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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78권, 중종 29년 11월 24일 병술 4번째기사 1534년 명 가정(嘉靖) 13년

제주의 표류인 만주 등이 남경에서 본 것 등에 대해 아뢰다

제주의 표류인 만주(萬珠) 【만주는 자칭 첨지(僉知) 서후(徐厚)의 종이라 하였다.】 이 아뢴 내용은 다음과 같다.

"2월 20일에 제주에서 신공(身貢)305) 을 배에 싣고 떠나 추자도(楸子島)에 닿았을 때, 폭풍을 만나 표류되어 윤2월 1일에 중국 남경(南京) 회안위(淮安衛) 지방에서 정박했습니다.

어선(魚船) 다섯 척이 때마침 근접해 왔으나 우리들을 보고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모르는 그들은 그대로 배를 저어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뒤따라가서 바가지로 바닷물을 떠가지고 몸을 구부려 마시는 흉내를 내자, 그들은 우리들이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을 알고 즉시 밥지을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뒤 우리를 향하고 말을 했는데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너희들은 어느 나라 백성이냐?’고 묻는 듯하기에 저희들이 ‘우리는 고려 백성들이다.’하니 그들은 곧바로 이장(里長)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장이 곧 나와서 둘러보고 배를 끌고가 상사(上司)에게 알렸고, 그곳 관원이라는 사람은 우리 나라 만호(萬戶)와 같았는데, 걸어나와 살펴본 다음 최만동(崔萬同)만 데리고 회안부(淮安府)로 가서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은 저희들의 옷 모양을 보고서야 조선 사람임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 관원은 본처(本處)로 되돌아와 저희 12명을 모두 인솔하고 회안위(淮安衛)로 가서 맡겼습니다. 저희들이 배에서 내리는 날 구경하는 인파가 10여 리를 이었는데 그 가운데 섞여 있던 어린 아이들 중에는 밟혀서 다친 자도 있었습니다.

회안위에는 육사(六司)가 있는데 육사가 저희를 둘러본 다음 사창(司倉)에 유치(留置)시키고 하루 세 끼를 거르지 않고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끼마다 일인당 쌀 두 되, 돼지고기 한 근 그리고 간장·식초·생강·마늘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을 때도 구경꾼은 매일 뜰을 가득 메울 정도로 모여들었는데 군사들이 문을 지키며 금지하자 은(銀)을 뇌물로 바치고 들어와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칠사(七司)에는 관원이 각각 한 사람씩 있었는데 모두가 사모(紗帽)와 비단옷을 입었는데 흉배(胸褙)에는 죄다 금룡(金龍)을 그려 넣은 것이었으며, 띠는 회안부에서는 옥대(玉帶)를 사용하고, 육사(六司)에서는 모두들 대모대(玳瑁帶)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인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아전(衙前)인 듯했고, 군사(軍士)들은 무각복두(無角幞頭)를, 나장(羅將)은 감토(甘土)306) 를 쓰고 있었습니다.

죄있는 사람은 큰 대나무를 네 조각으로 쪼개어 한 조각을 가지고 형벌을 하며 또 둥근 나무를 다섯 개의 손가락 사이마다 끼워서 나무 양끝을 동이고 죄니, 사람의 고통치고 그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화관(花冠)에 짙은 화장을 하고 교의(交倚)에 늘어앉아 있고 남자들은 항상 검은 옷을 걸치고서 밥과 반찬을 갖추어 공궤(供饋)나 할 따름이었습니다.

성안의 큰 절[大伽藍]들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을 정도인데 모두 벽돌로 만든 탑(塔)이 있었습니다. 관부(官府)도 전부 웅장하고 아름다왔는데 섬돌 앞 뜰의 보도(步道)는 온통 벽돌이었고, 시가의 도로에는 벽돌을 깔아 놓았습니다.

형조의 관원이라는 자가 자주 찾아와 보며 우리에게 공궤하는 일들을 감독하는데 통솔하는 일을 매우 부지런히 했으며, 또한 수금(守禁)을 못하게 하고 저희들에게 마음대로 출입하면서 구경하게 하였으나 볼만한 산천이 없었고 마을 앞에 큰 강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6월 13일에는 형조의 관리가 감토 하나, 단의(單衣) 한 벌, 치마 한 벌, 포대(布帶) 하나, 그리고 행등(行縢)307) 과 버선이 서로 연결된 것 하나를 가지고 와서 주었습니다.

14일에는 관원 1인과 천호(千戶) 1인 및 군사 8인이 저희를 데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곁에는 무수한 채선(彩船)이 있었고 기이한 꽃과 좋은 나무들이 배 안에 섞여 심어져 있었습니다. 배의 사면 창문에는, 금으로 꾸미고 채색한 주렴을 드리웠는데 그 금빛이 눈부셨습니다. 좌우에서는 떠들썩한 노래와 피리 소리에 퉁소, 나각까지 불어대었습니다. 배에 걸린 커다란 돛은 그 길이가 20여 발이고 넓이는 8발쯤 되는데 저희가 탄 배는 중간 정도의 배였습니다.

7월 26일 오시(午時)에 통주(通州)의 강가에 닿아 배를 언덕에 대고 내려 관(館)에서 쉬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신 오준(吳準)이 먼저 도착해 있었으므로 저희 13인이 모두 나아가서 알현하니, 오 사신이 지극하게 위무하고 사신의 행차는 즉시 떠났습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각기 노새를 타고 바로 북경(北京)으로 들어갔는데 통주관(通州館)까지의 거리는 약 60리였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표류한 외인(外人)들이 거칠고 천박하여 족히 돌아볼 것이 없는데도 중국에서 우대하여 그들을 보살펴 준 것이 그처럼 극진하였던 것은, 그들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라 우리 전하의 중국을 섬기시는 정성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정성의 효과가 지극하다 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78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550면
  • 【분류】
    외교-명(明) / 역사-편사(編史)

  • [註 305]
    신공(身貢) : 노비가 신역(身役) 대신에 바치는 공물(貢物).
  • [註 306]
    감토(甘土) : 감투.
  • [註 307]
    행등(行縢) : 행전.

濟州漂流人, 萬珠 【珠, 自稱僉知徐厚奴。】 也: "二月二十日, 自濟州載身貢發船, 至楸子島, 遭風漂流, 閏二月初一日, 止泊于南京淮安衛地界。 有漁船五隻適至, 見吾輩不知爲何許人, 搖船馳去。 吾輩追往, 以瓢汲海, 爲俯飮之狀。 其人知其索水, 卽以炊飯水與之, 向我言說。 雖未能解聞, 若問其汝爲何國人。 俺等應曰: ‘我是高麗人。’ 其人卽報里長, 里長卽來視之, 引船而往, 報于上司。 號爲官員, 如我國萬戶者, 步出視之, 只率崔萬同一人, 往告于淮安府。 相其衣服之制, 認是朝鮮人。 其官員還至本處, 盡率俺等十二人, 往付淮安衛。 當吾輩下船之日, 觀者成群, 十里不絶。 其間小僮, 或有踐傷者。 淮安衛中有六司, 六司巡視俺等訖, 留置于司倉, 供饋三時不輟。 一時每一人, 用二升米, 猪肉一斤, 醬醋薑蒜皆在焉。 在此觀者, 亦日集滿庭。 軍士把門而禁, 則賂銀而開視者, 亦有焉。 七司官員, 各有一人, 皆着紗帽, 叚服胸褙, 皆畫金龍。 帶則淮安府用玉帶, 六司皆着玳瑁帶。 其下胥吏, 着幞頭, 又有着紗帽者。 不知何如人也, 有似衙前焉。 軍士着無角幞頭, 羅將着甘吐, 有罪者, 以大竹剖作四片, 用一片而刑之。 又以圓木, 列柑于五指間, 縛其兩頭, 絞而鑽之, 人之痛楚, 莫甚於此。 女則花冠盛粧, 列坐于交倚, 男則常着黑衣, 備飯羞供饋而已。 城中大伽藍, 罔知其數, 而皆爲甓塔。 官府皆壯麗, 階庭承步者, 盡是甎也。 市衢道路, 亦皆鋪甓。 名爲刑曹官員者, 時時來見, 檢其供事, 護之甚勤。 又不令守禁, 任其出入, 使之遊賞, 無山川可觀, 只有夫江橫前。 六月十三日, 刑曹官, 將甘吐一事、單衣一件、裙一件、布帶一事、行縢與襪相連者一件, 與之。 十四日, 官員一人、千戶一人、軍士八〔人〕 , 領俺等泝江而往。 傍有彩船, 無數奇花好樹, 雜植舟中。 四面窓戶, 粧金施彩, 乘簾金色, 眩亂左右。 歌管爭鬧, 簫螺竝吹。 所掛大帆, 長可二十餘把, 廣可八把許。 俺等所乘, 乃中船也。 七月二十六日午時, 止泊通州江。 卸船登岸, 憩食于館。 我國使臣吳準, 已先到矣。 俺等十三人, 齊進謁見。 吳使臣蘇待頗至, 使臣行次, 卽時發去。 俺等留宿。 翌日各乘驢, 直入北京, 去通州館約六十里。"

【史臣曰: "漂流外人, 麤鄙不足顧也, 而上國之優待, 下人之擁觀, 至於如此, 非貴其人也, 我殿下事大之誠, 有以致之也。 誠之效, 至矣哉!"】


  • 【태백산사고본】 39책 78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550면
  • 【분류】
    외교-명(明)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