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의 재변으로 변방의 일을 논의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요사이 충청도의 해의 변괴에 관한 도형(圖形)을 보건대 지극히 놀랍고 두렵다. 재변은 반드시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닌데, 흰 기운은 병란(兵亂)의 형상이다. 평안도의 오랑캐들을 구축(驅逐)하는 일은 이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퍼지게 되기 전에 구축해야 뒤폐단도 없게 될 듯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먼저 흔단(釁端)을 여는 것은 불가하다. 피인(彼人)들이 현재 심하게 난동(亂動)하지도 않는데 우리가 먼저 흔단을 만든다면 나중에 변방의 근심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 싶다. 구축 하지 않는 것도 불가하고 구축하기도 또한 곤란하니 대신들은 모름지기 다시 의논하라. 이로 인해 반드시 변란의 흔단이 생기게 되리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먼저 발동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정언(正言) 이수경(李首慶)이 아뢰기를,
"피인들이 그 땅을 이롭게 여겨 와서 사는 것이고 변방을 침범하는 짓을 하는 것은 아닌데 무찔러 모두 없앤다면, 이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깊숙한 고장의 야인(野人)들, 혹은 그의 사돈(査頓) 혹은 그의 족속(族屬)이 그 무리가 자못 번다하므로 뒷날에 근심거리가 없지 않게 될 것인데, 만일 구축하다가 되지 않아 사세가 서로 싸우게 된다며 반드시 모두 섬멸한 다음에야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영사(領事) 홍언필(洪彦弼)이 아뢰기를,
"신은 비록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중의(衆議)를 들어보건대 내버려 두는 것은 불가합니다. 또한 이는 서로 싸우게 되는 경우와 같은 것도 아니고 또 건너편의 것을 구축하는 경우와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와서 사는 것이 처음에는 단지 3호(戶)였다가 이제는 9호가 되었으니, 올해에 구축하지 않았다가 내년에는 흉년이 들어 역시 구축하지 못하여, 10여 호, 20여 호가 된다면 반드시 당초에 구축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은 흔단을 여는 것이 온편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마는,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구축하는 것이 온편하고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윤희평(尹熙平)이 아뢰기를,
"임투(林投)에 살던 사람들은 만포(滿浦)와의 거리가 50리가 되었습니다. 성종조(成宗朝)에 김무상합(金武上哈)·박고리(朴古里)·동약합(童若哈) 세사람이 와서 살았었는데, 임자년과 계축년 사이에 성종(成宗)께서 유시(諭示)를 내려 들어가도록 하였지만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김윤제(金允濟)가 능히 그 사람들을 들어가게 하였으므로 특별히 상으로 가자(加資)를 내렸었습니다. 신이 계축년에 한량(閑良)108) 으로 부방(赴防)109) 나갔다가 들은 것으로는, 당초에 그 사람들이 호주(胡州)로 들어가므로 국가에서 제대로 들어간다고 여겨 특별하게 우대하고 상까지 주었었는데, 그 뒤에 좌위(左衛)가, 협호(夾戶)살이110) 는 임의(任意)로 농사지어 먹을 수 없어 생활하기가 역시 어렵다는 것을 들어 도로 그전에 살던 데로 돌려보내며 ‘비록 그 변방의 땅은 모두 오래 버려 둔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일구어 농사 짓지 못하겠는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고, 홍언필이 아뢰기를,
"건너편에 살면서 이 편에 와서 농사짓는 일은 그전에도 역시 있었습니다마는 우리 땅에 와서 사는 일은 일찍이 있지 않았습니다."
하고, 윤희평이 아뢰기를,
"이번에 들여보내겠다는 뜻으로 타이르다가 혹시 그들이 감히 항거하게 된다면 마땅히 쏘아 죽여야지 어떻게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처자(妻子)는 비록 사로잡게 된다 하더라도 진실로 쓸 데 없는 일이고, 잡아다가 서울 안에 가두어 놓고 먹이는 것도 또한 곤란한 일이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우리 나라의 사정을 알게 만드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만약 너무 가까운 지역에서 살고 있다면 구축하는 것이 가합니다마는 비록 지금 구축한다 하더라도 다시 오게 되지 않겠습니까. 내버려 두고 말하지 않은 지가 이미 20여 년이나 되는데, 구축하러 왔다갔다 하는 동안에 우리 군사만 실패하게 될까 싶습니다. 지난 날에 이함(李菡)이 실패하게 된 것도 역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집의(執義) 윤원형(尹元衡)이 아뢰었다.
"장죄(贓罪)111) 는 전부터 무겁게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조심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고을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장죄를 범한 사람이니 어찌 죄주어야 할 자가 없겠습니까. 대저 지금 사람들은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으므로 인정만 앞서고 법은 시행되지 못합니다. 대간(臺諫)에 있어서도 혹시 남의 과오나 허물을 말하게 되면, 사람들이 모두 험악하다고 지목하므로 이 때문에 모두들 남의 과오를 말하려 하지 않고 되어 가는 대로 범범하게 합니다. 이 폐단은 작은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는 반드시 점차로 위망하게 되어 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5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사법-탄핵(彈劾)
- [註 108]한량(閑良) : 무관(武官)이 될 수 있는 신분을 가진 자로서, 아직 무과(武科)에 응시하지 않았거나 또는 급제하지 못한 사람.
- [註 109]
부방(赴防) :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수자리하는 것.- [註 110]
협호(夾戶)살이 : 남의 집 협호(본채와 떨어져 있어서 딴 살림을 하게 된 집)를 빌어서 사는 사람.- [註 111]
장죄(贓罪) :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한 죄. 뇌물을 받았거나 법을 농간하여 차지했거나 문서를 위조하여 얻었거나, 또는 여타의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자신이 소유했건 남에게 주었건 간에 모두 장죄가 된다.○乙巳/御朝講。 上曰: "近見忠淸道日變圖形, 至爲驚懼。 災變必不虛生, 而白氣, 兵象也。 平安道驅逐之事, 此非起兵, 及其不滋蔓而逐之, 似無後弊, 然我國先開釁端, 不可也。 彼人時未梗亂, 而我先搆釁, 則恐邊患終何如也。 不逐之不可, 逐之亦難。 大臣等須更議之。 非謂因此必出變釁, 然在我先動, 爲何如?" 正言李首慶曰: "彼人利其土地而來居, 不爲犯邊, 而至於殄殲, 則非徒此人等, 彼深處野人, 或其査頓, 或其族類, 厥類頗(煩)〔繁〕 , 不無後日之患。 若不得驅逐, 而勢至相戰, 則必須盡殲, 然後乃已。" 領事洪彦弼曰: "臣雖不知, 聞諸衆議, 棄之則不可。 且此非如相戰, 亦非如越邊之逐也。 彼之來居, 初只三戶, 今至九戶。 今年不逐, 而來歲凶荒, 亦不能驅逐, 至於十餘戶、二十餘戶, 則必悔其當初不爲驅逐也。 侍從、臺諫以爲, 開釁未便, 然於臣之意, 逐之便當。" 特進官尹熙平曰: "林投居人, 距滿浦五十里。 成宗朝, 金武上哈、朴古里、童若哈三人來居, 壬子、癸丑年間, 成宗諭使入歸而不肯。 金允濟能使其人等入歸, 特給賞加。 臣癸丑年, 以閑良赴防而聞之。 當初其人等, 入歸胡州, 國家謂能入歸, 優對賞給。 其後左衛, 以夾戶不能任意耕食, 生理亦難, 復還舊居。 雖曰此邊地皆久棄, 豈不耕稼乎?" 彦弼曰: "居越邊而來耕此邊, 古亦有之, 來居我土之事, 曾未之有也。" 熙平曰: "今諭以入送之意, 而彼若敢拒, 則當射殺矣。 其人等何能捕捉乎? 妻子則雖可捉而生擒, 誠爲虛事也。 捉來而拘囚於京中, 饋之亦難, 且使知我國之事, 甚爲不可。 若居切迫之地, 則逐之可也, 今雖逐之, 其不復來乎? 置而勿問, 已爲二十餘年。 來往驅逐之間, 恐徒敗我軍也。 前日李菡之敗, 亦以此也。" 執義尹元衡曰: "贓罪, 在昔爲重, 故人皆畏戢。 今在列郡者, 皆爲犯贓之人, 豈無可罪者乎? 大抵今人, 不喜言人過失, 情勝而法不能行。 至於臺諫, 或言人之過愆, 則人皆指以爲險, 以是皆不欲言人之過, 悠悠泛泛。 此弊不小, 終必漸至危亡而不可救也。"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5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사법-탄핵(彈劾)
- [註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