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연·무창의 야인에 대해 의논하다
주강에 나아갔다. 상이 글에 임하여 이르기를,
"서운관(書雲觀)이 피전(避殿)097) 하여 재변을 해소하기 청하지만 어찌 피전한다고 재변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근래에 재변이 자주 생겨 때아닌 눈이 내렸으니, 마땅히 서로 미급한 일을 닦아 이변(異變)을 해소해야 한다."
하매, 참찬관 최세절(崔世節)이 아뢰기를,
"지난해에는 겨울이 봄처럼 따뜻했고 이번에는 또 때아닌 눈이 내렸습니다. 이는 모두 음기(陰氣)가 왕성한 소치인데, 이적(夷狄)과 부시(婦寺)는 대개 음기의 유입니다. 변방의 군졸들이 매우 지친데다 서쪽의 허수함이 북쪽보다 심한데, 정사 맡은 사람들이 또한 돌보는 도리를 잘못하여 군사들이 가질 말[馬]과 입을 옷이 없으니, 갑자기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적과 맞서겠습니까?
신이 만포(滿浦)에 있을 때 여연(閭延)·무창(茂昌)에 와서 거주하는 야인(野人)이 겨우 30여 호였는데 지금은 부락이 점차 번성해진다니, 번성해지면 상토(上土)·만포(滿浦) 등의 진(鎭)에 장차 조석간에 변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일찌감치 구축(驅逐)한다면 환란이 작지만 구축하지 않는다면 환란이 크리라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연·무창의 일은 대신들이 매양 말하기를 ‘퍼지게 되면 삼포(三浦)에서와 같은 변098) 이 있게 될까 싶다.’ 하였다. 그러나 구축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군량이 모자람에랴."
하매, 특진관(特進官) 윤희평(尹熙平)이 아뢰기를,
"야인들이 여연·무창에 와서 사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유래가 이미 오랩니다. 이극균(李克均)이 변방을 순찰할 때는 길을 여연 등지로 경유하지 않고 삼수(三水)·갑산(甲山)을 경유하여 통행했기 때문에 그들이 산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강윤희(姜允禧)·김석형(金碩亨)은 모두 변방지리를 아는 사람들로서 모두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였는데도 황형(黃衡)이 홀로 ‘새로 들어와 거주하는 것이다.’ 하여, 구축하자는 의논을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신이 생각에는 변진(邊鎭)이 허약하여 방어가 치밀하지 못한데 이를 도모하지 않고서 앞당겨 가서 쫓아내기로 한다면 여기를 막다가 저기를 잃게 되고 저기를 막다가 여기를 잃게 될 것이므로 진실로 경솔하게 쫓아냄은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더구나 산길이 험악하고 도로가 멀어, 비록 위엄을 세워 멀리 쫓는다 하더라도 장차 곧 도로 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토지가 비옥하고 수원(水源)이 좋아서 농사지으면 이득이 있고 어렵(漁獵)을 하면 소득이 있으며, 초서(貂鼠)099) 가 많이 나므로, 곧 도로 와 거주할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세절이 아뢰기를,
"희평이 말한 본래부터 와서 거주하는 자들이라는 것은 곧 온하위(溫下衛)인데, 온하위는 본래 추장(酋長)이 없고 다만 부락(部落)이 흩어져 삽니다. 여연·무창의 새로운 곳에 와서 사는 자는 곧 김주성합(金朱成哈)인데 이 사람이 와서 살게 된 이후부터 육진(六鎭)의 야인들이 4∼5호(戶)나 3∼4호씩 그곳에 옮겨와 삽니다. 무릇 육진은 야인들로 울타리를 삼는데 육진이 장차 허수해질까 싶습니다."
하고, 희평이 아뢰기를,
"온하위·건주위(建州衛)는 서로 섞여서 사는데, 이번에 만일 경솔하게 쫓아낸다면, 이 두 위(衛)가 서로 화합하여 변방 환란을 일으키게 될까 싶습니다."
하고, 세절이 아뢰기를,
"건주위와 해서위(海西衛)는 해마다 서로 싸우니 연합하여 화친하게 될 의단(疑端)은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44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6책 10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과학-천기(天氣)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註 097]피전(避殿) : 나라에 변고나 재변이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뜻으로 정전(正殿)을 피하여 행궁(行宮)이나 별서(別墅)에 옮겨 거처하는 것.
- [註 098]
삼포(三浦)에서와 같은 변 : 삼포는 세종 때에 왜인(倭人)들의 회유책으로 개항(開港)한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울산의 염포(鹽浦)로,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왜인의 교통·거류·교역(交易) 장소로 한 곳인데, 중종 5년에 반란을 일으켜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죽이고 웅천을 점령했었으나 곧 평정되어 대마도로 쫓겨갔었다.- [註 099]
초서(貂鼠) : 노랑가슴 담비.○御晝講。 上臨文曰: "書雲觀請避御弭災, 豈移御, 爲能避災乎? 近來, 災變屢臻, 雨雪非時, 固當交修不逮, 以消變異也。" 參贊官崔世節曰: "前年, 冬暖如春, 今又雨雪不時, 此皆陰盛所致。 夷狄婦寺, 蓋其陰類也。 邊方軍卒, 甚爲凋瘵, 而西方之虛疎, 甚於北方。 爲政者亦撫御失道, 軍無立馬著衣者, 猝有緩急, 誰與爲敵? 臣在滿浦時, 野人之來居閭延、茂昌者, 僅三十餘戶, 今聞, 部落漸至繁盛。 繁盛則上土滿浦等鎭, 將有朝夕之變。 臣意以爲, 早爲驅逐則患小, 不逐則患大矣。" 上曰: "閭延、茂昌事, 大臣每言之滋蔓, 則恐有三浦之變。 然驅逐非輕, 況軍糧告匱乎?" 特進官尹熙平曰: "野人之來居閭延、茂昌非自今始, 其來已久。 李克均巡邊時, 路不由閭延等地, 由三水、甲山通行, 故未知其居已久, 然姜允禧、金碩亨皆諳邊地者也。 皆曰: ‘其來已久。’ 而黃衡獨以爲: ‘新入居住。’ 以開驅逐之議。 臣意以爲, 邊鎭虛弱, 防禦不密, 不此之圖, 而徑往驅逐則禦此而失彼; 禦彼而失此, 固不當輕逐也。 況山路崎嶇, 道路遐遠, 雖立威遠逐, 將卽還來矣。 且其土地肥厚、水泉甘美, 耕稼有利、漁獵有得, 貂鼠多産, 其卽還來居, 不言可知。" 世節曰: "熙平所言: ‘本來居住者, 卽溫下衛也。 溫下衛本無酋長, 但部落散居矣。 閭延、茂昌新所來居者, 卽金朱成哈也。 自此人來居以後, 六鎭野人, 或四、五家, 三、四家, 年年移居其處。 大抵, 六鎭以野人爲藩籬, 恐六鎭將爲虛疎也。" 熙平曰: "溫下衛、建州衛相雜而居。 今若輕爲驅逐, 則恐此兩衛相和, 而發以爲邊患。" 世節曰: "建州衛與海西衛年年相鬨, 無連和之疑也。"
- 【태백산사고본】 22책 44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6책 10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과학-천기(天氣)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註 0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