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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77권, 중종 29년 8월 5일 기해 3번째기사 1534년 명 가정(嘉靖) 13년

오결 등이 초3일의 석전제에 음복하지 못한 것으로 대죄하다

대사간 오결(吳潔), 사간 채세영(蔡世英), 헌납 신거관(愼居寬)이 아뢰기를,

"석전제(釋奠祭) 드리는 날에는 조정이 음복하고 다음날에는 본원(本院)이 음복하는 것은 조종조의 관례입니다. 이달 초 3일은 석전제 올리는 날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성균관에서 본원에게 음복하기를 청하기에 본원이 성균관에 갔더니 그날 마침 대사례의 습례(習禮)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원에서는 습례가 끝난 뒤에 들어가 음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습례가 끝나고 나서도 왕자군(王子君)과 재상(宰相)들이 바야흐로 회동해서 활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들어가 음복하려 하였으나 왕자와 재상이 모여 있는 곳을 말 타고 지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을 내려 걸어가는 것도 불가할 듯싶었습니다. 그리고 음복을 하려면 먼저 들어가 알성(謁聖)을 해야 하는데, 알성을 하려면 반드시 왕자와 재상들이 활 쏘는 곳을 거쳐 들어가야 하니, 안 될 듯싶었습니다. 또 명륜당(明倫堂)에서 음복하려 하니, 명륜당이 외부와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왕자와 재상들이 밖에 계시는데 명륜당에 앉아서 음복한다는 것도 편안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왕자와 재상 등이 활쏘기를 마친 후에 들어가서 음복하자니 이것도 구차할 듯싶었습니다. 그래서 본원은 음복을 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음복하는 일은 사적인 일이 아니요 역시 공적인 일인데, 음복을 하지 않고 돌아왔으니,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오결 등이 또 아뢰기를,

"성균관 반수(泮水)의 안쪽은 문묘(文廟)의 측면(側面)이니, 경솔히 모여 놀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대사례를 반드시 이곳에서 하게 되면 모든 행례(行禮) 절차를 전부 전좌(殿坐)의 예(例)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과녁을 설치하고 북치는 일 같은 것도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따라서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니 일단 습례를 마치고 나면 습례하던 모든 관리들은 즉시 해산해서 돌아가야 하는 것이어서 그대로 남아 함부로 노는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습의(習儀)를 마친 뒤에 여러 왕자와 재상들이 그대로 남아 하련대(下輦臺) 앞에 모여 활쏘기를 하고, 심지어는 북까지 쳤으니, 이보다 심한 무례가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대신이 모이는 곳은 바로 조정인 것인데 갈 곳이 아닌데도 경솔하게 왕자와 더불어 회동하고 활쏘기를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조정이 존엄해지지 않은 처사입니다. 더욱이 헌부 같은 곳은 조정의 잘못된 일을 규찰함이 마땅한데 대관(臺官) 중에도 함께 회동한 자가 있었다 하니, 매우 사체(事體)에 어긋났습니다. 체차한 뒤에 추고하소서. 그리고 대사성 윤안인(尹安仁)은 주인의 입장에서 회동할 것을 청했으니, 또한 심히 부당합니다. 함께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안인이 주인의 입장에서 회동할 것을 청했으니, 과연 부당하다. 추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어제는 석전제(釋奠祭)에 음복(飮福)하는 일로 조정이 성균관에 회동했던 까닭에 모여서 활쏘기를 했던 것이다. 내가 임술년에 대사례(大射禮) 습의하는 것을 보니 습의를 마치고는 종일 활쏘기를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파하였다. 어제 재상들도 반드시 전례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대들이 음복을 위해 공회(公會)한 것이면, 마땅히 여러 재상들에게 고하고 들어가서 음복을 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논박받은 대관(臺官)은 시비를 가려 체직해야 하겠으나 추고할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오결 등이 또 아뢰기를,

"임술년 대사례 때 습의한 뒤 하련대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것은 신들이 미처 몰랐습니다. 다만 조종조로부터 예에 따라 해오는 일도 만약 부당한 점이 있으면 꼭 그것을 준행하여 관례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물며 임술년 폐조(廢朝) 때의 일을 어떻게 전례하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께서 전교하시기를, 마땅히 여러 재상들에게 고하고 들어가 음복하는 것이 무방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만, 신들은 음복하는 일로 본원(本院)이 왔다고 하는 뜻을 성균관 아전을 시켜 제군(諸君)과 재상에게 고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비록 여기서 모여 활쏘기를 하고 있지만 들어가서 음복하라고 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들이 들어가서 음복하는 것이 사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하는 뜻은 전에 이미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대간은 공적인 모임이 아니면 다른 관아의 관리와 뒤섞여 처할 수 없는데, 어제 헌부는 왕자와 재상이 모여 활 쏘는 곳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들은 대간이 체통을 잃었다고 생각되어 추고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들이 비록 여러 재상들에게 음복할 뜻으로 고하기는 했습니다만, 상께서 내리신 전교를 보니 자세히 살펴 처신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대로 이 직에 있기가 편안치 못하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였다.

"임술년 때의 일은 내가 직접 보았다. 비록 폐조(廢朝)라고는 하나 그때에도 대간이 있었고 예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대사례도 한결같이 임술년 때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다. 또 그대들이 미처 자세히 살펴 처신하지는 못했으나,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 【태백산사고본】 39책 77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17책 527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왕실-의식(儀式) / 사법-탄핵(彈劾)

○大司諫吳潔、司諫蔡世英、獻納愼居寬啓曰: "釋奠祭日, 朝廷飮福, 翌日本院飮福, 祖宗朝例事也。 本月初三日, 乃釋奠祭日也。 翌日成均館, 請本院飮福。 本院往成均館, 其日適大射禮習禮也。 本院以爲: ‘畢習禮後, 當入飮福, 而習禮畢, 則王子君宰相, 方會(射候)[射侯] 。’ 若欲入而飮福也, 則王子、宰相聚會處, 不可騎馬而過, 下馬而步行, 亦似不可。 且飮福, 則當先入謁聖, 謁聖則必於王子、宰相射侯處歷入, 似乎不可。 且欲於明倫堂飮福, 則明倫堂雖若與外相隔, 然王子、宰相在外, 坐明倫堂飮福未安, 故竢王子、宰相等畢散後, 入而飮禮, 則亦似苟且, 本院不爲飮福而還。 飮福非私事, 亦公事也。 不飮福而還, 待罪。" 傳曰: "其勿待罪。" 吳潔等又啓曰: "成均館, 泮水之內, 乃文廟之側, 非作會褻慢之地也。 大射禮, 必於此地爲之者, 凡行禮節次, 皆依殿坐例, 故如張侯擊鼓之事, 一從禮文而施行矣。 旣罷習儀, 則諸習儀之官, 當卽還散, 不可仍行褻慢之事。 昨日習儀後, 諸王子、宰相等, 仍於下輦臺前, 作會射侯, 至於鳴鼓, 褻慢孰甚焉? 況大臣所會之處, 卽是朝廷, 非其所, 而輕與王子作會習射, 朝廷亦不尊重矣。 至如憲府, 則朝廷所失之事, 所當糾察, 而聞臺官亦有與會者, 殊失事體。 請遞差後推考。 且大司成尹安仁, 爲主人請會, 亦甚不當。 請竝推之。" 答曰: "尹安仁爲主人請會, 則果爲不當, 所當推之矣。 但昨日以釋奠祭飮福之事, 朝廷會于成均館, 故作會射侯矣。 予觀壬戌年大射禮習儀, 習儀後終日射侯, 日暮而罷。 昨日宰相等, 必知前例, 故爲之矣。 爾等謂飮福公會, 則當告諸宰相等, 入而飮福不妨也。 被論臺官, 是非間可遞矣, 非所推也。" 吳潔等又啓曰: "壬戌年大射禮時, 習儀後, 於下輦臺習射事, 臣等未及知之。 但自祖宗朝循例所爲之事, 若有不當, 則不必遵以爲例矣。 況壬戌年廢朝時事, 豈可謂前例乎? 上敎云: ‘當告諸宰相等, 入而飮福不妨也。’ 臣等以飮福之事, 本院來會之意, 令成均館吏, 告諸王子、宰相, 則答云: ‘雖會射于此, 入而飮福可也。’ 云。 臣等之入而飮福, 不合於事體之意, 前已啓矣。 且臺諫非公會, 則不可與他員雜處。 昨日憲府, 於王子、宰相會射處, 亦參, 故臣等意以爲, 失臺諫之體, 而請推之矣。 且臣等雖告諸宰相以飮福之意, 然觀上敎, 似不詳察而處之, 在職未安。 請遞。" 答曰: "壬戌事, 予親目擊。 雖廢朝, 亦有臺諫, 有禮義之時也。 故今大射禮, 一依壬戌年, 而爲之。 且爾等雖未及詳察處之, 何有關焉? 勿辭。"


  • 【태백산사고본】 39책 77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17책 527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왕실-의식(儀式)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