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릉을 옮기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능을 옮기는 일은 분명하게 처리하여 후세에 다시 사특한 말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이 옳다. 옮겨 장사해야 할 것인지를 정부와 육경 및 판윤(判尹)을 불러 의논하여 정하라."
하니, 영의정 김근사, 좌의정 김안로, 우의정 윤은보, 우찬성 심언경, 공조 판서 조윤손, 호조 판서 소세양(蘇世讓), 병조 판서 윤임(尹任), 예조 판서 윤인경(尹仁鏡), 형조 판서 김인손(金麟孫), 이조 판서 심언광(沈彦光), 판윤 오결(吳潔)이 의논드리기를,
"《일기》를 고찰해 보건대, 산릉 도감(山陵都監)이 계품한 말이 그러했고, 그때의 낭관 및 석공들의 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금정(金井)에 박힌 돌을 파내기가 어려워서 옮겨서 아래의 혈 자리를 사용했다면 반드시 돌을 파내고서야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언덕이 짧으므로 위의 혈 자리를 2척 가량 합쳐서 쓴 다음에야 제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석공이 ‘윗 면 및 좌우의 돌 뿌리를 제거할 수 없어서 그대로 두고 삼물(三物)을 쌓았다.’고 하고, 또 ‘당시의 제조 및 낭관이 모두들 이 말이 새나갈까 몹시 두려워했으므로 내가 오랫동안 입밖에 내지 않았다. 지금은 그 관원들이 모두 돌아갔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로 본다면 그 당시에도 또한 온편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뜻이 있었던 것인데, 조정에서만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일 범범하게 산의 형세만 가지고 논하면서 풍수들의 애매한 말에 구애되어 옮기려는 것이라면 이유가 올바르지 못하니, 참으로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이 광(壙)은 곁에 돌이 깊이 박히고 멀리 뻗히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습기가 그대로 쌓이다가 물방울이 되어 흘러 내려와 점차로 광 안에 차게 된다면 물이 괴게 될 것은 뻔한 형세인데, 어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말이 한 번 전파되었으니, 듣는 사람치고 누가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뭇 사람들의 의심은 괴변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이는 법입니다. 인심이 의심하고 동요하는 것은 참으로 깊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또 아뢰기를,
"뭇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같으므로 부득이 옮겨야 한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또 관상감에게 지리서에 돌이 장지에 흉한 까닭을 말한 것이 실려 있는 것을 뽑아내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가지고 아뢰기를,
"이는 풍수의 말이어서 참으로 위에 주달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미 지리국(地理局)을 두고 그의 방술(方術)로 장지를 가리어 정하고 있으므로, 신들이 흉함을 보고는 아뢰지 않을 수 없기에 아울러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앞서 대신들이 아뢰길에 나 역시 온당치 않게 여겼으나, 다만 길흉에 구애되어 20여 년이나 된 능을 갑자기 옮기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듯싶었다. 그러나 뭇 사람들의 의심이 이러하니 능을 옮기겠다."
하고, 이어 정원을 명하였다.
"능을 옮기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마련하라고 해조에 말하라."
【관상감이 뽑은 글은 다음과 같다.】
"곽박(郭璞)의 《금낭경(錦囊經)》에는 ‘장사할 수 없는 산은, 오기(五氣)는 흙을 따라 다니는 것이므로 돌산에는 장사할 수 없다.’ 하였고, 그 경(經)에는 ‘잇닿는 돌이나 끊어진 돌이 지나갈 때는 새로 흉한 일이 생기며 이미 있던 복도 없어진다.’ 하였다. 범월(范越)의 《봉동임조담심세편(鳳洞林照膽審勢篇)》 육험측(六險側)에는 ‘내애석(內崖石)이 있는 데에는 혈을 설치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고, 또 개지편(開地篇)에는 ‘부수어진 돌과 검은 돌은 질병을 주로하는 법이어서 고향을 떠나가 객사(客死)한다.’ 하였으며, 흉기편(凶忌篇)에는 ‘모든 무덤자리는 비록 형세가 아름답더라도 십흉(十凶)이 끼이면 쓸 수 없다.’ 하였다. 채성우(蔡成禹)의 《지리문정(地理門庭)》에는 ‘혈 안에 검은 돌이 있으면 흉할 것이다.’ 하였고, 범월의 《봉입식가(鳳入式歌)》에는 ‘광(壙)을 만들다가 청흑석(靑黑石)이 나오면 흉한 일을 만나고 길한 일을 만나는 때가 적은 줄 알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안로가 정광필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날마다 허항를 영의정 한효원의 집에 보내어 의논하였으나, 한효원이 듣지 않으므로 죽이지 못했었다. 그 뒤로도 계획을 날마다 깊이 하였으나 오랫동안 허물을 잡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정광필이 일찍이 총호사(摠護使)였으므로 이 사건을 중시하여 그의 죄로 만들려고, 마땅히 옮겨야 한다고 주창하여 의논하였는데, 사람들이 의견을 달리하지 못했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84권 69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70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출판-서책(書冊)
○傳曰: "遷陵事, 不可不分明處置, 而使後世, 再有邪說也, 此言是矣。 其遷葬與否, 卽招政府六卿判尹議定。" 領議政金謹思、左議政金安老、右議政尹殷輔、右贊成沈彦慶、工曹判書曺潤孫、戶曹判書蘇世讓、兵曹判書尹任、禮曹判書尹仁鏡、刑曹判書金麟孫、吏曹判書沈彦光、判尹吳潔議曰: "旣考《日記》, 山陵都監啓稟之辭如彼, 其時郞官及石工之言, 又如此。 金井阻石難掘, 移用下穴, 則亦必掘石而後可用, 又因原短, 上穴二尺許, 合用而後方成。 石工又云: ‘上面及左右傍, 石根不可去, 因之而築三物。’ 又云: ‘當時提調及郞官, 皆深懼此言之出, 故吾久不出口, 今則其員皆已逝, 乃發此言。’ 云。 以是觀之, 當時亦必有未安之意, 而朝廷特未之知耳。 若泛論山形, 拘於風水茫昧之說, 欲有所遷動, 則事出不正, 固當重愼。 今此壙傍有頑石, 深據遠盤, 濕氣襲積, 淋瀝而下, 浸潤壙中, 則可成渟溜, 勢所必至, 安可保其不然? 此說一播, 臣子聞之者, 孰敢安心? 大抵衆疑成怪, 積口銷金, 人心疑動, 固不可不深慮也。" 仍又啓曰: "群議皆同, 故不得已, 以當遷之意敢啓。" 又令觀象監, 抄出地理書所載, 石之所以凶於葬兆者而啓曰: "此乃風水之說, 固不可上達也, 然國家旣設地理局, 用其術, 卜擇葬兆矣。 臣等見其凶, 不可不啓, 故敢竝啓之。" 【觀象監抄書曰: "郭璞 《錦囊經》曰: ‘山之不可葬者五, 氣因土行, 而石山不可葬也。’ 又曰: ‘經曰: 「臺斷石過, 獨生新凶, 消已福」’ 范越鳳 《洞林照膽審勢篇》 《六險側》云: ‘內崖石之中, 不可置穴。’ 又《開地篇》云: ‘碎石黑石, 主疾病, 離鄕客死。’ 又《凶忌篇》云: ‘凡冡宅形勢, 雖佳, 若遇十凶, 亦不堪用也。’ 蔡成禹 《地理門庭》曰: ‘穴中有黑石凶。’ 范越鳳 《入式歌》云: ‘開壙忽逢靑黑石, 須信逢凶少逢吉。’"】 傳曰: "頃者大臣啓之, 予亦以爲未安, 而但以拘於吉凶, 遽遷二十餘年之陵, 恐爲不當也。 然群疑如是, 必須遷陵也。" 仍命政院曰: "遷陵諸事磨鍊事, 言于該曹。"
【史臣曰: "金安老欲陷鄭光弼以殺之, 日遣許沆于領議政韓效元家, 以議之, 效元不從。 是以不得殺之。 厥後其計日深, 而久未得釁。 至是, 鄭光弼嘗爲摠護使, 故重其事, 欲成其罪, 唱議當遷, 人不能異同。"】
- 【태백산사고본】 42책 84권 69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70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