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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80권, 중종 30년 9월 15일 계유 3번째기사 1535년 명 가정(嘉靖) 14년

제릉에 제사하고 비망기를 내리다. 박연 폭포 행행에 대한 영의정 김근사 등의 논의

영의정 김근사(金謹思)와 좌의정 김안로(金安老)가 행궁(行宮) 밖에서 배알하였다. 상이 비망기(備忘記)로 전교하기를,

"내가 즉위한 지 31년이 되도록 한 번도 제릉을 배알하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한 지가 오래였는데 날씨도 청명한 오늘 배알의 예(禮)를 마치니 더없이 기쁘다. 모든 집사자(執事者)들 가운데 자궁(資窮)되지 않는 자는 가자(加資)하고 자궁된 자에게는 대가(代加)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제릉후릉(厚陵)목청전(穆淸殿)의 참봉(參奉)도 아울러 가자하는 것이 옳다. 성종조(成宗朝)의 고례를 보니,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와 경기 감사도 아울러 가자했는데 그 당시 물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2품인 관원은 물품으로 상을 주고 자궁이 되지 않은 여러 집사자에게만 가자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번에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내가 제사 때문에 온 것이지 유람하러 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옛부터 박연 폭포(朴淵瀑布)는 유명하다고 일컬어진 곳이고 또한 여기서 멀지도 않다. 일찍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보니 다음과 같은 고시(古詩) 두 귀가 있었다.

‘임금님 수레 이곳에 왔었다고 들었거니

당시 임금님 수레 지나던 곳이네’

이로 본다면 고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성종께서도 이곳을 행행하시려다가 마침 대신 성봉조(成奉祖)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행행하지 못하셨다.

이번에는 내일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인재를 뽑은 다음 방방(放榜)하고 나서 별달리 할 일이 없을 경우 모레는 박연 폭포에 행행하여 종실과 재상, 호종한 인원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그 다음날에는 경덕궁(景德宮)에서 양로연(養老宴)을 행하고 그런 뒤에는 인마(人馬)를 모두 쉬게 했다가 또 그 다음날에 환궁하는 것이 편할 듯하다. 그래서 그 가부를 하문한다."

하였다. 근사 등이 서계(書啓)하기를,

"멀리 계신 능을 추모하여 친히 제사를 드리는 일은 대사(大事)입니다. 더구나 옛 도읍지를 보고 느끼는 것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박연폭포는 전대에 놀러다니며 관광하던 곳이니 ‘임금의 수레가 왔었다.’는 말은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 다만 상께서 유람을 즐기시지 않는 것은 천성이신데 어찌 편안히 놀기를 즐기시려는 생각이 있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또 향사 때문에 행행하셨다가 고적을 두루 찾으려 하시는 것이니 전철(前轍)을 거울삼아 경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므로 무방할 듯합니다. 그러나 도로와 교량을 미처 수리하지 못할 것이니 이 또한 어려울 듯합니다.

또 이곳은 전대 왕조가 흥하고 망한 터전이므로, 상께서 목청전(穆淸殿)을 참배하셨으니 성조(聖祖)께서 창업하신 어려움을 생각하셨을 것이고 만월대(滿月臺)를 보시게 된다면 전대의 잔약한 후손들이 편안히 놀기를 즐기다가 패망하게 된 사실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현지를 두루 관람하시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그 유적을 실지 답사하여 그 옛일을 궁구해야 될 것이니, 어찌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고 새로운 장래를 경계하는 것을 절실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은(殷)나라가 거울삼아 경계할 것은 먼 데 있지 않고 하(夏)나라 임금의 세대에 있다.230) ’ 하였는데, 반드시 ‘하나라 임금’이라고 한 것은 시대가 가까와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지금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것은 전조(前朝)231) 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또 《시경(詩經)》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메기장 찰기장 이삭이 일렁일렁232)

이것은 어떤 느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상(聖上)께서 이것으로 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더욱 간직하시다면 어찌 성덕이 더욱 빛나지 않겠습니까. 여러 집사자들에 대한 가자(加資)는 빈번할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근년에 여러 차례 하려고 하다가 연고가 있어 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시행하게 되었는데 상(上)의 기쁨이 고조되어 상으로 가자하려 하시니, 무슨 방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2품인 사람에게는 물품을 상으로 주시겠다는 상교 또한 지당하십니다."

하니, 답하였다.

"내가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보았더니 흥망의 자취가 소상하게 실려 있었다. 이제 이곳에 와서 고적을 모두 살핀다면 거울삼아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연 폭포를 보려는 것은 유람하자는 것이 아니다. 도로는 대강 닦아서 말 한 필이 통행할 수 있도록만 하고, 크게 닦느라 백성들의 힘을 헛되이 수고롭게 하지 말라."


  • 【태백산사고본】 40책 80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604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인사-관리(管理)

  • [註 230]
    은(殷)나라가 거울삼아 경계할 것은 먼 데 있지 않고 하(夏)나라 임금의 세대에 있다. : 자신이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할 일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말이다. 즉 은나라 사람이 거울삼아야 할 것은 바로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이란 뜻이다.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
  • [註 231]
    전조(前朝) : 고려 조정.
  • [註 232]
    메기장 찰기장 이삭이 일렁일렁 : 주(周)가 쇠약해져서 풍호(豊鎬)에서 낙읍(洛邑)으로 천도(遷都)한 뒤에 대부(大夫)가 업무 수행차 풍호를 지나면서 성대(聖代)가 이제 덧없이 된 것을 애달파하며 읊은 시. 《시경(詩經)》 왕풍 서리(王風黍離).

○領議政金謹思、左議政金安老, 來詣行殿之外。 上以備忘記傳曰:

予卽位三十一年, 一未展謁齊陵, 中心未安久矣。 今日(日侯)〔日候〕 淸明, 展拜禮訖, 喜心曷極? 諸執事未資窮者, 加資, 資窮者, 代加, 似可, 厚陵穆淸殿參奉, 竝加〔資〕 亦可。 以成宗朝古例觀之, 開城府留守、京畿監司竝加資, 而其時物論有之。 今則二品人員, 則賞物, 未資窮執事, 則加資何如? 今到此處, 千載一幸。 予爲祭祀, 非爲遊觀而來也。 古稱朴淵有名之地, 而亦不遠於此處。 嘗觀《東國輿地勝覽》, 古詩云: ‘曾聞玉輦此經過。’ 又云: ‘當時玉輩經行地。’ 由是觀之, 不無古例。 成宗欲幸此地, 適聞大臣成奉祖之卒, 未果行也。 今則明日謁先聖取人, 放榜之後, 別無所爲, 欲於明明日, 幸朴淵, 饋宗宰、扈駕人員, 翌日於景德宮, 行養老宴, 其後, 則人馬皆休, 又翌日還宮似便, 故問其可否。

謹思等書啓曰: "追慕遠陵, 而親祀, 大事也, 況古都所見, 無非觀感之事也。 朴淵乃前代遊觀之地, 詩所云: ‘玉輦經行。’ 不足法也。 但自上不喜遊觀, 出自天性, 豈有逸豫之念? 今且因祀事臨幸, 欲歷古跡, 非爲遊觀, 亦可以鑑戒前轍, 似甚無妨。 然道路橋梁, 必未及治, 恐亦難也。 且此乃前代興亡之基, 自上拜穆淸殿, 則宜思聖祖創業之艱大, 見滿月臺, 則亦思前代孱孫, 以逸豫覆亡之事。 凡所歷覽, 必涉其迹, 而究其故, 豈不益切於披往牒, 而戒靑史者乎? 古人云: ‘殷鑑不遠, 在夏后之世。’ 其必稱夏后者, 以耳目所及, 而言也。 今之所鑑者, 莫如前朝也。 且詩曰: ‘彼黍離離, 彼稷之穗。’ 此無非起感之事也。 伏願聖上, 因此益存儆懼之心, 豈不增光於聖德乎? 諸執事加資, 亦不可頻數爲之, 但近年累欲爲之, 而有故不爲, 今始行之, 自上喜極, 欲給賞加, 有何妨焉? 二品人賞物事, 上敎至當。" 答曰: "予嘗覽《高麗史》, 昭載興亡之迹。 今到此地, 窮覽古跡, 可爲鑑戒。 欲見朴淵者, 非爲遊觀, 道路則略修, 單馬通行之路, 勿令大治, 虛勞民力。"


  • 【태백산사고본】 40책 80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604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