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중종실록 68권, 중종 25년 5월 15일 갑진 5번째기사 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성균관 진사 윤봉종 등이 소격서 혁파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윤봉종(尹奉宗) 등이 상소(上疏)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 즉위하시니 총명(聰明)하고 영단(英斷)이 있었습니다. 임금의 자질이 있어 밝고 공경스러웠고, 임금의 학문이 있어 바른 이치에 밝으셨습니다. 이단(異端)에 미혹되지 않아서 지내서는 안 되는 모든 요망한 제사들을 수년 동안에 빠짐없이 혁파하는 등 광명한 교화와 정대한 정령으로 사람의 이목(耳目)을 용동시키심이 전대(前代)보다 더합니다. 그런데 하찮은 소격서만이 유독 그 요사스러움을 유지하여 근절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격서를 혁파한다는 조서(詔書)가 하룻밤에 천리를 가서, 온나라 백성들이 감격해 울며 즐거워 춤을 추면서 모두 ‘주상(主上)께서 우리 동방이 일찍이 혁파하지 못한 폐습을 혁파하고, 동방이 일찍이 회복하지 못한 예(禮)를 회복하였다.’ 하였습니다. 조상에게 광영을 바쳤으니 효도가 더 클 수 없고 자손에게 은택이 미쳤으니 덕이 더 성대할 수 없었으며, 선을 부호하고 악을 억제하는 뜻이 드러났고 사(邪)와 정(正)이 없어지고 자라나는 기미가 판가름났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자전(慈殿)께서 미령하신 때문에 온 나라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으니, 이때에 만일 약(藥) 한 가지라도 효험을 볼만한 것이 있다면, 비록 분골쇄신이 되는 한이 있을지라도 모두가 만족하게 여길 것이며, 묵묵히 마음속으로 정성껏 신명(神明)에 기도하는 자도 혹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전하의 순수한 효심(孝心)으로서야 그 절박한 심정을 어찌했겠습니까. 그러니 어느 겨를에 사(邪)와 정(正)의 명분을 따지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명의 도움으로 오래도록 자전을 효성껏 받들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창졸간에 스스로 금하지 못하여, 다시 전지(傳旨)를 내려 대신을 보내서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전하께서 도를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고 이치를 살피심이 밝지 못하여, 학문의 공(功)과 실천하는 방도에 있어 능히 인욕(人欲)을 이겨서 천리(天理)를 보존하지 못하고, 그 시비·사정·진퇴·거취의 사이에 있어 능히 석연하게 깨달아서 시원스레 고치지 못한 것이지만, 재상이나 대간도 정성을 다하여 전하를 도(道)로 인도하고 전하를 허물없는 땅에 세우지 못하였고 보면, 재상이나 대간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또 탐관(貪官)이 음사(淫祀) 봉행하는 전하를 만홀히 여기고, 전하의 복(福) 구하는 재물을 훔쳐서 제 사욕을 채우고 남에게 뇌물을 주는 등 국법을 꺼림없이 범하다가 죄악이 극도에 달하여 그 죄상이 탄로되자, 국법을 면하기 어려우므로 그만 망명 도주하였습니다.

본디 예 아닌 향사(享祀)와 복받을 수 없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백성의 재력(財力)을 탕갈시켜 사특하고 망령된 귀신에게 아첨하여 기도하면, 복은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참란(僭亂)의 잘못만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한 이후 조정과 중외가 방금 상의 윤허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제 한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비가 밝지 못하고 사정이 분명하지 못하므로, 여망(輿望)이 답답하게 여기고 인심이 흉흉합니다.

이때에 전하께서 만일 일월(日月) 같은 밝음을 넓히고 강건한 결단성을 분발하지 않으시고, 끝내 고집하여 과실을 고치지 않으신다면, 대신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핑계하여 따르고, 대간들도 어쩔 수 없다고 핑계하여 간언을 중지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이목(耳目)에 익숙해지고 후사(後嗣)는 이를 당연한 전례(典禮)로 여겨서, 인정(人情)은 화복(禍福)의 설에 유인되기 쉬워서 결국 알기 어려운 귀신의 이치를 믿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도를 지키고 몸을 닦는 것이 곧 복을 취하는 일인 줄은 모르고, 쓸데없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만이 오직 재앙을 면하게 되는 것으로 여겨서, 터져서 세차게 흐르는 물결처럼 도저히 막을 길이 없게 되어, 선왕들의 아름다운 풍속을 해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불도(佛道)를 숭상하는 일이 고려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요, 참람되이 태산(泰山)에 제사지낸 일이 계씨(季氏)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제 국가 치란의 기미와 오도(吾道) 흥폐의 갈림길을 만나서, 우리가 다만 학술이 거칠고 부족하다는 이유로 입을 꼭 다물고 토로하지 않는다면, 이는 맹자(孟子)가 말한 적(賊)에 가까운 것입니다. 특별히 윤허하시는 성지(聖旨)를 내리시어 신민들의 소망을 유쾌하게 하소서."

전교하였다.

"소격서는 조종조 때부터 관(官)을 두어 제사지내던 곳이다. 만일 그것이 꼭 혁파할 일이라면 의당 대간의 말을 따랐겠지 왜 그대들 말을 듣고 나서야 혁파하겠는가? 이는 윤허하지 않는다."

윤봉종(尹奉宗) 등이 3일을 계속 상소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68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220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상-도교(道敎)

○成均館進士尹奉宗等上疏, 其略曰:

殿下龍飛御宸, 聰明英斷, 有人君之資; 緝熙敬止, 有人君之學。 昭晣正理, 不惑左道, 淫祀妖祭, 數年之間, 罷黜無遺。 光明之化、正大之令, 聳動耳目, 超越前代。 蕞爾昭格, 安得獨保其妖淫, 而不見絶也? 渙發綸音, 一夕千里。 中外臣民, 感泣蹈舞, 咸曰: "主上革東方所未革之弊, 復東方所未復之禮。 光于祖考, 孝莫大焉; 澤及子孫, 德莫盛焉。 扶陽抑陰之意著矣, 邪正消長之機判焉。" 頃緣慈殿未寧, 一國遑遑, 罔知攸措, 如有一方一藥可以見效, 則雖至於碎首糜身, 無不甘心焉, 潛心默誠, 禱諸神明者, 亦或有之。 矧以殿下純孝之心, 迫切之情, 爲何如焉? 奚暇乎邪正名分之計哉? 所以冀幸神佑, 久奉孝養之志, 不能自禁於倉卒之際, 遽復降旨, 遣大臣祭之。 是雖殿下信道不篤, 燭理未明, 學問之功、踐履之方, 不能克人欲以存天理, 其於是非、邪正、進退、去就之間, 不能釋然悟、翻然改。 宰相、臺諫, 亦不能極盡其誠, 務引殿下以當道, 立殿下於無過之地, 則宰相、臺諫, 不得辭其責矣。 今又貪官, 慢殿下非禮之祭, 竊殿下徼福之資, 利己賂人, 不畏邦憲, 罪大惡極。 厥事彰著, 國典難脫, 亡命卽逃。 本以非禮之享、無福之祀, 窮民財力, 謟禱邪妄, 福反不見, 陷於僭亂。 自兩司合啓, 朝廷中外, 方竢賜允。 今玆閱月, 猶未蒙允, 是非不明, 邪正不分, 輿望鬱鬱, 物情洶洶。 殿下若不廓日月之明, 奮乾剛之斷, 終然固拒, 過而未改, 大臣歸之於不得已而順之, 臺諫諉之於無奈何而止焉。 百姓習於耳目, 後嗣以爲常典, 以易狃禍福之情, 信鬼神難知之理。 守正脩身, 不知爲取福, 妄祭媚神, 惟知爲免殃, 波奔水決, 莫可禁遏, 傷先王之風, 悖先王之俗。 桑門之行, 不獨在於前朝, 泰山之祭, 不獨在於季氏矣。 今値國家治亂之幾, 吾道興廢之兆, 但以學術疎寡, 緘默不吐, 則幾於孟氏之所謂賊。 伏望聖旨, 特降允兪之命, 以快臣民之望。

傳曰: "昭格署, 自祖宗朝設官祭祀之事也。 若革罷之事, 則當從臺諫之言, 何待汝等之言而後革乎? 玆不允。" 奉宗等連三日上疏, 皆不從。


  • 【태백산사고본】 34책 68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220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상-도교(道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