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황을 잘 하는 관리에게 상을 주는 것에 대해 의논하게 하다
석강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황태후가 이미 부묘(祔廟)된 후이므로 진향은 못하고 다만 제문과 방물을 진헌하였다고 한다. 성절사는 기일이 있으므로 기일 안에 가겠지만 진향사는 정해진 기일이 없기 때문에 지체하여 간 것이 아닌가? 사대(事大)의 일에 매우 미안하다."
하였는데, 영사 윤은보가 아뢰기를,
"어제 전교를 듣건대, 진위사와 진향사를 보냈는데 진향사가 미처 진향하지 못하였다니 성상의 마음에 미안한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다만 우리 나라는 본국 내의 제후들과는 달리 번방 나라인만큼 황태후 붕서(崩逝)의 소식을 반드시 본국 내의 제후들보다 늦게 들었을 것입니다. 길을 떠난 지 70여일 만에 들어간 것은 지나치게 늦게 간 것은 아니니 중국 조정에서도 반드시 늦게 온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향하러 갔다가 진향하지 못하였으니 성상께서 미안해하시는 마음이 어찌 우연하겠습니까. 이는 사대의 중요한 일이니, 오늘 여러 제조(提調)들과 승문원에서 합좌하여 미처 진향하지 못한 전례가 있는지 상고하여 아뢰겠습니다.
또 중국 조정의 상제(喪制)는 달을 바꾸므로 [以日易月] 27일 만에 상기가 끝납니다. 신의 생각에는, 산릉에 너무 빠르게 부묘한 까닭에 미처 진향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신이 지난 신사년179) 에 부경(赴京)할 적에 진향사는 한순(韓恂)이었습니다. 정덕 황제(正德皇帝)180) 께서 붕서하였는데 오래도록 발인하지 않은 까닭에 당시에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나오려고 하다가 정덕 황제의 경연관으로서 영구를 빈소에 둔 채 나오기 미안하였으므로 행기(行期)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순은 세전(歲前)에 돌아오려고 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때에도 날로 달을 바꾸는 제도를 썼지만 산릉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틀림없이 산릉에 모시는 것을 너무 빠르게 하였기 때문에 미처 진향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근래에 진향하지 못한 사례를 보지 못하였다. 과연 산릉에 모시는 일이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어 그런 것이다."
하였다. 헌납 권철(權轍)이 아뢰기를,
"근래에 서울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에 야인(野人)의 녹봉(祿俸)을 베로 바꾸어 주어 굶주리는 백성들로 하여금 받아 먹게 하였으니, 국가가 백성을 염려하는 뜻이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부 관원(五部官員)들이 힘을 쓰지 않으므로 아전들이 작간(作奸)하고, 관령(管領)들이 가난한 자가 받아 먹도록 하지 않고 도리어 부자가 받도록 합니다. 이렇듯 고르지 않으므로 원망하는 자가 많습니다.
서인(庶人)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족 중에 과부나 녹봉이 없는 빈궁한 집들은 기근에 시달린 채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천재와 지변이 잇달아 흉작이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으며 역질마저 기승을 부리니, 민생은 죽어가서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어, 지극히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상께서는 마땅히 하늘의 공경하고 백성을 긍휼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마시고 백성을 괴롭게 하는 일체의 일을 우선 중단하시며,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신다면 국가가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민을 진휼하는 일은 서울이 더 잘못된 듯하다. 가난한 백성들은 먹지 못해서 굶주리고 사족(士族)의 집들마저 먹지 못하여 살기가 어렵다고 한다. 해조는 더욱 살펴서 일할 것이며 지방의 수령들도 진휼에 힘써야 한다. 근래에 부지런히 진휼하지 않은 자를 치죄했을 뿐 아니라 시종(侍從)을 보내어 적간하였다. 비단 진휼에 부지런하지 않는 자를 치죄할 뿐 아니라 진휼에 부지런한 자를 상주어야만 사람들이 힘쓸 것이다. 각도의 감사가 수령들을 방문해서 그들의 구황 실적을 계문하다면 상전(賞典)을 베풀겠다."
하였다. 참찬관 이준경(李浚慶)이 아뢰기를,
"구황에 대한 일을 들으니, 다른 지방에서 실어 온 곡식을 나누어주는데, 백성들은 이에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엔 도리어 폐단이 있어 백성들이 다 답답하게 여깁니다. 수령이 자기 고을 백성을 거느리고 곡식이 있는 다른 관아로 가서 실어 오는데 받는 곡식이 대개 양이 부족하며 간혹 섬[石]이 제대로 찬 것은 먼지나 흙으로 절반이 채워지고 비를 맞아 썩은 것들입니다. 본관(本官)에서는 정곡(正穀)을 나누어주려고 하지만, 곡식의 원수(元數)는 있고 결손된 수량은 채울 수 없으므로 총수로만 지급합니다. 인수하러 간 수령은 곡식을 인수하는 데 마음을 다하지 않습니다. 한갓 이뿐만 아니라 백성의 이름과 수를 기록하고 가서 받아오지 않는 자에 대해서도 그 받아가지 않은 것까지 징수하므로 그 사이에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한 섬이라고 받아오는 곡식이 겨우 8∼9말[斗]에 불과한데다가 현장에서 나누어주지 않고 관아로 실어왔다가 나누어 줍니다. 백성에게 나누어 줄 때는 섬수[石數]로 나누어주고는 받아들일 때는 말로 헤아려서 받습니다. 오래 묵어서 썩은 곡식을 섬을 채워서 준다 해도 백성들은 오히려 억울한데, 말수마저 차지 않으니 뒷날 백성들이 상환할 때는 만 배로 갚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충청도는 곡식을 옮겨 운반해 올 백성들이 들에 가득히 차서 울부짖고 원망한다고 합니다. 곡식은 원래의 수량이 있어, 키로 까불면 반드시 모자랄 테니 백성들이 어찌 억울해 하지 않겠습니까. 이 점을 각별히 하유하시어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양과 결손되어 모자라는 수량을 따져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들으니 충주 목사 안위(安瑋)는 구황(救荒)에 마음을 쏟아 관아에서 받은 결송작지(決訟作紙)181) 로써 곡식과 바꾼 뒤에 미곡(米穀)과 염장(鹽醬)을 가지고 촌락을 드나들면서 진휼한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이것이 백성을 온전히 살리는 길이 못 되고 불과 하루 이틀 더 살릴 수 있을 뿐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목사가 마음을 다해 구제하면 백성은 고향을 떠나 떠돌 생각을 갖지 않으며, 그 고을 관아에서 성심껏 구제한다면 막상 죽는 자가 생기더라도 감동할 것입니다. 옛말에 ‘삼군이 마치 솜옷을 입은 듯하다.[三軍之士如挾纊]182) ’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곧 정성으로 감복했다는 뜻입니다. 수령이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도리어 민폐만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빈민 구제를 잘하는 자가 있으면 상을 주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보고 흠모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옛적에 주희(朱熹)는 남강군(南康軍)183) 에서 구황을 잘하였기 때문에, 그 절목(節目)을 천하에 반포하고 모든 수령들로 하여금 그것을 법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우리 국가에서도 감사에게 하유하여 구황을 잘하는 자를 방문케 하고 그 절목을 각 고을에 효유하여서 모범으로 삼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수령이 있는 힘을 다한다면 구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윤은보가 아뢰기를,
"염채를 운반하여 백성을 진휼하는 것도 구황 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폐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국가에서는 염채를 운반해서 그들을 구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 고을의 구황 염채를 대처(大處)184) 에 모아 두었다가 인근에 있는 관아가 인수하러 갈 적에, 길이 멀어서 받아갈 수 없는 자는 독촉하여 받아가게 하고, 관속이 많은 고을은 사람과 말을 갖추어서 보내주는 것도 한 가지 조치입니다. 만약 빈약한 고을이면 부득이 백성들을 시켜 실어 와야 하는데, 이 경우엔 아무리 어진 수령이라 하더라도 조치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저, 백성들을 옮기고 곡식을 옮기는 일은 구황 정책에서 먼저 할 일입니다. 백성들을 비교적 농사가 잘 된곳으로 옮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번에 함경도 어유간(魚游澗)에 적변(賊變)이 났을 적에 신이 변장을 추고할 경차관(敬差官)으로 내려갔었는데, 그해가 바로 임신년185) 이었습니다. 그때 함경도는 가뭄이 매우 심하여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한 톨도 없었습니다. 감사 윤순(尹珣)은, 관아에 쌓아둔 곡식이 없고 달리 진구할 방법도 없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가 조금 잘 된 곳으로 가서 살다가 다시 본 고장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편리하겠고 설령 끝내 떠돌고 돌아오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앉은 채 죽기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고 여겼으므로 백성들이 떠나가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조정의 의논이, 감사는 마땅히 자기 도에서 진구해야 하며 백성들을 떠나가도록 내버려둔 것은 잘못이라 하여 그를 논박하여 체직하려 하다가 끝내 체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뒤, 도둑을 지키기 위하여 그 고장을 떠나지 못하게 하자 굶주린 백성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리이를 붙든 채 나무 뿌리를 의지하여 죽은 자가 즐비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함경도 백성들이 임신년에 태반이 죽었습니다."
하고, 장령 정언각(鄭彦慤)이 아뢰기를,
"국가가 과거 제도를 만들어 선비를 뽑는 것은 그 법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요즈음 거관 유생(居館儒生) 가운데 월강(月講)186) 에 통(通)을 받은 자는 명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회강(會講)187) 때 분수(分數)를 준다고 합니다. 만약 사서 삼경(四書三經)에서 다 통을 받았다면 그 유생은 이미 그것으로 급제한 것입니다. 회강 때 시관(試官)과 대간(臺諫)을 장막 바깥에 앉게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회강에 급분(給分)한다면 과거의 공도(公道)는 폐지되는 것입니다. 법이 만들어진 처음에는 사(私)가 없다 하여도 끝내는 사정을 쓰는 것을 어떻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조종조에서는 법을 만든 뒤에는 반드시 사헌부에 알려 서경(署經)을 하기 마련이었는데 지금은 법이 만들어져도 서경하지 않으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일렀다.
"새로 법을 만들면 당연히 사헌부에 알려야 한다. 대저 한 가지 법을 세우면 한 가지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64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63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법제(法制) / 왕실-경연(經筵) / 외교-명(明) / 구휼(救恤) / 보건(保健) / 재정-국용(國用) / 호구-이동(移動) / 교통-육운(陸運) / 교통-수운(水運)
- [註 179]신사년 : 1521 중종16년.
- [註 180]
정덕 황제(正德皇帝) : 정덕은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註 181]
결송작지(決訟作紙) : 소송의 판결문을 쓰는 데 소요되는 용지 값으로 받는 수수료.- [註 182]
삼군이 마치 솜옷을 입은 듯하다.[三軍之士如挾纊] : 감격한 나머지 군사들이 추위를 잊어 버린다는 뜻. 춘추 시대 초자(楚子)가 소(蕭)를 정벌할 때 신공 무신(申公巫臣)이 왕에게 말하기를 ‘군사들이 추위에 떨고 있으니 왕께서 삼군을 순찰하시고 군사들을 위로해 주신다면 군사들은 다 솜옷을 입은 듯이 따스함을 느낄 것입니다.’고 한 데서 온 말. 《좌전(左傳)》 선공(宣公) 12년.- [註 183]
남강군(南康軍) : 송나라의 부(府) 이름.- [註 184]
대처(大處) : 교통이 편리한 큰 지방.- [註 185]
임신년 : 1512 중종 7년.- [註 186]
월강(月講) : 예조에서 매월 1회씩 성균관생이나 사학(四學)의 유생을 고강(考講)하는 것을 말함.- [註 187]
회강(會講) : 왕세자가 여러 사람을 한데 모아 놓고 강서(講者) 시험을 보이는 것을 말함.○御夕講。 上曰: "皇太后已爲祔廟, 未及進香, 而但進獻祭文、方物云。 如聖節使則有日期, 故及期而往, 此則無日期, 無乃遲留而往乎? 於事大之事, 至爲未安。" 領事尹殷輔曰: "昨聞傳敎, 爲遣陳慰、進香使, 而未及進香, 聖心未安, 至當。 但本國, 非如內服諸侯, 乃藩邦也。 皇太后崩逝, 當初聞之, 必後於內服矣。 發程後七十餘日入歸, 則似非太緩也, 中朝必不以爲緩來也。 然但爲進香而去, 未及進香, 聖心未安, 其豈偶然哉? 此乃事大重事, 今日當與諸提調, 合坐于承文院, 未及進香, 有前例與否, 相考以啓。 且中朝喪制, 以日易月, 則二十七日, 喪畢矣。 臣意以爲, 附山陵太速, 故未及進香也。 臣前於辛巳年赴京時, 進香使乃韓恂也。 正德皇帝崩逝, 久不發引, 故其時唐皋、史道欲出來, 而以正德經筵官, 柩方在殯, 出來未安, 是以不定行期, 恂於歲前, 欲其來還而不能云。 其時亦用以日易月之制, 而不附山陵也。 今則必附山陵太速, 故未及進香也。" 上曰: "前例有無, 未可知也, 近來, 不見未及之時矣。 果爲附山陵, 遠近有異故然也。" 獻納權轍曰: "近來都下多飢餓, 故以野人祿俸貿布, 而使飢民受食。 國家慮民之意, 甚非偶然, 而五部官員 不能用力, 故吏緣爲姦, 管領等, 不以貧者受食, 使富者反受。 不均如是, 怨者多矣。 庶人則已矣, 如士族寡婦之家, 及貧窮未得受祿之人, 困於飢荒 無以生活也。 天災地變, 疊見層出, 飢荒之極, 癘疫又熾, 民生盡斃, 邦本殄瘁, 至爲憂懼。 自上當敬天恤民, 無少間斷, 凡經費病民之事, 一切停罷, 而惕然驚懼, 則國家可以保安矣。" 上曰: "賑救飢民之事, 京中尤爲失宜。 貧民不得食而飢餒, 士族之家, 亦不受食, 則生活爲難也。 該曹更加察而爲之。 外方守令, 用力賑救則可也, 近來不勤救荒者治罪, 遣侍從, 亦往摘奸矣。 不但不勤者治罪。 勤之者亦必賞之, 然後人有勉力者矣。 其道監司, 訪問守令, 救荒實跡啓聞, 則可施賞典也。" 參贊官李浚慶曰: "聞救荒之事, 外方移轉給穀, 百姓可賴生活, 然反有其弊, 民皆悶之。 守令等, 率其百姓, 往受有穀之官, 其官倉儲之穀, 不滿斗數, 間或盈石, 塵土雜半, 漏雨腐朽。 本官欲以正穀給民, 則穀有元數, 欠則無可置處, 故但摠數給之, 守令之往受者, 亦不盡心於擇受, 非徒此也, 又錄民之名數, 不往受者, 且徵其闕, 故其間吏緣爲奸, 其弊不貲。 所授之穀一石, 僅存八九斗, 而又不卽分於其處, 輸來其官, 授民之時, 給以石數, 而納官之日, 量斗以捧。 久陳成土之穀, 雖盈其石, 民猶冤憫。 況未滿斗數, 則民之後日之償, 必萬倍矣。 是故, 忠淸道移轉輸載之民, 遍滿于野, 哭泣冤憫云。 其穀有數, 簸之則必欠, 民安得不冤? 此事各別下諭, 計其民之可食, 及其耗數何如? 聞忠州牧使安瑋, 盡心救荒, 以其官中所捧決訟作紙, 貿穀, 持米穀鹽醬, 出入村落以賑之。 其民以爲, 此非全活之道, 不過一二日資生也。 然牧使誠心救之, 民無流散之意也。 若官吏誠心爲之, 則雖有死者, 亦可感也。 古云 ‘三軍之士, 如挾纊。’ 此以誠感也。 守令但爲文具, 故反有民弊。 若能有救荒者, 則賞之, 使他人觀瞻可也。 昔朱熹, 於南康軍能救荒, 其節目, 頒行天下, 使守令, 以此爲法矣。 國家亦下諭監司, 使訪問能爲救荒者, 以其節目, 曉諭列邑, 俾爲模範可矣。" 上曰: "監司守令, 盡心則可也。" 殷輔曰: "鹽菜移轉賑民, 亦荒政所不廢也, 民之受弊, 果如是。 然當其見民之飢, 國家不可不移轉救之也。 各官救荒鹽菜, 合置大處, 而令隣近官往受之際, 路遠有不能往受者, 則督促之。 官屬人多處, 則備人馬以送官, 亦可措也, 如其殘邑, 則不得已發民輸來。 此則雖賢守令, 措置爲難也。 大抵移民移粟, 荒政之先務也, 令民就食于稍稔之地爲當。 前者咸鏡道 魚游澗有賊變, 臣以邊將推考敬差官下歸, 乃壬申年也。 其時咸鏡道, 旱乾尤甚, 民無一粒之粟。 監司尹珣以爲, 官無儲穀, 他無賑救之術, 使民就食於稍稔之處, 而還來本土爲便。 設使流離不還, 不可坐待其死也, 不禁其出去。 其時朝議以爲, 監司當各於其處賑救, 而令民出去則非也, 將欲駁遞, 而終不遞之。 其後爲盜直, 不令出去, 則飢餓之民, 扶老携幼, 倚傍樹根而死者, 相望。 是以咸鏡道人民, 壬申年死亡殆盡矣。" 掌令鄭彦慤曰: "國家設科取士, 其法至重。 近日居館儒生, 月講爲通者, 置簿給分數于會講云。 若講得四書三經, 則其儒以此爲及第矣。 會講之時, 定試官, 臺諫, 坐于帳外事甚重矣。 此給分於會講, 則科擧之公道廢矣。 法立之初, 雖爲無私, 終皆用情, 何可禁也? 祖宗朝, 苟有立法, 必報府署經。 今者法立, 而不爲署經, 至爲未便。" 上曰: "新立其法, 則當報府署經。 大抵立一法, 而生一弊矣。"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64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63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법제(法制) / 왕실-경연(經筵) / 외교-명(明) / 구휼(救恤) / 보건(保健) / 재정-국용(國用) / 호구-이동(移動) / 교통-육운(陸運) / 교통-수운(水運)
- [註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