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의 재변과 변방의 일에 대하여 의논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요사이 재변이 겹쳐 생기는데, 태백이 주현하고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으니 이는 병란(兵亂)의 형상이다. 대신들이 모두 중국의 일을 염려하고 우리의 서쪽 변방을 걱정하면서 ‘평안할 적에도 위태함을 잊지 않아야 하는 법이니 무력(武力)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었다. 비록 변방에 흔단이 없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환란을 생각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지금은 변방의 흔단이 이미 나타났으니, 구축(驅逐)할 모든 준비를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참찬관(參贊官) 이준경(李浚慶)이 아뢰기를,
"서방(西方)의 구축하는 일을 무사(武士)들은 모두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이 깊이 우려하고 있는 것은, 해의 변괴가 서방에서 생겼는데 백기(白氣)는 병란(兵亂)의 형상인 법이니 사태가 마침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축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먼저 흔단을 열면 끝내는 반드시 환난(患難)이 있게 되는 것이라, 한번 흔단이 열리면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여 화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준경이 아뢰기를,
"토벌하여 내쫓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평안도의 강변(江邊)은 비록 풍년이 들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첫들머리는 매우 부실(不實)합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굶주리는 때에 당하여 중국에서 소식이 있게 되어, 조금 여물었다 하여 군사를 출동 한다면, 피인(彼人)들이 당인(唐人)099) 들과 내통하게 되고 또한 해(害)를 입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됩니다.
이런 뜻으로 본관(本館)이 상소하려고 하다가, 토벌하여 내쫓는 일은 그때 마땅히 비밀스럽게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쓸데없이 전파만 하게 될까 싶어 그만두었습니다. 또, 그곳에 와서 사는 사람들이 겨우 10여 집이라 하니, 비록 3∼4년을 기다렸다 하더라도 반드시 크게 퍼지지는 않을 것이니 군사를 출동하여 토벌하여 내쫓는 것은,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닌 듯싶습니다."
하고, 영사(領事) 윤인경(尹仁鏡)이 아뢰기를,
"요사이 지진과 해의 변괴가 잇달아 겹쳐 일어나는데 반드시 공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니, 성상께서 마땅히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셔야 합니다. 중국에서의 소식이 이와 같으니 서방의 방비하는 일을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북도(北道)의 성(城) 밑에 와서 사는 야인(野人)들은 국가에서 도움받는 것이 매우 많으므로 변이 쉽사리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마는, 서방은 각진(各鎭)을 배설(排設)한 그 사이에 옛적에는 긴 담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수축(修築)을 하지 않아 단지 담장의 터만 남아 있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는 야인들이 가까운 지역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수축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건너편에 와서 사는 자가 매우 번성하여 지극히 허술합니다. 비록 수축하려고 하더라도 힘이 또한 부족하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또한 건너편에 와서 사는 자는 동상시(童尙時)의 자손들인데 비록 여러 차례 타일러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변장(邊將)들이 장차 구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정병(精兵) 3백 명으로 사흘 밤을 지내며 구축한다면 노약(老弱)들은 비록 미처 도망가지 못하더라도 장정들은 반드시 군마(軍馬) 소리를 듣고 산으로 올라가 도망하게 될 것이니, 노약들을 사로잡아 위엄을 보인 다음에 타일러 돌려보낸다면, 싸움을 하지 않고도 할 수 있다고들 했는데, 이 의논이 합당한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또한 이치에 닿는 듯합니다."
하고, 이준경이 아뢰기를,
"해마다 지진이 번번이 겨울철에 일어납니다. 변괴가 생기는 것이 어떤 일에 응험하여 일어난 것인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한서(漢書)》 오행지(五行志)에 ‘신하의 도리가 비록 올바르다 하더라도 제멋대로 하게 되면 지진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아랫사람들은 하나도 제멋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요사이 성상께서 성상의 결단으로 하는 일이 없고 무릇 일이 있으면 매양 대신들과 의논하는데, 비록 널리 의논해서 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어찌 소소한 일들을 반드시 대신들에게 물을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성상의 덕이 지극히 커서 독단(獨斷)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마는, 문무(文武)를 권면 장려하는 일 같은 것도 또한 모두 준례대로 중론(衆論)을 채택하여 하고 성상께서 성상의 결단으로 특별히 권장하는 방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解弛)되어 고무(鼓舞)되는 기미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권면 장려하는 일은 반드시 성상께서 독단하여 하신 다음에야 아랫사람들이 깊고 깊은 특은(特恩)에 감격하여 고무되고 진작(振作)하는 기미가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의논할 일이 있을 적에는 언제나 육조(六曹)의 참의(參議)들도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에 참예(參預)하게 하는데 이는 합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비록 같이 참예하더라도 가령 각각 품고 있는 생각을 진달(陳達)하게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말석(末席)에 참예하고 있어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은 오직 위에 앉아 있는 품계(品階)가 높은 사람들의 뜻만 살펴 보다가 마침내는 뇌동(雷同)100) 하기나 하고 끝내 별달리 말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도 전번에 남방(南方)에 갔다 온 이후로 왜인(倭人)들의 사정을 안다고 하여 역시 따라가 참예하여 의득(議得)하도록 되었는데, 국가의 체례(體例)가 매우 구차한 일이었습니다. 그때에 마음에는 아뢰고 싶었지만 사세가 몰리게 되기 때문에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빈청에서 의득할 적에도 보니, 대신들이 모두 변방의 일을 알지 못하므로 매양 한두 무신(武臣) 【황종(黃琮)·장언량(張彦良).】 에게 물었었습니다.
대저 사람의 소견(所見)은 각각 다르고 처치하는 방략(鈁略)도 또한 각각 다른 법이며, 유사(儒士)와 무부(武夫)가 꾀하는 생각은 더욱 서로 가깝지 않은 것인데, 일처리를 어찌 무신(武臣)들의 한 마디 말에 따라 하겠습니까. 일 처리가 두루 원만하게 되지 못한 듯 싶습니다.
심사손(沈思遜)이 만포(滿浦)에서 죽은 뒤로 변장(邊將)들을 모두 무신(武臣)으로 임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문사(文士)들 중에 궁마(弓馬)101) 의 재주가 있는 사람을 가리어 자주 변방에 보내되 더러는 어사(御史)로 삼기도 하고, 더러는 경차관(敬差官)으로 삼기도 하여, 때로는 납의(衲衣)102) 를 가져다 주기도 하고 군장(軍裝)을 점열(點閱)하기도 하며 늘 변방의 요새(要塞)에 드나들어 변방의 사정을 알고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뒷날 묘당(廟堂)의 윗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일 처리와 방략(方略)이 반드시 합당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두 무사와 상대하여 의논하기를 마치 성인(聖人)을 대한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하고, 윤인경이 아뢰기를,
"그 말이 지당합니다. 신과 같은 사람은 전혀 변방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송(宋)나라 때에는 유사(儒士)들이 모두 변방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범중엄(范仲淹)103) 과 같은 유자(儒者)가 모두 장수의 소임을 맡았던 것입니다. 단지 무신(武臣)으로만 장수의 소임을 삼을 것이 아니라 비록 문사라 하더라도 배양(培養)하여 소임을 맡긴다면 또한 방어(防禦)를 잘못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변방 일을 의논해 보면 대신들은 변방 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변방 사정을 잘아는 재상(宰相)은 비록 품계가 낮다 하더라도 매양 따라가 참예하도록 한 것이다. 과연 그 한두 무사의 말만 듣고서 처치하는 것은 사체에 이상하니, 마땅히 문관을 더러는 어사를 삼고 더러는 경차관을 삼아 자주 변방에 보내도록 한다면, 앞날에 변방일을 의논할 적에 매우 유익할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5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외교-야(野) / 과학-천기(天氣) / 군사-군정(軍政)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註 099]당인(唐人) : 중국 사람.
- [註 100]
뇌동(雷同) : 주견없이 남의 의견에 따름.- [註 101]
궁마(弓馬) : 무예(武藝)를 뜻함.- [註 102]
납의(衲衣) : 솜 따위를 두껍게 넣어 중의 장삼처럼 만든 방한복(防寒服).- [註 103]
범중엄(范仲淹) : 송대(宋代)의 장상(將相)이자 학자. 자는 희문(希文), 시호는 문정(文正). 변방에 있을 적에 오랑캐들이 감히 침범하지 않으며 ‘그의 가슴 속에는 수만의 갑병(甲兵)이 들어있다.’고 했었다. 《송사(宋史)》 권314.○辛丑/御朝講。 上曰: "近日災變疊出, 太白晝見。 白虹貫日, 此兵象也。 大臣皆以中原爲慮, 以西邊爲憂, 而曰: ‘安不忘危, 武不可不備。’ 雖無邊釁, 亦當思患, 況今邊釁已著, 驅逐諸備, 不可不預慮。" 參贊官李浚慶曰: "西方驅逐事, 武士皆易言之, 臣之所深憂者, 日變出於西方, 而白氣, 兵象也, 恐其事終何如也。" 上曰: "驅逐之事, 不可不爲, 然先開釁端, 終必有患。 其釁一開, 所關至重, 其禍不知何如也。" 浚慶曰: "討逐, 不可已也, 然平安道江邊, 則雖曰不稔, 初面甚爲不實。 當此百姓飢荒, 中原有聲息時, 以謂稍稔而擧兵, 則恐彼人與唐人交通, 而且有受害之事也。 此意館中欲疏, 而討逐之事, 時當秘密爲之, 故恐徒爲騰播而止耳。 且彼處來居之人, 僅十餘家云。 雖待三四年爲之, 必不至大滋蔓。 擧兵討逐, 今則恐非其時也。" 領事尹仁鏡曰: "近者地震、日變, 相繼疊出, 必不虛生, 自上宜當恐懼修省。 中原聲息若此, 西方防備之事, 亦可重念。 我國北道, 則城底來居野人, 仰資於國甚多, 變不易生也。 西方則各鎭排設兩間, 古有長墻, 而今者不得修築, 只有基址。 祖宗朝則野人不居近地, 故不爲修築, 而今則越邊來居者甚盛, 至爲虛踈。 雖欲修築, 力且不足, 何以爲之? 且越邊來居者, 童尙時子孫, 而雖屢開諭, 不肯入去, 故邊將欲爲驅逐。 若以精兵三百, 經宿三夜而驅逐, 則老弱雖未及出走, 壯者必聞軍馬之聲, 登山逋遁, 則生擒老弱, 以示其威, 然後開諭還送, 不爲爭戰而可爲云。 不知此議之當否, 亦或近理也。" 浚慶曰: "連年地震, 每在冬月。 變怪之出, 不知應在何事, 《漢書》 《五行志》曰: ‘臣道雖正, 專則震。’ 今者下人無一毫專擅之事, 近來自上, 但無聖斷之事, 凡有事, 每議大臣。 雖曰廣議而爲之, 豈小小之事, 必詢諸大臣耶? 聖德至大, 而但無獨斷之事。 如文武勸奬之事, 亦皆循例以採衆論, 而自上無聖斷特勸之道, 故人心解弛, 而無皷動之氣。 如此勸奬之事, 必自上獨斷爲之, 然後在下之人, 感激於特恩之深, 而有皷舞振作之氣也。 且時有議事, 皆令六曹參議, 亦與議於賓廳, 此似不當也。 雖曰同參, 若各陳其所懷, 則豈不爲美? 渺然居參末席者, 唯視坐上秩高人意, 終然雷同, 竟無別言之人, 此何如也? 臣頃自南方往來之後, 以知倭事, 亦令隨參議得, 國體甚爲苟且。 其時意欲啓之, 事逼於臣, 故不敢也。 前日議得時, 於賓廳見之, 則大臣皆不知邊事, 故每問於一二武臣。 【黃琮、張彦良。】 大抵人之所見各異, 而處置方略, 亦各有異也。 儒士、武夫之計意, 尤不相近, 則處事, 豈宜委之於武臣之一言而爲之乎? 恐其處置之不能周遍也。 自沈思遜死於滿浦之後, 邊將皆用武臣矣, 然當擇文士中稍有弓馬才者, 累遣邊方, 或爲御史, 或爲敬差官, 有時傳給衲衣, 點閱軍裝, 常常出入邊塞, 使知邊事然後, 他日坐廟堂之上, 則其人之方略處事, 必得其宜矣。 今則無如此之人, 故對議一二武士, 有如聖人也。" 仁鏡曰: "此言至當。 如臣專不諳邊事。 宋朝儒士, 皆出入邊方, 故如范仲淹之儒, 皆爲將帥之任。 不但以武臣爲將帥之任, 雖文士, 培養委任, 則且無失禦之時也。" 上曰: "有議邊事, 則大臣不知邊事, 故知邊事宰相, 雖秩卑, 每令隨參。 果如聽此一二武士之, 言而處之事體有異。 宜令文官, 或爲御史、敬差官, 數遣邊方, 則他日議邊之事, 甚有益也。"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5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외교-야(野) / 과학-천기(天氣) / 군사-군정(軍政)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註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