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약빙이 폐위된 연산과 노산의 묘소를 복원하고 후사를 세울 것을 건의하다
한산 군수 이약빙(李若氷)이 상소를 올렸다.
"신이 구언(求言)290) 하신다는 전지를 보고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또 계절이 바뀌도록 늘 전하께서 간언(諫言)을 잘 들으시는 이때 한 가지 소회와 한 가지 소견이라도 있으면, 누군들 즐거이 진언(進言)하여 전하의 바람에 부응해서 생사간에 원망이 없게 되기를 기대해 전하로 하여금 인(仁)을 하는 도(道)를 더욱 넓혀서 국가의 무궁한 복을 수립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 밖의 소소한 폐단이야 나약한 자도 격려되는 마당에 저절로 사라질 것이니 어찌 전하께 누를 끼칠 일이 되겠는가고 여겼었습니다. 신이 외지고 먼 곳에 떨어져 있으므로 듣지 못함인지 어찌하여 이렇듯 막막하게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까. 신은 멸망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代)를 이어주는 것이 성왕(聖王)의 법이라 들었습니다. 성왕의 법은 곧 하늘의 뜻입니다. 독한 뱀과 모진 가시덩굴은 인간이 모두 싫어하지만 하늘은 도리어 이것들을 살리고 번식시켜 주니 만물을 생장시키려는 하늘의 뜻을 인간이 어길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일을 전하께서 학문하는 가운데 역력히 보아서 잘 알 것이므로 일일이 언급할 필요없고 다만 보고 들어서 기억되는 일만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노산(魯山)과 연산(燕山)은 근대에 폐위된 임금입니다. 연산이 매우 무도하였음은 신이 직접 보았거니와 노산은 나약하여 국가를 진흥시킬 수 없는 임금이었음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종묘 사직을 위하는 대계에서 부득이 폐위시킨 것이니 하물며 전하의 깊으신 덕이 오래도록 빛나서 신인(神人)의 바람에 부응하시는 데이겠습니까. 나라 잃은 죄로 논하면 폐위시킨 정도에서 끝낸 것이 다행이라 하겠으나 속적(屬籍)을 논한다면 그들이 일찍이 임금이었다는 점은 관두고라도 지친(至親)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범인(凡人)에게는 후세에서 성왕의 법을 본받게 하고 왕실 지친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옳은 일입니까, 옳지 않은 일입니까? 지친의 신분으로 볼 때 두 주(主)를 위하여 후계를 세우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를 곤란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그 무덤 【노산의 묘는 강원도 영월에 있고 연산의 묘는 경기도 양주에 있음.】 을 수호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할 것을 논의케 하심은 곧 인(仁)을 하시려는 단서입니다. 그러나 선단(善端)이 겨우 드러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확충되지 못하였으니 신은 성명(聖明)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대학(大學)》에서 효도와 우애 그리고 자애를 말하면서, 강고(康誥)의 ‘어린이를 보호하듯 하라.’는 말만을 인용하였습니다. 위의 세 가지는 다 천성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불효하고 아우가 불경하여도 그 어버이와 그 형은 스스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애가 없으면 만물은 멸종될 것입니다. 그래서 호랑이 부자간의 자애를 인(仁)이라 일컫습니다.
신은 어리석은 주제에 조정에 있다가 미움 【기묘 사화 때 이약빙도 포함되어 있었다.】 을 받아 초야에 19년이나 물러나 살았습니다. 그래서 외정(外廷)의 일도 듣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전하의 구중 궁궐, 그 중에서도 내전의 말하기 곤란한 일들이겠습니까. 그러나 늘 미(嵋) 【복성군(福城君)의 이름.】 는 곧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아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먼 곳으로 폐출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처음에는 괴이한 일이라 생각하다가 도리어 괴이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곧 미의 죄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므로 전하께서 대의(大義)로 결단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사진(賜盡)291) 의 명을 내리셨다는 말을 듣고는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수저를 떨어뜨렸으며, 잠도 잊고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하께서 차마 못할 일을 하심이 아니요 그렇게 만든 자들이 차마 못할 일을 한 셈입니다. 전하께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차마 하시었으니 그때에 어떻게 견디시었습니까? 때때로 다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안해 보셨습니까? 그의 어미 【박씨(朴氏).】 는 교만하고 방종함이 오래 전부터 외부에까지 전파되었으니 패가 망신을 누구 탓이라 하겠습니까? 신은 미의 사건을 슬퍼하는 것이지, 그를 슬프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람들이 우리 전하의 자애를 손상시킨 것을 가슴아파합니다. 무릇 하늘 아래 인간은 모두 하늘의 자식인데, 혹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면 하늘에 대하여 못하는 말이 없이 욕설을 퍼붓더라도 하늘이 큰 위력으로 그 사람을 벌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성왕(聖王)의 도량도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행한 흉악한 저주(詛呪)292) 【작서(灼鼠)의 변(變).】 는 정해진 형벌이 있어서 용서할 수는 없다 해도 저주한 사실은 밝히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옛사람도 이를 신중하게 여겼습니다. 즉 한 무제(漢武帝)는 폭주(暴主)이지만 죄가 태형(笞刑)에 해당된다는 설(說)을 듣고 종신토록 후회하였다293) 고 합니다. 미가 한집안에서 저주한 일에 참여했는지는 신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논의는, 춘궁(春宮)294) 의 뒷날을 위하여서라고 하면서 친지들에게 서로 자랑하였습니다. 때문에, 전하의 총애하는 첩과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쫓아내거나 죽이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고 말하나 신은 의혹이 더욱 깊습니다. 의신(儀宸)295) 의 덕은 하늘이 명하시고 사람이 떠받든 것입니다. 박씨의 교만함과 미의 오만함을 누군들 알지 못하며 누구인들 그르다 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돌발 사태가 일어났을 때 세자를 위하는 자는 죽음을 불사하고 충성을 바치겠지만 미를 위하여서는 죽을 자가 있겠습니까? 삼광(三光)의 밝음과 구천(九泉)의 어둠으로도 그 천양지차를 비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논자의 말이 이러했으니 이는 자신을 위한 모략에 불과합니다. 만일 세자로 하여금 우애하는 도를 독실히 하게 하고 전하의 일을 본받게 하려 했으면 이와 같은 말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옛날에 맹손(孟孫)이 수렵하다가 어린 사슴을 잡아 진서파(秦西巴)에게 주며 가지고 먼저 가라 했는데, 그 사슴 어미가 따라 오면서 울었습니다. 진서파는 이를 보고 가엾게 여겨 몰래 놓아주자 맹손이 크게 노하여 서파를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다시 서파를 불러 아들의 스승을 삼고 ‘어린 사슴에게도 자애를 베풀었으니 내 아들에게 어찌 자애를 베풀지 않겠는가?’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오당(吳唐)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수렵에 나갔다가 어린 사슴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러자 어미 사슴이 죽은 어린 사슴 곁에 와서 슬피 울었는데, 오당은 어미 사슴마저 죽이고 또 다른 사슴을 만나자 활을 쏘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화살이 갑자기 빗나가 오당의 아들에게 맞았습니다. 당은 죽은 아들을 안고 가슴을 두드리며 우니 공중에서 말소리가 ‘오당아, 네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사슴이 그 새끼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므로 당이 깜짝 놀라 다시 들으려 하였으나 아무것도 없더라는 일도 있습니다. 지난번의 무리들 【삼흉(三凶)의 무리.】 이 혹 자식이 없다 해도 차마 이런 일을 하여 전하로 하여금 도리어 옛날 필부인 진서파가 한 일만도 못하게 하였으니, 신은 오당의 통곡이 아마도 그 사람들에게 적중된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이제 와서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뉘우치고 후회하는 진심을 사람들에게 마치 일식과 월식이 다시 소생함을 보듯이 하시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당당한 암랑(巖廊)296) 과 제제(濟濟)한 관각(館閣)들이 전하 앞에서 직언을 진술하려 않는 것은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곧 지나간 일은 소소한 일이라서 덕의 경중과 정사의 대소에 관계될 것이 없다고 핑계대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시대에서 꺼리는 일이고 후세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말하는 자에게 반드시 화가 미칠까 싶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신도 전에 말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기다린 것은 몸을 아껴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전하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고 말 않는 것은 그 죄가 같으므로 감히 어리석은 말을 발하여 전하께 누를 끼치니 전하께서는 용서하소서. 신이 본래 병이 많을 뿐 아니라, 또한 재덕도 없으면서 이 한 고을을 지키고 구구하게 물러나지 못함은 차마 영명하신 전하를 저버리고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뢰는 말을 옳지 않게 여기시어 다시 전리(田里)에 돌아가 송추(松楸)297) 아래에서 목숨을 마치라 하시면 성은이 망극하겠으며 귀양을 보내셔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속에서 우러나오는 심정이 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9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31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註 290]구언(求言) : 국정에 대하여 신하나 백성의 직언(直言)을 구하는 것으로, 특히 천재 지변이 있을 때 임금이 자기의 과오 탓이 아닌가 하고 뉘우치면서 도움이 될 만한 직언을 구하는 것.
- [註 291]
사진(賜盡) : 사사(賜死)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것.- [註 292]
그가 행한 흉악한 저주(詛呪) : 중종 22년(1527)에 쥐를 잡아 동궁을 저주한 사건으로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혐의를 받아 아들 복성군 미(福成君嵋)와 함께 쫓겨나 서인이 되었던 일.- [註 293]
한 무제(漢武帝)는 폭주(暴主)이지만 죄가 태형(笞刑)에 해당된다는 설(說)을 듣고 종신토록 후회하였다 : 한 무제의 아들 여태자(戾太子)가 강충(江充)의 모함을 입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자 부왕의 군사를 절취하여 강충을 죽이고 자기도 목매어 죽었다. 그후 무제는 아들의 죽음이 억울했음을 깨닫고 있던 중 전춘추(田千秋)가 "아들이 아비의 무기를 희롱한 것이 태형(笞刑)인데 천자의 아들이 잘못하여 살인했으면 무슨 죄에 해당되겠습니까?" 하는 말을 듣고 무제는 크게 후회하여 마침내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를 쌓았다는 고사. 《한서(漢書)》 권63 무오자 열전(武五子列傳).- [註 294]
춘궁(春宮) : 세자를 말함.- [註 295]
○庚子/韓山郡守李若氷上疏曰:
臣伏見下旨求言, 日以成月, 月以經時, 常謂當此從諫之際, 苟有一懷一見, (殊)〔雖〕 不樂進以塞聖上之望, 庶見生死無冤, 使殿下益廣爲仁之道, 樹邦家無彊之休。 至如小小弊端, 自去於激懦之餘, 何足仰塵? 臣在僻遠, 耳所未及歟? 何其寥寥不得聞歟? 臣聞興滅繼絶, 聖王之典也。 聖王之典, 則天之意也。 虺蛇之毒, 荊棘之惡, 人欲盡之, 天隨生之。 生物之天, 人其違乎? 異世之事, 俱在聖學中歷認, 臣不必枚數, 請以耳目所記爲言。 魯山、燕山, 今代見廢之主也。 臣及見燕山無道之極, 側聞魯山委靡不振而已。 然皆出於爲宗社大計, 而況殿下, 潛德久昇, 尤叶神人者乎? 如論失國之罪, 廢之而止, 亦幸也, 如論屬籍之分, 舍其曾是君臨, 而猶至親也。 在凡人, 必令爲後, 法也。 在至親則闕焉, 可乎? 不可乎? 例視至親之分也, 其爲二主, 立其嗣何有, 而所以難之者, 安在? 臣未敢知也。 殿下旣令議守其瑩域, 【魯山墓在江原道 寧越, 燕山墓在京畿 楊州。】 致祭由官, 此仁之端也。 善端纔露, 尙未擴充之, 臣之所以爲聖明惜也。 臣聞《大學》, 言孝悌慈, 而獨引《康誥》曰: "如保赤子。" 蓋三者, 皆天也。 雖有不孝之子, 不友之弟, 其親其兄, 自可以爲生。 如不慈也, 物無其類。 是故, 虎狼父子, 謂之仁。 臣以愚妄, 獲戾朝廷, 【己卯年士林被禍時, 若氷亦與其中。】 退居田野, 十有九年。 外廷之事, 猶不得聞, 而況殿下九重之內, 床笫之上, 有未易言者耶? 然常謂嵋 【福城君名。】 卽殿下之寵子也。 及聞廢黜于遠, 初以爲怪事, 而反不怪之者, 嵋之得罪, 必有以也, 而殿下能以大義斷之也。 終聞賜盡之命, 則不覺當食棄匙, 當寢廢眠, 反覆求之, 未得其由。 以今言之, 非殿下之忍也, 道之者忍也。 念殿下忍之於不可忍, 何以堪之於其時? 時復思之耶? 不思之耶? 母朴 【朴氏。】 驕縱, 久播於外。 其敗家亡身, 尙誰咎哉? 臣爲嵋也悲, 非悲其嵋也, 痛人之傷吾殿下之慈也。 夫居天下, 皆天之子也, 而或有不得其願, 仰天罵詈, 無所不至, 未聞天用大威, 以懲其人。 聖王之度, 當如是也。 祝詛不道, 【灼鼠之事。】 自有其刑, 雖不可貸, 祝詛之狀, 未易明也, 古人愼之。 漢 武, 暴主也。 聞罪當笞之說, 終身悔之思之。 嵋之參於一家祝詛, 非臣所可知者, 而當時之議, 謂爲春宮後日之地, 爭相誇於親故曰: "以殿下之嬖妾寵子, 黜之殺之, 爲何如耶?" 臣尤惑焉。 儀宸之德, 天所命之, 人所戴之。 朴之驕, 嵋之傲, 孰不知之, 孰不非之? 設使事有緩急, 死於泰宮者, 雖芟刈之, 不可止也, 其有死於嵋者乎? 貫三光洞九泉, 猶不足喩其判然, 議者之言乃爾, 是不過爲身謀也。 如欲使儀宸, 篤友愛之道, 法殿下之事, 當如是耶? 昔孟孫獵得麑, 使秦西巴持歸, 其母隨之啼, 西巴放之。 孟孫大怒逐之, 居二月, 復召爲子傅曰: "不忍於麑, 且忍吾子乎?" 吳唐, 將兒出獵, 射麑死, 母驚還悲鳴, 又射殺, 逢他鹿將射, 忽箭發, 反激其子。 唐抱兒拊(應)〔膺〕 而哭, 聞空中呼曰: "吳唐之愛其子, 與鹿何異?" 唐驚聽, 不知所在。 頃時之輩, 【三兇之輩。】 雖無其子, 忍爲此事, 使殿下, 反不如秦西巴一匹夫之所爲, 臣恐吳唐之慟, 將中於其人也。 夫死者, 不可復生, 今其奈何? 惟在殿下一開悔悟之端, 而人仰日月之更耳。 堂堂巖廊, 濟濟館閣, 不肯陳之於王前, 意有在也。 無乃諉諸已往之事, 事之瑣細, 而不足爲德之輕重, 政之大小歟? 抑謂時之所諱, 後之所關, 言之者必有禍歟? 臣亦不能言之於前, 而必待于今日, 可謂非愛其身乎? 可謂愛殿下乎? 言與不言, 其罪等爾, 敢發狂迷, 以累殿下。 伏願殿下恕之。 臣本多病, 又乏才德, 守此一城, 區區不能退者, 未忍辭去聖明也。 若以此言爲不可, 使之復還田里, 畢命松楸, 則聖恩極矣, 至於竄殛, 亦所不逭。 情溢于中, 不獲自已。
- 【태백산사고본】 46책 9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31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註 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