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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85권, 중종 32년 6월 4일 신해 1번째기사 1537년 명 가정(嘉靖) 16년

성담기를 가볍게 논죄하고, 조광세의 일은 추신없이 죄를 정하게 하다

상이 사정전에 나아가 의정부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득정은 장하에서 죽고 자복하지 않았다. 성담기는 비록 가형한다 하더라도 늙고 혼매한 사람이니, 그 자백한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만일 가벼운 법을 가한다면 범죄 관계가 중대하므로 형벌을 잘못 적용했다는 책망을 들을까 염려되고, 만일 큰 법으로 다스린다면 일에 의심점이 많으므로 ‘가벼운 쪽으로 다스려야 한다.’348) 는 뜻에 크게 어긋나니 대관절 어떻게 조율해야 중도를 얻겠는가?"

하니, 영의정 김근사가 아뢰기를,

"성담기는 완악하고 어리석으니 비록 자백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신빙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신이 새 선릉(宣陵) 자리를 잡을 때 보니, 담기는 한 번도 그곳에 오지 않고 밖에서 심부름만 했을 뿐이니, 그의 어리석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논이 막 나올 때 신문하지 않고 죄를 정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에 형추(刑推)했던 것인데, 그 전지(傳旨)에 ‘세자가 어리므로 그들이 반역할 마음을 품고 총행(寵幸)349) 에게 붙으려고 했다.’ 하였기 때문에 율법이 높아지고 죄가 무거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상고하니, 총호사 등이 산을 살피고 돌아와서 아뢸 때 경릉(敬陵) 근처를 제일로 치고 희릉(禧陵)을 다음으로 쳤으니, 당초 꼭 희릉을 쓰려고 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능 자리를 잡을 때 전적으로 상지관의 말만 들었으니, 상지관이 길지(吉地)라고 했다면 총호사 등이 어찌 지리(地理)를 알 리 있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중법(重法)을 가한다는 것은 부당한 듯싶습니다. 옛말에 ‘모반 대역(謀叛大逆)이 대죄(大罪)다.’라고 하였습니다. 군사를 일으키거나 민중을 동원하는 자도 있고 악담을 하거나 직접 범행을 하는 자도 있어, 그 죄가 차등이 있는데, 법관(法官)·유사(有司)는 일률(一律)로써 논죄하니 위에서 의당 참작하여 정해야 할 것입니다. 당초 경릉 근처를 제일 좋은 자리로 생각했었는데 대역률(大逆律)을 적용하는 것이 어찌 온당한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처음 능 자리를 고를 때 가서 참여하지 않은 자도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일률로 죄를 준다면 이는 크게 부당한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모반 대역이 이미 환하게 드러났더라도 반드시 승복을 받은 다음에 죄를 정해야 한다. 《승정원일기》를 가지고 상고하니 다른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중법을 가한다면 지금 당장에 율법을 잘못 적용한 실수를 범할 뿐만 아니라 후세의 조롱거리가 될까도 염려가 된다. 만일 처음에 정한 율법을 낮추어서 조율한다면 대간이 필시 처음에 정한 율법대로 처치하기를 청할 것이므로 아예 다른 율법으로 고쳐 적용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근사가 또 아뢰기를,

"총호사 등에게 전혀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승정원일기》로 보면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호사 등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상(卿相)의 지위에 있는 사람을 그 실정도 캐보지 않고 곧바로 반역의 죄를 가한다는 것은 왕자(王者)로서 법을 공평하게 쓰는 일이 아니니, 상지관의 말을 믿고 흉한 땅을 썼다는 율법을 적용하려고 한다."

하였다. 좌의정 김안로가 아뢰기를,

"이 일이 일단 터지니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통분해 하면서 ‘흉지를 길지라고 한 그 형적이 환하게 드러났으니 그 죄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단, 한두 사람이 비록 다른 뜻을 품었다 하나, 남은 사람이야 어찌 다 이런 마음을 가질 리 있었겠습니까. 상지자(相地者)는 의당 정신을 써서 능 자리를 택했어야 했을 터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자연 그에 대한 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일의 증거를 얻은 다음에야 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별로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 단지 의심만을 가지고 동일한 죄를 정하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합니다. 신에게는 상피(相避)할 일이 있습니다. 숙부의 일을 함께 의논한다는 것은 혐의가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이 삼공(三公)의 반열에 있어 성상의 하문을 우러러 받고 감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서 아뢴 바이니, 실로 매우 황공합니다."

하고, 우의정 윤은보가 아뢰기를,

"당초에 충성치 못하고 반역을 도모하는 율법을 적용하였었는데 위에서 가벼운 쪽으로 좇아 고쳐 논죄하시어 참작해서 중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공론이 격발한 것은 산형(山形)과 수세(水勢)가 중첩으로 극흉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대개 수파(水破)에 흉이 있을 경우 상지관이라면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가장 알기 쉬운데, 극흉의 땅을 길지라고 속여 가리켰습니다. 그런 때문에 다른 뜻을 가졌다고 의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승정원일기》를 상고하니, 그 당시에 네 길로 나누어 가서 따로따로 땅을 살펴보고 나서 총호사 등이 복명할 때 아뢰기를 ‘경릉 근처는 산형 수파(山形水破)의 길지일 뿐만 아니라, 공역(功役)도 간편할 것이다. 신들은 지리를 모르나 상지자가 모두 길지라고 한다. 헌릉(獻陵)은 산형이 장대하고 또 큰 강이 막혀 있으니, 석물(石物)을 운반하는 데 폐단이 있겠다. 산형이 너무 장대하다 한 것은 곤위(坤位)350) 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그 뜻은 오로지 경릉 근처를 위주로 하였으니, 어찌 감히 반역할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율법을 고쳐서 죄를 정하는 것이 크게 해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고, 좌찬성 유보가 아뢰기를,

"희릉 자리를 흉지에다 잡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군들 분한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비록 승복을 받지 못했다 해도 중벌을 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과연 상의 분부처럼 비록 모반 대역임을 분명히 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실정을 잡은 다음에 죄를 정하는 것이 예입니다. 지금 별로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 한갓 의심의 울분만을 감안하여 얼른 동일한 죄로 정해버린다면 율법에 적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번 그 단서를 열어놓으면 후일의 폐단을 바로 잡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담기(成聃紀)는 비록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사를 차리지 못할 정도로 의식을 잃고 있으니, 지금 다시 신문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 실정을 얻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간이 인심의 울분을 감안하여 율법대로 죄를 정하려고 하니, 위에서 마땅히 참작해서 정할 일입니다."

하고 우찬성 심언경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전지(傳旨)를 가지고 조율하였기 때문에 모반 대역의 죄를 가했으나 당시에 반역을 도모할 불충의 마음을 가졌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승정원일기》를 상고하면 경릉 근처를 제일 좋은 자리로 생각하였었는데, 지금 경릉의 산을 보면 산맥이 쇠잔하고 풍수가 사나우니 설사 당시에 그 자리를 썼다 하더라도 후대에, 헌릉의 산이 흉지에 속한다는 의논과 같은 것이 없으리라고 어찌 꼭 보장하겠습니까. 인심이 이로 말미암아 통분해 하기 때문에 대간도 성담기를 끝까지 추신한 뒤에 죄를 정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초에 적용한 법이 합당한데 어찌 또 고쳐 적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늘 대신의 의논과 대간이 논한 바는 위에서 이미 통촉하셨으니, 참작해서 정하기를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성담기에게 형벌을 더 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우참찬 권예가 아뢰기를,

"풍수설은 자고로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통분해 하는 것은, 이왕에 국(局)을 설치했다면 상지관은 마땅히 그 기술을 극진히 하여 길지를 잡아야 옳았을 것인데 흉지를 길지로 지정하여 끝내는 그 자리를 썼으니, 국을 설치하여 위임시킨 의도가 어디 있습니까? 단, 정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반역을 도모한 불충의 마음을 가졌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니, 다른 뜻을 품었으리라는 짐작을 가지고 율법을 정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할 듯싶습니다. 대체로 큰 죄는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곳이 있으면 조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 산을 살펴 능 자리를 잡는 일에 근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논죄한다면, 아마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작은 죄를 논하는 일도 오히려 근신해야 하는데, 하물며 경상(卿相)의 모반 대역의 죄를 논함에 있어서랴. 의심스럽다는 것으로 율법을 정한다면 당시에 논란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조롱을 자초할까도 염려된다. 지금 이미 반역을 도모한 불충에 대한 내용을 중외에 효유하였는데, 또 그 율법을 낮춰 적용할 것으로 유시한다면 잘못이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안로가 아뢰기를,

"전에 적용한 율법이 과중함을 이미 알았다면, 고쳐 조율하도록 다시 유시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겠습니까."

하고, 윤은보가 아뢰기를,

"실정과 죄상이 서로 부합된다면 비록 전 죄과(全罪科)를 가지고 정한다 하더라도 뭐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만일 전에 정한 죄가 과중했다고 생각된다면 율법을 고쳐 적용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역 불충의 마음에 대해서는 별로 뚜렷한 증거가 없으므로 전지를 고쳐 조율하려고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김근사가 아뢰기를,

"당초 대간이 어찌 그 실정을 알았겠습니까? 지금 《승정원일기》를 상고하면 반드시 그가 다른 뜻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전지가 과중한 듯하오니, 고쳐 조율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였다. 심언경이 아뢰기를,

"조광세(趙光世)가 경상(卿相)들을 내리 헐뜯고 그에 대한 죄를 모면하기를 도모하여 경상도 관찰사에게 소장을 바치기를 ‘인기(印紀)는 나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가 나더러 경상들을 내리 헐뜯었다 하지만 나는 실로 그런 일이 없다.’ 하니, 관찰사가 판결하기를 ‘한 고을의 공론은 헛되이 퍼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죄가 없다는 확증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율에 따라 논죄하는 것이 옳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광세의 죄를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인기를 추신하였더니, ‘광세가 어찌 경상들만 내리 헐뜯었을 뿐이겠는가. 한 고을 백성들에게 징렴(徵斂)도 하므로 향중의 큰 폐해가 되고 있다. 한 고을에만 전파된 것이 아니라, 중외에 전파된 지 오래다.’ 하고, 유향소(留鄕所)351) 등도 ‘광세는 한갓 경상 등 유명한 사람만 비방한 것이 아니라, 생원(生員)들도 헐뜯었고, 수령들을 무함한 일들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한 고을에 퍼지고 중외에 전파되었는데, 어찌 유독 인기의 말일 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기를 다시 추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기를 추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광세가 자신이 경상들을 비방한 말을 인기가 전파한 것이라고 한다. 향중의 사람이 한 명뿐이 아닌데, 하필 인기를 지적해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공사(公事)를 보면 인기가 전파했다는 이유를 한 번도 공파(攻破)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광세를 신문한 뒤에 인기를 석방하려 한 것이지, 인기를 추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심언경이 아뢰기를,

"지금 그 부자가 이미 다 승복하였으니 율에 의하여 죄를 정할 것이고 다시 신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유향소 등은 모두 놓아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권예가 아뢰기를,

"비록 광세의 죄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아비 조계로(趙繼盧)의 죄는 전가 사변률(全家徙邊律)352) 에 해당합니다. 지금 다시 광세를 신문한다 하더라도 이 죄에서 더 추가될 것이 없습니다. 만일 무죄한 사람을 많이 끌어들인다면 장차 옥사가 견련(牽聯)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추신하지 말고 죄를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8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81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348]
    ‘가벼운 쪽으로 다스려야 한다.’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죄가 의심스럽거든 가벼운 쪽으로 다스리고 공이 의심스럽거든 후한쪽으로 치하할 것이니,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상적으로 법을 쓰지 않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 낫다. [罪疑惟輕 功疑惟重 與其殺不辜 寧失不經]’ 한 데서 온 말이다.
  • [註 349]
    총행(寵幸) : 여기서는 중종에게 총애를 받았던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가리킨다.
  • [註 350]
    곤위(坤位) : 왕비.
  • [註 351]
    유향소(留鄕所) : 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 고려 시대의 사심관(事審官) 제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말 선초에는 유향 품관(留鄕品官) 또는 한량관(閑良官)이라 하여 지방의 유력자나 벼슬에서 은퇴한 자를 택하여 지방의 풍속과 향리의 부정을 막도록 지방 자치에 활용하였다가, 이것이 점차 제도화되어 유향소 또는 향소(鄕所)라는 조직으로 고정되게 되었다.
  • [註 352]
    전가 사변률(全家徙邊律) : 형률(刑律)의 한 가지.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하는 일. 세종 때부터 북변 개척(北邊開拓)이 시작되어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키는데, 이에 응하는 자가 없자, 그 정책의 하나로 전가 사변률을 실시, 주로 함경도 오진(五鎭)으로 이주시켰다. 이 법의 적용 범위는 문서 위조자·좀도둑·우마 도살자(牛馬屠殺者)·관리로서 백성을 억압하는 자 등 비교적 경범자를 대상으로 이민 정책의 한 방법으로 이용하였다.

○辛亥/上御思政殿, 引見議政府堂上。 上曰: "黃得正死於杖下而不服, 成聃紀雖加刑, 老鈍茫昧之人也。 安足取信乎? 若加輕典, 則所關重大, 恐失於不經; 若正大法, 則事多有疑, 大非惟輕之意。 將何照律而得中?" 領議政金謹思曰: "成聃紀, 糞土頑愚, 雖或有言, 不足取實。 臣見新宣陵卜定時, 聃紀一不來眼前, 只使令於外而已, 其愚劣, 乃可知也。 此論初發, 不訊而定罪不當, 故刑推也, 其傳旨以爲, 世子幼弱, 懷今將之心, 欲攀附寵幸云, 故律高而罪重也。 近考《承政院日記》, 摠護使等看山回啓時, 以敬陵近處歸重, 禧陵爲次。 初欲必用禧陵, 似非本意也。 卜地之時, 一聽相地官之言, 相地官若以爲吉也。 則摠護使等, 豈能知地理乎? 以此加重法, 恐或不當也。 古語云, 謀叛大逆, 大罪也, 有興師動衆者, 有惡言直犯者, 罪有差等, 而法官有司, 以一律論之, 自上固當酌定。 初以敬陵近處歸重, 而以大逆爲律, 豈其當乎? 況初卜擇時, 有專不往參者, 若以一律罪之, 是大不便。" 上曰: "大抵謀叛大逆, 雖已現著, 必須承服而定罪。 以《日記》考之, 似無他心。 如是而加之重法, 非徒失刑於當時, 恐貽後世之譏也。 若以初律而降照, 臺諫必請依律, 欲改以他律何如?" 謹思又曰: "摠護使等, 非曰無罪, 以《日記》觀之, 其無異志可知。" 上曰: "摠護使等, 不爲無罪, 然卿相之人, 不究其情, 而遽加叛逆之罪, 非王者用法之平。 欲以信用相地之言, 竟用凶地之律照之。" 左議政金安老曰: "此事一發, 凡有聞見, 孰不痛憤? 以凶爲吉, 情迹現著, 其爲罪也, 孰有加於此哉? 但一二人, 雖懷異志, 餘人豈皆有是心? 相地者, 固當用意卜擇, 而不爾, 自有其罪, 然必得事證然後, 乃可定罪。 今別無明證, 只疑之而以一罪定之, 似乎不可。 臣有相避叔父之事, 嫌於同議, 然臣待罪三公之列, 仰承顧問, 不敢含默, 實深惶恐。" 右議政尹殷輔曰: "當初以不忠, 今將照律, 而自上從輕改論, 斟酌得中也。 厥後公論激發者, 以山形水勢, 疊犯極凶故也。 大抵水破有凶, 則相地官, 雖愚癡之甚者, 知之最易, 而極凶之地, 誣指爲吉, 故疑其有異志也。 然今考《日記》, 其時分四道相地後, 摠護使等復命之時, 啓曰: "敬陵近處, 非但山形水破之吉也。 功役亦便, 臣等雖不知地理, 相地者皆以爲吉。 獻陵則山形壯大, 且隔大江, 有石物輸轉之弊。 所謂山形過壯者, 以其不合於坤位故也。 其意專主敬陵, 安敢有今將之心? 改律定罪, 似無大妨。" 左贊成柳溥曰: "禧陵卜兆之犯凶, 孰不憤心? 雖不承服, 宜加重典。 雖然, 果如上敎, 雖明知謀叛大逆, 必得其情然後定罪, 例也。 今別無明驗, 而徒因物情之憤, 遽以一罪定之, 不但不合於律, 一開其端, 後弊難救。 成聃紀雖不加刑, 不省人事, 今雖更訊, 必不得其情。 雖然, 臺諫因物情, 欲依律定罪, 自上當酌定耳。" 右贊成沈彦慶曰: "初以傳旨照律, 故加謀叛大逆之罪, 然當時有今將不忠之心與否, 未可知也。 考《日記》, 以敬陵近處歸重, 而今見敬陵之山, 山脈殘而風水戾。 設使當時, 雖用其地, 安知後來, 無如獻陵山犯凶之議也? 物情由是而憤鬱, 故臺諫亦欲畢推聃紀而後定罪。 雖然, 當初用典當矣, 又何改爲? 今日大臣之議, 與臺諫之所論, 自上旣已洞照, 在酌定之何如耳, 成聃紀不須加刑。" 右參贊權輗曰: "風水之說, 自古難信也。 然今之痛憤者, 旣已設局, 則相地官, 所當極盡其術, 以占吉可也, 而指凶爲吉, 竟用其地, 甚非所以設局委任之意也。 但情狀不露, 有今將不忠之心, 難可定知。 若以爲(套)〔陰〕 懷異志而定律, 則(以)〔似〕 不相當。 大抵大罪, 有一毫未盡處, 則照律難矣。 若論以相地擇兆之不謹, 庶乎其可也。" 上曰: "雖論小罪, 猶可謹愼。 而況卿相謀叛大逆之罪, 以疑定律, 非但有議於當時, 恐招後世之譏。 今旣以今將不忠, 曉諭中外, 又降其律以諭, 無乃有妨乎?" 安老曰: "旣知前律之過重, 則改照更諭何妨?" 殷輔曰: "情罪相當, 則雖以全科定之, 有何不可? 若以前罪爲重則, 改律似當。" 上曰: "今將不忠之心, 別無明狀, 欲改傳旨照律何如?" 謹思曰: "當初臺諫, 豈知其情乎? 今考《日記》, 必知其無異志矣。 傳旨似過, 改照爲當。" 彦慶曰: "趙光世歷詆卿相, 而謀欲免罪, 呈狀于慶尙道觀察使曰: ‘印紀與我有隙, 以我爲歷詆卿相, 而我則實無此事也。’ 觀察使判曰: ‘一鄕公論, 非虛發。 如不得明其無罪, 可依其律而論之。’ 以是觀之, 光世之罪可知也。 臣等曾推印紀, 則云: ‘豈但歷詆卿相而已, 徵斂一鄕之民, 爲鄕中(臣)〔巨〕 害。 非惟一鄕, 傳播於中外久矣。’ 留鄕所等亦云: ‘光世非徒誹謗卿相有名之人, 雖生員, 亦必詆毁, 至如誣(講)〔構〕 守令之事, 不可勝言。 騰播一鄕, 傳於中外, 豈獨印紀之言乎?’ 然則不必更訊印紀。" 上曰: "非欲推印紀也, 光世以己之詆毁卿相之說, 爲印紀傳播也。 鄕中之人非一, 而敢以印紀爲言者, 何耶? 見其公事, 印紀傳播之由, 一不攻破, 故欲更訊光世而後釋印紀也, 非欲推印紀也。" 彦卿曰: "令其父子, 皆已承服, 可以依律定罪, 不必更訊。" 上曰: "留鄕所等, 皆放送可也。" 權輗曰: "雖非光世之罪, 其父繼盧之罪, 自當全家徙邊。 今雖更訊光世, 無加於此罪。 若多引無罪之人, 將恐獄事牽聯也。" 上曰: "然則不推而定罪可也。"


  • 【태백산사고본】 43책 8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81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