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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81권, 중종 31년 2월 6일 신묘 1번째기사 1536년 명 가정(嘉靖) 15년

궁시 제작·양제 간택·유생과 시험의 폐단·견항진 공사 등에 대한 구언

조강에 나아갔다. 영사(領事) 김안로(金安老)가 아뢰기를,

"궁시(弓矢)의 제작은 결코 범연히 하는 일이 아닌데 지금 군기시(軍器寺)에 소장된 궁시는 다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 중국도 우리 나라의 사정과 같아 많은 군현(郡縣)에 모두 궁시가 소장되어 있는데, 요즈음에 중국에서는 군현에 소장된 궁시를 모두 거두어 올려서 기능 있는 자로 하여금 다시 개조(改造)하여 내려 보내게 한다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군기시와 군현에 소장된 궁시도 쓸모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착된 우각(牛角)은 다시 이용할 수 있으니, 오랫동안 묵어서 쓸모가 없는 것들을 군사들에게 나눠 주어 사용할 만한 것을 골라 개조, 비치하게 하고 기타 군현에 소장된 궁시도 다시 개조하여 만일에 대비하게 하소서. 만약 쓸모없는 물건이라면 아무리 산더미처럼 쌓여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지당하다. 지난 경오 왜란(庚午倭亂) 당시 관부(官府)에 소장된 궁기가 다 쓸모없이 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아주 심한 지경에 이르기 전에 개조하게 하라."

하였다. 사간 권기(權祺)가 아뢰기를,

"세자궁(世子宮)의 양제(良娣)040) 를 간택할 때 윤원량(尹元亮)의 딸이 금혼(禁婚)되었는데, 윤원량은 중궁(中宮)의 지친(至親)입니다. 비록 세자궁과 상피(相避)할 것은 없다고 하겠으나 의논들이 다 온당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장령 임붕(林鵬)은 아뢰기를,

"윤원량의 딸은 동궁(東宮)의 모후(母后)의 동성(同姓) 지친이 되므로 동궁은 의당 모후의 지친으로 대우하는 것이 옳고 금혼에 해당시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중국에는 혹 이같은 경우가 있지만 우리 나라는 풍속이 중국과 다른데 끝내 금혼하여 양제(良娣)로 삼는다면, 후세에 어찌 의논이 없겠습니까."

하고, 권기가 또 아뢰기를,

"양제는 중외에 널리 구하여 반드시 정밀한 간택을 해야 하며, 그 문벌만 따질 것이 아니라 그 현부(賢否)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비록 윤원량의 딸이 아니라도 어찌 적합한 규수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원량의 딸이 비록 금혼되었다 하나, 굳이 거기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대저 금혼에 해당되는 규수가 처음에는 금혼되었다가 뒤에 가서 혹 허혼(許婚)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는 그 처음에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금혼시킨 때문이다. 다만 세자와는 상피할 게 없기에 금혼시킨 것인데 지금의 계청(啓請)이 지당하니, 다음 간택할 때 허혼하라."

하였다. 권기가 아뢰기를,

"유자(儒者)가 학문을 할 때는 반드시 여럿이 모여 강론하였는데, 근래에는 전혀 학문을 힘쓰지 않으므로 서도(書徒)와 원점법(圓點法)을 만들어 관학(館學)에 모여 학문을 강습하게 하였으니, 이는 폐단을 바로잡는 데 좋은 방법입니다. 오늘날에는 책문(策問)을 초집(抄集)하는 폐단이 극심한 때문에 별시(別試) 때 사부(詞賦)로 사람을 뽑고 근래 성균관에서 제술(製述)할 적에도 배율(排律)041) 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유생들이 전시(殿試)에서도 반드시 배율로 사람을 뽑을 것이라 여기고 모두 사운(四韻) 배율을 유초(類抄)하여 외고 읽으니, 만약 이런 풍조가 이루어지게 되면 종말에는 부화(浮華)한 폐단이 매우 심할 것입니다.

또 강경(講經) 시험에 대하여, 전에는 오경(五經) 중에서 3경을 지원해 오면 그 중에 1책(冊)을 뽑아서 강하게 하였는데, 지금에는 지원한 1책을 그냥 강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유생은 본시 실학(實學)을 좋아하지 않는데 또 그들을 이와 같이 유도한다면, 신은 이제부터 유생들이 전혀 실학에 힘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무릇 제술에 있어 반드시 훌륭한 문장을 가지고 시취(試取)한다면 혹 요행히 합격한 한두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중에 다시 현부(賢否)를 살펴 뽑을 수 있지만, 사부(詞賦)를 가지고서는 인재를 뽑을 수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사부도 미리 초집(抄集)하여 요행을 바랄 터이니, 결국 책문의 경우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별시(別試)에서 그 인원은 비록 예정하더라도 시제(試題)만은 예정하지 않음으로써 유생들로 하여금 그 단서를 잡지 못하여 모든 글을 두루 익히게 하고 시험 시기에 임하여 시관(試官)의 숙배(肅拜)가 끝난 뒤에 상이 직접 명하신다면, 유생들이 자연 모든 글을 두루 익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안로는 아뢰기를,

"요즈음 유생들의 사정을 듣건대, 국가에서 아무리 성심을 다하여 학문을 권유하여도 그대로 따르려는 뜻이 없다고 합니다. 이전에 통독(通讀)할 때에는 유생들이 강습에 열중하였는데 지금에는 아무리 통독하여도 별다른 소득이 없습니다. 유생들 중에 뒷줄에 입참(入參)한 자는 가지고 온 책이 강습과 무관한 것이기도 하고 혹 책을 아예 가지고 오지 않은 자도 있으니, 강습에 뜻이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또 법사(法司)에서 유생들이 말을 타고 입참하는 폐단이 있음을 듣고 이를 엄격히 금지시키므로 유생들이 무사(武士)로 가장하여 수정영(水精纓)042) 차림에 하인에게 궁시(弓矢)를 들리고 관학문(館學門) 근처에 이르러서 말에서 내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무식한 백성들도 다 국법을 두려워하는데, 소위 유생이라는 자들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런 폐단을 어떻게 바루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듣건대 지난번 정시(庭試)에 응시한 유생 2천여 명 중에서 합격한 자는 겨우 2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니, 학문에 충실하지 않았음이 이와 같습니다. 사체(事體)가 이렇게 어긋났으니,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별시 때 사장(詞章)으로 시취하는 것은, 책문(策問)을 영원히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시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옛날의 유자들은 책문을 최상으로 여기었습니다. 옛날에는 처음 배우는 선비가 맨 처음 시부(詩賦)를 배우고 그 다음 논표(論表)를 배워서 박람(博覽)이 된 뒤에 책문을 배웠으므로 그 문장이 두루 볼 만하였습니다. 시부에 능하지 못한 자는 논표에 뜻을 두지 않았고 논표에 능하지 못한 자는 책문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지 못한 자는 동당(東堂)043) 에 응시할 수 없어 경부(徑赴)044) 에 뜻을 두지 않았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처음 배우는 선비가 시부를 먼저 배우려 하지 않고 책분을 먼저 배워 동당에 경부하여 사장을 아주 폐지하고 익히지 않는 실정입니다.

대저 책문이란, 유자가 온갖 글을 박람하여 모든 문장에 다 능한 뒤에 그의 포부를 책문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시장(試場)에 책문 과목을 설치하여 시취하는 것은 시무를 아는 인재를 가려서 쓰시 위해서입니다. 문장가의 입장에서 보면 책문은 문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부에 능한 자이면 누구나 다 책문을 지을 수 있습니다. 또 책문의 시제(試題)는 시무(時務)나 재변에 관해서 묻기도 하고 혹은 역대의 인물이나 시폐(時弊)를 묻기도 합니다. 제의(題意)에 대해서도 유사(類似)한 것이 많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초집(抄集) 표절하여 하나의 편(篇)을 만드니 아무리 서찰마저 쓸 줄 모르는 자도 다 책문을 지어 요행히 합격하고 있습니다. 근래 이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서 별시나 초시 때는 책문으로 시취하지 않고 있으니, 전시(殿試) 때 간혹 책문을 시험하는 문제는 상께서 직접 처리하소서.

또 별시 때 시제(試題) 문제도 시관의 숙배가 끝난 뒤에 상께서 직접 봉송(封送)하는 것도 사간(司諫)이 계청(啓請)한 대로 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그러나 식년시(式年試)는 시제의 규례가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어 사람마다 미리 알고 있으므로 모든 글을 두루 익힐 것 같은데, 격식에 맞는 문장 한 편을 지은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단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지금 아무리 시제를 미리 정하지 않고 유생들로 하여금 모든 글을 두루 익히게 한다 하여도 어찌 격식에 맞는 글을 지을 자가 있겠습니까. 대저 법을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폐지시킨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법을 믿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유자들이 법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국사(國事)에도 많은 누(累)가 될 것입니다.

무릇 사장(詞章)도 육경(六經)에서 흘러나온 뒤에야 이승(理勝)하는 글이 됩니다. 사장으로서 이승하지 않으면 글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시부를 짓는데 이승하게 된다면 어찌 시부를 천하게 여기겠습니까. 시(詩)는 본디 삼백편(三百篇)045) 에서 시작된 것인데, 성인(聖人)이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산정(刪定)할 때 시로써 사람의 심지(心志)를 감발(感發)시키고 징계시키는 자료를 삼았으니, 사람을 선(善)으로 교화하는 데 시만큼 좋은 것이 없으므로 옛 사람들이 다 시를 중하게 여겼습니다. 후세에 와서는 풍운월로(風雲月露)나 읊조릴 뿐, 삼백편의 유의(遺意)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다 천하게 여깁니다.

신이 유생 시절에 보건대 사람의 성품이란 원만하지 못하여 혹은 실학(實學)에 가깝기도 하고 혹은 사장(詞章)에 가깝기도 하므로, 사장에 가까운 자는 사장을 힘쓰고 실학에 가까운 자는 실학에 힘쓰는데, 실학에만 힘쓰고 사장에 힘쓰지 않는 자는 사리에 통창(通暢)하지 못하니 마침내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 다만 훈장직(訓長職)에 그칠 뿐이요, 사장에 능한 자는 발휘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사리에 두루 통합니다. 그러므로 국가에 등용되는 범위도 그 사람들이 더 넓었는데, 오늘날에는 경학(經學)이나 사장이나 모두 힘쓰지 않으니, 어찌 이같은 때가 또 있겠습니까. 이전부터 시장(詩章)만 숭상하는 것을 불가하다고 여겨왔던 것은 그 폐단이 결국에는 부화(浮華)한 데 이를까 염려한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의 임금들은 감히 시장만 숭상하지 못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시장을 전혀 익히지 않기 때문에 따로 법을 만들어 권유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나라는 사대(事大)하는 나라로 실학만을 숭상할 수 없는 형편인데 한 사람도 사장에 능한 자가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법을 만들고 폐지하기를 마치 길 가에 집 짓듯 하여 아침 저녁으로 변경한다면 무슨 일이 성취되겠습니까. 대체로 법을 새로 만든 초기에는 의논의 이동(異同)이 많게 마련인데, 지금 별시나 초시 때 사장(詞章)으로 사람을 뽑기로 한 일은 이미 중론을 모아 그 규칙은 만든 것입니다. 이미 그 규칙을 만들었으니, 반드시 오래도록 고수하여 그 이해(利害)를 환히 파악한 뒤에 다시 수정해야 합니다. 만약 만들어만 놓고 바로 폐지한다면 사람들이 다 법을 믿지 않게 됩니다.

이번에는 시험 날짜가 임박한 데다가 모든 유생이 반드시 원점(圓點)을 획득하여야 응시할 수 있으므로 일시에 관학(館學)에 모여 앉아 소란만 피울 뿐 학문에 힘쓰지 않는 실정이지만, 시험 날짜만 경과하면 서도(書徒)와 원점(圓點)이 찬 자는 나가고 차지 않은 자는 도로 들어오는 등 혹 나가기도 하고 혹 들어오기도 하여, 지금과 같이 함께 모여 있지 않을 것으므로 학문에 힘쓰게 될 것입니다. 서도법(書徒法)을 만든 초기에는 유생 중에 강(講)을 들으며 학문에 유의한 자도 있었으나 중간에는 쓸모없는 서도법은 폐지해야 옳다는 의논도 있었다 합니다. 그러므로 유생들도 이 법은 머지않아서 폐지될 것이라 여기고, 심지어는 학업에 유의하지 않고 이 법이 폐지되기만을 기다린 자까지 있었다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이 법을 오래도록 고수하고 시행하여 조금도 요동됨이 없게 한다면 유생들이 자연 학업에 근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법을 만들 때는 세밀한 심사를 거쳐야 하며 법이 일단 만들어진 뒤에도 의당 오래도록 고수하여 결과를 기다릴 것이고 경솔히 고쳐서는 안 된다. 또 별시나 초시의 시제(試題)를 미리 정하는 것은 과연 온당치 않으니 그 시기에 임하여 취품하도록 하라. 다만 이번에는 이미 정하여졌으므로 다시 고칠 수 없지만 이후부터 별시나 초시에는 시제를 미리 정하지 말고 그 시기에 취품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저번 대신이 성균관에 가서 유생들에게 제술(製述)을 시험할 때 승지를 보내 배율(排律)을 짓게 하라고 일렀지만, 배율은 사실 학궁(學宮)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혹은 배율을 혹은 다른 문장을 곁들여서 짓게 하는 것이 좋겠다. 또 배율은 우연히 한차례 시도하였을 뿐 영원한 규칙으로 삼자는 것이 아니었다."

하니, 임붕이 아뢰기를,

"이 버릇이 혹 폐단이 될까 염려되어 의논해서 아뢴 것입니다. 배율을 간혹 짓는 일을 잘못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김안로는 아뢰기를,

"당(唐) 송(宋) 시대에도 혹 시(詩)로 사람을 뽑았으니, 어찌 시로 사람을 뽑을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로 사람을 뽑는 것을 규칙으로 정한다면 혹 부화(浮華)하는 버릇이 생길 것입니다. 논상(論賞)하는 자리에서는 간혹 시를 제술하여도 불가하지 않습니다. 또한 따로 조항을 만들어 운영하자는 것이요, 감히 옛것을 폐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즉 지금 폐습이 이미 형성되어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는 것이며, 영원한 규칙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강경(講經)을 시험할 때 1경(經)을 지원하게 하는 것은 새로 생긴 규칙이 아니라 전례를 인습한 것 같다. 그러나 강경에 관한 규칙은 과연 가벼운 편이다."

하였다. 김안로가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누구나 다 1경(經)만을 전공하여 강경에 응시하고 다른 경은 강하지 아니하니, 지금 강경 시험에서 1경을 지원하게 하는 것은 조금도 불가함이 없습니다. 혹 어떤 한 부분을 뽑아 강하게 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하고, 동지사 권예(權輗)는 아뢰기를,

"견항진(犬項津)을 막는 공사는 공조(工曹)에서 관장하게 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한 점이 많으므로, 지난번 수군(水軍) 역사(役使)의 사목(事目)에 의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승군(僧軍)과 수군과는 근만(勤慢)이 같지 않습니다. 승군은 휴대한 식량이 넉넉하지 못한 터이라 날짜를 계산하여 공사를 빨리 끝내려 하므로 독려를 가하지 않아도 각자가 힘을 다하는데 다만 국가에서 준비하여 지급할 물건을 지급해 주지 못할 뿐입니다. 현재 막아야만 할 곳을 포백척(布帛尺)으로 헤아려 본다면 대략 3천여 척(尺)이 됩니다. 그중에 공사가 갑절이나 힘겨운 곳도 있고 쉬운 곳도 있는데, 공사가 가장 힘겨운 곳은 1천 척이고 약간 쉬운 곳은 3분의 2가 됩니다. 현재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승군은 1천 8백여 명인데, 뒤따라 도목(都目)을 대비하여 오는 자가 줄을 잇고 또 스스로들 모여서 부역하러 오는 자도 많으니, 수군(水軍)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토석(土石)을 짊어지는 등 힘으로 할 일은 독려를 가하지 않아도 각자가 힘을 다하는데, 큰 바위를 깨뜨리는 일들에 대하여는 승군 중에 석공(石工)도 없고 또 정(錠)이나 쇠망치 같은 기구가 없으므로 바위를 깨뜨리려 하여도 맨손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는 지난번에 쌓아놓은 돌이 남아있으므로 승군이 이 돌을 가지고 공사를 진행하지만 이 돌을 다 사용하면 할 일이 없게 됩니다.

또한 호패(號牌)는 나무나 혹은 종이를 사용하는데,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만 종이를 사용하면 편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애당초 조정에서 중의를 모아 확정한 일이니, 공조에서만 종이로 패첩(牌牒)을 만들어 발급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 역시 조정의 대사이므로 의당 대신 및 예조(禮曹)와 상의해서 처리해야 합니다. 또한 승군의 부역(赴役) 기일이 동시(同時)가 아니어서 먼저도 되고 뒤에도 되는 선후의 차별이 있으므로 공사가 끝나는 대로 호패를 발급해 주어야 하는데, 공조·호조·예조가 한군데서 제작 발급하지 않는다면 이리저리 이문(移文)하는 과정에서 간위(奸僞)가 작용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승군들의 실정을 보면 저마다 국사에 힘을 다하고 있는데, 만약 부역 기일이 끝나는 대로 호패를 발급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반드시 식량이 떨어져 끝내 기다릴 수 없으므로 그냥 흩어져 가고 말 것입니다. 대체로 작은 물도 막기 어려운데 이처럼 큰 강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늦춰도 될 일이면 천천히 진행하여도 되지만, 이 공사는 단시일에 끝내야 할 일로 공사 구역을 재어서 맡겨준다면 가까운 시일에 준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준비되지 않아도 공사의 진행이 어려운데 지금 모든 것이 준비되지 않고 있으니 일을 어떻게 진행하겠습니까. 수천 명의 인력(人力)이 1∼2일간 공사를 중단하는 것을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공조의 의향을 보면 도감(都監)을 설치하기 위하여 그러는 모양이다. 하지만 도감을 설치하면 그 폐단이 심할 것이므로 설치할 수 없다. 모든 일에 각사(各司)가 함께 제 시기를 맞추어 거행하도록 하라. 공조 단독으로는 처리할 수 없다. 호패 문제는 역시 끝나는 대로 제작 발급하되, 공조와 해사(該司)가 공처(公處)에 모여서 상의해서 진행하면 반드시 쉽게 처리될 것이다. 다만 나무를 사용하면 제작이 어려우나 종이를 사용하면 비교적 쉬울 듯하기에 이를 어제 공조에 일렀다."

하였다. 임붕이 아뢰기를,

"요즈음 복색(服色)에 저마다 사치를 숭상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조정의 대회례(大曾禮)나 연향(宴享) 때에만 사라 능단(紗羅綾緞)을 입었었는데 지금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자마자 입고 있으니 응당 입어야 할 것을 금지할 수는 없으나, 그 습관만은 잘못입니다. 또 짙은 초록색을 엄금하므로 당하관은 입지 않는데, 당상관이 오히려 입는가 하면, 혹 경연(經筵)에서까지 태연히 입는 자가 있으니 이는 다 신들이 무능한 까닭입니다. 경연에까지 입고 들어오는 자가 있는데, 딴 곳에서야 어찌 법을 두려워하여 입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일렀다.

"사치하는 습관은 각자가 반성하여 힘써 버려야 한다. 재상이 법을 범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저절로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8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635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기(軍器) / 군사-관방(關防) / 정론-간쟁(諫諍) / 풍속-예속(禮俗) / 사상-불교(佛敎) / 호구-호구(戶口) / 의생활-예복(禮服)

  • [註 040]
    양제(良娣) : 조선조 때 세자궁(世子宮)에 소속되었던 궁녀직(宮女職)으로 종2품 내명부(內命婦)의 벼슬.
  • [註 041]
    배율(排律) : 한시(漢詩)의 한 체. 오언(五言) 또는 칠언(七言)의 대구(對句)를 여섯 구 이상 배열한 시(詩).
  • [註 042]
    수정영(水精纓) : 수정으로 된 갓끈.
  • [註 043]
    동당(東堂) : 식년과(式年科) 또는 증광과(增廣科).
  • [註 044]
    경부(徑赴) : 순서를 건너 뛰어 응시함.
  • [註 045]
    삼백편(三百篇) : 《시경(詩經)》을 말함.

○辛卯/御朝講。 領事金安老曰: "弓矢造作, 固非偶然, 今軍器寺所藏弓矢, 皆無可用之物。 中朝與我國之事相同, 許多郡縣, 皆藏弓矢。 近聞中國以郡縣弓矢, 皆令上之, 使能作者, 改造還下云。 今軍器寺及郡縣所藏弓矢, 亦不可用云。 然所付之角, 則可以用之。 如久陳不可用者, 分與軍士, 擇其可用者, 改造藏之, 其他郡縣所藏弓矢, 亦令改造, 以備緩急。 如其無用之物, 則雖積如山, 何所用哉?" 上曰: "斯言當矣。 去庚午年倭亂時, 官藏弓矢, 皆不可用云。 今當及其不至於已甚, 使之改造可也。" 司諫權祺曰: "世子良姨揀擇時, 尹元亮女子禁婚。 尹元亮, 乃中宮至親, 雖無相避, 物論皆以爲未便。" 掌令林鵬曰: "尹元亮女子, 於東宮, 乃母后同姓至親也。 東宮當以母后至親, 待之可也, 至於禁婚, 則不可。 中朝則或有如此之事, 我國則習俗, 與中朝有異。 若終禁婚, 遂作邸配, 則後世豈無議論乎?" 曰: "良娣, 當廣求中外, 務要精擇, 非但擇其門地, 當先察其賢否。 雖非尹元亮女子, 豈無可當之人乎?" 上曰: "尹元亮女子, 雖曰禁婚, 不必定用矣。 大抵禁婚之人, 初雖禁婚, 後或許婚, 例也。 此則初不計料, 而禁婚也。 但於世子無相避, 故禁婚矣, 所啓至當。 後日揀擇時, 許婚可也。" 曰: "儒者之爲學, 必群居講論。 近來全不務學, 故設書徒圓點之法, 使之聚館學, 講習學問, 其矯斯弊也至矣。 且策問抄集之弊, 今時爲極, 故別試以詞賦取人, 近又於成均館製述時, 試排律。 以此儒生等, 皆以爲殿試亦必以排律取之, 皆類抄排律四韻, 而誦讀之。 若以此成習, 則厥終之弊, 浮誇莫甚。 至於講經前, 則於五經中, 自願三經, 而抽生一書講之, 今則講自願一書。 今之儒生, 本不好實學, 而又導之如此, 則臣恐自今以後, 儒者全不讀實學也。 凡製述, 必以文之大者試取, 則雖有一二人幸中者, 猶可察其能否, 而取之, 至於詞賦, 亦未可定爲得人矣。 詞賦亦皆抄集, 而僥倖, 何異於策問乎? 臣意以爲, 別試則額數雖當預定, 試題則不爲預定, 使儒生莫知端倪, 無文不習, 而臨時試官, 肅拜後出某題事, 自上命之, 則儒生於文, 自不得不徧習矣。" 安老曰: "近聞儒生之事, 國家雖誠心勸勉, 莫有遵奉之意。 古之通讀時, 儒生等無不講習, 而今則雖有通讀, 而其實無益。 儒生之參在後行者, 其所持入冊, 或非講論書, 或有不持冊, 而入參者, 其無意於講習者如此。 且法司聞儒生騎馬之弊, 嚴令禁止, 則儒者或詐爲武夫之體, 垂水精纓子, 使下人持弓矢, 至於館學門近處, 下馬而入。 雖頑愚凡民, 尙皆畏法。 況名爲儒者, 至於此極, 未知何以救之也。 又聞頃者, 儒生入庭試者二千餘人, 而其入格者, 只二人而已, 其不勤學也如此, 事體至爲埋沒。 可勝言哉? 別試時, 以其詞章取之者, 非永廢策問也, 欲矯時弊, 而爲之也。 古之儒者, 以策問爲上者, 古之時, 始學之士, 初學詩賦, 次學論表, 及其博覽而後, 學策問, 故其文有足可觀, 而不能爲詩賦者, 無意於表, 不能爲論表者, 無意於策問。 且未捷司馬者, 不得赴東堂, 而無徑赴之意, 今則不然, 初學之士, 不以先學詩賦爲心, 乃先學策問, 徑赴東堂, 而詞章頓廢不習。 大抵策問, 則儒者博覽群書, 於文無不能, 然後其志, 施之於策問, 故國家於試場, 設而取之, 欲擇其識時務者, 用之也。 以文章家言之, 策問, 非其文也。 苟能製詩賦, 則無不能製策問者。 且策問之題, 或問時務、或問災變、或問歷代人物、或問時弊, 至題意多有類同, 故多有抄集, 剽竊成篇, 不能書片簡者, 亦皆製策問, 僥倖取第。 近欲矯其弊習, 故別試、初試時, 勿以策文試取, 而殿試, 則或間試策問事, 自上處之矣。 且別試時, 試官肅拜後, 出某題事, 自上封送司諫之所啓, 當矣。 然式年, 則試題之規, 具在大典, 人皆預知, 疑若無文不習, 而未聞有一人能製一文者。 今雖不預定試題, 使儒生無文不習, 亦安有能製者乎? 大抵立法未久, 隨卽旋廢, 則人無定志, 莫有信奉之者。 非徒儒者不信法也, 其於國事, 亦多有累矣。 大凡詞章, 出於六經, 然後爲理勝之文矣。 詞章而非理勝, 則不可謂之文矣。 若能製詩而理勝, 則豈以詩章爲賤乎? 詩本權輿於三百篇, 而當聖人之刪詩書、定禮樂也, 乃以詩爲感發懲創之資, 而取之。 其化於善也, 莫良於詩, 故古人無不重之, 後世, 則徒詠風雲月露之狀, 而不本於三百篇之遺意, 故人皆賤之矣。 臣爲儒時見之, 人性不能周(編)〔徧〕 , 或近於實學, 或近於詞章, 故其性, 長於詞章者, 務詞章; 近於實學者, 務實學。 其只治實學, 而不爲詞章者。 不能通暢, 故終爲無氣之人, 而只任訓誨之職而已。 其長於詞章者, 多有發揮之事, 故該通於事理。 是故國家之任用, 亦多其人。 今則經學、詞章, 俱不爲之, 安有如此之時乎? 常時以專尙詩章, 爲不可者, 恐末流之弊, 或至於浮靡, 故古之人君, 亦不敢專以詩章爲尙, 今則專不習詩章, 故別立法勸之。 況我國, 乃事大之邦, 尤不可專尙實學也, 而無一人能爲詞章者。 不知何以爲之然後可也。" 又曰: "法之廢立, 有如作舍道傍, 朝更、夕變, 安能有成乎? 大抵法度新立之初, 議論固多同異, 別試、初試, 以詞賦取人事, 已共議定, 而立其規矣。 業已立其規, 必堅持悠久待之, 明知利害而後, 乃可更張也。 若才立而旋廢, 則人皆不信其法矣。 今則試日已逼, 儒生必爲圓點, 乃得赴試, 故一時多聚于館學, 徒致紛擾, 而不爲之學矣。 若過試, 則書徒圓點, 先滿者出去, 其未滿者, 從而入, 或出、或入, 不如今時之共聚, 則可能爲學矣。 聞當初書徒立法之時, 儒生或聽講, 而志學矣, 中間又有書徒無益, 可廢之議矣, 故儒生等亦以爲: ‘此法不久當廢。’ 尤不有志乎學業, 而坐待其廢。 臣意以爲, 此法當堅持, 而行之悠久, 毋或少撓, 則儒生自不得不勤學矣。" 上曰: "立法之初, 不可不審, 而旣立之後, 亦當堅持, 悠久待之, 而不可輕改也。 且別試、初試製題預定, 果似未便。 臨時取稟可也。 今則已定矣, 不可更改。 自今而後, 別試、初試, 則試題不預定, 而臨時取稟爲之可也。" 上又曰: "前者大臣, 往成均館, 製述儒生時, 遣承旨俾製排律, 排律, 果不合於學宮也。 然或以排律, 或以他文, 互相製述可也。 且排律, 偶一爲之耳, 非所以爲永規也。" 曰: "恐或成習, 而爲弊, 故啓之矣, 非所以或製排律, 爲誤也。" 安老曰: "之時, 或以詩取人。 豈(似)〔以〕 是爲不可取人乎? 果以詩定取人之規, 則或有浮靡之習矣, 論賞時, 間或出詩製之, 未或不可也。 且別建條章, 非敢廢舊也。 方今弊習已成, 不可坐視不救, 故欲矯之耳, 非必爲永規也。" 上曰: "今則試講經, 自願一書, 非新規也, 似因前例矣。 然講經規矩, 果爲輕矣。" 安老曰: "中朝則皆以一書, 爲業經講之, 而他書則不講也, 今之講自願一書, 未或不可也。 或抽栍以講, 亦無妨也。" 同知事權輗曰: "犬項防塞事, 使工曹掌之, 然多有未盡之事, 今依前者水軍役使事目爲之。 僧軍則與水軍, 勤慢不同, 僧輩裹糧未優, 計日欲速畢, 故雖不督役, 自各力役。 但國家, 備給之物, 不能給之耳。 今防塞處, 大槪以布帛尺量之, 則三千尺許也, 而其中, 或有功役倍重處, 或有輕處。 其中功役最重處, 乃一千尺, 而稍易處, 則三分之二也。 僧輩時赴役者, 一千八百餘數, 而隨後爲都目, 而來者相繼, 又自募而赴役者亦多。 此非水軍例也。 負土石, 可以力致之事, 則雖不督役, 各自盡力爲之矣, 但於剖大石等事, 則僧人中無石工, 又無錠、鐵椎等物, 雖欲剖石, 不可以徒手爲之矣。 今則前日所築之石遺在, 故僧輩以此石爲役矣, 若盡用是石, 則無所事矣。 且號牌, 或以木, 或以紙, 兩無輕重。 但以紙爲之, 則似乎便易矣, 然當初朝廷共議已定事, 工曹不可獨以爲, 以紙爲牒, 而給之也。 斯亦朝廷大事, 當與大臣及禮曹, 同議處之。 且僧軍畢役, 不在一時, 或先、或後, 先後有異。 當隨其所畢, 給牌爲可, 而工曹、戶曹、禮曹, 若不同處造給, 則轉傳移文, 不無奸僞之弊。 見僧人之情, 皆欲盡力於國事, 而若事畢, 不能趁時造牌給之, 則彼必糧盡, 難於留待, 則皆散去矣。 大抵雖小水, 防之似難。 況橫防大江, 非小事也。 若可緩之事, 則雖徐爲之可也, 今此之事, 若尺量分授, 則不多日間, 可畢役事, 而一物不備, 用力爲難。 況今諸事不備若此, 則其何以爲之乎? 以數千之衆, 一二日廢役, 固非小事。" 上曰: "昨見工曹之意, 欲設都監而然, 若設都監, 則甚爲有弊, 不可設也。 凡事, 令各司趁時擧行矣, 工曹不可獨爲之也。 號牌造給事, 則隨其畢役, 而造給之。 工曹與該司同議, 於公處而爲之, 則其勢必易。 但以木爲牌, 則難得以造之, 以紙爲之, 則似乎便易, 故此事昨已言于工曹矣。" 曰: "近者服色, 爭尙奢侈。 其在前時, 唯於朝廷大會禮及宴享時, 服紗羅綾叚, 而今則纔陞堂上, 而服之。 應服之物, 雖不得禁之, 其習則非矣。 且深染草綠嚴禁, 則堂下官不服矣, 堂上官猶服不已, 或於經筵, 恬然服之者有之, 皆臣等不職之所致也。 經筵時, 或有反入之者。 況於他處, 畏法而不服乎?" 上曰: "奢侈之習, 人各自察, 而務袪之事也。 宰相不爲犯禁, 則在下者, 自不得爲之矣。"


  • 【태백산사고본】 41책 8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635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기(軍器) / 군사-관방(關防) / 정론-간쟁(諫諍) / 풍속-예속(禮俗) / 사상-불교(佛敎) / 호구-호구(戶口) / 의생활-예복(禮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