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곤·이유청 등과 양전 실시·황사언보 설치·입거 등에 대해 의논하다
영상(領相) 남곤(南袞)·좌상(左相) 이유청(李惟淸)·우상(右相) 권균(權鈞)·병조 판서(兵曹判書) 홍숙(洪淑)·호조 판서(戶曹判書) 안윤덕(安潤德)·좌참찬(左參贊) 유담년(柳聃年)·우참찬(右參贊) 이항(李沆)·호조 참판(戶曹參判) 홍경림(洪景霖)·병조 참판(兵曹參判) 박호(朴壕)·호조 참의(戶曹參議) 유희저(柳希渚)·병조 참의(兵曹參議) 반석평(潘碩枰) 등이 의논 아뢰기를,
"지금 정부(政府)에 있는 자들은 형세를 모르나, 오직 유담년·반석평은 그곳의 일을 잘 알기 때문에 바로 지금 물었더니 절도사(節度使)의 계본(啓本)이 마땅하다 합니다. 황사언보(黃士彦堡)가 적로(賊路)의 요해지(要害地)라고는 하나 이제는 물에 떠내려가고 묻혔는데 따로 다시 설치할 곳이 없고, 이곳에 보(堡)를 설치하더라도 적로가 매우 많아서 방어하기 어려우나, 삼삼파보(森森坡堡)는 만호도(萬戶道)인데 권관(權管)으로 고쳤으니, 예전대로 만호로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평안도는 본디 인물이 적은데다가 여역(癘疫)으로 무려 1천 8백여 인이 죽었으니, 어찌 이런 재변이 있습니까? 변방을 채우는 일은 반드시 백성을 옮겨 억지로 들어가 살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겠으나, 남방 사람들이 늘 이 일이 있을까 염려하고, 뽑힌 자는 혹 목매어 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한 큰 일이라면 백성의 작은 폐해를 돌볼 수 없습니다. 이제 평안도의 여역으로 빈 땅과 사군(四郡)510) 의 빈 땅에 백성을 옮기는 일은, 억지로 들어가 살게 하지 않더라도 하삼도(下三道)511) 의 감사(監司)를 시켜 죄를 지은 자를 뽑아서 들여보내게 하면, 스스로 지은 죄이므로 억지로 들어가 살게 하는 자처럼 깊은 원망을 사지 않고도 변방을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변방을 채우지 못하면 억지로 시켜도 될 것입니다. 대저 임금의 형벌은 가볍게 할 수도 있고 무겁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변방을 채울 때에는 죄가 가벼운 자라도 중률(重律)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진구(賑救)하는 일은, 함경도가 죄다 실농(失農)한 것이 아니라 수재(水災)가 있기 때문이니, 경내(境內)에 재해를 입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호조를 시켜 그 도에 이문(移文)하여 생업을 잃은 사람과 재해를 입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살피게 한 뒤에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또 양전(量田)하는 일은, 신들의 생각을 이미 아뢰었거니와 이제 또 호조·병조와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대저 양전은 나라의 큰 일이고 연한도 있으니, 당기거나 물릴 수 없습니다. 근래 폐조(廢朝)512) 에 일이 많아서 미처 하지 못하고 이제 53∼4년이나 되었으므로 부역(賦役)이 고르지 않고, 농사짓는 자는 많은데 부세(賦稅)할 자는 적습니다. 올해에는 농사가 그만하고 그 도에도 일이 없으며, 천사(天使)513) 가 올 때를 당하면 풍년이 들더라도 양전할 수 없습니다. 일이 있을 때에 한다면 백성이 한꺼번에 폐해를 받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일이 없을 때에 해야 합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어느 때에나 할 수 있을런지 모릅니다. 국가의 큰 일은 이 두세 가지뿐이니, 백성의 작은 폐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황해도에서 양전하는 일은 알았다. 진구하는 일은 회보(回報)를 기다려 조치하도록 하라. 황사언보를 옮겨 설치하는 일은 병조를 시켜 회계(回啓)하도록 하라. 네 고을에 들어가 살게 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삼공(三公)이 이어서 아뢰기를,
"신 등이 이제 듣건대, 의주(義州)·철산(鐵山) 등 고을의 원[倅]을 파출(罷黜)했다 합니다. 신옥형(申玉衡)·정경(鄭瓊)은 다 쓸만한 사람이고 그곳의 방어가 긴급한데, 이제 다른 사람을 가려 보내더라도 이 두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아마도 파출하여서도 안될 듯합니다. 또 신관(新官)·구관(舊官)을 맞이 하고 보내는 사이에 폐해를 받는 것도 많으니, 이제 전지(傳旨)를 받들어 추고(推考)하고 뒷날에 죄를 논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삼공에게 전교하기를,
"신옥형·정경은 버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제 이미 일을 잘못하였으니, 뒤에는 쓰더라도 지금은 파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5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16책 324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농업-양전(量田) / 군사-관방(關防) / 호구-이동(移動) / 보건(保健) / 구휼(救恤) / 인물(人物)
- [註 510]사군(四郡) : 세종 때에 평안도 강계부(江界府)의 북쪽 압록강 남변에 설치한 네 고을, 즉 여연군(閭延郡)·무창군(茂昌郡)·우예군(虞芮郡)·자성군(慈城郡). 사군은 멀리 떨어져 있어 남방의 군사가 들어가 방수하기에 힘이 들고 그곳으로 옮겨 살게 한 백성이 괴로와서 재산을 팔아 만주 지방으로 도피하여 들어가는 등의 폐단이 있으므로 폐지하자는 의논이 일어나, 세조 원년(1455)에 자성 외의 세 고을을 폐지하고 세조 5년(1459)에 자성군도 폐지하였었다.
- [註 511]
○領相南袞、左相李惟淸、右相權鈞、兵曹判書洪淑、戶曹判書安潤德、左參贊柳聃年, 右參贊李沆、戶曹參判洪景霖、兵曹參判朴壕、戶曹參議柳希渚、兵曹參議潘碩枰等議啓曰: "今在政府者, 不知形勢, 唯柳聃年、潘碩枰乃詳知其處之事, 卽今問之則云: ‘節度使啓本當矣。’ 黃士彦堡雖曰賊路要害之處, 而今則爲水所漂沒, 別無更設之地。 假使設堡於此地, 賊路甚多, 難以防之。 但森森坡堡乃萬戶道也, 而革爲權管, 請仍舊爲萬戶爲當。" 又啓曰: "平安道人物, 本來數少, 而加之以癘疫, 無慮千八百餘人死亡, 安有如此災變乎? 實邊之事, 必須徙民。 勒令入居, 此亦不得已爲之, 然南方人, 常恐有此事, 其見(披)〔抄〕 者或至縊死, 然若爲國家大事, 則不可顧民之小弊。 今徙民於平安癘疫及四郡空曠之地, 則雖不勒令入居, 令下三道監司, 抄其作罪者入送, 則自作之罪, 不如勒令入居者之怨深, 而可以實邊也。 如此而若不得實邊, 則勒令亦可爲也。 大抵, 王者之刑罰, 或輕或重。 若實邊之時, 則雖罪之輕者, 亦可從重矣。 且賑救事, 咸鏡道非盡失農也, 有水災故也, 一境之內, 亦無被災之地矣。 令戶曹移文于其道, 審其失業人及被災多少後, 爲之可也。 且量田事, 臣等意已啓之矣, 今又與戶、兵曹同議。 夫量田, 國之大事, 而亦有年限, 不可進退矣。近因廢朝多事, 未及爲之, 以至于今五十三四年, 賦役不均, 耕田者多, 而賦稅者少。 今年則農事偶然, 而其道亦且無事。 若在天使之時, 年雖豐稔, 不可爲也。 若於有事之時爲之, 則人民受弊於一時, 不得已爲之於無事之時也。 今若不爲, 則不知何時可得爲也。 國家大事只此數三事, 而已, 不可計民之小弊。" 傳曰: "黃海道量田事, 知道。 賑救事, 待回報措置可也。 黃士彦堡移設事, 令兵曹回啓可也。 四邑入居事, 依啓。" 三公仍啓曰: "臣等今聞, 罷黜義州、鐵山等邑倅。 申玉衡、鄭瓊皆是可用之人, 彼處防禦緊急。 今雖擇送, 他人無愈於此兩者, 恐不可罷也。 且新舊迎送之間, 受弊亦多。 今奉傳旨推考, 而後日論罪何如?" 傳于三公曰: "申玉衡、鄭瓊非不知不可棄之人。 今旣失事, 後雖用之, 今不可不罷。"
- 【태백산사고본】 26책 5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16책 324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농업-양전(量田) / 군사-관방(關防) / 호구-이동(移動) / 보건(保健) / 구휼(救恤) / 인물(人物)
- [註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