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관의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 힘쓸 것 등에 대해 전교하다
상이 이르기를,
"이종각(李宗角)의 종이 주인을 살해한 사건은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일이다. 죄상이 이미 분명한데도 오히려 형장(刑杖)을 견디면서 불복하고 있다. 이같이 죄상이 분명한 일을 반복해 추핵(推覈)하여도 그 실정을 자백받지 못했다면 그 자가 완악하고 사납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추관(推官)이 국문하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겠다. 근래 강상의 변고가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어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아내가 지아비를 살해하는 사건이 계속해 발생하고 있다. 종각의 종의 경우는 그 죄가 심히 중대하여 실정을 쉽사리 찾을 수 있으니 모름지기 정상을 캐내 그 죄를 밝혀 바로잡는 것이 좋겠다. 이와 같은 사건은 비록 인심이 완악해서 일어났다고 하겠으나 역시 교화가 시행되지 않은 데서 연유한다. 이것은 지방관이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 힘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니, 영사(領事) 유보(柳溥)가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신이 추국할 때에 일찍이 이런 문제에 마음을 써서 그가 범한 일을 모두 알아내고 사실을 찾아보니 그 사건의 진상은 바로 노복(奴僕)들이 모의한 것인데 서로가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마침내 판결이 지체되었습니다."
하고, 대사간 김만균(金萬鈞)은 아뢰기를,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해마다 기근(饑饉)이 들어 백성들이 연명하기도 힘겨우니 백성들의 고달픔이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습니다. 형편이 이러한데도 사대부의 집에서 다투어 호사로움을 숭상하므로 백성들이 바람에 쏠리듯 따르고 있습니다. 제택(第宅)이나 음식의 호사스런 폐습이 지금에 와서는 더욱 심한데도 이에 대한 금제(禁制)가 없습니다. 풍속과 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어찌 상에게 원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위에서 별로 지나친 행동이 없는데도 아래에서 이와 같은 폐단이 생긴 것은 잘은 모르겠으나 상께서 모범을 보이시는 데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왕자(王子)들의 제택이 과도하게 사치스런 폐단을 시종신(侍從臣)들이 소장(疏章)을 올려 진술하였고 신들도 누차에 걸쳐 아뢰었는데도 상께서는 심상히 보시면서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왕자와 왕녀들의 궁실이 백성들의 주거지까지 이어져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니 그 폐단이 극심합니다.
근래 신수경(申秀涇) 【경현 공주(敬顯公主)의 부마인 신의(申檥)의 부친이다.】 의 집에서 길례(吉禮)를 베풀 때 극도로 사치스러웠습니다. 【예물과 복식의 지나친 사치가 근고에 없던 것이어서 길례를 베풀 때 참석했던 사람들이 놀라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뒤 이러한 잔치를 마련하는 이들이 서로를 다투어 그 사치스러운 것을 본떠 이보다 더욱 잘하려고 힘들이는데 백성들의 삶은 날로 더욱 곤궁해지니 이 모두 상께서 금억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사실 상께서 자녀를 지나치게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비록 필부 필부(匹夫匹婦)라도 자기 자녀를 시집 장가 보내어 부귀 속에서 편하게 살기를 바라니 자식 사랑하는 인정이야 어찌 위아래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자녀들을 풍족하게 편히 살도록 만들어 주려고만 하는 치우친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면, 자녀에 대한 사랑이 사치스런 마음을 열어줄 뿐이니 복을 누리는 도리에 어긋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교화하는 일은 위에서 실행해야 아래에서 본받는다. 위에서 잘못된 일을 엄격히 금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사치스런 풍조가 크게 일어나니, 백성의 곤궁함이 지금보다 극심한 때가 없다."
하였다. 지평(持平) 김홍(金泓)이 아뢰기를,
"각 고을의 어전(漁箭)037) 은 예부터 있었습니다. 각 고을에서 진상할 때 백성들은 이것으로 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민간에는 폐단이 없었습니다. 근래 왕자군(王子君)들이 나누어 차지하고 어전을 많이 내어 자들의 물건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이익을 얻지 못하고 각자 시장에서 포목을 팔아서 개인이 갖추어 바치게 되니,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이 일로 해서 더욱 곤궁해집니다. 폐단을 매번 아뢰고자 했는데 지금 호조(戶曹)의 공사(公事)를 상고하니 왕자군들이 어전을 과다하게 차지하여 폐해(弊害)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왕자군 등이 전지(田地)를 절수(折受)하지 못할 경우 대신 어전(漁箭)을 받기 때문에 이미 이를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지난번 헌부가 누차 이 일을 아뢴 까닭에 지금은 그 수를 줄여 한 곳만 남아 있다."
하였다. 유보가 아뢰기를,
"백성들의 괴로움을 경연에서 시종신들이 자세히 아뢰었는데도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뢴 말이 비록 훌륭하였어도 말로만 끝났을 뿐 시행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뢴 말을 모두 힘써 실행한다면 백성들이 실질적인 해택을 입을 것입니다.
인물이 어찌 모두 다 과거(科擧) 출신자 속에만 있겠습니까. 과거 출신자들이라고 반드시 모두가 어진 것도 아니며 문음(門蔭) 출신이라 해서 반드시 죄다 어질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인물이 합당하지 않으면 비록 천거에 들었더라도 대간(臺諫)이 어찌 논계하지 않겠으며, 비록 천거되지 않았더라도 현능(賢能)하여 쓸만하다면 대간이 어찌 논박하겠습니까. 문무관들도 어질지 못한 자가 있으면 대간이 모두 논박하였습니다.
예부터 어진 사람은 적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많으니 전조(銓曹)에서 전형(銓衡)하여 임용해야 됩니다. 만약 한결같이 천거를 위주하고 전형을 위주하지 않는다면 인물을 쓰고 내치는 것이 또한 공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천거하는 법을 시행하려고 해도 수령을 차출할 적에 주의(注擬)할 만한 인물이 부족하여 차출할 인원이 없게 된다면 어찌 하겠는가. 《대전(大典)》의 법이 처음에는 거행되다가 중도에서 폐지된 것은 또한 까닭이 있다. 천거법이 좋기는 하나 크게 쓰기에는 장애가 있을 것 같다."
하니, 보가 아뢰기를,
"《대전》의 천거하는 법이 중도에서 폐지된 연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천거된 자 이외에 어찌 쓸만한 인물이 없겠습니까. 천거된 인물 가운데도 간혹 용렬한 사람이 섞여 있는 것은 역시 《대전》의 법을 바르게 준수하지 않아 단지 그 명목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의 분부에 지방관이 힘써 교화를 폈다면 인심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인심이 완악하기가 근래에 더욱 심합니다. 무릇 수령들은 겨우 부서(簿書)나 때맞추어 낼 일만 알고 있을 뿐이니 어찌 교화를 봉행해야 된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교화의 일이 어찌 별다른 업무이겠습니까. 오륜(五倫)을 잘 펴서 풍속이 박정하지 않아 고을에 완악한 사람이 없게 된다면 어진 수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수령이 있을 때 특별히 포상을 내린다면 다른 고을 수령들 역시 모두 이를 보고 느끼어 본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강원도 관찰사 김섬(金銛)이 최항(崔沆)을 파출시킨 것은 합당한 듯하다. 금후에 완악한 사람이 고을에서 나오면 그 사람만 죄줄 것이 아니요 그 고을 수령까지 함께 파직시켜서 좋은 일을 권장하고 나쁜 것을 징계하는 규례를 삼는 것이 좋겠다."
사신은 논한다. 최항은 본래 권문(權門)을 잘 섬겨 이름을 얻고 벼슬을 구했던 사람이다. 그는 교화에 힘쓰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다. 전일 고을 백성인 유석(劉石)이 아비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을 때 형적이 드러났는데도 읍호(邑號)가 강등되고 관직의 자급(資級)이 깎임을 꺼려 하여 불효라고 판결, 하늘도 노할 죄악을 엄폐하려고 했으니 그 심술이 몹시 사납다. 그뒤 유석의 아비가 법에 따라 힘써 다투자 엄폐할 수 없음을 알고 도리어 그 사건을 충주(忠州)에다 전가하여 충주가 예성(芮城)으로 강등되게 하였으나 충주 사람들의 진소(陳訴) 때문에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뒤 충주 사람 허초(許礎) 등이 상언(上言)했을 때 이 사건을 반복하여 수의했었다. 그러나 대신 중에 평소 항(沆)과 교분이 두터운 자가 애매하게 의논하여 아뢰었기 때문에 항이 기만(欺瞞)한 죄를 벗어났으므로 물론이 통분하게 여겼다. 이때에 와서 김섬이 파직시킬 것을 아뢸 때 유석의 사건까지 아울러 들어 그의 간교한 정상을 밝히지는 못했으나 풍화에 힘쓰지 않은 죄로 파직당하게 되니 사람들이 다 통쾌하게 여겼다. 그뒤에 항은 얼마 안 있어 다시 서용되었고 항을 위하는 자들이 ‘항이 파직당한 것은 도사(都事) 안주(安宙)가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보복한 것으로 섬(銛)이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사(私)를 따르고 공(公)을 버려 간교한 자를 왜곡되게 비호한 것이 지나치다고 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94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443면
- 【분류】윤리-강상(綱常) / 사법-재판(裁判) / 사법-법제(法制)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註 037]어전(漁箭) :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물 속에 나무를 세워 고기를 끌어들이는 나무울. 어살.
○上曰: "李宗角奴殺主事, 關係綱常。 罪狀已明, 而猶忍杖不服。 如此分明之事, 反覆推覈, 不得其情, 則其人之頑悍可知, 而推官之難鞫宜矣。 近來綱常之變, 未有甚於此時, 子殺父、妻殺夫者, 相繼有之, 而宗角之奴, 則其罪深重, 而其情易推。 須得情狀, 而明正其罪可也。 此雖人心頑惡所致, 亦由敎化之不行也。 承流宣化者, 不以敎化爲務故也。" 領事柳溥曰: "上敎至當。 臣於推鞫之時, 未嘗不致意於斯, 庶可知其所犯, 鉤得其情, 其事狀, 實爲奴僕所謀, 自相推調, 故不得歸一, 而遂成老獄矣。" 大司諫金萬鈞曰: "《書》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近來年年饑饉, 百姓救死不贍, 民之困悴, 莫甚於今時。 然而士大夫之家, 爭尙豪侈, 齊民風靡, 第宅飮食之弊, 抵今尤甚, 不有禁憲。 其風敎所關, 豈不在於上乎? 自上別無淫荒之事, 而下有如此之弊, 未知上之表率, 有所未盡耶? 王子第宅過侈之弊, 侍從開陳疏章, 而臣等亦爲屢啓, 自上視爲尋常, 曾不動念, 故王子女宮室, 連亘里閭, 駭人耳目, 其爲弊極矣。 近者申秀涇 【敬顯公主駙馬申檥之父。】 家吉禮時, 極爲奢侈。 【禮物服飾之僭, 近古所無, 吉禮時往赴人, 莫不駭嘆。】 後之爲此者, 爭相效倣, 務欲加彼, 而民生則日益困悴。 是皆自上不能禁抑而然也。 凡此之弊, 實是自上慈愛之過也。 雖至於匹婦匹夫, 皆欲使子女, 有室有家, 富貴安居。 慈愛之情, 上下何異? 然徒欲其安居富饒, 不改一念之偏, 則其所慈愛者, 適足以啓侈靡之心, 而恐有妨於享福之道也。" 上曰: "風敎之化, 上行下效, 自上禁抑之方, 不爲不嚴, 而奢侈之風大起, 民生之困, 未有甚於此時。" 持平金泓曰: "各官漁箭, 自古有之。 各官進上時, 百姓賴之於此, 故民間無弊。 近來王子君別占, 多出漁箭, 以爲己物, 使百姓不得下手於其間。 以此民不獲利, 各於市上, 抱布貿之, 私自備納, 沿海之民, 以此困悴益甚。 此弊每欲啓之, 而今考戶曹公事, 王子君多占漁箭, 爲弊不貲, 故敢啓。" 上曰: "王子君不得折受田地, 則代受漁箭, 故已令受之, 而前者憲府屢啓此事, 故今則減之, 而只有一處耳。" 柳溥曰: "民間疾苦, 經筵侍從之臣, 莫不盡啓, 而民不得蒙實惠, 所啓之言雖善, 而徒爲空言無施故也。 以所啓之言, 一切務行, 則民蒙實惠矣。 人物豈盡在於科擧乎? 科擧不必皆賢, 門蔭不必皆不賢。 人物不相當, 則雖在薦擧之中, 臺諫豈無論啓乎? 雖無薦擧, 賢能可用者, 則臺諫豈駁之乎? 至於文武官, 亦有不賢者, 臺諫皆論之。 自古賢者少, 而不賢者多, 銓曹權衡用之可也。 若一主於薦擧之人, 而不主權衡, 則其進退人物, 亦不公矣。" 上曰: "銓曹雖欲行薦擧之法, 差出守令時, 注擬者不足, 而無塡差之人, 則奈何? 《大典》之法, 初則擧行, 而中廢之意, 亦有以也。 此法好矣, 而恐有妨於大用也。" 溥曰: "《大典》薦擧之法, 中廢之由, 未可知也, 然薦擧之外, 豈無可用人乎? 薦擧之中, 或有庸雜之人, 亦由不遵《大典》, 而徒有其名故耳。 上敎以爲, 承流宣化之人, 務崇敎化, 則人心不必如此云, 人心頑惡, 近來尤甚。 凡守令之輩, 粗知簿書期會之事而已, 何能知崇敎之化意乎? 敎化之事, 豈別有他務乎? 五倫攸敍, 風俗不薄, 一境之中, 無頑惡之人, 則可謂賢守令矣。 如此守令, 特加褒奬, 則他邑守令, 亦皆觀感而取則也。" 上曰: "江原道觀察使金銛, 罷黜崔沆, 似當。 今後頑惡之人, 出於郡邑, 非但罪其頑惡之人, 竝罷其邑守令, 以爲勸懲之規可也。"
【史臣曰: "崔沆本以善事權門, 釣名干進之人, 非但不務敎化, 前日州人劉石弑父之事, 旣發形迹, 而厭其降州號削官資, 欲以不孝斷之, 以掩滔天之惡, 其用心極矣。 及其劉石之父, 據法力爭, 知不能掩, 則反歸其事於忠州, 以至降爲芮城, 而因忠州人陳訴, 不久而(後)〔復〕 。 當其忠州人許礎等上言時, 反覆收議, 而大臣有素厚沆者, 矇朧議啓, 故沆得免欺瞞之罪, 物情憤之。 至是, 金銛啓罷, 雖不竝將劉石事, 而明其奸巧之狀, 以不務風化, 而至於罷, 人皆快之。 厥後, 沆未久復敍, 而爲沆謀之者, 乃曰: ‘沆之見罷, 都事安宙挾私報施之事, 而銛未詳察,’ 云。 其亦徇私滅公, 曲庇奸巧之甚矣。"】
- 【태백산사고본】 48책 94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443면
- 【분류】윤리-강상(綱常) / 사법-재판(裁判) / 사법-법제(法制)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