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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62권, 중종 23년 8월 24일 계해 2번째기사 1528년 명 가정(嘉靖) 7년

중국 사람들이 신도에 살고 있는 일에 대한 평안도 경차관 임준의 계본

평안도 경차관 임준(林畯)의 계본(啓本)을 정원에 내리며 이르기를,

"이는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니, 즉각 사관(史官)을 나누어 보내 삼공에게 수의(收議)하여 아뢰도록 하라. 또 중국 사람들이 ‘인산(麟山)의 수보장(守堡將)이 와서 살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와서 산다.’고 했다는데, 수보장은 반드시 와서 살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와서 사는 사람들을 만일 금단하지 않는다면 장차는 퍼지게 될 것이고, 따라서 틈이 맺혀 사단이 생길 것이 지극히 염려스러우니, 이는 마땅히 쇄환(刷還)해야 할 일인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아울러 물어보아야 한다."

하였다. 임준의 계본은 다음과 같다.

"신이 표류된 중국 사람들의 선척(船隻)을 수포(搜捕)하는 일로 이 달 16일 신도(薪島)에 들어갔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표류해 온 배는 없고 이 섬의 서쪽에 중국 사람들이 48가구나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신이 데리고 간 통사(通事) 신순(申恂)을 시켜 그 가운데 우두머리인 사람들을 불러와서 산 연월일을 물어보니, 최임(崔林)이라는 중국 사람이 ‘우리들은 본디 동녕위(東寧衛) 사람으로 탕참(湯站)에서 4백 리쯤 떨어진 임강(臨江) 지방에서 살았습니다. 손자인 탕참의 관대관(管隊官) 최당(崔堂)의 여정(餘丁)이고, 현재 나이 60여 세이며 하는 일이 없습니다. 가정(嘉靖) 4년 6월 20일에 아들 노재(奴材)를 데리고 사슴을 잡는 일로 녹도(鹿島)에 들어갔다가, 표류된 두 사람이 뗏목을 타고 이 섬 근처를 떠내려가면서 사람 살리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 내가 곧 마상선(馬尙船)463) 을 타고 구출하여 집으로 데리고 와 10일을 머무르며 음식을 먹였고, 성명을 물어보니 의주(義州) 수보군(守堡軍) 박영(朴永)김여석(金呂石)이었습니다. 내가 자식 노재와 함께 이 두 사람을 데리고 길을 떠나 3일 만에 비로소 의주 압록강에 도달하여 외치니, 성 안에서 한 사람이 나와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와 우리 부자와 그 두 사람을 데리고 성 밖에 도달했는데, 역관(譯官) 두 사람이 수직(守直)했습니다. 머무르도록 한 지 4일 만에 한 관원이 의자에 나앉고 잔치를 차려 대접하여 표류한 사람을 데리고 온 공을 논상(論賞)하여 쌀 4석·소금 4석·거친 면포(綿布) 20필·말 2마리를 내주었는데, 면포만 받고 쌀과 소금 및 말은 싣고 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도로 주었습니다. 이어 우리 지방인 신도에 살고 싶다고 간절하게 청하니 수보관이 허락해 주기에 올 3월에 내 가족과 같은 마을에 사는 15가구가 한꺼번에 옮겨왔고, 나머지 30여 가구는 4∼5월과 7∼8월에 옮겨왔는데, 이 중에 막을 치고 있는 7∼8가구는 소금을 굽는 일과 고기를 잡는 일로 왕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 최개(崔揩) 등 40여 명은 동녕위 사람이고, 정강(鄭康)·강목(康睦)·유한우(劉漢愚) 등은 자신들은 금주(金州) 사람인데 지난 5월에 이 섬으로 옮겨왔다고 했고, 왕원(王願)·고노(高盧)·이문거(李文擧) 등은 개주(蓋州) 사람인데 8월에 옮겨왔다고 했으며, 그들은 ‘우리들이 옮겨오는 것을 수보장이 허락했는지 안 했는지는 당신의 나라 수보장이 발급한 인(印)을 찍은 문서를 고찰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했습니다.

이 섬의 동쪽 포구에 집물(什物)이 없는 중국 중선(中船) 한 척이 있기에 최임에게 물어보니 그가 ‘이 달 초승 무렵에 서성도(西城島)에 사는 성명을 알 수 없는 중국 사람 7명이 고기를 잡는 일로 이 배를 타고 서쪽으로 대양(大洋)을 향해 가다가 배 위에서 불이 나 돛이 연소되어 배를 운행할 수 없으므로 이 포구에 와서 정박하기에 우리들이 마상선을 주어 본토(本土)로 내보냈는데, 이 배의 주인이 돌아갈 적에 나에게 여러 날이 되기 전에 돌아와서 가져가겠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각 사람들이 공술하는 말이 이러하기에, 표류해 온 중국 사람 최당(崔堂)·최보(崔保)·최오(崔五)·장봉(張奉) 등이 사는 데와 서로 아는 사이인지를 물어보니, 모두 알지 못한다고 답변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최임의 손자인 탕참의 관대관 최당이라는 자와 표류해 온 사람 최당은 성명이 서로 같을 뿐만 아니라, 집물이 없는 버려놓은 중국 배는 표류해 온 배와 비슷한 것이기에, 위와 같은 말을 가지고 반복해서 추문했으나 끝내 알지 못한다는 것으로 답변했고, 최임의 손자 최당이란 사람은 탕참의 관대관으로 지금 거기 머물러 있다고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공술했습니다. 최임 등 48가구의 가족들은 더러 삼[麻]을 베는 일로 본토에 나갔고, 현재 있는 수를 점검해 보니 남녀와 장년·노약 아울러 95명이었습니다. 소·염소·나귀·돼지·닭·개가 매우 많았으며, 올해부터 시작하여 이따금씩 개간하여 잡곡을 심었고, 두 곳에 결전(結箭)을 하고 크게 촌락을 이루어 형편이 점차로 와서 살게 생겼었습니다. 신이 또한 바람에 막혀 돌아오지 못하겠기에 섬에서 이틀을 머무르며, 중국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다른 나라 지경 안에 옮겨가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반복해서 타이르니, 대답하기를 ‘만일 들어와 사는 것이 부당하다면 마땅히 밭곡식을 수확하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본토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수보장이 인을 찍어준 문서도 모두 기록하여 계문(啓聞)합니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62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29면
  • 【분류】
    외교-명(明)

○下平安道敬差官林畯啓本于政院曰: "此所當急處之事, 其卽分遣史官, 收議于三公以啓。 且唐人等曰: ‘麟山守堡, 將許令來居, 故來居。’ 云。 守堡將, 必不許來居也。 如此來居之人, 若不禁止, 則將至於滋蔓, 又因以結釁生事, 至爲可慮。 此所當刷還事, 何以爲之? 幷宜問之。" 林晙啓本曰: "臣以唐人漂流船隻搜捕事, 本月十六日, 入歸于薪島唐人漂流船則無, 而同島西邊, 唐人四十八家來居。 臣令帶行通事申恂, 致招其中頭頭人, 問其來居年月, 則唐人有名崔林者, 乃言曰: ‘我等本以東寧衛人, 居住于湯站西百里許臨江地方。 孫子湯站管隊官崔堂餘丁, 時年六十餘歲, 而無役。 至嘉靖四年六月二十日, 率子奴材以捉鹿事, 入向鹿島, 見有漂流二人浮桴査, 同島近處浮流, 呼號救命。 我乃乘馬, 尙船救之, 率來于家, 留十日供饋, 問其姓名, 則曰義州守堡軍朴永金呂石也。 我與子奴材, 率其二人發程, 三日始到義州 鴨綠江, 呼喚, 則有一人, 自城中出來, 乘小船越江而來, 吾父子及其二人率歸, 到於城外, 驛官二人守直許留四日, 有一官員, 坐交倚設宴供饋, 論賞漂流人率來之功, 以稻米四石、鹽四石、麤緜布二十匹、馬二頭出給。 緜布受之, 米鹽馬匹, 則難於輸轉, 故還納。 仍請曰: 「欲居爾地方薪島。」 以此懇說。 守堡官許諾, 故今年三月、我及同里住族親十五家, 一時移來。 其餘三十餘家, 則或四五月、或七八月移來。 其中結幕七八家, 則以煮鹽捉魚之事, 往來留住焉。 唐人 崔揩等四十餘人, 則東寧衛人也。 鄭康康睦劉漢遇等, 則自言金州人, 去五月移來于此, 王願高盧李文擧等, 自言盖州人, 八月移來。 吾等移居, 守堡將許諾與否, 則考爾國守堡將所給踏印文書, 可知也。’ 云。 同島東浦, 有無什物中, 船一隻, 問于崔林, 則曰: ‘今月初生間, 西城島居名不知唐人七名, 以捉魚事, 乘此船, 西向大洋, 船上失火, 延燒帆席, 不得行船, 故到泊于此浦, 吾等給馬尙船, 出送于本土。 此船主歸時, 謂我曰: 「不多日內, 還來持去。」 云。’ 各人招辭如此。 乃問漂流唐人 崔堂崔保崔五張奉等居處及相知與否, 則雖皆以不知答之, 然崔林孫子湯站管隊官崔堂者, 與漂流人崔堂不但姓名相同而已, 無什物棄置船, 與漂流船隻疑似, 故以右辭反覆推問, 終以不失答之, 而謂崔林孫子崔堂者, 以湯站管隊官, 時方留在, 終始如一納招。 崔林等四十八家人口, 則或以刈麻事, 出歸本土, 以見在之數着點, 則男女壯老弱竝九十五名, 牛羊驢豕雞犬甚多。 今年爲始, 往往開墾, 種以雜穀, 兩處結箭, 大成村落, 勢漸來居。 臣亦阻風未還, 留山二日, 使唐人等一處聚會, 而以他國境內, 不可移居之意, 反覆開諭, 則答曰: ‘若以入居爲不當, 則當待田穀收穫, 後卽還本土。’ 云。 其守堡將所給踏印, 又書俱錄啓聞。"


  • 【태백산사고본】 31책 62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29면
  • 【분류】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