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효원·이계맹 등이 변방의 일에 관해 아뢰다
주강에 나아갔다. 《고려사절요》를 진강(進講)했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대문에 ‘곡식을 받고 관직을 제수했다.’ 했는데, 필시 군량이 모자랐기 때문일 것이나 이는 역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군수(軍需)를 예비하여 의외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듣건대 서북도(四北道)의 군자(軍資)가 부실하다고 하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하매, 특진관 이계맹(李繼孟)이 아뢰기를,
"근년에 농사가 흉년들어 서북이 더욱 심하기 때문에 군자가 넉넉하지 못한 것입니다. 옛적 한(漢)나라 때에도 납속(納粟)으로 관직을 제수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부득이하여 한 것이요 좋은 법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둔전(屯田)을 많이 두고 또 한 속포(贖布)로 곡식을 사들이기도 하여 재물을 마련하는 방법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점차로 허비되었으니 이번에 마땅히 그런 제도를 거듭 밝혀야 됩니다."
하고, 특진관 한효원(韓效元)은 아뢰기를,
"납속이 아름다운 일이 아님은 과연 성상의 분부와 같습니다. 신이 보건대 중국에는 지금도 그런 제도가 있으니 이는 재물 마련하는 방도를 잃었기 때문이나, 우리 나라 형편을 보면 납속과 같은 아름답지 못한 일을 근간에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오년116) 의 왜변(倭變)을 한번 겪고서 온 경상도(慶尙道)가 거의 고갈되었고 또 외방(外方)의 군자(軍資)는 본래 전란(戰亂)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수령들이 백성 구제에만 급급하여 모두 흩기만 하고 거두어 들이지는 않아 남아 있는 곡식이 전혀 없으니, 혹시라도 뜻밖의 사변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공급(供給)을 지탱할 것입니까? 그러므로 납속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니 어찌 후세의 비웃음을 헤아리겠습니까? 지금 태평한 지 오랩니다. 그러나 염려스러운 일들이 보이지 않는 속에 숨어 있으니 마땅히 한 방면을 맡은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워 힘써 조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야인(野人)들을 내쫓자는 의논 역시 합당합니다. 다만 한번 쫓아낸 다음 그만두고 물러온다면 별탈이 없을 것이나, 만일 분심을 가지고 틈을 노려 여기저기서 충돌하게 된다면 반드시 환란을 구제하기 어려울 것이니, 해조(該曹)와 비변사(備邊司)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조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계맹(繼孟)이 아뢴 곡식을 사들이는 일은 더욱 마땅히 유의해야 하는데, 고형산(高荊山)이 함경 감사로 있을 때 어염(魚鹽) 등의 물품을 가지고 민간의 곡식을 값을 낮추어 사들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편치 못하게 여겼었습니다. 수령된 사람들이 쓸데없이 문부(文簿)만 가지고 숫자를 과장해 놓기도 하는데, 혹시라도 병사(兵事)가 있게 된다면 어떻게 공급할 것입니까? 더욱 거듭 밝혀 거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간원(諫院)의 상소에, 변방 일에 뜻을 두지 말라면서 옛일을 든 것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변진(邊鎭)의 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매, 계맹이 아뢰기를,
"상소의 뜻은 과연 지당하고 변장(邊將)들이 공을 세우려다 일을 저지른다는 말은 더욱 지당하나, 미조항(彌助項)의 진(鎭)설치는 대신들이 건의한 지 이미 오래고 전번에 장순손(張順孫)도 가하다고 말했으며, 이번에 또 대신이 직접 형세를 살폈기 때문에 의논하여 처리한 것입니다.
경상도 각 진(各鎭)의 개혁(改革)에 관한 일은 경솔하게 거행하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세조조(世祖朝)에 남도(南道)의 영(營)을 북청(北靑)에 둔 것은 내부에 있으면서 외부를 제어하려 한 때문입니다. 이래서 평안도 영변(寧邊)의 진도 내지(內地)에 있는 것이니 이로써 헤아려본다면 남방 영(營)의 진을 옮기는 것은 불가할 듯하고 행영(行營)을 설치하여 외진(外鎭)으로 삼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전일에 의주(義州)의 성을 겨울철에 쌓았는데 쌓자마자 무너져 버려, 백성만 수고롭게 하고 공효가 없게 된 것은 과연 아뢴 말과 같으나, 방어를 설치하는 일은 역시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방 일은 마땅히 변방 일을 잘 아는 사람과 의논하여 그 사세의 완급(緩急)을 보아서 해야 할 뿐이니, 기다려 보게 하려는 대간의 뜻도 지당하다."
하매, 계맹이 아뢰기를,
"비록 당령 수군(當領水軍)들을 역사시킨다 하더라도 폐해가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게 된다고 대간이 말했습니다. 대저 대간과 대신이 서로 가부를 논란함은 준례이니, 어찌 대신들만 유독 자기들의 뜻을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때는 상께서 짐작하여 재결(裁決)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효원은 아뢰기를,
"대간이 아뢴, 변방 일에 뜻을 두지 말라는 말은 과연 좋은 말입니다. 다만 태평한지 오래되면 중등 이하의 임금은 교만하고 안일하려는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무부(武夫)들 중에 틈을 노리는 자가 또한 없지 않는 것인데 태평에만 버릇이 들어 방비를 하지 않다가는 변란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진을 경영하는 일은 전부터 만들어진 법이 있으니 지금 개혁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장수를 가리고 사졸을 훈련하여 시급한 일을 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형산이 옮겨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옮기려 한 것인데, 과연 장수가 선량하지 못하고 사졸이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면 형세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하매, 시강관(侍講官) 김섬(金銛)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위에서 거창한 것을 좋아하고 공효를 바라는 임금이 있으면 아래에 공을 세우려고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평 무사한 때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평안도(平安道)는 창고들이 차지 못하여 혹시라도 변방의 환란이 있게 되면 거의 지탱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선량한 장수를 가려 군졸들을 훈련하게 하여 일이 생기기 전에 예비해 놓아야 합니다."
하고, 계맹은 아뢰기를,
"태평한 때라 하여 전란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태한 법입니다. 이른바 ‘거창한 것을 좋아하고 공효를 바란다.’는 말은 임금이 부강해진 기세를 틈타 먼 나라에 위엄과 무력을 과시하는 것이니 지금 일로 본다면 대마도(對馬島)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는 것과 같은 따위가 오히려 거창한 것을 좋아하고 공효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진을 설치하는 일과 같은 것은 그런 유가 아닙니다."
하고, 효원은 아뢰기를,
"육진(六鎭) 지역의 관원은 모두 사람을 가려서 보내야 하나 만포(滿浦)같은 데는 더욱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이 포구는 북쪽 사람들이 왕래하는 문호에 해당되니 한갓 무재(武才)만 있는 사람을 임용(任用)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문사(文辭)에 능하고 임기응변에 잘하는 사람을 제수(除授)해야 합니다. 피인(彼人)들이 묻는 일이 있는 경우 능히 응대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병조에 치문(馳問)하게 되어 왔다갔다 하는 동안에 자못 합당하게 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근자에는 모두 유장(儒將)으로 차임(差任)하였고, 반석평(潘碩枰)이 이번에 체직하게 되었는데 다른 적임자가 없으니 염려스럽습니다. 전일에는 병조의 당상 하나는 반드시 무신(武臣)을 임용하여 무반(武班)의 소임을 위임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사람을 쓰는 일에 치밀하지 못한 것이 혹 이 때문인가 싶으니 마땅히 문무관원 중에 임용할 만한 사람을 가려 미리 그의 재질을 양성했다가 앞날에 쓰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고, 계맹이 아뢰기를,
"옛날 성종조(成宗朝)에는 반드시 효원이 아뢴 것처럼 무신을 참작해서 임용했었고 지금에 있어서는 무신으로서 승지 및 육조의 관원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삼면(三面)이 적(敵)의 공격을 받는 지형인데도 장수감이 적습니다. 대범 인재의 많음과 적음을 위에서 잘 알고 계실 것이므로 그런 사람을 발탁하셔야 할 것이고 아래서는 함부로 할 수가 없으니 이 일은 위에서 재결(裁決)하여 어떻게 널리 가리시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신은 마땅히 병조가 차임(差任)해야 한다. 다만 제장(諸將)에 있어서도 충당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그런 소임이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44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16책 106면
- 【분류】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註 116]경오년 : 1510 중종 5년.
○御晝講, 講《高麗史節要》。 上曰: "此言納粟補官, 必以軍糧之乏, 然亦非美事也。 爲人君者, 當預置軍需, 以備不虞。 今聞, 西北道軍資不實, 此非細故。"特進官李繼孟曰: "近來年歉, 西北尤甚, 故軍資不裕。 昔在漢時, 亦有納粟補官者, 此, 出於不得已矣, 非良制也。 我國, 廣置屯田, 且以贖布貿穀, 生財之方非不至矣, 而漸至虛耗, 今宜申明其制。" 特進官韓效元曰: "納粟, 非美事, 果如上敎。 臣觀於中原, 今亦有其制。 此, 由於生財之失其道也。 觀我國家之事, 如納粟不美之事, 近必有之矣。 一經庚午年倭變, 慶尙一道幾至罄竭。 且外方軍資, 本以備兵, 而守令急於賑民, 盡散而不斂, 頓無贏餘之數, 脫有不虞, 將何以支供? 如此納粟之事, 亦必行矣, 豈計後世之譏笑哉? 方今昇平日久, 然其所可憂者, 隱於無形, 宜責方面之任, 務令處置, 野人驅逐之議, 亦當但一驅之後, 斂手而退, 則可無虞矣。 若含忿乘釁, 衝突諸處, 則患必難救, 宜令該曹及備邊司, 更議措置。 繼孟所啓貿穀之事, 尤當留念。 高荊山嘗爲咸鏡監司時, 以魚鹽等物, 輕損其價, 而貿穀於民間, 人皆以爲未便。 爲守令者, 空申簿籍, 虛張其數, 設有兵事, 則何以爲供? 尤當申明而擧行也。" 上曰: "諫院上疏以爲, 毋留意邊事。 援引古事, 甚善也, 然邊鎭之事, 亦不可忘。" 繼孟曰: "疏意果當。 邊將要功生事之言, 尤當。 彌助項設鎭, 大臣建議已久。 前者, 張順孫亦言其可, 今又大臣親審其形勢, 故議處之耳。 慶尙道各鎭沿革之事, 則恐難輕擧。 世祖朝置南道營於北靑者, 居內制外之制也。 是故, 平安道 寧邊之鎭, 亦在內地。 以此計之, 南方營鎭, 似不可移矣。 設行營以爲外鎭, 則似當。 頃者, 義州之城築於冬月, 築之旋圮, 勞民而無功, 果如所啓, 設防備之事, 亦不可少弛。" 上曰: "邊方之事當與知邊事者議之, 而視其事之緩急而已, 臺諫之意欲以待之, 亦當矣。" 繼孟曰: "臺諫以爲, 雖役以當領水軍, 弊必及民。 大抵, 臺諫、大臣相可否, 例也。 大臣亦豈可獨執己意乎? 此在上之斟酌裁決耳。" 效元曰: "臺諫所啓, 無留意邊事, 果善言也。 但昇平日久, 則自中主以下, 不無驕逸之心, 故武夫之佻釁者, 亦不無矣。 狃於昇平, 而不爲之備, 則無以應變, 不可不慮。 但營鎭之事則已有成規, 今不可沿革, 宜令選將鍊卒, 以爲急務。" 上曰: "高荊山言可移, 故欲移耳。 果將不良、卒不鍊, 則形勢不足恃也。" 侍講官金銛曰: "自古上有好大喜功之主, 則下有要功生事之人。 然當平安無事之時, 而預爲之備可也。 平安道倉庫不實, 脫有邊患, 幾不能支, 宜擇良將, 使之訓鍊軍卒, 綢繆牖戶於未陰雨之時也。 "繼孟曰: "大抵, 居太平之時, 忘戰則必危。 所謂好大喜功者, 人君乘富强之勢, 遠示威武者也。 以今觀之, 若往征對馬島、建州衛之類, 則猶可謂之好大喜功也。 若如設鎭之事, 非此類也。" 效元曰: "六鎭之官, 皆當擇人, 如滿浦尤當擇遣。 是浦當北人往來門戶, 不可徒用武才, 必以能文辭、善應變者, 授之。 彼人如有所問, 而不能應對者, 則必馳問于兵曹, 其往復之間, 頗多失當。 近者, 皆以儒將差之, 而潘碩枰今將臨遞, 而他無可者, 可爲慮也。 往者, 兵曹堂上一員, 必用武臣, 委以武班之任, 今則不然。 用人之疎漏, 慮或以此也, 宜擇文武中可用者, 預養其才, 以爲他日之用。" 繼孟曰: "昔在成宗朝, 必參用武臣, 果如效元所啓。 在今時, 以武臣爲承旨及六曹者, 亦有之矣。 我國, 三面受敵, 而將才蓋寡。 夫人才衆寡, 自上的知矣。 擢拔其人, 下不堪自擅, 此, 在上之裁決, 而廣選之如何耳。" 上曰: "武臣當差於兵曹矣。 但諸將亦不得充, 況此任乎?"
- 【태백산사고본】 22책 44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16책 106면
- 【분류】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