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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 10월 2일 무오 3번째기사 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예조가 표류한 유구국 사람을 대우하고 돌려보낸 전례에 대해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유구의 말을 아는 왜인을 왜관(倭館)427) 에 물어 보니, 일본국의 왜사맹(倭司猛) 좌마조가구(左馬助家久)가 있을 뿐이므로, 왜학 통사를 시켜 묻기를 ‘너는 유구국 사람을 아는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무역하느라 서로 교통하여 왕래하니, 그 사람을 만나보면 그 사람의 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전례를 상고하니, 유구국의 사신 양광(梁廣)양춘(梁春)이 나왔을 때에 상사(上使)는 한어(漢語)에 능통하므로 우리 나라의 한학 통사를 시켜 접대하고, 부사(副使)는 왜어(倭語)를 잘 알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왜학 통사를 시켜 접대하였습니다. 그뒤에 표류한 유구국 사람이 나왔는데, 그때 일본국의 왜인 삼랑사랑(三郞四郞)이라는 자가 마침 왔으므로 딸려 보내려 하였으나, 삼랑사랑이 받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우리 나라는 대마도에 글을 보내어 왜인 정승(貞勝)에게 딸려서 본국으로 돌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표류한 유구국 사람은 이미 연접 도감으로 옮겼으므로 나치(拿致)하여 추문할 수 없으니, 예조의 당상이 몸소 가서 물으라"


  • 【태백산사고본】 35책 69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256면
  • 【분류】
    외교-유구(琉球)

  • [註 427]
    왜관(倭館) : 왜인의 교역(交易)과 접대 등을 위하여 설치한 관사(館舍). 처음에는 삼포(三浦), 곧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山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에 각각 두었다가, 중종 5년(1510)의 삼포 왜란으로 폐쇄하고 중종 7년 임신 약조(壬申約條)로 제포에만 두었음. 뒤에 또 조선 관병(官兵)과 대마도인(對馬島人)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으므로 중종 36년(1514)에 부산포로 옮기고 숙종 4년(1678)에는 초량(草梁)으로 옮겼음. 왜관에는 주위에 성을 쌓고 그 안에 왜인이 거류하며 시장·창고·공청(公廳) 등이 있고 관수왜(館守倭) 등이 상주함.

○禮曹啓曰: "解琉球言語倭人, 問之於倭館, 只有日本國倭司猛左馬助家久, 故使學通事問曰: ‘汝知琉球國人乎?’ 答曰: ‘我國以貿易相通往來, 如見其人, 則可解其人之語。’ 云。 且考前例, 則琉球國使臣梁廣梁春等出來時, 上使能通漢語, 故使我國漢通事待之, 副使能解語, 故使我國通事待之。 厥後琉球國漂流人出來, 其時日本國倭 三郞四郞稱號者適來, 故欲付送, 而三郞四郞, 不肯受去, 故我國通書于對馬島, 付倭人 貞勝, 使之轉送本國也。" 傳曰: "琉球國漂流人, 已移于延接都監, 不可拿致推之, 禮曹堂上親往問之。"


  • 【태백산사고본】 35책 69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256면
  • 【분류】
    외교-유구(琉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