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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64권, 중종 23년 12월 10일 정축 1번째기사 1528년 명 가정(嘉靖) 7년

조강에 나아가 학교와 사대와 방어에 관해 의논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송순(宋純)이 아뢰기를,

"무릇 학교의 법에는 본디 규모가 있으므로 한때의 법령으로 할 수 없으니, 임금이 성심으로 힘써 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당(唐)나라 때의 일을 보면, 당 태종(唐太宗)은 학교를 건설하고 생원(生員)을 증광(增廣)하여 교양에 도리가 있었으므로 그때에는 인재가 배출되고 교화도 밝았는데, 후사(後嗣)가 임금답지 않아서 학사(學舍)가 죄다 풀이 무성하여지고 교화가 쇠퇴해 가서 드디어 망하였습니다. 대저 학교의 흥폐는 인재의 성쇠에 관계되며, 인재가 쇠하면 사습(士習)도 아름답지 않게 됩니다. 삼대(三代)1035) 이전의 일은 멀거니와 우리 나라의 일을 보면 세종(世宗)·성종(成宗)께서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세워 교양하여 인재를 만드는 일을 지극하게 하시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제 따로 법령을 만들어서는 안되고 선왕(先王)의 성헌(成憲)1036) 을 살펴서 해야 합니다. 선왕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이 이제까지도 남아 있는데, 학교의 법이 날이 갈수록 점점 잘못되어 가서, 예의 염치가 쓸어 없앤 듯이 거의 다하여 말류(末流)의 폐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근래 선비의 일을 보면, 혹 바탕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기는 하나 나이 겨우 스물에 벼슬을 구하기에 급급하여 절행(節行)과 염치를 돌보지 않고, 부형인 자도 가르치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는 일이냐고 생각하여 금지할 줄 모르며, 벼슬한 뒤에는 자격에만 따라서 벼슬을 올리는 것이 출신(出身)한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이 때문에 선비의 추향이 날이 갈수록 비루하여지고 학교에 관한 정사가 점점 쇠퇴하여 갑니다. 이 폐단은 작지 않으니 상께서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학교의 일은 요즈음 경연(經筵)에서 여러 번 말하였거니와, 교양하는 도리가 점점 예전만 못하여 가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권장하고 징계하는 절목(節目)은 이제 따로 법을 세울 수는 없으나, 사장(師長)으로 마땅한 사람을 얻어서 교도(敎導)에 힘쓰게 하면 묵은 버릇이 절로 고쳐질 것이다. 또 자제의 현부(賢否)는 부형에 말미암으니, 부형인 자가 가르치는 일에 부지런하면 또 이 폐습(弊習)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매, 영사(領事) 심정(沈貞)이 아뢰기를,

"학교는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조정의 인재가 다 여기를 거쳐서 나오니, 참으로 이른바 어진 선비의 관문입니다. 상께서도 우연히 하시는 것은 아니고, 요즈음은 더욱 학교에 뜻을 다하여 사유(師儒)를 특별히 뽑으시나, 사유에 합당할 만한 사람이 없고 훈고(訓詁)의 학문을 잘하는 자도 적습니다. 신이 젊어서 거관(居館)하던 때에는 장강(張綱)·반우형(潘佑衡)·이문행(李文行) 등이 가르치는 일에 오로지 힘썼으므로, 선비도 다 본받고 높이며 덕행(德行)을 살피고 학업(學業)을 묻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이러한 사람이 없으니 감당할 사람이 있으면 다른 관사(官司)로 옮기지 말고 그 직임에 오래 있으면서 공효(功效)를 이루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하고, 대사간 한승정(韓承貞)이 아뢰기를,

"인재를 양육하는 방도는, 마땅한 사장(師長)을 얻으면 장구(章句)의 학문에도 보탬이 있습니다. 옛사람은 인재를 양육하는 방도에 있어서 뜻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으되 먼저 사장을 가렸는데 지금은 조정에서 논박받아서 다른 관사에서 용납되지 않는 자를 차임(差任)하여 채우니 지극히 옳지 않습니다. 대사성(大司成)은 참으로 가려 맡겨서 권장에 힘쓰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랫사람이 다 학문에 전력하여 해묵은 폐습이 절로 바뀔 것입니다. 근래의 폐습은 다름아니라 마땅한 사장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풍속이 쇠퇴하매 인심이 교만하고 방종하여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으므로, 사장은 한때에 추중(推重)되는 사람이 아니면 선비들이 먼저 사장을 깔보는 마음을 가져 도리어 수업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성균관(成均館)의 허다한 관원을 반드시 다 마땅한 사람을 얻을 수는 없겠으나, 사예(司藝) 이상을 추중되는 사람으로 가려서 차출하면, 그 사람도 상의(上意)를 받들어 가르치는 일에 힘쓸 것이고, 선비들도 다 공경하고 존경하여 사습(士習)이 절로 바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심정이 아뢰기를,

"이번에 북경에 가는 사신을 들여보내는 일로 승문원(承文院)의 전례를 상고하였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진위사(陳慰使)는 들여보내야 하겠으나, 해내(海內)의 친왕(親王)과 13포정사(布政司)도 모두 진향(進香)을 그만두게 하였다 하니 해외(海外)의 진향은 온편하지 못할 듯합니다. 전의 일을 상고하니, 수안 황태후(壽安皇太后)의 상(喪) 때에 진향을 하지 말라고 이미 명하였으나 그때에는 들여보냈다 하는데, 이것은 그때에 잘못한 일일 것입니다. 이제 진위사는 들여보내야 하겠으나, 이미 진향을 모두 그만두게 하는 것을 천하에 일렀으니 진향사는 들여보내지 않더라도 꾸짖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제 부득이 진향을 해야 한다면 진위사로 겸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전에 노공필(盧公弼)이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가고 신도 사은사(謝恩使)로 들어갔고 사흘째 되는 날에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이 잇달아 들어가니, 예부(禮部)가 사명(使命)이 번다하다고 여러 번 말하고, 물화(物貨)를 사러 왔다고 생각하더라 하는데, 통사(通事)들이 방물(方物)을 빙자하여 사사로이 무역하는 물건을 많이 가졌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 합니다.

전해 듣건대, 중국 등과록(登科錄)1037) 에 있는 책문제(策問題)1038) 에 ‘조선은 진공(進貢)을 빙자하여 사명이 빈번하고 무역하는 일을 많이 하므로 요동(遼東)이 곤폐(困弊)한데, 이제 거절하면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에 어그러지고 거절하지 않으면 요동이 더욱 곤폐하여질 것이다.’ 하였으니, 우리 나라는 사대(事大)를 중하게 여기나 중국은 무역하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합니다. 상의원(尙衣院)과 제용감(濟用監)이 공무역(公貿易)하는 물건은 주사처(主事處)에서 공무역이라고 써 주는데 혹 지체하는 일이 있으면 우리 나라 통사(通事)들이 마치 지금 일악 동당이 하는 짓처럼 주사처에 간절히 고하므로, 이 때문에 우리 나라의 사신은 오로지 무역에 힘쓴다고 생각한다 합니다. 사명이 잇달아 북경에 가면, 아마도 예부가 물화를 무역하려는 것이라고 우리 나라 사람을 더욱 의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부가, 우리 나라가 무역하러 왔다고 생각하기는 하나, 부득이 들여보낼 일이 있으면 어찌 무역한다는 이름을 피하느라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에는 진향을 모두 그만두게 하였더라도 들여보냈으니, 전례대로 진향사를 아울러 들여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심정이 아뢰기를,

"각도(各道)의 각포(各浦)에 있는 병선(兵船)·조선(漕船)은 조종조(祖宗朝)에서 본디 정한 액수가 있었는데, 경오년1039)왜변(倭變) 이후에 수사(水使)와 병사(兵使) 등이 병선을 혁파하고 경쾌선(輕快船)을 창조하여, 10여 인 또는 7∼8인으로 운용하여 방어에 편리하게 하였으나, 지금은 사람이 타고 다니지 않고 물가에 매어 두었으니, 참으로 왜변이 있더라도 이 배로 쫓아낼 수 없습니다. 공세(貢稅)를 나르는 일은 많고 조선은 수가 적으므로 병선도 쓰지 않을 수 없으니, 부득이 낡은 병선을 수리하게 하여 수군(水軍)을 시켜 타고 다니며 운용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해로(海路)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종조에서 우연하게 헤아려서 설치한 것이 아닌데 지금은 혁파하였으니, 옳지 않습니다. 쓸모있는 병선이 이제 도리어 쓸모없는 물건이 된 것은 지극히 옳지 않으니, 병조(兵曹)·비변사(備邊司)에 물어서 병선을 다시 설치하고 경쾌선을 혁파하면 또한 조운(漕運)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물에서 왜인을 막는 것은 본디 우리 나라 사람의 장기(長技)가 아니므로, 경쾌선이 있더라도 과연 이것으로 왜인을 쫓아낼 수 없으니, 조종조에서 하던 일을 해사(該司)에 의논해야 할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64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88면
  • 【분류】
    군사-군기(軍器) / 외교-명(明) / 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무역(貿易) / 교통-수운(水運)

  • [註 1035]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세 나라 때.
  • [註 1036]
    성헌(成憲) : 이미 이루어진 법.
  • [註 1037]
    등과록(登科錄) : 중국의 진사 급제자(進士及第者)의 성명 등을 모아 적어 둔 책이다.
  • [註 1038]
    책문제(策問題) : 책문의 제목. 책문은 임금이 경서(經書)의 뜻이나 정치에 관한 문제를 내어 응시자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다.
  • [註 1039]
    경오년 : 1510 중종 5년.

○丁丑/御朝講。 侍讀官宋純曰: "凡學校之法, 自有規模。 不可以一時法令爲之也。 只在人主之誠心而力行之耳。 以時之事觀之, 太宗建設學校, 增廣生員, 敎養有道, 故其時人才輩出, 敎化亦明。 後嗣不君, 學舍鞠爲茂草, 敎化陵夷, 遂以亡。 大抵學校之興廢, 關於人才之盛衰。 人才衰, 則士習亦爲不美矣。 三代以上之事, 則遠矣。 以我朝之事見之, 世宗成宗建學立師, 敎養作成, 無所不至。 今不可別設法令, 監先王成憲而爲之可也。 先王良法、美意, 至今猶有存焉, 而學校之法, 日漸訛僞, 禮義、廉恥, 掃蕩殆盡。 末流之弊, 至於此極。 以近來儒者之事見之, 雖或有質美之人, 年纔二十, 汲汲於求官, 不顧節行、廉恥。 爲父兄者, 亦以敎誨爲何事, 曾不知禁。 及至筮仕之後, 循資陞秩, 與出身人無異。 以此士之趨向, 日就汚卑, 而學校之政, 漸至陵替。 此弊不小。 須自上留念焉。" 上曰: "學校之事, 近於經筵, 屢次言之。 敎養之道, 漸不如古, 此非細故。 勸懲節目, 今雖不可別爲立法, 然師長得其人, 而勤於敎導, 則積習自爾變革也。 且子弟賢否, 由於父兄。 爲父兄者, 若勤於敎誨, 則亦可無此弊習也。" 領事沈貞曰: "學校, 國家之重事也。 朝廷人才, 皆由此出, 眞所謂賢士之關也。 自上亦非偶然爲之, 而近者尤致意於學校, 別選師儒, 然無師儒可當之人, 而能爲訓誥之學者, 亦少也。 臣年少居館時, 張綱潘佑衡李文行等, 專務訓誨, 故儒者亦皆宗師, 考德, 問業者甚多。 今時則無如此人者。 若有堪任之人, 勿遷他司, 久於其任, 俾責成效可也。" 大司諫韓承貞曰: " 養育人才之方, 師長得其人, 則雖章句之學, 尙亦有益也。 古人於養育人才之道, 莫不致意, 而先擇師長也。 今時以被駁於朝廷, 而不容於他司者, 爲之差塡。 至爲不可。 大司成固當擇任, 而使之勤於勸奬, 則下人皆專力於學問, 積年弊習自爾變也。 近來弊習, 無他, 以師長之不得其人故也。 世降俗末, 人心驕縱, 不敬其上。 爲師長者, 非一時推重之人, 則爲儒者, 先有輕師長之心; 反以受業爲恥, 士習從以不美。 成均館許多官員, 未必皆得其人, 然司藝以上, 以推重之人擇差, 則其人亦奉上意, 而務於訓誨, 爲儒者亦皆敬重, 士習自正也。" 沈貞曰: "今此赴京使臣入送事, 考承文院前例。 臣意以爲陳慰使所當入送也。 海內親王, 及十三布政司, 幷免進香云, 則海外進香, 似爲未穩也。 考前事, 則壽安皇太后之喪, 進香旣命不爲, 而其時入送云。 是必其時誤爲之事也。 今陳慰使所當入送。 進香使則雖不入送, 旣以幷免進香, 曉諭天下, 萬無譴責之理。 今若不得已爲之進香, 則請以陳慰使兼之何如? 前者, 盧公弼以奏請使赴京, 臣又以謝恩使入歸, 第三日, 成希顔朴元宗相繼入歸, 禮部以使命煩多, 屢言之, 以爲貿買物貨而來之云。 通事等方物依憑, 多持私貿之物, 故如此云。 詮聞中原《登科錄》 《策問題》云: ‘朝鮮依憑健貢, 使命頻煩, 多行貿買之事。 遼東困弊。 今若拒絶, 則有乖待夷之道; 不絶, 則遼東益困。 我國則以事大爲重, 中原則以爲欲爲貿易云。 通事等, 尙衣院、濟用監, 公貿易之物, 主事處, 以公貿易書示, 而或有遲滯, 則懇告于主事處。 如今者, 一鶚東 之所爲, 以此爲我國使臣, 專務貿易云。 若使命連續赴京, 則恐禮部以物貨貿易, 益疑我國之人也。" 上曰: "禮部雖以我國, 爲貿易而來云, 然若有不得已入送之事, 則豈可避貿買之名, 而不送乎? 前此, 雖幷免進香, 而亦入送。 依前例進香使, 竝入送可也。" 曰: "各道、各浦兵船、漕船, 祖宗朝, 自有定額。 庚午年變後, 水使、兵使等, 革罷兵船, 創造輕快船, 或以十餘人, 或以七八人運用, 使便於禦侮。 今則人不騎行, 置于岸上。 雖實有變, 不可以此船驅逐也。 輸運貢稅則多, 而漕船數少, 兵船亦不可不用也。 不得已兵船之腐朽者, 使之修造, 令水軍騎行運用, 則海路亦可知之也。 祖宗朝非偶然計而設之, 而今則革罷。 不可也。 有用兵船, 今反爲不用之物。 至爲不可。 其問于兵曹、備邊司, 復設兵船, 而革罷輕快之船, 亦可用於漕運也。" 上曰: "禦於水上者, 本非我國人長技。 雖有輕快船, 果不可以此驅逐倭人也。 當以祖宗朝所爲之事, 議于該司。"


  • 【태백산사고본】 32책 64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88면
  • 【분류】
    군사-군기(軍器) / 외교-명(明) / 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무역(貿易) / 교통-수운(水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