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청병 요청에 대비하게 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세조(世祖)정해년015) 과 성종(成宗)기해년016) 의 《서정일기(西征日記)》 및 윤필상(尹弼商)의 《부전일록(赴戰日錄)》을 내가 자세히 보니, 그때에는 유사(有司)만이 힘을 다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도 힘써 계책을 세웠으니 조종께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한 뜻을 알 수 있다. 성종이 조칙(詔勅)을 받고 명에 따라 장군 어유소(魚有沼)를 보냈는데, 유소가 미리 강이 얼지 않아서 건너지 못한다고 핑계하자 필상이 부교를 놓으면 건널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유소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군사를 거느리고 강까지 갔다가 얼음이 녹았다는 핑계로 제멋대로 군사를 파하였으니, 군령을 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로 하여금 중국 조정을 기만하게 한 것으로 그 죄가 또한 크다. 그러나 성종은 한편으로는 날씨가 추우니 차마 다시 보낼 수도 없었고, 한편으로는 중국 조정에 죄를 얻게 될까 걱정하셔야 했으니, 노심 초사가 극에 달했었다.
마땅히 군사를 출발시키기 전에 강이 얼었는가 풀렸는가를 헤아려서 먼저 강을 건너기 편리한 만전의 대책을 강구한 다음에 바야흐로 군사를 출동시켜야 한다.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에까지 갔다가 제멋대로 군사를 파하고 돌아왔다면, 마땅히 군령으로 위엄을 보인 다음에 다시 시행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했어야 한다. 이것은 이미 지난 일이라 하더라도 이왕의 시비를 분명하게 판단해야 앞으로의 일을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종조의 당당함으로 대신에게 위임했어도 오히려 이러했는데, 더구나 요즘 인심이 스스로 편한 것만을 좋아하고 있으며 마침 변방에 걱정이 없어서 장졸(將卒)이 군령의 엄함을 알지 못하니, 만약 뜻밖에 징병하라는 조칙이 내려지면 반드시 두서가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양조(兩朝)017) 의 일로 살펴보면, 모두 미리 조처하여 중국 조정이 군사를 출동할 기일에 대도록 했었는데, 다만 어유소가 사기(事機)를 그르쳤으므로 필상이 드디어 기한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오랑캐들을 섬멸하고 사실대로 주문(奏聞)했으므로 우리 나라를 질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형편을 헤아려 보면 중국의 기강이 이미 전 같지 않으니 정토하는 기사도 기필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도리로는 마땅히 미리 조처해야 한다. 내 뜻으로는 도원수와 부원수를 미리 정하여 위임한다면 모든 조처할 일들을 등록(謄錄)에서 상고하여 스스로 힘쓸 것이며 만약 그 기한에 이르지 못하면 스스로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품계가 높은 사명(使命)은 폐단이 있을 듯하니 다만 문신(文臣)으로 종사관(從事官)을 차정하여 3도 【평안도·황해도·함경도.】 에 나누어 보내어 감사(監司)와 병사(兵使)가 함께 의논하여 병마·군량·기계 등의 일을 조발·수선하게 하고 서울에서는 원수(元帥)와 병조(兵曹)가 함께 의논해서 장사(將士)와 군관(軍官)을 선발하여 결정하게 하면, 마침내 군사 출동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해로울 것은 없을 것이다. 만약 미리 조처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칙서가 오면 그 기한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전일의 일로 비추어 보면, 얼음이 얼면 갔다가 돌아오기는 비록 편리하나 다치는 군사가 반드시 많고 여름 또한 군사를 출동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의 형세를 헤아려 보면 봄이 아니면 반드시 가을에 해야 한다. 이때는 강이 얼지 않을 때이므로 배를 타거나 부교(浮橋)를 설치해야 할 것인데, 그것도 하루이틀에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타 병기(兵器)·의장(儀仗)·전마(戰馬) 따위는 원수 등이 계책을 세우겠지만 납의(衲衣) 등의 장비는 옛날에도 모든 군사에게 두루 공급하였으니, 지금도 전례에 따라 많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작은 계책이 아니기 때문에 조종조에서는 모두 대신들을 인견(引見)하여 의논하였던 것이다. 나도 대신들과 면대하여 의논하고자 했으나, 아직 확실한 기별이 없고 옛 전례도 마땅히 상세하게 상고한 다음에 의논해야 하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뜻으로 대신에게 의논하라."
- 【태백산사고본】 51책 10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648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註 015]
○辛亥/傳于政院曰: "世祖丁亥年、成宗己亥年, 《西征日記》及尹弼商赴戰日錄, 予詳覽之。 其時非但攸司竭力。 上亦黽勉爲策, 可見祖宗至誠事大之意。 成宗奉勑應命, 遣將魚有沼, 有沼預以江氷未合爲辭, 弼商曰: ‘浮橋可渡’ 云, 有沼不以爲然。 將兵到江, 托以流澌, 擅自罷兵, 非徒犯於軍令, 使我國欺罔天朝, 厥罪亦大。 成宗一以冱寒, 不忍再擧, 一以恐得罪於天朝, 其軫慮勞思極矣。 當其未發之前, 備籌凍合流澌之形勢, 先定利涉萬全之長算而後, 方可行師動衆矣。 若率師到境, 擅自罷還, 則亦當示以軍令, 然後始議再擧。 此雖已往之事, 然明辨已往之是非, 斯審方來之事宜, 故如是云耳。 堂堂成廟, 委任大臣, 尙至於此, 況近者人心, 以自便爲事, 而適又邊方無虞, 將卒不知軍令之嚴。 若不意降勑, 則其顚倒失措必矣。 以兩朝之事觀之, 皆預爲措置, 及赴中朝發兵之期, 只因魚有沼失誤事機, 弼商遂未及期, 然能勦滅俘虜, 以實奏聞, 故責不在於我國。 在今計之, 中原紀綱, 旣不如古, 征討之擧, 亦難必也。 然在我之道, 當預爲措置。 予意預定都、副元帥委任, 則凡措置之事, 備考謄錄, 自然勉力爲之。 若未及期會, 則自有其責, 秩高使命, 則似爲有弊, 只定文臣從事官, 分遣三道, 【平安、黃海、咸鏡道。】 與監司、兵使同議, 調治兵馬軍糧器機等事, 在京則元帥與兵曹同議, 抄定將士軍官, 雖或終不行師, 亦無所妨。 若不預措, 而卒有勑書, 則其能及乎? 且觀前日之事, 氷堅則往還雖便, 傷士必多, 夏月亦不可擧。 揣今之勢, 非春則必秋也。 此非江合之時, 或乘船或浮橋, 其設施亦非一二日所得措辦。 其他器仗戰馬, 自有元帥籌策, 而衲衣等具, 古亦遍給諸軍。 今可依例廣造矣。 此非小策, 故祖宗朝皆引見大臣等議之。 予亦欲面議, 但時無的奇, 而舊例亦宜, 從容詳閱, 然後可議, 故未果耳。 以此意議于大臣。"
- 【태백산사고본】 51책 10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648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