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사의 서장관 이안충이 돌아와 상이 인견하다
천추사(千秋使) 【이희옹(李希雍)인데 죽었다.】 의 서장관(書狀官) 이안충(李安忠)이 서울에 들어와 숙배(肅拜)하니 상이 사정전에서 인견하였다. 이안충이 아뢰기를,
"들어갈 때 요동(遼東)에 이르자 어사(御史) 호문거(胡文擧)의 사인(舍人)이 통사(通事) 김기(金驥)에게 와서 하는 말이 ‘협강(夾江) 땅의 경작(耕作)을 금단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사의 힘이 컸다. 전에 신순(申洵)이 돌아갈 적에 마땅히 사례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당부했었는데 지금까지 하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당신의 나라 임금에게 고하여 속히 사례를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개 어사의 뜻을 전하는 말일 것입니다. 장인 대인(掌印大人)이 화연(畫硯) 4개와 주육(酒肉)을 신의 일행에게 청하기에 일행의 것을 뒤지어 벼루와 어육(魚肉)을 보내주었더니, 장인 대인이 큰 벼루 2개만 가려서 가지고 작은 벼루 2개는 도로 보내면서 다른 좋은 벼루로 바꾸어 오라고 하기에 신이 즉시 바꾸어 보냈더니 받았습니다. 일행의 짐 부대와 건량(乾糧)을 실은 수레를 장인 대인이 주관하여 내주게 되는데, 수레 25량을 내주면 싣고 갈 수 있겠다고 청했더니 단지 20량만 주었습니다. 다시 짐은 많은데 수레가 적다고 청했으나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뜻을 보건대 인정(人情)을 받으려는 것이기에 드디어 인정을 주고서야 23량의 수레에 싣고 광녕(廣寧)에 당도했습니다.
광녕의 어사(御史)는 본디 3대인(大人)들이 법 어기는 것을 규찰(糾察)하는 사람인데, 일찍이 대인들이 수레를 가지고 술책을 쓴다는 것을 듣고 신 일행이 당도하기도 전에 먼저 적간하여 수레 수효가 23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요동의 차관(差關)에는 30량으로 써넣은 것을 고찰해 내어 드디어 반송(伴送)453) 을 잡아다가 묻기를 ‘이 일행의 수레 수가 단지 23량뿐인데 어찌하여 차관에는 30량이라고 하였는가?’ 하니, 반송이 답변하기를 ‘당초에는 30량에 싣고 오다가 도중에 수레를 모는 사람의 수가 적어져서 23량에다 합쳐 실었다.’고 했습니다. 어사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다시 관원을 시켜 짐바리의 중량을 자세하게 살피도록 하자, 반송은 사단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인정쓰는 물건을 구해 뇌물을 쓰려고 창황하게 쏘다녔었는데, 어사가 수량을 덧붙이어 술책 쓴 것을 알았기 때문에 30량으로 기록한 것 중에서 5량을 감했습니다. 그전에 듣건대 요동에서 수레 수효를 덧붙이어 그만한 대가를 받아내어 대인(大人)이 반송(伴送)과 나누어 쓴다고 했었는데, 이번에 이처럼 틀리는 것을 보니 그 말이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안산(鞍山)의 수보관(守堡官)은 성명이 양융(楊戎)이었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그곳은 인심이 지극히 험악하다고 하므로 일행이 근심했었는데, 그곳에 당도했다가 떠나올 적에 성문(城門)을 닫아 놓고 인정을 요구하였는데 그들이 바라는 대로 준 다음에야 내보냈습니다. 돌아올 적에 또한 그곳에 당도했는데 관원들의 소위를 아랫사람들도 본받아, 일행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주지 않는다고 까닭 없이 마구 구타했었고 또한 성문을 닫아 놓고 내보내지 않다가 인정을 준 다음에야 드디어 내보냈습니다. 안산(鞍山)에는 말[馬]이 없으므로 요동의 말을 하루전에 모아놓았었는데, 즉각 내주지 않고서 물목(物目)을 기록하여 인정을 요구하다가 물목의 수량대로 준 다음에야 사람과 말을 내주었습니다.
신들이 북경(北京)에 이르러 진헌(進獻)할 방물(方物)을 예부(禮部)에 바치자 하인(下人)들이 방물의 겉을 싼 종이와 사이에 끼운 종이를 모두 사사로이 쓰려고 빼갔습니다. 진헌하는 인삼(人蔘)도 근수(斤數)가 있어 큰 저울로 달아 중량을 정한 것인데, 하인들이 작은 저울로 나누어 달아 여러 번을 가져다 달므로 근수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통사 김기(金驥)가 ‘큰 저울은 온 천하가 통용하는 것이니 큰 저울로 달기 바란다.’ 했지만 끝내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수량을 보충할 인삼은 으레 따로 싸는 것인데, 그 사람들이 견양(見樣) 인삼이라 하며 각자 나누어 쓰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김기가 ‘인삼을 진헌할 때 만일 수량이 차지 않으면 이로써 보충하는 것이다.’고 했지만 역시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진헌물을 우리 나라 사람들 자신이 바치게 하고는 여러 차례를 챙겼는데 인정(人情)을 준 다음에야 무사히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돌아올 적에 광녕(廣寧) 총병관(總兵官)이 활 4장(張)과 매화쇄어피(梅花碎魚皮) 10장을 요구하고서 하정(下程)454) 을 보내었습니다. 이전부터 준례가, 하정을 보내오면 반드시 회사(回謝)하는 예를 차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김기를 시켜 인정을 가지고가 사례하게 했더니 ‘요구한 활과 어피를 위에 주달(奏達)하여 들여보내게 해달라.’ 하였습니다. 김기가 답변하기를 ‘말로써 위에 주달하기는 어려우니 글로 써서 주면 가지고 가서 위에 주달하겠다.’고 하니, 총병관이 ‘앞서 보낸 요구하는 물목도 반송(伴送) 오필승(吳弼承)에게 주어 요동(遼東)의 진무(鎭撫) 고숭(高嵩)에게 전하여 당신의 나라에 전해 보내 주달하게 했었다.’고 하고 써주지 않았습니다. 요동의 3 대인(大人) 서부(徐府)도 안장(鞍粧) 1건을 요구했습니다.
서반(序班)455) 손벽(孫碧)이 우리 일행을 호송하고 왔는데 손벽은 나이가 젊고 협기(俠氣)가 많았습니다. 맥태감(陌太監)의 조카라고 자칭했었는데 맥태감은 현재 용사(用事)하는 사람입니다. 전례가 일행을 호송하고 가는 서반에게는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대접해 왔기에 우리 일행도 마련하여 대접하려고 했었는데 손벽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침해하여 뜯어내려고 하여 먹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전부터 서반인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침해하여 뜯어내려고 하여 산해관(山海關)에 당도하게 되면 금지품(禁止品)을 규찰한다는 핑계로 겹날 칼과 긴 송곳을 가지고 일행의 무역한 물건을 담은 농(籠)과 옷 담은 농을 모두 쑤셔 보고 찢어 보고 하므로, 일행은 공무역(公貿易)한 것이 부수어질까 두려워하여 미리 인정쓸 물건을 준비했다가 주었습니다. 신 일행도 다소 인정쓸 물건을 준비했었지만 만일 금법(禁法)을 범하게 되었으면 또한 반드시 애걸(哀乞)했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에 금단(禁斷)하는 물건이 없으면 애걸할 것이 없겠기에, 궁각(弓角)·상모(象毛) 등의 물건은 위에 주달(奏達)해 본 다음에 다시 무역하려고 이번에는 무역해 오지 않았고, 명박 영자(明珀纓子) 및 도련 아청(擣鍊鴉靑)·회회청(回回靑) 등의 물건도 무역해 오지 못했으며, 호박(琥珀)·독활(獨活)·마아초(馬牙硝) 등의 물건도 무역해 오지 못했습니다. 육두구(肉荳蔲)는 남방(南方)의 교지(交趾)에서 나는 것인데 요사이 중국과 교지가 서로 통(通)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물건들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신 이희옹(李希雍)은 들어가게 된 때부터 기운이 쇄약했었고 길을 떠나던 날에는 갑자기 이질(痢疾) 증세가 생겨 겨우 숙배(肅拜)를 했었습니다. 의주(義州)에 당도하여 머물면서는 그의 기운이 더욱 약해지므로 일행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근심했습니다. 요동에 이르러서는 먹지도 못하여 단지 물만 마셨고 부증(浮症)이 생기므로 겨우 치료하는 약을 구하여 조금 괜찮아지므로 길을 떠났습니다. 가다가 탕참(湯站)에 이르러 날 꿩고기를 먹고 나서 목에 갈증이 나는 참에 또한 된 죽을 마시다가 목구멍이 갑자기 막히어 기색이 즉각 달라졌습니다. 이때 의원을 부를 틈이 없기에 신이 소합원(蘇合元)을 갈아 먹였었지만 약도 삼키지 못한 채 기운이 끊어져 소생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가 지금도 조회를 보지 않던가?"
하니 이안충(李安忠)이 주대(奏對)하였다.
"조회 보지 않은 지 여러해라고 했습니다. 권신(權臣) 곽훈(郭勛)을 잡아 가두고 조율(照律)한다는 것이 문견 사건(聞見事件)에 실려 있습니다. 일죄(一罪)로 조율하여 입주(入奏)했지만 발락(發落)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올 적에 길에서 들으니 사형을 감하여 말 8천 마리를 징속(徵贖)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무슨 일의 통보(通報)를 으레 옥하관(玉河館) 문에서 했기 때문에 인정을 준비하였다가 주면 쉽게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주사(主事)가, 외국 사람들이 듣고 보고 하는 곳에서 통보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북궐(北闕)에서 통보하기 때문에 듣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 전해 듣건대, 구묘(九廟)의 일은 한림 학사(翰林學士)를 남경(南京)에 보내어 위판(位版)의 이름 차례를 써 온 다음에 구묘를 짓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537면
- 【분류】외교-명(明)
- [註 453]반송(伴送) : 따라가는 사람.
- [註 454]
하정(下程) : 사신(使臣)이 사관에 도착하면 보내주는 주식(酒食) 등 일상 수요 물품.- [註 455]
서반(序班) : 대외 관계를 맡아보던 홍려시(鴻臚寺)나 외국 사절의 숙소인 회동관(會同館) 등에 소속되어 외국 사절의 안내와 접대 등을 맡아 보는 관원.○己卯/千秋使 【李希雍身死。】 書狀官李安忠, 入京肅拜, 上御思政殿引見。 安忠曰: "入歸時到遼東, 則御史胡文擧之舍人, 來言於通事金驥曰: ‘夾江禁耕之事, 御史之力居多。 前日申洵還歸時, 寄言當行謝禮之意, 而至今不爲。 須告汝國王, 速行謝禮’ 云。 蓋傳御史之意也。 掌印大人, 求請畫硯四面及酒肉於臣之行, 搜于一行, 硯面魚肉贈送, 則大人擇取大硯二面, 而還送小二面曰: ‘換他好硯更來。’ 臣卽換送則受之矣。 一行包子乾糧之物所載車兩, 掌印大人, 專掌抄發, 故請發車子二十五兩, 則可以載歸, 而只給二十兩, 更以載重而車小爲請, 則不肯給之。 觀其意, 欲得人情也。 遂給人情, 然後載得二十三車, 而行到廣寧, 廣寧御史, 本糾察三大人不法之事。 曾聞大人車兩用術之事, 臣行未到之前, 先自摘奸, 以知二十三兩之數, 而且考遼東差關, 則以三十兩書塡。 遂捉致伴送問之曰: ‘此行車兩之數, 只二十三, 而於差關何如是三十耶?’ 伴送答曰: ‘初以三十兩載來, 而前路車子數小, 故合載二十三車’ 云。 御史不信其言, 更使官員, 詳察卜駄輕重。 伴送恐其生事, 求人情之物而欲賂, 蒼黃奔走。 御史知虛張其數用術之事, 故於三十兩內, 減五兩矣。 前聞遼東, 虛張車數, 以捧其價, 大人與伴送分用, 而今見違錯, 則其言果然矣。 鞍山守堡官, 楊戎其名也。 曾聞其處, 人心極惡, 一行憂之, 比到其地臨發, 閉城門求人情, 如願給之, 然後出送。 回還時, 又到其地, 其官所爲, 下人效之, 一行之人, 以不給人情, 無端亂打, 又閉門不出, 遂給人情, 然後出送。 鞍山無馬, 故遼東之馬, 前一日已聚, 而不卽給之, 書物目而索人情, 依其數給之, 然後出給人馬。 臣等至北京, 進獻方物, 呈禮部, 下人等, 方物外裹之物及隔紙, 皆拔取私用。 進獻人參, 有斤數, 而以大衡稱量爲准, 而下人以小衡, 分累運稱量, 其數爲縮。 通事金驥曰: ‘大衡天下通用, 請以大衡稱量’ 云, 竟不聽焉。 補數人參, 例爲別齎, 而其人等以爲見樣人參, 而欲各分用。 金驥曰: ‘此人參, 進獻若不准其數, 則以此補之也,’ 亦不聽焉。 令我國人自獻, 而累次推捉, 給人情, 然後無事納之。 回還時, 廣寧摠兵官, 弓四張、梅花碎魚皮一十張求之, 而送下程焉。 前例送來下程, 則必修回謝之禮, 故令金驥持人情往(射)〔謝〕 , 則所求弓張與魚皮, 令上達入送云。 金驥答曰: ‘以言上達爲難, 書給文字, 則欲持歸上達’ 云, 摠兵官曰: ‘前送求請物目, 付伴送吳弼承, 傳于遼東鎭撫高嵩, 令傳送汝國上達’ 云, 而不書給也。 遼東三大人徐府, 亦求鞍子一件。 序班孫碧, 護來我行, 而碧年少多俠氣, 自稱陌太監之姪云。 太監, 當時用事之人也。 前例護行序班, 備酒肉饋之, 故一行欲設辦饋之, 則碧欲侵毒我國之人, 不來食焉。 在前序班之類, 侵漁我國之人, 到山海關, 則以糾察禁物爲名, 而持二刃刀及長錐, 一行貿易之籠及衣籠, 皆衝剌斫破。 一行之人, 畏其公貿之破, 預備人情之物以給之。 臣之行, 少備人情之物, 而若犯禁, 則必且哀乞, 臣等以爲, 無禁物則無可乞之事, 故如弓角, 象毛等物, 欲上達後更貿, 而今不貿來也。 明珀纓子及擣鍊鴉靑、回回靑等物, 無之故未得貿來, 琥珀、獨活、馬牙硝等物, 亦未得貿來。 肉豆蔲, 出於南方交址之國。 中國, 近與交址不相通, 故無此物云。 使李希雍入歸時, 其氣衰弱, 啓行之日, 奄發痢證, 僅爲肅拜。 到留義州, 其氣尤弱, 一行以不得生還爲憂, 至遼東, 不能食, 只飮水, 浮證亦發, 僅得救藥, 小歇而行。 行到湯站, 旣食生雉, 喉渴之際, 又飮濁粥, 咽喉遽塞, 氣色卽異, 時無招醫之暇, 臣躬磨蘇合圓以飮之, 則藥亦不得下, 而氣絶不蘇。" 上曰: "皇帝至今不視朝乎?" 安忠對曰: "不視朝累年云。 權臣郭勛, 囚禁而照律事, 載於聞見事件矣。 以一罪照律入奏, 而未知發落。 來時聞之於路, 則減死而徵贖馬八千匹云。 前者通報, 例於玉河館門爲之, 故給人情則易得聞之矣。 今則主事, 以爲外國聞見之處, 爲之不當, 故於北闕爲通報, 而未易得聞矣。 且傳聞九廟之事, 遣翰林學士於南京, 書位版名次而來後, 始造九廟云。"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537면
- 【분류】외교-명(明)
- [註 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