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이 공물의 사선 운송의 폐단과 절도사 이안세의 경쾌선을 소개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헌 김극성(金克成)이 조여회(趙如晦)와 정공필(鄭公弼)의 일을 아뢰니, 모두 파직시키도록 하였다. 김극성이 아뢰기를,
"이런 재변을 만나 상께서 근심하고 염려하실 때에는 유독 묘당(廟堂)의 대신·대간(臺諫)·시종(侍從)만 생각하는 바를 아뢸 것이 아니라, 여타의 재상들도 상께서 매우 근심하고 두렵게 여기시는 것을 보고 현재의 폐단을 빠짐없이 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경연에서 보면 대신·대간·시종은 더러 일을 아뢰어도, 여타의 특진관(特進官)221) 및 경연 당상(經筵堂上)은 한 마디도 아뢰지 않으면서 마치 자신의 직임(職任)이 아닌 듯이 여기니, 지극히 부당합니다. 비록 따로 신하들을 연방(延訪)하지는 않더라도, 경연에 나아가시는 것은 전적으로 학문하는 것만 숭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하의 심정을 통하여 시정(時政)의 득실을 아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일을 아뢰는 자가 없으니, 될 일이겠습니까?"
하고, 헌납 송순은 아뢰기를,
"한 도(道)의 수령을 출척(黜陟)시키는 권한은 마땅히 감사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것은, 과연 성상의 분부와 같습니다. 그러나 신이 병든 어버이를 가 보는 일로 평소 외방(外方)에 왕래하며 듣건대, 수령 중에 백성을 학대하고 방자한 짓을 하지만 십고 십상(十考十上)이 되는 자가 있고, 백성을 사랑하고 봉공(奉公)하는데도 도리어 하등이 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는 국가에서 위임한 뜻과는 크게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감사들에게만 위임한 채 탄핵하지 않는 것은 안될 일입니다."
하고, 영사 심정은 아뢰기를,
"올해 조운(漕運)할 것은 거의 모두 운송하였습니다마는, 사선(私船)으로 운송하는 폐단은 진실로 작지 않습니다. 전에 사선을 쓰지 않았던 것은, 전라도와 충청도 등에 해다마 흉년이 들어 운송할 곡물의 수량이 적었기 때문에 모두를 조운선(漕運船)으로만 수납(輸納)했고, 사선을 쓰는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지난해에는 약간 풍년이 들어 곡물의 수량이 많았기 때문에 부득이 사선을 사용했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사선을 징발할 때에 선척의 수효를 정하지 않고 모조리 나오도록 재촉해서 그 중에서 쓸만한 배를 가렸다고 합니다. 그에 따라 간사한 아전들이 술책을 많이 부렸으므로, 민가의 원성이 작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배나 수레의 소득은 백성의 생활 밑천인 것인데, 그 소득을 잃게 되면 원성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또 외방(外方)의 곡식을 서울로 운반해 들인 다음에야 서울도 따라서 부실(富實)해지는 것이니, 사선을 사용하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병선(兵船) 및 조운선을 만들어서 병선에는 수군(水軍)을 조운선에는 조졸(漕卒)을 사용하여, 조운(漕運)과 어모(禦侮)222) 에 모두 편리하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선척(船隻)은 반드시 운용하여야만 견고해지는 것이므로 조운선으로 곡식을 운반할 때에는 아울러 병선도 운용하여 왜구들의 약탈을 막게 함으로써 운행을 보호케 했었습니다. 조종조에서 병선과 조운선을 같이 운용한 본의는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했으므로 아무리 곡물이 많아도 폐단없이 운송해 왔었습니다.
지난 경오년223) 의 왜변(倭變) 이후부터는 변장(邊將)들이 왜구들을 노획하려는 욕망이 줄기찼습니다. 그래서 이안세(李安世)가 절도사(節度使)일 때에는 자신이 배의 운행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는 것을 기화로 조그마한 배를 만들고, 경쾌선(輕快船)이라 명명했었습니다. 그 때 왜구들을 추격할 적이면 나는 듯이 빨랐으므로 왜구들의 배와 다를 게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비변사(備邊司)가 공사(公事)를 작성하여 병선 1백 50여 척을 개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병선 1척을 부수어 경쾌선 2척을 만들었는데, 선체(船體)가 작아서 6∼8명이 탈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전라도에서는 미역을 딸 때에 만호(萬戶)·첨사(僉使)·수사(水使) 등이 더러 사용합니다. 그러나 충청도의 상륙포(上六浦) 이상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해안(海岸)에 방치해 놓았다가, 단지 적간(摘奸)할 때에만 이름과 수효를 채울 뿐입니다. 조종조에서는 유용하던 것이 이제는 도리어 무용한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상(申鏛)이 전라도 감사로 있을 때에 계본(啓本)을 올려 병선을 개혁해서는 안되는 것을 극력 진달(陳達)했었습니다. 그러나 비변사가 듣지 않고서 경쾌선을 만드는 것으로 공사를 작성했었으니, 지금이라도 하문(下問)해 보신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병선 1척의 군사는, 대맹선(大猛船)이 80명, 중맹선이 60명, 소맹선이 40명입니다. 지금 다시 만든다 해도 본래의 군사가 있으므로 형편 역시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대전(大典)》과 조종조의 예에 따라 다시 병선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호조도 사선을 사용하는 데서 생기는 폐단을 알면서도 사세가 부득이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대저 일단 조종조의 법을 폐지하면 폐단이 수없이 발생(發生)하는 법인데, 지금 사선을 사용하면 야기되는 폐단이 작지 않겠기에 아룁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신공제(申公濟)는 아뢰기를,
"요사이 조문할 때면 모두 사선(私船)을 사용하는데, 그 사람들이 올 적마다 매번 정장(呈狀)하여 답답한 사정을 고해왔습니다. 올해의 조운은 이미 지나갔지만, 만약 내년에 또 사선을 쓴다면 그들의 원망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사선을 사용하여 조운(漕運)할 때엔 그들의 세금을 감해줍니다. 그러나 세금을 감해줘도 배를 사용하여 이익을 얻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으니, 어떻게 생활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원성과 고생은, 사세로 보아 으레 그렇게 되는 법입니다.
사선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익을 얻는 것은 국가와 상관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전라도와 충청도 등의 곡식은 사선으로라도 서울에 실어와야 합니다. 서울의 시가(市價)가 그에 따라 오르내리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도 조운에 관한 별다른 조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대전(大典)》에 의하여, 내년에 조운할 때는 대맹선·중맹선·소맹선을 원수대로 다시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전선(戰船)도 아울러 준비하였다가, 조운에는 큰 배들을 쓰고 싸움에는 전선을 사용한다면, 신의 생각에는 양쪽 다 편리하리라 여겨집니다.
또 조운은 예부터 해왔었지만 공안(貢案)224) 을 보면, 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사도시(司䆃寺)가 각사(各司)의 경비 이외의 나머지 곡식의 절반은 군자창(軍資倉)으로 실어들이고, 또 절반은 고을 창고에 넣어두었었습니다. 조종조에서 모두 경창(京倉)으로 실어들이지 않은 것은 역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1년의 경비만을 계산하여 서울로 실어오고, 나머지는 전처럼 고을 창고에 넣어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전량을 운송해 들이기 때문에 조운선이 부족하고 백성도 폐해를 받습니다. 조종조에서 법을 만든 것이 어찌 범연히 헤아려 한 것이겠습니까? 조종조의 구안(舊案)대로 하소서."
하고, 심정이 아뢰었다.
"신공제의 말이 과연 지당합니다. 다만 근년(近年)의 흉년은 경기가 더욱 극심합니다. 그래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느라 국고(國庫)가 고갈되었고, 또 평안도에 실어 보냈기 때문에 경창도 역시 비었습니다. 경기는 온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을 비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풍년이 든 해에는 많은 수량을 조운하여 근본을 풍족하게 하소서. 서울이 부유해지고 경비(經費)가 넉넉해진 다음에는, 공안(貢案)에 의해 운량해서 감해 놓고 조운해야 합니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65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121면
- 【분류】교통-수운(水運) / 군사-군기(軍器)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창고(倉庫)
- [註 221]특진관(特進官) : 경연에 참예 하는 임시 관직. 처음에는 3품 이상의 문관으로 하였으나 뒤에는 2품 이상의 문무관과 음관(蔭官) 중, 의정부·육조·한성부의 직을 지낸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 [註 222]
어모(禦侮) : 외적의 침임을 방어하는 것.- [註 223]
경오년 : 1510 중종 5년.- [註 224]
공안(貢案) : 공물(貢物)의 품목 및 수량을 기록한 문서. 곧 백성의 상납(上納)한 공물의 예산표(豫算表)이다.○乙卯/御朝講。 大司憲金克成啓趙如晦、鄭公弼事, 命皆罷職。 克成曰: "如此遇災, 自上憂慮之時, 則不獨廟堂大臣, 臺諫、侍從, 啓其所懷, 他餘宰相, 亦當見上憂勤惕慮, 悉陳時弊, 而近於經筵見之, 大臣、臺諫、侍從或啓事, 而他餘特進官及經筵堂上, 則曾不一言, 有若謂非吾之職任然, 至爲不可。 雖不別爲延訪臣僚, 其所以御經筵, 非徒專尙學術, 欲其通上下之情, 達時政之得失, 無一人啓事者, 豈可乎哉?" 獻納宋純曰: "一道黜陟之權, 當委任監司, 果如上敎, 然臣以病親相見事, 常往來外方聞之, 守令虐民自恣, 而有十考十上者。 字民奉公, 而反爲居下者, 亦多有之, 與國家委任之意, 有大相戾。 不可專委監司, 而不爲彈劾也。" 領事沈貞曰: "漕轉之事, 今年則幾盡來矣。 但私船載來之弊, 誠爲不少。 前此不用私船者, 以全羅、忠淸等道, 連年凶歉, 所輸之穀數少, 故皆以漕船輸納, 而無私船之弊矣。 前年則年穀稍稔, 而穀數多, 故不得已用私船也。 臣竊聞之, 方私船催促時, 不定其額, 而盡數催促, 擇其可用之船云。 其間奸吏等用術多, 而民怨不少矣。 且舟車之利, 民之所以資生, 而失其利, 則怨必至矣。 且外方之穀, 輸入京中, 然後京中從而富實, 私船之用, 亦不可謂無助於國家也。 臣意以爲在祖宗朝, 設立兵船及漕船, 兵船則用水軍, 漕船則用漕卒, 使便於漕轉, 而宜於禦侮也。 然其船隻必須運用, 然後可以堅固, 故漕船載穀時, 幷用兵船, 以防倭寇而護行。 祖宗朝, 兼用兵漕船之意, 蓋以此也。 如此故米穀雖多, 而無弊載來矣。 頃自庚午年倭變以後, 邊將謀欲捕倭, 李安世爲節度使時, 稍知行船之事, 乃造小船, 名之曰輕快船。 某時逐倭, 疾行如飛, 與倭船無異云。 備邊司因爲公事, 乃革兵船, 一百五十餘隻, 破兵船一隻, 而造輕快船二隻。 其船體小, 可容六七八人。 如全羅道則採用海菜時, 萬戶、僉使、水使等, 時或用之, 忠淸道上六浦以上, 則全不運用, 掛置岸上, 只於摘奸時, 徒存其名數而已。 祖宗朝有用之物, 今反爲無用。 申鏛爲全羅道監司時, 爲啓本, 力陳兵船之不可革, 而備邊司不聽, 以造輕快船爲公事。 今若下問, 則可知其事也。 大抵兵船之軍, 大猛船一雙八十人, 中猛船六十人, 小猛船四十人也。 今雖復爲設立, 自有其軍勢, 亦不甚難也。 請依《大典》, 且依祖宗朝例, 復立兵船何如? 戶曹亦知用私船之弊, 而事出不得已, 故用之也。 大抵一廢祖宗朝之法, 而弊有萬端。 今用私船, 民弊不貲, 故啓之。" 特進官申公濟曰: "近來漕轉之時, 皆用私船, 其人等, 每至呈狀告悶。 今年則已過矣, 若於明年, 又用私船, 則其怨悶, 又何極耶? 國家用私船漕轉, 則減其稅矣。 雖減其稅, 與用船興利, 大有輕重, 其何以資生乎? 民之怨苦, 勢所必至。 其人之興利, 雖不關於國家, 然全羅、忠淸等道之穀, 必以私船輸入于京中, 然後京中市價, 亦以此貴賤也。 今此漕運之事, 別無措置。 其已然之事則已矣, 請依《大典》, 及明年漕運時, 大、中、小猛船, 雖不可依數復立, 而戰船亦竝爲之, 當漕則用大船, 當戰則用戰船, 臣意以爲兩便。 且漕運之事, 自古有之。 但見貢案, 則如豐儲倉、廣興倉、司䆃寺、各司經費外, 其餘穀, 半則輸入于軍資倉, 又半則納置于州倉。 祖宗朝不盡輸入于京倉者, 意亦有深意。 今亦計其一年經費, 輸來于京師, 而其餘, 依古例納置于州倉何如? 今者盡數輸納, 故漕船不足, 而民受其弊。 祖宗朝立法, 豈偶然計而爲之? 請依 祖宗朝舊案爲之。" 沈貞曰: "公濟之言果當。 但近年凶荒, 畿甸尤甚, 賑給飢民, 國庫虛竭。 又輸于平安道, 故京倉亦空。 畿甸, 四方之根本, 根本不可虛耗, 故年穀稍稔, 則所當多數漕運, 以厚根本。 果若京中富給, 經費周足, 則依貢案, 量減漕運可也。"
- 【태백산사고본】 33책 65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121면
- 【분류】교통-수운(水運) / 군사-군기(軍器)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창고(倉庫)
- [註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