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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 4월 21일 정묘 1번째기사 1527년 명 가정(嘉靖) 6년

추관이 박빈을 죄줄 것을 청하자 의정부와 육경 등에게 의논하도록 지시하다

추관(推官) 등이 아뢰기를,

"당초 신 등의 생각에는 궁내에서 죄인을 가려내어 재단(裁斷)해야 한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러다가 신 등에게 명하여 추문하게 하는 데 이르러서는 반복해서 추문했지만 전혀 승복(承服)하려 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범한 일로 말하면 그 죄가 지극히 중합니다. 하지만 교사한 사람을 추문하면 자기의 주인을 위해 사세상 숨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의 형세를 보건대 죽을 결심을 하고 있으니 실정을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신 등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사상(事狀)이 의심스러운 사람을 궁내에서 이미 지적하여 대궐 밖으로 내치셨으니, 자전(慈殿)께서도 어찌 범연히 생각해서 지적해 말했겠으며 성상(聖上)께서도 어찌 범연히 생각해서 내보냈겠습니까? 내전(內殿)에서 내린 자지(慈旨)가 물론에 합당하니 자복을 받지는 못했더라도 위에서 재단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널리 의논해서 처치하소서. 옛날 양 효왕(梁孝王)초왕 영(楚王英)의 옥사(獄事)126) 도 끝내 규명하여 처치하지 못했으니, 이 일은 역시 상의 결단에 달렸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자전(慈殿)과 내가 지적(指的), 귀일시켜 추문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자전의 뜻은 그날 박빈(朴嬪)이 혼자 동침실(東寢室)에 있었기 때문에 의심스럽게 여겼던 것이고, 마침 박빈의 딸 혜순 옹주(惠順翁主)의 계집종들이 또 인형을 만든 일을 하여 그 사상(事狀)이 주도 면밀한 것 같았으므로 아랫사람을 추문하라 명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정범(正犯)을 분명히 모르고 있으니, 어떻게 의심스럽다는 것만으로 죄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다시 추문할 수 있다. 다시 추문해서 설사 거짓 자복하더라도 반드시 행한 일의 형상을 말하게 하여 승복시켜야 될 것이고 보면 역시 하나하나 초사(招辭)를 받아내야 한다. 조정에서 어찌 그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가지고 죄줄 수 있겠는가? 의당 조정과 의논하여 처치해야겠다. 내 생각은 다시 추문해야겠다고 여기고 있지만 이는 중대한 일이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는지 모르겠다. 지금 조정과 같이 의논해야겠는가, 아니면 사간(事干)을 다시 추문해야겠는가?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

하매, 심정(沈貞)이 첨의(僉議)로 아뢰기를,

"지금 형신(刑訊)을 가해도 형세가 실정을 알아내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6차나 형신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맥이 너무 약해져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끝내 승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모두 장하(杖下)에서 죽게 된다면 조정의 물론이 더욱 흉흉해질 것입니다. 옛날 한 무제(漢武帝)한 명제(漢明帝)는 영걸스럽고 과단성 있는 임금이었습니다만, 끝내 옥사(獄事)127) 를 궁추(窮推)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처결했습니다. 위에서 대의(大義)를 헤아려 결단, 선처(善處)한다면 물론이 통쾌히 여길 것이고 따라서 국본(國本)128) 이 흔들리지 않음은 물론 왕자(王子)도 따라서 보전될 것입니다. 사간(事干)들이 지금은 죽지 않았지만 금명(今明) 간에 반드시 죽은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사간은 자복받기가 매우 어려우니 위에서 결단을 내려 선처하소서. 위에서 결단하기가 곤란하면 조정에 하문(下問)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박빈(朴嬪)을 대궐에서 내보낸 일은 바로 이 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자전게서도 분명히 지적할 수 없었던 차에 마침 하인이 인형을 만들어 형벌을 가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의심하여 추문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지금 정범을 분명히 모른 채 단지 의심스런 일만을 가지고 죄를 정하면 되겠는가? 한 무제한 명제의 일은 본받을 것이 못된다. 세종조(世宗朝)성종조(成宗朝) 적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궁내에서 추문하여 사건이 귀일된 뒤에야 조정과 의논하여 죄를 정했었다. 이번 일은 분명히 지적할 수 없는데도 죄를 정해야겠는가? 이 점에 대해 조정과 의논해야겠다."

하고, 명하여 의정부 전원과 정승을 역임했던 사람과 육경(六卿)·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부르게 하였다.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이 일을 박빈이 한 일이라 여겨 내보낸 것은 아니다. 박빈의 시비(侍婢) 가운데 초사(招辭)에 관련된 사람이 있게 되면 궐내(闕內)로부터 잡아내오기가 매우 편치 못함은 물론이고 박빈도 송구스러울 것이기에 내보낸 것이다. 지금 추관(推官)들이 같이 의논해서 아뢰기를 ‘아무리 형추(刑推)해도 실정을 알아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지금까지 추문한 것으로 조율(照律)할 일로 취품(取稟)한다.’고 했다. 대저 모든 일에 있어 정범(正犯)을 분명히 안 뒤에야 조율할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의심스런 일로 경솔하게 죄를 정할 수 있겠는가? 조종조 때의 일을 보더라도 반드시 사건이 귀일된 뒤에야 죄를 정했었다. 지금 의심스런 일로 대죄(大罪)를 결정하게 되면 후세(後世)의 기의(譏議)가 있게 될까 저어스럽다. 하지만 큰 일이라서 사세가 버려두기도 곤란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대신(大臣)이 오거든 이런 내용으로 말하여주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이 일을 가령 박빈(朴嬪)이 했다 하더라도 이는 혼자서 한 일이 아니라 반드시 교사한 자가 있을 것이고 또한 수종(隨從)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르겠다만 조정의 의논은 어떠한가? 이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일이고 사간(事干)도 승복하지 않고 있어 그 죄가 어떠한지를 모르겠다. 일죄(一罪)129) 에 이르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일죄에 이른다면 같이 모의한 사람은 방치한 채 불문에 붙이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같이 모의한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추관들은 이미 이 뜻을 알고 있지만 대신과 육경은 모르고 있다. 그리고 추관들은 한(漢)나라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지만 의당 당(唐)·우(虞)130) 때를 본받아야지 어찌 한 나라를 본받을 수 있겠는가? 조종조 적에도 의심스런 일로 대죄(大罪)를 결정한 때는 없었다. 조정에서는 모름지기 상세히 헤아려 의논해서 조처가 중도(中道)에 맞게 함으로써 후세의 기롱이 없게 하도록 하라. 이런 뜻도 아울러 말해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58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16책 567면
  • 【분류】
    사법-치안(治安) /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註 126]
    양 효왕(梁孝王)과 초왕 영(楚王英)의 옥사(獄事) : 양 효왕은 한문제(漢文帝)의 둘째 아들 유무(劉武)이다. 율 태자(栗太子)가 폐위되자 양 효왕을 태자로 삼으려 했었으나 원앙(袁盎) 등 때문에 책립되지 못하였다. 이를 한스럽게 여긴 양 효황이 자객(刺客)을 시켜 자신의 책립을 반대한 원앙 등 10여명을 죽였는데, 이 때문에 발생했던 옥사를 말한다. 《한서(漢書)》 권47. 초 왕영(楚王英)은 광무제(光武帝)의 여섯째 아들인 유영(劉英)으로 노장(老莊)과 부처를 좋아했다. 얼마 뒤 한 명제(漢明帝) 때 모반(謀叛)했다고 고발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끝내는 유영이 자살했는데 이 옥사를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권72.
  • [註 127]
    한 무제(漢武帝)와 한 명제(漢明帝)는 영걸스럽고 과단성 있는 임금이었습니다만, 끝내 옥사(獄事) : 한 무제의 옥사는 여 태자(戾太子)의 일을 가리킨다. 중종 58권 22년 3월 27일(갑진) 두 번째 기사 참조. 한 명제(漢明帝)의 일은 초왕 영(楚王英)의 일을 가리킨다. 중종 58권 22년 4월 21일(정묘) 첫 번째 기사 참조.
  • [註 128]
    국본(國本) : 세자의 자리.
  • [註 129]
    일죄(一罪) : 사형.
  • [註 130]
    당(唐)·우(虞) : 요(堯)순(舜).

○丁卯/推官等啓曰: "當初, 臣等意以謂, 此事, 自內推得罪人, 而裁斷矣。 及命臣等推之, 反覆問之則全不承服。 彼人等以身犯言之, 其罪至重。 若問指敎之人則爲其主, 其勢皆當隱諱也。 觀其勢則至死爲限, 得情無由。 臣等意謂, 事狀可疑之人, 自內已爲指的, 而黜闕。 慈殿亦豈偶然計, 而指言; 聖上亦豈偶然計, 而出送乎? 內下 慈旨, 合於物情。 雖不取服, 自上裁斷定罪爲當。 若不能然則請與朝廷, 廣議處之。 昔梁孝王楚王 之獄, 終不能究竟, 而處置。 此事亦在聖斷。" 傳曰: "此事, 慈殿及予, 非以指的, 而欲歸一推之也。 慈殿意謂, 其日朴嬪, 獨在東寢室, 故以此疑之, 而適其女惠順翁主侍婢等, 又爲人像之事, 其事狀, 似爲綢繆, 故命推下人矣。 時未的知正犯, 豈可以疑似, 罪之乎? 且其人等, 時未死, 可更推也。 更推而假使誣服, 必言其所爲之狀, 使承服則亦必一一納招矣。 朝廷豈可不得其情, 而以疑似定罪乎? 當與朝廷議而處之。 予意, 當更推也, 然是乃重事, 未知何以爲之。 今與朝廷共議乎, 更推事干乎? 其更議啓。" 沈貞僉議啓曰: "今雖刑訊, 勢難得情, 且彼人等自分必死。 今已六次受刑, 氣已甚弱。 將至於死, 而終不承服。 假使盡死於杖下, 朝廷物情, 尤爲洶洶。 古者, 武帝明帝乃英斷之主也, 雖終不得究竟獄事, 而處置。 自上計其大義, 裁斷善處則物情洞快, 而國本不搖, 王子亦從而保全矣。 事干之人, 今雖未死, 今明日間必有死者矣。 以事干所服甚難, 須自上裁斷而善處。 若自上難斷則下問朝廷處之。" 傳曰: "朴嬪出送之事, 非謂定爲此事而然也。 慈殿亦未能指的, 而適有下人, 爲人像行刑之事, 故以此疑之, 而命推矣。 今未能的知正犯, 只以疑似之事, 定罪可乎? 武帝明帝之事, 不足法也。 世宗成宗朝, 亦有如此之事。 自內推之, 歸一然後, 與朝廷議而定罪矣。 此則未能指的, 然亦定罪乎? 當議于朝廷。" 命召政府全數, 曾經政丞、六卿、漢城府判尹, 傳于政院曰: "此事, 非謂朴嬪所爲, 而黜送也, 其侍婢若有辭連之人, 則自闕內執捉而出, 深爲未便, 而當身亦爲未安, 故出送矣。 今推官等共議以啓曰: ‘雖刑推, 得情甚難。 以其所推擬罪事, 取稟。’ 大抵凡事, 的知正犯然後, 可以擬罪。 豈可以疑似之事, 輕易定罪乎? 以祖宗朝事見之, 必須歸一而後, 定罪矣。 今若以疑似之事, 定大罪則恐有後世之議也。 然亦大事, 勢難棄之, 何以爲之? 大臣之來, 以此言之。" 又傳曰: "此事, 假令朴嬪爲之, 此非獨爲之事, 必有敎之者, 亦必有隨從之人。 未知朝廷之議何如也, 此乃未能的知之事, 而事干亦不承服, 又未知其罪何如也。 若不至於一罪則已, 若至於一罪, 而同謀之人, 置而不問則同謀之人, 得脫於罪矣。 推官則已知此意, 大臣、六卿則未之知也。 且推官以時事言之。 當取法, 豈以爲法哉? 祖宗朝亦無以疑似之事, 定大罪之時矣。 朝廷須詳度以議, 處之得中, 使無後世之議可也, 以是竝言之。"


  • 【태백산사고본】 29책 58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16책 567면
  • 【분류】
    사법-치안(治安) /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