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 정광필이 실농한 농가의 조세의 등급을 ‘하지하’로 책정할 것을 건의하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금년의 한발은 근래에 없던 일로 흉년이 들어 백성의 생활이 지극히 우려스런 처지에 놓였습니다. 마땅히 각별한 조처가 있어야겠습니다. 금년에는 한발로 인하여 파종도 못한 전지가 있을 뿐 아니라, 파종하고 김매기를 한 곳도 한발 때문에 완전히 버린 곳이 많습니다. 모름지기 조세(租稅)를 너그럽게 해야만 곤궁한 백성들을 소복(蘇復)시킬 수 있습니다. 농삿일을 게을리하여 경작에 힘쓰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국가의 법령이 있으니 면세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매기를 하고서도 한발로 수확하지 못하게 된 곳이라면 면세(免稅)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경기 관찰사의 계본(啓本)을 보건대, 금년 면세지가 단지 2천 2백여 결(結)뿐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수원군(水原郡)만 계산해도 반드시 이 숫자에 밑돌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한 도내의 결수(結數)가 이것뿐이겠습니까? 수령들이 호조(戶曹)의 본의(本意)를 모르고 만약 재상(災傷)304) 을 주면 중한 견책을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모두 재상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전부터 모두 그렇게 해 온 바 큰 폐단입니다.
금년의 가뭄은 을사년의 가뭄보다 훨씬 심합니다. 을사년에는 봄에 비가 왔기 때문에 그렇게 고갈(枯渴)되지는 않았으므로, 수원(水源)이 있어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곳과 제언(堤堰)305) 이 있는 곳의 농사는 폐기되지 않고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은 과거에 수원이 있던 곳도 모두 말라 버려 수확할 수 있는 전지가 백에 두셋밖에 안됩니다. 이런데도 각 고을의 수령들은 재상에 관해서는 전연 마음을 쓰지 않았고 경기 역시 그러하니, 백성들의 살아갈 일이 진실로 애처롭습니다. 연분(年分)의 등급306) 을 매길 때 더욱더 감면해 주어 모두 하지하(下之下)를 매긴다면 일이 제대로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기의 농사가 이렇게 흉년이 들었으니, 나의 생민(生民)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은 호조가 잘 살펴서 조처했다면 이러한 폐단이 절로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각도 계본에만 근거하여 조처했다면 필시 잘못 조처했을 것이다."
하매, 광필이 아뢰기를,
"호조에서는 직접 답험(踏驗)307) 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그런 줄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단지 관찰사의 계본만 보고서 했을 뿐입니다. 또 이런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조처를 많이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근래에 보건대 새로 제수된 수령들이 모두 지체하면서 즉시 부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의옥 공사(疑獄公事)308) 는 전에 한재(旱災) 때문에 거의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각도에는 여러해 갇혀 있는 사형수들이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이런 흉년에는 그 가족들이 반드시 근심과 고통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오랫동안 갇혀 있지만 끝내 살 수 없는 자들이라면 속히 처결(處決)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승정원으로 하여금 계복 공사(啓覆公事)를 조사하도록 했었다. 그랬더니 승정원에 올라온 공사가 적지 않았으므로 이미 승지에게 미리 살펴보도록 했다. 자주 조계(朝啓)를 청리(聽理)한다면 사형수의 공사(公事)가 자연히 빠르게 결단될 것이다."
하매, 대사간 원계채(元繼蔡)가 아뢰기를,
"신이 근래 외방에서 보니 과연 광필이 아뢴 말과 같았습니다. 수령들 가운데 간혹 재상으로 매기려는 자가 있지만 거의가 나약하여 감사나 호조로부터 견책(譴責)을 받을까 하여 으레 재상을 매기지 않고 있으니, 지극히 부당합니다. 신이 듣건대, 충청도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도 경기와 다름없이 전야가 말라버려 마초(馬草)도 벨 수가 없다고 하니, 금년의 곤궁한 백성들이 어떻게 구제될 수 있겠습니까? 연분(年分)을 정할 때 재상을 매기는 것은 자세히 살펴서 조처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곤궁한 백성들을 살릴 방도가 없습니다.
또 외방 수령들이 옥수(獄囚)를 추문(推問)함에 있어 어질다고 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 그 실정을 캐지 않고 율의 적용을 심각하게 하기만을 힘써 오히려 죽이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죄에 얽어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수를 위해 살릴 방도를 강구하는 자는 백에 한두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으레 전에 추문한 문안(文案)을 공사(公事)로 만들 뿐 반복해서 힐문(詰問)하지 않으므로, 옥사가 결정된 뒤에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끝내 사형당하는 경우가 거의 태반입니다. 신의 생각은 이렇게 잘못 추문하는 자를 죄주어야만, 이런 폐단이 없어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장령(掌令) 상진(尙震)은 아뢰었다.
"금년 같은 실농(失農)은 근고(近古)에 없던 일입니다. 외방 수령들이 전년에 다소 풍년이 들었다고 하여, 금년의 흉년은 예상하지 못하고 공채(公債)를 많이 주었습니다. 만약 실농으로 보고하면 공채를 받아들일 수 없어 해유(解由)를 받기가 어려울까 우려해서 거의 재상(災傷)을 매기지 않으니, 지극히 잘못된 처사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6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144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농업-농작(農作)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금융-식리(殖利) / 사법-행형(行刑) / 구휼(救恤) / 왕실-경연(經筵) / 재정-전세(田稅) / 과학-천기(天氣)
- [註 304]재상(災傷) : 한재나 수재 등으로 실농(失農)하여 조세액을 감면하거나 면제하는 것.
- [註 305]제언(堤堰) : 관개용(灌漑用) 물을 모아둔 보(洑)나 저수지.
- [註 306]연분(年分)의 등급 : 그 해의 농사를 풍흉에 따라 상지상(上之上)에서 하지하(下之下)의 9등급으로 나누어 조세를 거두어들이던, 세종(世宗) 때 만들어진 조세 제도. 이전까지는 답험 손실법(踏驗損實法)이라 하여 사전(私田)은 전주(田主)가, 공전(公田)은 관에서 작황(作況)을 매겨 조세를 결정했는데, 실제로 이를 운용함에 있어서는 관리와 전주의 농간이 심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많았다. 이에 세종 25년(1443) 전제 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 본격적인 조세의 합리화에 들어가 전국의 토지에 대한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토지의 비척(肥瘠)에 따라 6등급[田分六等], 풍흉에 따라 9등급[年分九等]으로 나누는 세제가 확립되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20년마다 실시해야 하는 양전이 잘 지켜지지를 않고 관리들이 농간과 협잡이 뒤따라 임진 왜란을 거치면서 유명 무실해지고 농민들의 부담만 가중되었다. 결국 연분 9등법은 형해화되었고 인조(仁祖) 12년(1634) 갑술양전 후에 폐지되고, 정액세법으로서의 영정법(永定法)이 실시되었다.
- [註 307]답험(踏驗) : 농사의 풍흉을 직접 다니면서 돌아보는 것.
- [註 308]의옥 공사(疑獄公事) : 증거가 불충분하여 쉽게 결단할 수 없는 옥사.
○丁丑/御朝講。 領事鄭光弼曰: "今年之旱, 近古所無。 農事不稔, 民生至爲可慮, 所當各別措置。 今年田地, 以旱不得付種處, 非但有之, 雖付種, 除草, 以旱專棄之處, 亦多有之, 須寬收稅之事, 庶蘇窮民之困矣。 惰農自安, 不(暋)〔務〕 耘耔者, 則國有令法, 不當免稅, 若除草而以旱不食之處, 則豈不爲之免稅乎? 臣見京畿觀察使啓本, 今年免稅, 只二千二百餘結。 臣意以水原郡計之, 必不止此數。 況一道之內, 豈止此乎? 守令等不知戶曹之意, 若給災傷, 則恐被重譴, 以此全不給災。 自前皆然, 此其大弊也。 今年之旱, 甚於乙巳。 乙巳年, 則春而雨水, 故不甚枯渴, 其有水根引水之處及堤堰處, 皆不棄而食之。 今年, 則雖昔年有水根之處, 皆爲枯渴, 其得食田地, 百無二三, 而各官守令, 其於災傷之事, 全不用意爲之, 京畿亦爲如此。 生民之事, 良可哀矜。 其爲年分等第之時, 當倍加省念, 皆以下之下給之, 則其亦庶乎其可矣。" 上曰: "京畿農事, 至爲凶歉。 哀我民生, 將何以救活乎? 如此之事, 戶曹察而爲之, 則自無此弊。 若徒據各道啓本而爲之, 則必爲誤矣。" 光弼曰: "戶曹則不得親爲踏驗矣, 安能悉知其然乎? 只見觀察使啓本而爲之。 且如此險年, 措置救民之事, 不爲不多, 而近見守令之新除者, 皆爲遲回, 不卽赴任, 至爲不可也。 且疑獄公事, 前因旱災, 幾已決矣, 然於各道死囚之曠年囚繫者, 亦不爲不多。 如此險年, 其一家之人, 必皆不堪愁苦。 其久爲囚繫, 而終不得其生者, 則速爲處決爲當。" 上曰: "頃者令承政院考其啓覆公事, 則其已來院者, 亦爲不少, 故已令承旨, 預爲見之矣。 若數聽朝啓, 則死囚公事, 自然速決矣。" 大司諫元繼蔡曰: "臣近來於外方見之, 果如光弼所啓。 守令等雖間有欲給災傷者, 率多懦刦, 恐被監司與戶曹之譴責, 例不給災, 至爲不可。 臣詮聞忠淸道沿海各官, 與京畿無異。 田野焦枯, 至於馬草, 不得刈取云。 今年窮民, 將何以救活乎? 年分災傷, 所當審察而爲之。 不然, 則窮民將無以爲生矣。 且外方守令, 推其獄囚, 雖號爲賢者, 類多不究其情, 而務爲深文, 羅織其罪, 猶恐不死。 其爲囚求生道者, 百無一二, 例以前推文案, 爲之公事, 而不爲反覆窮詰。 至於獄成之後, 雖知其不可, 亦無可奈何, 終置於死者, 滔滔皆是。 臣意謂, 如此誤推者罪之, 然後可無此弊也。" 掌令尙震曰: "今年失農, 近古所無。 外方守令等, 以往年稍稔, 而不知今年之失農, 多給公債。 若以失農報之, 則恐其不得捧納公債, 解由難出, 而率爲不給災傷, 至爲非也。"
- 【태백산사고본】 33책 6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144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농업-농작(農作)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금융-식리(殖利) / 사법-행형(行刑) / 구휼(救恤) / 왕실-경연(經筵) / 재정-전세(田稅) / 과학-천기(天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