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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100권, 중종 38년 1월 28일 계유 1번째기사 1543년 명 가정(嘉靖) 22년

동지사가 돌아와 황제 시해 미수 사건과 달자의 문제, 사신의 예를 논하다

동지사(冬至使) 최보한(崔輔漢)이찬(李澯)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니 상이 사정전에 나아가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궁위(宮闈)의 변은 듣기에 매우 놀랍고 해괴하다."

하니, 보한이 아뢰기를,

"신들도 자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서반(序班) 등의 사람 외에 기타 사대부들과는 상종하여 교제하지 못했습니다. 혹 만나더라도 어찌 감히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들이 들어갈 때 통주(通州)에 한 주인(主人)이 있었는데 사족(士族)은 아니었지만, 또한 아주 무식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양 우리 나라 사람을 은근하고 두터이 대우하였습니다. 다례(茶禮)를 마치고 나서는 통사(通事) 홍겸(洪謙)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더니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는 귀에다 대고 비밀히 ‘황제가 궐 안의 여종에게 목매어져 죽음을 당할 뻔했는데 형세가 매우 위급하여 콧구멍에서 피가 흐르기까지 하였다. 다행히 어린 여종이 달려가 황후(皇后)에게 고하여 급히 달려와 구제했으므로 마침내 다시 살아나기는 했다. 그러나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매우 놀랍고 황공하게 여겼는데 북경에 이르러 들으니 아무 탈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인에게 ‘모역(謀逆)한 사람들은 모두 평상시 가까이 모시던 자들로 심지어 총행(寵幸)이 있어 딸까지 낳았는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고 물으니 ‘황제가 도술(道術)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연단(鍊丹)을 먹었는데 이때부터 성질이 차츰 조급해지면서 희노(喜怒)가 일정치 않아 궁인(宮人)들이 원망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동모하여 난을 꾸몄다.’고 하였으나 확실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황제가 국정을 돌아보지 않아 한번도 정무를 보지 않고 이술(異術)에 미혹되어 있다고 합니다. 도사(道士) 도전진(陶典眞)이란 자가 있는데 그를 서리(胥吏)에 기용하여 날마다 좌우에서 모시게 하고 연단(鍊丹)으로 선약을 만들어 먹으며 신선(神仙)이 되기를 구하는 중이므로 한창 그 법을 혹신(酷信)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주사(朱砂)가 희귀하여 시장마다 모두 바닥이 나서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도사에게 예부 상서를 겸하게 하여 《진신일람(縉紳一覽)》에 기록하게 하였고 녹봉(祿俸)도 그 품계에 준하여 주면서 오로지 그를 총애하여 임무를 맡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온갖 일이 해이되고 기강이 비로 쓴 듯이 없어졌는데 산서(山西)에 있는 달자(㺚子)들의 세력이 또한 치성해져 대원(大原)에까지 침구해 와서 인물(人物)을 살해했는데, 그 숫자를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고 표기 장군(驃騎將軍)도 패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가을에 요동의 정병을 징발하여 많은 수가 진격해 갔으나 적들이 이미 물러가 흩어진 뒤라서 별 효과 없이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조정에서 계획하는 일은 항상 구차히 막아내는 것만을 급선무로 삼고 있을 뿐이요, 정토(征討)의 거사는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서의 달자가 깊이 들어와 피해를 끼친 뒤에도 본토(本土)로 돌아가지 않고 오래 머물면서 침구했다고 하던가?"

하니, 보한이 아뢰기를,

"오가는 것에 일정한 시기가 없이 마음대로 출입하기 때문에 감히 검문(檢問)을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살해당한 중국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중국 사람들은 달자들의 수급(首級)을 전혀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산서의 달자가 가장 큰 걱정거리이고, 산동(山東)의 달자는 1천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함몰(陷沒)당한 관원도 거의 40인이나 된다 합니다. 그들이 무단히 노략질하고 있으니 매우 놀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산서의 달자에 비하면 이들은 보잘것없는 도적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서의 도적도 장졸을 많이 죽이고 사로잡아 갔는가?"

하니, 보한이 아뢰기를,

"그 형세는 미처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만 듣기로는, 적이 1천여의 기병을 거느리고 어느 구릉(丘陵) 위에 모여 있자 관군(官軍)이 얕보고 곧바로 달려가서 포위하고 막 공격하려는데, 적이 갑자기 큰 함성을 지르면서 돌을 굴리며 돌진하여 포위를 뚫고 나오니, 장졸 1천여 명이 일시에 상실되었고 그밖에 죽음을 당하고 사로잡힌 사람들은 얼마인지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군의 소득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대충 보완책을 정하였을 뿐이며 인심까지도 이반되어 참으로 작은 우려가 아니었습니다. 어찌 산동뿐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궁위(宮闈)의 변이 평정된 것을 진하할 때에 사은(謝恩)도 하려 하였다가 번거롭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만약 성은(聖恩)이 진실로 특이하였다면 사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보한이 아뢰기를,

"동지(冬至)의 하례(賀禮)는 예부 상서(禮部尙書) 엄숭(嚴嵩)이 특별히 친히 받기를 청하면서, 친히 받지 않으면 내외의 조공(朝貢)하는 인원(人員)들이 반드시 실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의식(儀式)을 익힐 날이 모두 이미 정해졌었으나 날씨가 매우 추워지자 마침내 권정례(權停例)로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엄 상서(嚴尙書)가 다시 주청하기를 ‘날씨가 그리 춥지 않으니 신기(神祗)에게 제고(祭告)하는 일이라면 혹 섭행(攝行)할 수도 있지만 하례를 받는 일은 친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는데, 황제가 밑도 끝도 없이 ‘그대로 조선국 사신에게 보여 그들로 하여금 외국으로는 다른 나라에서 조공 온 자가 없고, 다만 서번(西番)·나마(剌麻)·달자와 본국(本國)041)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하라.’고 조서를 내렸습니다. 대체로 우리 나라는 연속적으로 조공을 바쳐 예의(禮義)를 아는데 친히 하례를 받지 않는 것을 미안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명으로 하유한 것인 듯합니다.

엄숭도 ‘황제가 중히 대우하는 뜻에 대해 그대들이 매번 궐에 나아가 문안해야 할 것이나 사체에 어려울 듯하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속히 국왕(國王)에게 치계(馳啓)하여 와서 문안케 하오.’ 하였고, 일행의 인원을 자기 집에 불러다가 또한 이와 같이 말하였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찬(李澯)은 아뢰기를,

"서반(序班)042) 들 중에도 엄숭이 한 말은 온당하지 못한 일인 것 같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고, 보한이 아뢰었다.

"중국 조정의 신하들도 ‘공손히 기거주(起居注)에 올리면 그만이지 한번에 3예(禮) 【흠문(欽問)·진하(進賀)·사은(謝恩).】 를 거행하자면 진실로 번잡하고 혼란할 듯하니 흠문례와 진하례만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신들의 생각도 이와 같습니다만, 황제의 은혜가 참으로 비상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조서의 내용을 등서(謄書)해 가지고 와서 신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본국의 감결(甘結)043) 을 받든 것과 비슷했습니다. 그렇지만 2예(禮)044) 만을 거행하더라도 국가의 사체에 무슨 휴손됨이 있겠습니까? 외국 사람은 한 사람도 조공을 오지 않았었습니다. 유구(琉球)는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호칭하면서 평소 우리 나라와 선후를 다투어 왔는데 이번에는 진하하지 않았고 본국만이 조공을 폐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중국 조정에 강기(綱紀)가 없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달자(㺚子)는 상(賞)으로 주는 것을 받아가기 위해 2천여 인이 연달아 끊이지 않았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100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656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註 041]
    본국(本國) : 우리 나라.
  • [註 042]
    서반(序班) : 명(明)·청(淸) 시대의 벼슬 이름. 홍려시(鴻臚寺)에 소속된 관리로 백관(百官) 반열의 차등을 차례대로 인도하여 정제하는 일을 관장하였음.
  • [註 043]
    감결(甘結) : 상급 관청(上級官廳)에서 하급 관청에 내리는 공문(公文).
  • [註 044]
    2예(禮) : 흠문례와 진하례.

○癸酉/冬至使崔輔漢李澯等, 回自京師, 上御思政殿引見。 上曰: "中朝宮闈之變, 聞之至爲驚駭。" 輔漢曰: "臣等不得詳聞。 如序班等人外, 其他士大夫, 則未嘗相從交接, 雖或見之, 豈敢公然倡說哉? 但臣等入歸時, 於通州, 有一主人, 雖非士族, 亦不至無知, 每向我國之人, 厚遇慇懃。 茶禮之後, 招通事洪謙來前, 屛去左右之人, 屬耳密語曰: ‘皇帝爲宮婢縊弑, 勢甚危急, 至於鼻孔流血。 幸賴小婢, 奔告皇后, 走及救解, 遂得復蘇, 然猶死生未可知也。’ 臣等甚驚惶, 到京聞之, 則無恙云。 問諸下人, 以謀逆之人, 皆常時親侍, 至有寵幸生女, 而何以至此乎? 答以皇帝篤好道術, 鍊丹服食, 性(寢)〔寖〕 躁急, 喜怒無常, 宮人等不勝怨懼, 同謀搆亂云, 然未可的信。 但帝不顧國政, 一不視朝, 而惑於異術, 有道士陶典直者, 起自胥吏, 日侍左右, 鍊丹爲藥, 求作神仙, 方自酷信。 以此朱砂稀貴, 市皆乏盡, 求貿未得。 乃以道士, 兼禮部尙書, 錄在縉紳一覽, 而祿俸亦准其品, 專倚寵任, 由是萬事怠惰, 紀綱掃如。 山西 㺚子, 勢又熾盛, 侵至太原, 殺害人物, 不紀其數, 驃騎將軍, 亦見敗死。 去秋間調發遼東精兵, 多數進去, 賊巳退散, 無及而還。 且朝廷常所籌策之事, 只以苟得防遏爲務, 其如征討之擧, 無以爲計爾。" 上曰: "山西 㺚子深入作耗之後, 亦不還本土, 長留侵犯乎?" 輔漢曰: "往來無常, 任其出入, 莫敢誰何, 中原人物之被其殺掠者, 不知紀極, 而㺚子首級, 則中原之人, 專無所得云矣。 山西之患, 爲憂最巨。 如山東 㺚子, 殺獲千餘人, 官員陷沒者, 亦幾四十人。 無端擄掠, 至爲可駭, 然以山西見之, 直是小醜耳。" 上曰: "山西之賊, 亦多殺虜將卒乎?" 輔漢曰: "雖未及詳知形勢, 聞賊率千餘騎入寇, 聚於一丘陵之上, 官軍易之, 徑進環圍, 將欲搏擊, 賊忽大呼放石, 奮力突圍出, 將卒千餘人, 一時喪失, 其他被諸殺掠, 不紀其限, 官軍所得, 則頓無所聞。 朝廷粗足爲保安之策耳。 人心亦皆離叛, 誠非細慮, 豈至山東而已?" 上曰: "宮闈變定, 進賀之時, 欲擧謝恩, 而以煩擾還止。 若聖恩誠爲特異, 則謝之何如?" 輔漢曰: "冬至賀禮, 禮部尙書嚴嵩, 特請親受, 不然則內外朝貢人員, 必皆失望云。 故習儀之日, 皆已定之, 以天氣寒嚴, 遂命權停。 嚴尙書更奏, 日候不至甚寒, 祭告神祇, 雖或攝行, 受賀則不可不親也。 帝忽無端下詔曰: ‘仍示朝鮮國使臣, 令知所以外國他無來朝者, 只拘西番剌麻㺚子與本國而已。’ 蓋本國連續朝貢, 能知禮義, 而不親受賀, 以爲未安, 故似如是特命諭之也。 嚴嵩亦言: ‘皇帝重待之意, 儞每亦可詣闕問安, 事體似難, 故未得爲之也。 宜速馳啓國王, 使來問安’ 云, 招一行之人於其家, 亦如是言之, 不知何意也。" 李澯曰: "嚴嵩所言, 似爲未便事, 序班等亦有言之者。" 輔漢曰: "中朝群臣, 亦恭上起居而已。 一擧三禮, 【欽問、進賀、謝恩。】 誠似煩亂, 只行欽問、進賀爲宜。 臣等之計, 亦如是矣。 但皇帝之恩, 則實出非常也。 謄書下詔之言, 來示臣等, 似若本國之奉甘結也。 雖然, 只擧二禮, 於國體, 豈有虧損? 外國之人, 一不朝貢。 琉球則號爲禮義之邦, 素與本國爭先後之次, 而今不進賀, 唯本國不廢述職耳。 此豈非朝廷無綱紀而然哉? 㺚子則欲受賞賜, 故二千餘人, 連絡不絶矣。"


  • 【태백산사고본】 51책 100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656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