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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93권, 중종 35년 9월 18일 병오 3번째기사 1540년 명 가정(嘉靖) 19년

강연공 등의 표류자들과 그들을 인솔한 왜인들을 올라오게 하라고 이르다

전교하였다.

"이제 제주 목사(濟州牧使) 권진(權軫)의 계본(啓本)을 보니 ‘황당선(荒唐船) 1척이 동쪽 해상으로부터 본주(本州)로 향해 오기에 왜적이라 생각되어 즉시 본진(本鎭)의 수군과 육군을 정돈하고 달려가서 알아보았더니 기해년201)감자(柑子)202) 를 진상하러 갔던 강연공(姜衍恭) 등 4명이었다. 연공 등의 공술(供述)은 「지난 기해년 10월에 감자를 진상하기 위해 바다로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였다. 밤낮으로 해상에 떠다니다가 5일째 되던 날 한밤중에 오도(五島) 근처 간자라도(干自羅島)에 도착하여 배가 부서졌는데 바위에 의지해 살아났다. 마침 작은 고기잡이배 4척이 우리를 보고 접근하여 일의 전말을 묻고 자기들의 옷을 벗어 입혀준 다음 도주(島主) 원순정(原純定)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알렸다. 우리의 신분을 추문한 다음 각 이(里)·도(島)·사(寺)에 나누어 배치하고 4개월 동안 머물러 두고 접대하였다. 이번 7월에 큰 배를 정돈하여 차정관(差正官) 왜인 인자문(引自門) 등 7명과 반인(伴人) 산시려(山時慮) 등 3명과 격군(格軍) 이라음벽(伊羅音碧) 등 5명과 우리들까지 합해서 모두 19명을 함께 태워 내보냈다. 우리를 호송하는 왜인들은 대마도 왜인과 사이가 좋지 않으므로 만약 제포(薺浦) 근처에 배를 댄다면 혹시 포에 머물고 있는 대마도 왜인과 만나게 될까봐 경상도의 다른 포에 정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동북풍이 크게 불고 짙은 구름 때문에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여 해상에 표류하던 중 이달 29일에야 구름이 걷히고 날씨가 개어 한라산을 보고는 조천관(朝天館)에 이르러 배를 댔다.」고 하였다. 인자문 등은 「옛날 태수(太守) 원순정대마 도(對馬島)주(主)와 사이가 좋지 않으므로, 만약 대마도의 왜인을 만날 경우 살해당할까 두렵다. 비록 여러달 잡혀 있게 되더라도 형편이 되면 서울로 올라갔다가 살아서 본토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뜻으로 간절하게 말했다.’ 하였다.

그 인솔하고 온 왜인과 표류한 사람들을 속히 올라오게 하라. 그런 다음에라야 추문할 수가 있다. 이 공사(公事)를 빨리 회보하라고 예조에 이르라."


  • 【태백산사고본】 47책 93권 69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412면
  • 【분류】
    외교-왜(倭)

○傳曰: "今觀濟州牧使權軫啓本云: ‘荒唐船一隻, 自東大洋向本州, 疑其爲賊, 卽整齊本鎭水陸之軍, 馳到詳問, 則乃己亥年柑子進上陪持姜衍恭等四名也。 衍恭等供曰: 「去己亥年十月, 以柑子進上陪持出海, 逢大風漂流, 晝夜浮海, 第五日夜半, 五島近境干自羅島至到, 船隻致敗, 依巖得生。 有鈞魚小艇四隻, 望見(未)〔來〕 到, 問其所由, 解衣衣之, 入告島主原純定之處, 根脚推問, 分處于各里各島各寺, 四朔留饋。 今七月大船整齊, 差正官倭人 引自門等七名, 伴人山時慮等三名, 格軍伊羅音碧五等十五名, 及俺等十九名, 竝載出送。 護來倭人等, 與對馬島 倭人作嫌, 若到泊薺浦近處, 則恐相逢留浦之, 故欲泊于慶尙道他浦, 適東北風大吹, 雲暗不辨東西, 浮流海上, 本月二十九日, 雲倦淸明, 望見漢挐山, 到泊朝天館」 云。’ 引自門等曰: 「太守源純定, 與對馬島主作嫌, 若逢對馬, 恐被殺害, 雖累月拘留, 隨便上京, 生還本土事懇說」 云。 其率來倭人及漂流人物, 速爲上來, 然後可以推問也。 此公事急速回報事, 言于禮曹。"


  • 【태백산사고본】 47책 93권 69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412면
  • 【분류】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