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모 연루자들을 벌하다
장순손·한효원·김근사 등이 의논을 써서 아뢰었다. 이어 아뢰기를,
"저번 정부(政府)에 하문할 적에 이미(李嵋)를 안치(安置)시키시려 했었고, 신들도 그것이 옳겠다고 여겼기 때문에 상의 분부를 지당하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 종묘 사직(宗廟社稷)에 크게 관계되는 죄라고 하기 때문에 신들이 다시 의논하여 아룁니다."
하였다. 그 의논은,
"전일 박씨가 저지른 흉모와 이번에 홍여가 범한 죄는 모두가 미(嵋) 때문에 발생된 것으로, 대간이 아뢴 바와 같이 바로 종묘 사직의 대계에 관계된 일입니다. 두 옹주는 속적(屬籍)을 끊어버려야 되고 인경(仁慶)도 외방으로 내쳐야 되며, 박수림 3부자(父子)도 대간이 아뢴 대로 시행해야 됩니다. 홍여가 비록 장하(杖下)에서 죽었지만 수견(守堅) 등이 진술한 공초(供招)에 죄를 범한 정상이 다 드러났습니다. 비상한 대악(大惡)은 비상한 법전에 따라 집행해야 됩니다. 단, 근래 옥사를 결단함에 있어 자복하지 않고 죽은 자는 연좌(連坐)시키지 않는 것이 예(例)입니다. 한결같이 율문에만 따른다면 예(例)와 다르게 되니, 짐작하여 논단(論斷)하소서. 이항이 종처럼 박씨를 섬겼다는 일은, 대간이 아뢴 바와 같다면 마땅히 무거운 법으로 다스려야 됩니다. 단, 지금의 흉모에는 간예하지 않았으니 드러내어 처형하는 것은 과중한 것 같습니다. 정광필은 아뢴 바가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의견을 진달한 것일 뿐 다른 뜻이야 있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수상을 체직시키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대신(大臣)들의 의논에 답하기를,
"미(嵋)의 일은 조정의 의논이 이러하니 사약(死藥)을 내려야 하겠다. 박수림 등과 김인경은 먼 곳에 부처(付處)233) 하라. 두 옹주는 폐서인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다시 의논할 일이 있다. 홍여가 자복하지 않고 죽었으니, 홍서주(洪敍疇)와 홍숙(洪淑)은 율에 따라 죄줄 수 없다. 서주는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라. 홍숙은 고신(告身)234) 을 다 빼앗도록 해야겠는가 아니면 함께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야 되겠는가? 다시 의논하라. 이항의 일은 대간이 아뢴 것이 온당한 것 같다. 이번 일은 재상 자리에 있는 권간(權奸)이 상응하여 발생한 것이니, 대간이 아뢴 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영상은 실수한 말이 있었지만 무슨 딴 뜻이야 있었겠는가. 단지 연방(延訪)할 때 병이라 핑계대고 들어오지 않았는데 정말 병들었다면 처음부터 오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데 대궐에 들어와서 병이라 핑계대었고 강요한 뒤에야 들어왔다. 지금 체직하지 않더라도 대간들의 아룀이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은 대역이므로 당연히 통쾌하게 정죄해야 된다. 다시 의논하라."
하였다. 순손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처음에는 자세히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환히 아셨고 공론도 저러하니, 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홍숙은 고신을 모두 추탈(追奪)하고 홍서주는 먼 변방에 귀양보내는 것이 또한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미(嵋)에게는 사약을 내리라. 두 옹주는 폐서인하고, 김인경은 먼 변방에 귀양보내라. 박수림·박인형·홍서주도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홍숙은 고신을 죄다 추탈하라. 이항에게는 사약(死藥)을 내리고, 정광필은 체직하라."
【미(嵋)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 상이 슬픈 마음으로 정원에 전교하였는데, 이 전교를 들은 사람은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교는 다음과 같다. "미가 어느 곳에서 죽느냐! 그가 죄 때문에 죽기는 하지만 바로 나의 골육이다. 시체나마 길에 버려지지 않게 거두어 주어야 하겠으니, 그의 관(棺)을 상주(尙州)로 실어보내도록 하라. 이 뜻을 감사(監司)에게 하유하고, 지금 가는 도사(都事)에게도 아울러 이르라. 그리하여 연로(沿路)의 각 고을로 하여금 역군(役軍)을 내어 호송하게 하라.".】
사신은 논한다. 미(嵋)가 작서의 변이나 목패를 매단 모의에 간예하였다면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죄이므로 드러내어 처형해도 애석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간흉의 무리들이 거짓 공론을 빙자하여 군부를 협박, 임금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면서도 조정으로 하여금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홀로 정광필만이 몸을 돌보지 않고 분발하여 경명군(景明君)과 영산군(靈山君)의 일을 인용하여 아뢰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의롭게 여겼다.
또 논한다. 항(沆)은 성품이 조급하고 각박하여 부드럽고 너그러운 아량이 없었다. 잔인하고 가혹한 이빈(李蘋)과 함께 양사(兩司)의 장(長)이 되어서는 팔을 내젓고 혀를 마구 놀려 사류(士類)들을 차례로 비방하여 일망타진했으니, 이미 군자의 마음을 지켜서 몸을 보호하는 도리에 어긋났다. 뒷날 김안로(金安老)가 이조 판서가 되었을 적에 마침 대사헌 자리가 비었으므로 드디어 항을 의망(擬望)하여 낙점(落點)받았다. 이러고 나서 안로는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여 참판 신공제(申公濟)를 돌아보면서 ‘호숙(浩淑) 【항(沆)의 자(字)임.】 이 낙점을 받았으니 매우 기쁘다.’ 했었다. 그러고 얼마 안 되어 항이 안로를 탄핵하여 내쫓았다. 항은 매양 ‘뒷날 안로가 면방(免放)되는 날은 바로 내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했었는데, 마침내 그의 손에 죽었다. 단, 항이 박빈(朴嬪)에게 빌붙었다고 허위 사실을 날조하여 죽인 그것이 억울할 뿐이다.
또 논한다. 조정이 같이 의논하여 미에게는 사약을 내리고, 박수림 등은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홍숙은 고신을 모두 추탈했고, 이항에게는 사약을 내렸고, 정광필은 수상에서 체직시켰고, 박씨는 이보다 앞서 사약을 받게 했다. 정광필이 이 옥사에 대해 의심을 품고 결정을 미루면서 ‘견성군은 반정(反正)한 처음 인심이 위의(危疑)스러웠기 때문에 부득이 일죄(一罪)로 다스렸지만, 영산군(靈山君)과 경명군(景明君)은 모두 간인의 입에 자주 올랐었다는 것으로 금고(禁錮)시켰었으니, 복성군(福城君)도 영산군의 예에 따라 금고만 시키자.’고 했기 때문에 시론(時論)이 비난했고 수상에서 체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광필은 충후하고 자애스런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본디 재보(宰輔)의 물망이 있었고, 사림(士林) 가운데 도움받은 자도 많았다. 그런데 뜻밖에 체직되었으니 이미 인정에 어긋난 조처였다. 하물며 용렬한 김근사(金謹思)로 대신했음에랴!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항(沆)은 대사헌으로 있을 적에 안로를 지척하여 내쫓았다. 항이 간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여론이 심하다고 여겼다.
【정광필은 수상으로서 궐내에서 죄인을 추국할 적에 병을 핑계대면서 들어가지 않았고, 또 고사(故事)를 인용하면서 심각하게 다스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간이 그를 논계하여 체직시켰다. 그리하여 좌상 장순손이 대신 영상이 되고 우상 한효원이 좌상이 되고 이상(貳相) 김근사가 우상이 되었다. 당시의 정사(政事)는 모두 대각(臺閣)에 달려 있었으므로, 대간이 논하는 일은 기필코 윤허를 얻어내고야 말았고 상도 모두 마음을 굽혀 따랐다. 처음에 대신 김극성(金克城)·유여림(兪汝霖)·조계상(曺繼商)·성세창(成世昌) 등이 대관이 뜻에 거스렸다가 모두 유배(流配)당하였었다. 이때에 공경(公卿)들은 위의 사람들이 당한 것에 경계, 화(禍)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저 그들의 뜻에만 맞출뿐 경연(經筵)의 자리에서도 서로 가부(可否)를 논하지 못하고, 구차스럽고 입을 다문 채 그들의 의견에 견제되어 갈 뿐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74권 67장 A면【국편영인본】 17책 432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역사-편사(編史)
○張順孫、韓效元、金謹思等, 以議書啓, 仍啓曰: "前者下問政府時, 欲以嵋爲安置, 臣等之意, 亦以爲然, 故乃以上敎爲當, 今朝廷以爲: ‘大關宗社。’ 故臣等更議啓之。 其議曰: ‘前日朴氏兇謀, 今此洪礪罪犯, 皆是爲嵋而發。 臺諫所啓, 正關宗社大計。’ 兩翁主, 屬籍當絶, 仁慶亦宜黜外, 朴秀林三父子, 竝依臺諫所啓施行。 洪礪雖死於杖下, 守堅等所供, 情犯畢露, 非常大惡, 宜示非常之典, 但近來斷獄, 不服而死者, 例不緣坐。 若一依律文, 則於例不同, 酌宜論斷。 李沆奴事、朴氏之事, 如臺諫所啓, 則宜置重典, 但今兇謀, 不相干預, 則於顯誅, 恐爲過重。 鄭光弼所啓雖失, 只陳所懷, 豈有他意? 以此遽遞首相, 恐不穩。" 答大臣議曰: "嵋事, 朝議如是, 當賜藥也。 朴秀林等及金仁慶, 則其遠遠方付處也。 兩翁主, 當廢爲庶人, 但有更議事, 洪礪不服而死, 洪叙疇、洪淑, 不可依律罪之。 叙疇竄黜遐裔, 洪淑告身, 盡行追奪耶? 當皆竄黜遐裔耶? 其更議之。 李沆事, 臺諫所啓似當。 此事以權奸宰相之相應而發, 其依臺諫所啓, 而爲之何如? 領相所言雖失, 然亦有何意乎? 但於延訪時, 辭病不入。 若誠病, 則初當不來, 而詣闕稱病, 强之後入。 今雖不遞, 臺諫之啓, 必不止於此矣。 此乃大逆, 所當快定, 更議之。" 順孫等啓曰: "臣等當初未詳知也, 自上洞照, 而公論又如彼, 上敎爲當。 洪淑告身, 盡行追奪, 洪叙疇竄黜遐裔, 亦當。" 傳曰: "嵋賜藥, 【嵋之賜藥也, 上惻然, 傳于政院曰: "嵋死伺地耶? 彼雖以罪而死, 乃予骨肉, 不可不斂。 毋使棄之於路, 須以其樞輸於尙州可也。 此意下論監司, 今去都事處, 亦幷言之, 使沿路各官, 出軍謹送。" 聞此傳敎者, 莫不鳴咽。】 兩翁主爲庶人, 金仁慶竄外, 朴秀林、朴仁亨、洪叙疇迹遠竄, 洪淑告身, 盡行追奪, 李沆賜死, 鄭光弼遞相可也。"
【史臣曰: "嵋若預謀灼鼠與懸牌, 則罪關宗社, 顯誅無措, 但奸兇之徒, 陽托公論, 脅制君父, 迫殺王之愛子, 使朝廷莫敢開口。 獨鄭光弼奮不顧身, 引景明、靈山事以啓, 人皆義之。"】
【又曰: "沆之爲人, 有躁妄刻剝之惟, 無優游寬容之量, 與殘忍毒害之李蘋, 同爲兩司之長, 揚臂、掉舌, 歷詆士類, 一網打盡, 已非君子之心; 保身之道也。 後日金安老爲吏曹判書, 適大司憲有缺, 遂以沆擬望受點, 則安老喜形於面, 顧語參判申公濟曰: ‘浩叔 【沆之字也。】 受點甚好。’ 沆也未幾, 彈安老斥黜。 沆每曰: ‘他日安老免放之日, 乃吾入地之日也’ 卒死其手。 但以沆攀附朴嬪, 而構捏致戮, 是則冤也。"】
【又曰: "朝廷共議, 嵋賜藥, 朴秀林等竄遐, (洪叔)〔洪淑〕 告身, 盡行追奪, 李沆賜藥, 鄭光弼遞首相。 朴氏先此賜藥。 鄭光弼, 於此獄事, 遲疑以爲: ‘甄城君在反正初, 人心危疑, 故不得已治一罪, 靈山、景明, 皆以累騰奸口、禁錮, 請以福城, 依靈山君例, 只令禁錮。’ 云, 故時論非之, 至於遞相, 然光弼忠厚惻怛, 素有宰輔之望, 士林倚賴者亦多。 遞於不意, 已非人情。 況以庸陋金謹思代之, 物論惜之。 沆爲大司憲, (持)〔特〕 安老見黜, 沆雖奸邪, 死非其罪, 物情甚之。 【鄭光弼以首相, 於闕內罪人推鞫時, 托病不入, 且授引故事, 不肯深刻, 臺官論啓遞之, 左相張順孫代爲領相, 右相韓效元爲左相, 貳相金謹思爲右相。 時政在臺閣, 臺官所論事, 必得允而後已, 上亦無不一一曲從之。 初大臣金克成、兪汝霖、曺繼商、成世昌等, 忤臺官, 皆流配。 時, 公卿懲於右輩, 畏禍及己, 碌碌浮沈, 不能相可否於經席, 惟牽制苟含而已。】 "】
- 【태백산사고본】 37책 74권 67장 A면【국편영인본】 17책 432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