당우(唐虞) 시대 사람으로 순(舜)이 기(棄)를 후직(后稷)으로 삼아 백성으로 농경법을 가르치게 하였고 설(契)을 사도(司徒)로 삼아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서경(書經)》 순전(舜典).
  • [註 087]
    이윤(伊尹)·여상(呂尙) : 이윤은 상(商)의 어진 정승으로 이름은 지(摯)다. 유신씨(有莘氏)의 들에서 밭갈이 하는 것을 탕왕이 세 차례나 폐백으로 초빙하니 그제야 탕왕을 도와 왕천하(王天下)를 하게 하였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 여상(呂尙)은 주(周)나라 동해(東海) 사람으로 본성은 강씨(姜氏)이다. 연로하여 낚시질하면서 은거 생활을 즐겼다. 문왕(文王)이 사냥하러 가다 만나서 이야기하여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우리 태공(太公)이 바라던 분이다.’ 하고는, 모시고 갔다. 무왕(武王)을 도와 왕천하를 하였고 제(齊)의 영구(營丘)에 봉함을 받았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제2(第二).
  • [註 088]
    부명(符命) : 도참(圖讖).
  • [註 089]
    광무제(光武帝)는 천자로서 양구(羊裘)를 벗삼으니 : 엄광(嚴光)의 일을 말함. 동한(東漢) 여조(餘姚) 사람. 어려서 광무제와 함께 공부를 하였고 광무가 즉위하니 성명을 변경하여 은거 생활하며 찾아보지 아니하므로 광무가 그 어짊을 생각하여 찾아내어 간의 대부를 제수하였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돌아와 항시 양구(羊裘)를 입고 낚시질을 하였는데, 후인이 그곳을 엄릉탄(嚴陵灘)이라 했다. 《후한서(後漢書)》 일민열전(逸民列傳) 엄광전(嚴光傳) 제73.
  • [註 090]
    신비(辛毗)처럼 옷깃을 당긴 이 : 신비가 문제(文帝)의 옷깃을 당기며 직간한 일. 문제가 기주(冀州)의 사가(士家) 10만호를 하내(河內)로 옮겨 채우려 하였는데 당시에 황충(蝗蟲)이 연이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있었다. 군사(群司)에서 안 되다고 하였으나 문제의 뜻은 대단하였다. 신비가 조신(朝臣)들과 함께 알현하려고 하니 문제는 간하려는 것임을 알고 잔뜩 위엄을 부려 접견 하였다.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데 신비가 "폐하께서 신을 불초하다 않으시고 좌우에 두어 모의(謀議)의 관직에 끼이게 하였는데 어떻게 신과 논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신이 말하는 것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바로 사직을 염려해서입니다. 어떻게 신에게 노여워하십니까?" 하니, 문제가 답을 않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므로 신비가 따라가서 그 옷깃을 당겼다. 《삼국지(三國志)》 권25 신비전(辛毗傳).

○弘文館副提學柳辰仝等上疏曰:

聖人, 人倫之至。 夫人之大倫有五, 而唯聖人, 能盡之, 作君師於萬民之上, 任天下綱常之重, 正標準以率下, 故語父子, 則極其孝, 而天下之爲父子者, 於此定焉; 語夫婦, 則極其別, 而天下之爲夫婦者, 於此定焉。 此無他, 特因其所固有不容己之良知, 而作新之耳。 由是而明敎化, 則風俗美, 而人倫益厚; 由是而正士習, 則氣節立, 而人倫益惇。 是以之道, 蕩蕩乎無能名焉, 而求其本, 則不越乎孝悌而已。 雖有强暴之人, 見子則憐, 至於襁褓之兒, 見父則哭。 此人之眞情, 而不可解者也。 但爲物欲所拘, 利害所蔽, 而傷其恩、害其義者, 或有之矣, 安有至於滅天倫、絶人理, 與禽獸奚擇, 而終不可救乎? 嗚呼! 今時之變, 其忍言耶? 子弑父, 古或聞其語, 而未見其人, 婦弑夫, 古或聞其語, 而未見其人也。 豈意千古彝倫之大變, 一時竝出於殿下之民人乎? 人心天理, 至是盡絶無餘, 雖有粟, 吾得以食諸! 凡有含生, 孰不痛憤? 臣等伏見殿下, 臨御垂四十年, 其所以紀綱人道, 建立人極者, 固無所不用其極, 則敎之所入, 化之所行, 宜見孝子不匱, 女也不爽, 而反致惡逆之輩, 相踵而出, 民彝安在, 物則安在? 臣等竊惑焉。 豈皇天降衷之理, 有所不均而然歟? 豈殿下厚倫之化, 有所未至而然歟? 《易》曰: "觀我生, 觀民也。" 此言觀民風之美惡, 而可以知吾身之所出也。 殿下於此, 豈不惕然猛省, 而爲人心世道, 發一慨歎也? 擧大辟、明王法, 至於洿其宮、瀦其宅, 足以快神人之共憤, 足以雪王化之大恥矣。 然使大禹視之, 不知當何如爲心也? 抑不知之朝, 有此變否? 人君者, 風化之主也。 主而不正, 如正家何, 家而不正, 如正國何? 是故, 《大學》 《傳》曰: "一家仁, 一國興仁。" 夫仁者, 衆善之長也。 凡於性本之所當然, 職分之所當爲, 皆莫非此仁之所發, 則有若所謂孝悌也者, 其爲仁之本也者, 不其信歟? 孟子曰: "君仁, 莫不仁" 者, 此也。 然其家不可敎, 而能敎人者, 有之乎? 上老老, 而民興孝者, 乃曾子所謂齊家治國之大旨, 而其綱領, 實在於明德、新民、止至善之三者。 欲使殿下, 興一國之孝, 則舍是三者, 復何由焉? 是知《大學》者, 收《小學》之成功, 而誠平天下之律令格例也。 然《大學》固不可一蹴而徑到, 則爲學工夫之次第, 必有不可亂、不可闕也, 而今之獻議者, 獨擧《二倫行實》, 可以救人心之惡, 可以起人心之善。 二倫足以補三綱之不備, 而可使愚夫與知焉, 可使愚婦與行焉, 則此書固不爲無助, 而此言亦不爲無益也。 然人生八歲, 而明灑掃應對之節, 是乃三代之成法, 則徒欲先從事於二倫, 已失古人爲學之有序, 而恐不免躐等凌節之病也。 今之諱言《小學》者, 臣等固知之矣。 己卯間, 年小新進之士, 以迂遠狂狷之質, 徒有好古尙志之心, 又信殿下好善之誠, 不揆王者必世後仁之意, 以謂三代至治, 可期日而待矣, 唯知化民之本, 在於學校, 而敎之之方, 又自《小學》, 而至于《大學》, 於是乎倡《小學》於其間, 而人知趨向之方, 殿下亦爲之崇信焉。 然其倡之者, 雖無一毫邪念, 而從之者, 或非其人, 不務切巳之學, 徒尙詭激之習, 不能無紛擾促迫之弊, 非《小學》之敎, 本然也, 用之者, 誤也。 萋斐一織, 打盡士林, 幷與其書而詆毁之, 有如朝僞學之禁。 嗚呼! 將之覆軍者雖有之, 而其可疑兵書之難行乎? 醫之殺人者亦有之, 而其可疑醫書之難用乎? 不習之於《小學》, 則無以收其放心, 養其德性。 朱熹之言, 豈欺我哉? 顧其用之如何耳。 孟子曰: "三代之學, 皆所以明人倫也。" 明云者, 講明之, 而使之識其理之所以然也。 學云學云, 口耳言乎哉? 臣等伏見殿下之或御經筵, 或幸國學, 其所講論, 不過乎政令事爲之具, 其所作人, 亦不過記誦詞章之陋, 而在下者, 亦不知非之道, 不敢陳於王前, 則孰能明天理於人心, 而使之耳濡目染於躬行心得之餘乎? 臣等恐殿下之學問, 亦未必出於至正至誠也。 旣失其學之之道、敎之之本, 天下之大防已毁, 故名爲士類者, 亦不務民彝物則之所關, 而其於君臣、父子、兄弟、夫婦之間, 交盡其道, 而無悖者鮮矣。 至於朋友之道, 廢闕亦甚焉。 雖或責一善、箴一過, 反懷諱疾之忌, 竟致斯踈之辱, 至於完席之上, 論事是非, 議人得失, 旋卽播洩, 掠美移謗。 以之而處臨難, 如之何責其爲禍福之不動; 以之而處論事, 如之何責其廷爭而不屈乎? 朋友者, 所以維持是倫, 而責善輔仁之職, 亦以無用見廢, 彼四者之不能獨立久存, 宜哉! 孝弟之發於人心, 而毅然爲道義之正者, 氣節也。 是故欲扶人倫者, 必養氣節, 欲養氣節者, 必正人倫。 氣節者, 無非孝悌中來, 而有關於人國家也甚大。 殿下以爲, 今之士習, 爲如何也? 靡靡風塵, 悠悠偸俗, 父兄之所敎詔, 師友之所講明, 皆以依阿軟熟, 取媚當世, 爲一身之得計, 而有言責者則曰: "不可訐人以爲直也。" 有官守者則曰: "不可獨賢而招議也," 轉轉相尙, 泯默成習, 國事無主, 百司無綱, 爲大臣者, 非不知爲國家建明之一念, 而第以目覩前日之慘酷, 恐被危疑之逼己, 昧昧焉如愚, 休休焉若容, 不察於事機之關, 不屑於用捨之際, 優游度日, 因循保身。 其於明哲之智, 足矣, 而其於扶持之相, 何哉? 雖然, 君之於臣, 有元首肱股之喩, 則其爲一體而無間, 可知矣。 是以, 上下之間, 情孚意契, 而言聽計從, 然後能成長治久安之策。 此三代之君, 獲之佐, 聚精會神, 相得益章者也。 苟有一毫之未孚, 則上下交而德業成, 豈不難哉? 近見臨民之官, 多被數遞, 送迎之弊, 實關於民。 臺諫難言, 唯大臣可啓, 而一啓未允, 旋默而退。 由此一事, 可知其餘。 不知殿下, 待大臣之道, 果能交欣, 而千載一人會者乎? 大抵主氣節者, 人君之責也; 扶氣節者, 宰相之事也。 今也上無所恃, 下無所依, 則爲士者, 孰肯以舍生取義自許, 而輕犯一世之所難乎? 無文王而猶興者, 其可望於人人乎? 殿下何不以兩漢之得失, 爲今之監戒也? 高祖以孝行爲無益, 而終致士氣掃地, 諛侫成習, 爭獻符命者有之, 而炎祚以移, 光武以天子, 友羊裘, 而能成兢持名檢, 節義相望, 折首不悔者有之, 而鼎不動。 以是觀之, 臣等竊爲殿下懼焉。 殿下自嗣大歷服, 屢經變故, 有如朱雲之折檻者誰歟, 有如辛毗之牽裾者誰歟? 然設有不測之禍, 伏於冥冥之中, 殿下何從而知之耶? 諫官或有憤時政之切弊, 拳拳於章奏之間, 而一經乙覽, 竟無施設, 言有逼切, 亦不下答。 此豈帝王好問、拜昌言之美意也? 今之可言者, 臣等固不可盡擧, 而民彝之泯滅如是, 則不可不思所以復天理之微, 而回道化之盛也。 蔡襄曰: "三五之際, 忠孝多由於性, 三五之後, 忠孝多由於勸。" 陳瓘曰: "彼臣弑其君, 子弑其父者, 常始於見其有不是處耳。" 彼見其不是之時, 其幾甚微, 而竟蹈莫贖之大惡。 然則初豈有弑逆之心哉? 若於此時, 有以激其秉彝之眞, 而有以懲其不善之幾, 則雖不爲至孝至忠, 而亦不至於梟獍之惡也。 是知勸固不如勞來匡直之爲甚易, 亦足以激之懲之, 則勸之道, 亦不可廢也。 此特論其王政之所不可已者, 而若就其三綱之本、萬化之原, 則豈外於人主之一身乎? 誠能以人倫之極, 建皇極之德, 已立其施人之準則, 自家而朝廷, 自朝廷而四方, 使一國人民, 養之以秉彝之天, 開之以秉彝之性, 使卽其所養之中, 以啓其良知之端, 因其已知之端, 而反之於身, 以致其知之之實, 則人之所得於天者, 雖有氣質物欲之蔽, 而豈不超然復得其本體之全哉? 其所謂秉彝者, 又人之所同得, 而非我之所得私也。 視彼衆人之同得乎此, 而不能自全者, 豈不爲之惻然, 思有以救之哉? 成湯曰: "百姓有過, 在予一人。" 帝王之德, 莫要於反躬。 苟能歸罪於己, 而必推吾之所自得者, 以激其同然之善, 則彼同有是心而興起者, 天理之眞, 自然呈露, 不唯孝可行於父子, 道可行於夫婦, 而至於君臣、長幼、朋友, 莫不皆得其當然之理, 則善人自多而氣節立, 氣節立而人倫自敍, 豈非天理之大幸, 而國家之大福也? 伏願殿下, 留神焉。

答曰: "觀此疏, 甚切當。 弑親、殺夫, 古所罕有, 而疊出於近間, 是予不能敎化之過也。 予以否德, 三十八載之間, 未見治化, 而變故非常, 予每恨焉。 且《小學》, 敎人之本原也。 果如己卯之後, 幷廢《小學》, 則甚爲不當。 扶植氣節, 人君所當念, 近來人心士習, 不如古, 上下孰不憂歎? 此疏之言, 大關於治體, 予當留念焉。"


  • 【태백산사고본】 51책 100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67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