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래의 폐단을 사헌부가 상소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급제(及第)하여 출신(出身)하는 것은 곧 선비가 벼슬길에 들어가는 처음이므로 마땅히 예모(禮貌)를 삼가고 기개(氣槪)를 양성하여 임용(任用)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체 신래(新來)라 이름하여 멋대로 침학(侵虐)하기를,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온 낯에 오물을 칠하며, 잔치를 차리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없이 하되,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그의 몸을 곤욕(困辱)하는 등 갖가지 추태를 부리고, 아랫사람들을 매질하는데 그 맷독[楚毒]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신래인 사람들이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지공에 대응하기에 바쁘며, 비천(卑賤)하고 오욕(汚辱)스러워 모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들도 달갑게 여기며 해야 합니다. 가져다 쓰느라 허비하는 물건 값이 수만 냥(兩)이 되는데 신진(新進)인 빈한한 선비들이 스스로 마련할 길이 없으면 구걸(求乞)하여 빌려주기를 청하기를 서울이고 외방(外方)이고 할 것 없이 하여, 오직 눈앞의 급한 대로만 하고 염치(廉恥)를 돌보지 않습니다. 그 중에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은 간혹 부유한 장사치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이 일을 의뢰하기도 하니, 몸을 망치고 이름을 떨어뜨리는 짓을 함이 이처럼 심합니다. 또한 침학할 때에는 되도록 가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더러는 겨울철에 물에다 집어넣기도 하고 한더위에 볕을 쪼이게 하기도 하므로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생명을 잃거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 폐해가 또한 참혹합니다.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서 먼저 이런 풍습을 주창했기 때문에 미관 말직(微官末職) 및 잡품(雜品)과 군졸(軍卒) 및 복례(僕隸)와 같은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감찰(監察) 및 법사(法司)의 관원들도 오히려 세속을 벗어나지 못하여 다투어 서로 본받아 하느라 가산(家産)을 모두 탕진하고도 또한 감당해 내지 못하여, 더러는 논밭과 노비를 팔고 더러는 집까지 팔게 됩니다. 폐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데 혹시라도 고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들 ‘신래들의 뻣뻣하고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버려야 한다.’고 말을 하니, 이는 더욱 생각해 보지 않음이 심한 일입니다.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시대를 살펴 보건대, 과거(科擧)로써 선비를 뽑았었지만 신진(新進)인 선비들을 은덕과 영화(榮華)를 극도로 하여 총애(寵愛)하였을 뿐이고 조금도 좌절(挫折)시키거나 모욕을 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의 선비들이 이로 인해 교만하거나 건방져져서 부리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또, 오랑캐인 원(元)나라의 미개한 풍속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 짓은 없었습니다. 다만, 전조(前朝) 말엽에 조정이 혼탁하고 어지러워져 권세 있고 부귀한 집의 자제(子弟)들이 뜻을 얻어 교만하고 방자한 짓을 하므로, 선진(先進)들이 이를 염려하여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류(末流)의 폐단을 막지 못하여 그대로 고질(痼疾)이 되어버린 것을 예사로 보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아서, 우리 동방(東方)의 예의(禮義)의 풍속이 도리어 이와 같은 미개한 풍습이 되어버린 것이니, 매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신래를 침학하는 짓을 금단하는 법이 국가의 《대전(大典)》에 실려 있고, 지난날에 조정에서 또한 거듭 밝히어 통렬하게 금단하라는 영을 자세하고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더욱 심해지기만 하는 것은 한갓 폐단을 금단하라는 영만 있고 신래라는 이름은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들과 선배들 사이에 있어서는 품계(品階) 하나의 차이도 엄격한 것이므로 상하(上下)가 서로 접하게 될 적에 본래 그만한 예절이 있는 법입니다. 진실로 선배들이 도리를 잃지 않는다면 후배들이 누가 감히 예를 범하게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출신(出身)한 사람이나 감찰(監察)의 유에 있어서 신래라는 이름을 없애 버리고 한결같이 선배와 후배의 예절로 대하게 하며, 허참(許參)·면신(免新)416) , 침학(侵虐)·책판(責辦) 등의 일을 일체 혁파하게 하소서. 하물며 올해는 흉년이 매우 심하여 저자의 베 한 필 값이 겨우 곡식 두어 되[升]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는 비록 일푼(一分)의 쓸데없는 허비라 하더라도 모두 금단해야 마땅합니다. 만일 신래라는 이름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책판(責辦)하여 쓸데없이 허비하고 있는 폐단을 법으로도 금단하기 어려울 것이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매우 마땅하다. 과연 이런 폐단 때문에 쓸데없는 허비와 야비한 곤욕(困辱)을 당하는 일이 많이 있는데다, 몸을 상하게 되거나 생명을 잃게 되거나 하는 폐해는 또한 큰 일이다. 이 폐단이 어찌 우연히 생긴 것이겠는가. 단지 한때의 금단만으로는 통렬하게 고칠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이 일을 가지고 따로 승전(承傳)을 받들라."
하고, 이어 정원에 전교하였다.
"간관이 아뢴 말을 가지고 승전을 받들 적에, 무릇 신래에 있어서는 사대부로부터 군졸이나 복례들까지 마땅히 모두 통렬하게 고치도록 하는 사항을 아울러 써 넣어서 승전을 받들라."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532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풍속-연회(宴會)
- [註 416]허참(許參)·면신(免新) : 새로 들어간 벼슬아치가 전부터 있던 관원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 이로부터 상종을 허락하고, 새 관원의 오기를 없애려는 풍습. 10여일 뒤에 다시 면신례를 치러야 비로소 구관원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된다.
○辛酉/憲府啓曰: "及第出身, 乃士人入仕之初, 尤當謹其禮際, 養其氣節, 以待用可也。 今則一切號爲新來, 肆行侵虐, 泥塗沒身, 糞穢滿面, 責設宴會, 飮食如流, 少不如意, 則窘辱其身, 百端醜態, 鞭撻下人, 楚毒難狀。 爲新來者, 晝夜奔走, 應給之不暇, 苟賤汚濁可羞之事, 皆非人類所可爲, 而甘心爲之。 其應用之物, 糜費鉅萬, 新進寒士, 無由自辦, 則丐乞請貸, 無問京外, 唯務目前之急, 不顧廉恥。 其甚不自濟者, 或依贅於富商之家, 以資其事。 失身墜名, 如此之甚。 又侵虐之際, 務爲苛刻, 或冬月入水, 或盛暑曝日, 因以得病, 有至捐生廢疾者, 其害亦慘。 士大夫間, 先倡此風, 故雖微官、雜品、軍卒、僕隷之賤, 無不皆然, 至於監察法司之官, 猶未免俗, 爭相慕效, 盡蕩家産, 亦不堪支, 或賣田土奴婢, 或賣家舍, 其弊至於此極。 如有欲革之者, 則皆以折新來剛銳之氣爲辭, 此尤不思之甚也。 歷觀唐、宋之世, 以科目取士, 其新進之士, 但極其恩榮以寵之, 非有一毫之挫辱, 未聞其時之士, 因此驕蹇難使也。 且以胡元之陋俗, 猶未有此事。 只以前朝之末, 朝廷濁亂, 權貴子弟, 得志驕橫, 先進患之, 因以作俑, 末流難防, 因循痼弊, 恬不知怪, 至使吾東方禮義之俗, 反有如此之陋風, 至爲可羞。 侵虐新屬之禁, 載在國典, 頃來朝廷, 亦申明痛禁之令, 非不詳盡, 而至今不革而愈甚者, 徒有禁弊之令, 而新來之名猶在也。 後進之於先進, 一位嚴於一位, 上下相接之際, 自有其禮。 先進苟無失道, 則後進孰敢犯禮哉? 請自今出身之人, 監察之類, 革去新來之名, 一以先、後進之禮待之, 許參免新, 侵戲責辦等事, 一皆罷之。 況今凶荒太甚, 市布一匹, 僅直數升。 如此之時, 雖有一分糜費, 皆當禁斷, 而若不革新來之名, 責辦糜費之弊, 法亦難禁, 敢啓。" 答曰: "啓言至當。 果因此弊, 多有糜費陋辱之事, 而傷生殞命之害, 亦大矣。 其弊豈偶然哉? 只以一時之禁, 不能痛革。 當以此別奉承傳。" 仍傳于政院曰: "以諫官所啓奉承傳時, 凡新來, 自士大夫至軍卒僕隷, 皆當痛革事, 竝入承傳可也。"
-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532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풍속-연회(宴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