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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43권, 중종 16년 10월 11일 기축 2번째기사 1521년 명 정덕(正德) 16년

송사련·정상이 안처겸 등을 역적 모의로 고변하다

관상감 판관(觀象監判官) 송사련(宋祀連)·학생(學生) 정상(鄭瑺)고변(告變)225) 하자, 정원이 입계(入啓)하니, 전교하기를,

"자세히 물어보아 아뢰라."

하매, 사련이 아뢰기를,

"안처겸(安處謙)이 전일에 언제나 말하기를 ‘간신(奸臣)이 조정에 오랫동안 있게해서는 안 되니, 마땅히 먼저 제거한 다음 주문(奏聞)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듣고서 지난 8월 10일 이후에 배천(白川)의 농가로 갔을 때, 안당(安瑭)피접(避接)226) 한 곳으로 가서 처함(處諴)에게 말하기를 ‘자네도 처겸의 뜻을 알고 있는가?’ 하니, 처함이 ‘형이 비록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고, 신이 ‘그렇다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처함이 ‘제생원(濟生院) 동리에 한 사람이 있으니 내가 마땅히 가서 보고 그만두게 하겠다.’고 하였으며, 신이 ‘누구인가?’ 물으니 듣고 처함이 ‘시산정(詩山正)227) 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듣고 드디어 배천으로 돌아왔다가 이달 초승께 집으로 왔는데, 신의 처남 정상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처겸이 나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가 고신(告身)228) 을 빼앗기게 되어, 이 때문에 처함이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로 내려가려 하는데 이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안당의 집으로 가니 처겸이 혼자 모시고 있었는데, 신이 안당을 보고 ‘언제 시골로 내려가느냐?’고 물으니, 이 ‘옛사람이 말하기를 「써주면 나아가고 버리면 물러나는 법이다.」했는데, 나도 역시 물러나 시골로 돌아가야 하므로 돌아오는 6일에 서문 밖 집으로 갔다가 이어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신이 또 의 본가(本家)로 가서 모시고 성문 밖 집으로 갔다가 드디어 신이 작별하고 나오는데, 처겸처근(處謹)이 함께 사랑문 안에 앉았다가 신에게 말하기를 ‘큰 일을 하려다가 갑자기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면 되겠느냐?’고 하기에, 신이 ‘자네들이 모시고 돌아간다면 무슨 일이 있겠는가? 시급히 모시고 돌아가야하네.’ 하고, 신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의 집 종 영동(永同)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정승이 나를 부르고, 또 처겸정상을 보고자 한다.’하기에, 신이 드디어 가서 보았는데, 처겸이 먼저 나와 신을 인도하여 뒷 처마밑에 앉히며, 아버지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다가, 처겸처근이 다시 신을 인도하여 행랑에 앉히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오늘 재상(宰相)들이 본사(本司)에서 재숙(齋宿)229) 하게 되니 거사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시산정·권수찬(權修撰)도 올 것이다. 우리들이 순이(純伊) 【안총(安璁)의 종이다.】 를 병조(兵曹)에 보내서 어느 당상(堂上)이 입직(入直)했는지 탐문하도록 했다.’ 하였고, 조금 뒤 정상이 들어오자, 처겸정상에게 ‘자네는 자네의 집으로 가 벗들과 함께 쏘아야 된다.’하니, 정상이 드디어 먼저 돌아갔습니다.

처겸이 또 신에게 이르기를 ‘큰 일을 당했을 ‘때는 다른 일은 생각할 수 없는 법이니, 자네는 병조와 도총부(都摠府)로 가서 누가 입직했는지 탐문하라.’하므로, 신이 대궐에 나아가 들어보니 병조에는 판서, 도총부에는 이조 참판과 양군(陽君) 【사련이 "양(陽)자 위의 글자 하나는 기휘한다."했다.】 이 있기에 즉시 돌아와 보고하니, 처겸이 ‘내가 이미 알고 있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오늘은 사람이 적어 거사할 수 없으니 초아흐렛날 해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 즉시 정상이 돌아왔기에, 신이 정상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니 정상이 초청한 벗 이수견(李壽堅)·황현(黃俔)·정송련(鄭松連) 등도 드디어 오게 되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포시(晡時)230) 가 되어 각자 해산했습니다.

신이 집으로 와서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같이 안당의 집으로 가니, 처겸처근은 모두 있지 않았고 도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정상의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정상을 만나 말하기를 ‘이는 큰 일이다. 나는 독자이고 너는 장자인데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우리집에서 같이 밥을 먹었으니 함께 고양(高陽)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하니, 정상이 ‘처겸을 만나본 다음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처겸의 집으로 가니 나가버렸기에 처함의 집으로 가니, 처함이 변색(變色)하여 앉으며 말하기를 ‘늙은 아버지가 있는데 감히 그런 일을 하겠는가?’하기에 신이 처함에게 ‘가서 처겸을 보고 권유하여 중지시키고 을 재촉하여 떠나도록 해야 한다.’하고서, 함께 처겸의 처소로 가니 처겸이 돌아와 있었습니다. 처겸처함이 뒤뜰에 앉았다가 처함이 먼저 말을 내어 만류하자 처겸이 크게 화를 내며 ‘네가 무엇을 아느냐?’하기에, 신이 중지하도록 권유하니, 처겸이 ‘가군(家君)231) 께 떠나도록 권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말을 하더라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처함이 먼저 나가고 신이 인사하고 나오려 할 때 처겸이 신을 앉도록 권하자, 처함이 먼저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신을 나가도록 재촉하므로 신이 인사하니, 처겸

‘내 생각에는 때가 안 되었다고 본다.’ 했습니다.

신이 처함과 함께 안당의 집으로 가니, 의 사촌(四寸) 안형(安珩)이 이미 와 있었고 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조금 있다 이 나왔기에 신이 앉은 곁으로 가서 말을 하려 하자 이 구부리며 무슨 말이냐고 묻기에, 신이 ‘처겸이 초아흐렛날 거사한다고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조금 있다 처함이 뒤따라 오자 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계달(啓達)하겠다.’하니, 안형이 ‘그렇다면 말할 수 없습니다.’하며 그만두도록 권유하자, 이 ‘내가 마음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한 말이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처함안형이 ‘시급히 식구들을 데리고 가버리면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하자, 이 즉각 글을 띄워 처겸처근을 불렀는데 처겸처근이 즉시 오므로 이 곧 나음날 떠나기로 결정하였고, 처겸이 집에 돌아가 아내와 작별하고 오겠다 했으나 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초아흐렛날 안당이 떠날 때 이웃에 사는 장형(長兄) 안장(安璋)의 집으로 가 부모의 신주(神主)앞에서 고별할 적에 처겸이 오지 않자 이 불러오도록 하였으나 오지 않았고, 앞길에 나섰을 때 처겸이 또한 따라나서지 않자, 이 말을 멈추고 두세번 불러서 데리고 갔습니다.

신도 함께 한강까지 갔다가 말을 언덕에 두고 전송하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신도 따라가자 하므로 말을 데리고 낙생역(樂生驛)까지 가서 같이 자고 이튿날 신이 서울로 돌아오려 하자, 처겸도 아내를 보려고 서울로 들어오려 하니, 이 ‘비록 네 아내가 죽었다 하더라도 늙은 아비를 버리고 어찌 가겠느냐?’하니, 처겸이 눈물을 흘리며, ‘제가 비록 가더라도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어찌 이처럼 믿지 않으십니까? 이러시면 부자간에 은혜가 끊길 것입니다.’ 하므로, 이 ‘네가 만일 억지로 간다면 내가 자진(自盡)232) 하겠다.’ 했습니다.

신이 작별하고 나올 적에 ‘도중에서 먹을 점심은 마련할 것 없이 육물(肉物)을 싸서 주면 가지고 가다가 먹겠다.’ 하니, 처겸이 책갑(冊匣)속의 휴지를 내어 신에게 주면서 ‘이를 뜯어서 싸면 된다.’고 하기에 신이 뜯어 쌌었는데, 양재역(良才驛) 근처에 와서 점심을 먹으려고 펴보니, 전면에는 사람들의 이름을 나란히 썼고 후면에는 날짜를 썼기에, 신이 속으로 황당하게 여겼습니다.

당초 낙생역에서 서로 작별할 적에 처겸이 신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의 첩 및 계집종 산비(山非)·효대(孝代)와 사내종 한정(漢丁)·효동(孝同) 등이 모두 알고 있으니, 말하자면 백분(百分)의 99분은 드러난 사세이고 1분만 드러나지 않은 사세이다.’ 했습니다.

신이 안당에게는 이성(異姓) 삼촌 조카이고, 정상은 신의 처남입니다."

하였다. 정상은 아뢰기를,

"지난해 겨울에 안처겸(安處謙)송사련(宋祀連)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정상은 곧 내 사촌 동생인데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에게 묻기를 ‘자네 활쏘기를 잘하는가, 말타기를 잘하는가?’하기에, 신이 ‘활쏘기는 잘 못하지만 말타기는 잘한다.’고 하니, 처겸이 자기 집으로 자주 찾아왔으면 하므로, 그뒤 잇달아 왕래하며 서로 만났습니다.

지난 7월에는 처겸이 신과 함께 광주(廣州) 묘소(墓所)로 가도록 했는데 시산정(詩山正)이 또한 왔다가 말하기를 ‘자네들이 만일 초하룻날 묘소로 간다면 내가 전송하겠다.’고 했습니다. 초하룻날 시산정이 먼저 제반교(濟盤橋) 곁으로 왔고 신도 뒤따라 갔으며, 처겸도 조금 있다 왔기에 같이 앉아 술을 마시는 동안에 처겸이 ‘내 아내가 태자무(太子巫)233) 에게 문복(問卜)하니, 그 무당이 「얼굴이 조금 얽고 턱이 뽀족한 사람이 상대편의 두목이 되어, 당신들을 제거하여 다른 사람이 닫아놓은 문안에 넣으려 하면서도 다만 당신들의 유가 실로 많으므로 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자, 시산정이 ‘그런 말 할 것이 없다.’하였는데, 이는 신이 듣기를 즐겨하지 않아 한 말이었습니다.

신에게 말을 달리도록 하므로 신이 말을 몰자, 시산정이 ‘이번은 우선 타보라고 주지만, 네 몸을 아껴야 하니 근신하여 다녀야 한다.’하였습니다. 드디어 처겸과 함께 광주로 가서 신이 처겸에게 말하기를 ‘대영공(大令公)을 대간(臺諫)들이 논계(論啓)했습니까, 아직 존계하지 않았습니까?’하니, 처겸이 ‘논계할 것을 언간(諺簡)234) 으로 써서 입계(入啓)했는데, 상이 어찌 윤허하지 않겠는가?’ 했습니다.

3∼4일을 머물다 들어온 뒤에 처겸수원(水原)의 농가로 가고 신은 송사련·안처근연안(延安) 농가로 돌아가 타작(打作)을 마치고서 송사련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튿날 처근과 범산 굴사(梵山窟寺)에 가서 담화하는 동안에, 처근이 신에게 말하기를 ‘무당이 「조광조(趙光祖)의 귀신이 홍경주(洪景舟)를 잡아가고, 홍순복(洪舜福)의 귀신이 이빈(李蘋)의 종을 잡아가 이빈의 종이 죽었다.」고 했고, 청혼(請魂)할 때 무당이 「홍순복이 나를 잡아간 것은 내 명이 짧아서가 아니다. 이제는 장차 우리 상전(上典)을 잡아간다니, 상전이 꿈에 상인(喪人)을 보게 되면 상전이 반드시 죽을 것이다.」했는데, 이빈이 그뒤 꿈에 상인을 보고 조금 있다가 병을 얻어 죽었으니, 나이 젊은 사람의 귀신은 영험이 있는 것이다.’했습니다.

그뒤 세 사람이 서울로 와 신이 처겸을 보러 가니, 처겸수원에서 이미 서울에 와 있었습니다. 처겸《송감(宋鑑)》악비(岳飛)235) 의 이름이 있는 데를 펴 놓고 말하기를 ‘악비진회(秦檜)236) 에게 살해되었는데, 옛적부터 군자가 소인에게 살해되었었다.’했고, 신이 대영공(大令公)의 일을 입계(入啓)하지 않았는 지에 대해 물으니, 처겸이 ‘27일에 이미 그대로 윤허되었고 나는 28일에 서울로 들어왔다.’하며 신을 만류하여 저녁밥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저녁을 먹고 송사련의 집에 가서 처겸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당초 6일에 저전동(苧前洞) 노계종(盧繼蹤)의 집에 가서 유숙했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송사련이 길에서 신의 종을 만나 처겸이 신을 보려고 한다는 뜻을 알렸으므로 신이 안당의 집으로 갔더니, 처겸·처근·송사련이 같이 있었습니다, 처겸이 먼저 신에게 말하기를 ‘자네 고향에 자네 또래들이 몇사람이나 있는가?’하기에, 신이 ‘이수견(李壽堅) 이외에는 모두 고향에 내려갔다.’하니, 신에게 ‘이수견·황현(黃俔) 등 무사(武士)를 너의 집으로 모아서 내가 고향에 내려갈 때 전송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서 신이 모화관(慕華館)의 무과(武科) 개장(開場)한 곳으로 가서 황현·박순(朴詢)·최세관(崔世寬)을 보고 그날 저녁에 신의 집으로 오도록 청하고, 그 길로 정송년(鄭松年)의 집에 들어가서도 청하고, 또 이수견의 집으로 갔더니 수견이 없기에 그의 종으로 하여금 신이 그날 저녁 보고자 한다는 뜻을 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처겸의 집으로 갔더니 처겸·처근권전(權磌)·시산정이 함께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처겸이 신에게 말하기를 ‘자네 우인(友人)들을 초청했는가?’하기에, 신이 ‘단지 5∼6인만 초청했다.’ 하니, 처겸이 ‘오늘은 내가 서울로 들어가니, 초아흐렛날 삼청동(三淸洞)에서 나를 전송하는 일로 자네 친구들과 모이기로 기약해두어야 하네.’ 했습니다.

신이 송사련과 함께 신의 집으로 왔는데, 이수견·황현·정송년이 잇달아 오기에 초아흐렛날 삼청동에서 모이기로 기약했고, 그날 저녁에 또 박순·최세관이 왔기에 역시 모이기로 하니, 그들이 ‘그날은 곧 격구(擊毬)하는 날이어서 가서 참예하지 못할 듯하다.’고 했었습니다.

초여드렛날 사련안당의 집 앞길에서 만났는데, 신이 도보(徒步)로 갔으므로 사련이 말에서 내려와 말하기를 ‘자네는 장자이고 나도 독자인데 어찌 이런 큰 일을 저지르겠는가? 고양(高陽)으로 돌아가야 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처렴·처근이 신으로 하여금 무사들을 청하도록 하는 말을 듣고, 비록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신 역시 황당함을 짐작했었는데 사련의 말을 듣고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이 사련에게 말하기를 ‘처겸을 만나보고 우리들이 고양으로 간다는 뜻을 말해야하지 않겠는가?’ 하고, 처겸의 집으로 가니 처겸이 나갔기에, 처함의 집으로 갔더니 처함이 ‘이런 큰 일을 하려고 하는데, 형은 사세가 만류할 수 없으니 마땅히 가군(家君)에게 고하여 고향 집으로 가도록 권해야 하겠다.’ 했습니다.

드디어 처함·사련과 함께 도로 처겸의 집으로 가니 처겸이 이미 와 있었는데, 신은 행랑 마당에 있도록 하고, 처겸·처근사련은 북쪽 마당으로 가서 함께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뒤에 그 동네의 무사(武士) 네 사람이 또 왔었는데, 처함이 ‘성문밖 아버지의 집으로 가로 싶다.’고 하자, 처겸이 ‘너나 가거라. 나는 아직 미정이다.’했습니다.

시산정이 문 밖 길에 와서 처겸을 나오라 하여 말하기를 ‘내가 자네를 보고 나서 잉화도(仍火島)로 돌아가겠다.’하므로, 처겸이 나오고 신이 또한 잇달아 나오자, 시산정이 ‘내일 큰 거사(擧事)를 하려면서 어찌 집에만 있는가?’하니, 처겸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처함이 아버지에게 고하고, 아버지를 고향으로 내려가도록 권하려 한다.’하며, ‘자네는 정상의 집으로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마땅히 나갔다 돌아가겠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노영손(盧永孫)237) ·정막개(鄭莫介)238) 도 종족(宗族)을 망치고 후손이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이 시산정과 함께 신의 집으로 가서는 시산정에게 말하기를 ‘내일 전송하는 모임에 나리도 가려고 하느냐?’고 하니, 시산정이 ‘가겠다.’고 했으며, 이때 처겸의 종이 와 신들을 부르기에 신이 시산정안당의 집으로 갔더니, 처겸·처함·송사련·안형(安珩) 등이 함께 행랑에 앉았다가, 처겸처함에게 이르기를 ‘만일 칼이 있다면 내가 마땅히 자결(自決)하겠고, 너도 마땅히 자결해야 한다.’ 하였는데, 처함이 빙긋이 웃자, 처겸이 ‘너는 딴마음을 먹으면서 감히 웃느냐?’고 했습니다. 신이 나오려 하자, 처겸이 신보다 먼저 나왔습니다. 방안에 앉아 시산정과 함께 이야기할 때, 처겸이 ‘안형의 무리를 한 곳에 둔치게 하고 우리들은 다른 곳에 둔치고서, 내가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기색을 보면, 따르게 되는지 안 따르겠는지를 틀림없이 알게 된다.’하였고, 이어 조정이 맑지 못함을 말하다가 ‘통곡하고 싶다.’고 하였으며, 처겸이 또한 ‘우리집 밑에 담장을 쌓은 빈 집이 있으니, 운집한 무사들을 그 집으로 몰아넣어 놓고, 이어 전교(傳敎)를 관수(盥手)하고 전독(展讀)239) 한다고 하면서, 자네들이 칼을 차고 무기를 들고서 담장 밑에 빙둘러 들어와, 호응하는 사람은 그의 성명을 기록하고 불응하는 사람은 그의 머리를 쳐, 서로 끌고 거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튿날 또 안당의 집에 가니 권전이 이미 와 있었는데, 권전처겸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에 내려가면 그 일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처겸이 ‘마땅히 속리산(俗離山)에서 한 말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신이 드디어 권전과 함께 신의 집으로 돌아오자, 권전이 신에게 말하기를 ‘나와 자네는 몸은 비록 둘이지만 마음은 곧 하나이네 내가 정언(正言) 때 상소했는데, 「이는 고금에 없는 사람이다.」고 전교했고, 이어 서계(書啓)하도록 했었네. 비록 내가 얼굴은 초라하지만 글과 계략(計略)은 남보다 낫지. 유용근(柳庸謹)·박세희(朴世熹)를 장재(將才)라 하나, 이들은 모두 부족한 사람이네. 만일 그들이 저쪽 장수가 되고 내가 이쪽 장수가 된다면 마땅히 사로잡아 오겠네.’ 했습니다.

또 ‘자네는 새벽이나 저녁이면 와서 마땅히 처자에게 가보아야 하고, 설혹 일이 생기게 되더라도 단지 자신만 당하고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게 해야 하네. 비록 처겸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이 남아 있으면 뒤에 반드시 거사하는 사람이 있게 될 것이고, 처겸이 비록 고향에 내려가더라도 만일 거사한 것을 듣게 되면 수일내에 도보로라도 오게 될 것이네.’ 했습니다.

신이 안당의 집으로 가니 처겸이 그 아버지를 모시고 떠났으므로, 신이 한강으로 뒤쫓아 갔으나 이미 강을 건너 저쪽 강 가에 앉았기에, 처겸과 울며 작별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43권 3장 B면【국편영인본】 16책 65면
  • 【분류】
    변란-정변(政變)

  • [註 225]
    고변(告變) : 반역 고발.
  • [註 226]
    피접(避接) : 요양(療養) 또는 병 치료를 위해 전지(轉地)하는 것.
  • [註 227]
    시산정(詩山正) : 세종(世宗)의 증손 이정숙(李正叔). 송대(宋代)의 정이(程頤)·주희(朱熹)가 왕에게 올렸던 글의 내용으로 나라 다스리는 방도를 삼아야 한다고 권했고, 김정(金爭)·박상(朴祥) 등을 석방하라고 극력 간했는데 기묘 사화(己卯士禍) 때 관직을 삭탈당했다.
  • [註 228]
    고신(告身) : 직첩(職牒).
  • [註 229]
    재숙(齋宿) : 제사에 앞서 재계(齋戒)할 때 재계하는 곳에서 밤을 지내는 것.
  • [註 230]
    포시(晡時) : 오후 3시에서 5시까지의 사이.
  • [註 231]
    가군(家君) : 자기 아버지를 말함.
  • [註 232]
    자진(自盡) : 자결.
  • [註 233]
    태자무(太子巫) : 음양가(陰陽家)들이 말하는 태일성(太一星)이 팔방(八方)으로 유행(遊行)하는 위치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무당.
  • [註 234]
    언간(諺簡) : 국문 편지.
  • [註 235]
    악비(岳飛) : 남송(南宋) 시대의 충신. 자는 붕거(鵬擧), 시호는 무목(武穆). 강회(江淮)의 반적(叛賊)을 토벌한 공으로 ‘정충악비(精忠岳飛)’의 기(旗)를 하사받았다. 여러 번 금군(金軍)을 무찔러 공을 세웠으나, 진회(秦檜)의 참소로 옥사했다. 저서는 《악무목집(岳武穆集)》이 있다.《송사(宋史)》 권365.
  • [註 236]
    진회(秦檜) : 남송 시대의 간신. 자는 회지(會之), 시호는 충헌(忠獻). 19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악비 등 충신과 어진 장수를 거의 죽였다. 《송사(宋史)》 권473.
  • [註 237]
    노영손(盧永孫) : 중종 2년에 이과(李顆) 등이 중종을 폐하고 견성군(甄城君)을 추대하려 한 사건을 밀고한 사람.
  • [註 238]
    정막개(鄭莫介) : 의정부의 종. 중종8년 박영문(朴永文)·신윤무(辛允武) 등의 모반을 고변한 사람.
  • [註 239]
    전독(展讀) : 펼쳐 들고 읽는 것.

○觀象監判官宋祀連、學生鄭瑺上變告, 政院入啓, 傳曰: "其詳問以啓。" 祀連啓曰: "安處謙, 前日常常與我言曰: ‘奸臣在朝, 不可使久在也, 當先除後聞。’ 臣聞此言矣。 去八月十日後往白川農舍時, 詣安瑭避接處, 語處諴曰: ‘汝知處謙意乎?’ 答曰: ‘兄雖不說, 我何不知?’臣曰: ‘然則將何以處之?’處諴曰: ‘濟生院洞有一人焉, 我當往見而止之。’ 臣曰: ‘誰耶?’ 處諴曰: ‘詩山正也。’ 臣聞此語, 遂歸白川, 今月初生間還來。 臣之妻娚鄭瑺來語臣曰: ‘處謙謂余曰: 「父, 被奪告身。 以此, 處諴欲陪父下鄕。 是, 不可說也」, 臣聞此,語, 卽詣家, 處謙獨侍側。 臣謁安瑭, 問曰: ‘何時下鄕乎?’ 曰: ‘古人云: 「用之則行, 捨之則藏。」吾亦歸藏鄕曲。 來初六日, 往門外家, 仍下鄕矣。’ 翌日, 臣又詣本家, 陪歸門外家, 臣遂辭歸。 處謙處謹共坐舍廊門內, 語臣曰: ‘欲擧大事, 而遽棄下鄕, 其可乎?’ 臣答曰: ‘君等陪歸, 則有何事? 其速陪歸。’ 臣還家。 翌日曉, 家奴永同來報臣曰: ‘政丞招爾矣。 且處謙欲見鄭瑺。’ 臣遂往見焉, 處謙先出來, 引臣坐後簷曰: ‘父翁, 時未起寢。’處謙處謹還引臣, 坐翼廊, 語臣曰: ‘今日, 宰相等齋宿本司, 擧事何如? 詩山正權修撰亦當至矣。 吾等令純伊 【安璁婢夫。】 遣兵曹, 探問某堂上入直矣。’ 俄而, 鄭瑺入來, 處謙鄭瑺曰: ‘爾往爾家與友輩共射可也。’ 遂先歸處謙又謂臣曰: ‘當大事, 不計其他。 汝往兵曹及都摠府, 探問伊誰入直。’ 臣詣闕聞見, 兵曹則判書, 都摠府則吏曹參判及陽君 【祀連云: "陽上一字忌之。"】 卽還報之, 處謙曰: ‘吾已知之矣。’ 且曰: ‘今日人少, 不可擧事, 初九日爲之可也。’ 鄭瑺卽還來, 臣與鄭瑺偕往家,則之所請之友李壽堅黃俔鄭松連等遂來到, 相與飮酒, 日晡時各散。 臣到家, 達曙不寐。 乘曉又往家, 處謙處謹皆不在焉, 亦時未起寢。 臣遂往鄭瑺家, 路逢鄭瑺, 語之曰: ‘此大事也。 我是獨子, 汝亦長子, 何可爲此事乎? 已於吾家炊飯, 偕往高陽家, 可也。’答曰: ‘見處謙, 然後歸之可也。’ 往處謙家則出去矣。 往處諴家, 處諴變色而坐曰: ‘有老父, 而敢爲此事乎?’ 臣謂處諴曰: ‘往見處謙, 勸止之, 促發行可也。’ 與處諴偕往處謙處, 則處謙已還矣。 處謙處諴坐後庭, 處諴先發言止之, 處謙大怒曰: ‘汝何知之?’ 臣遂勸止之, 處謙答曰: ‘家君, 可勸行之。 雖言之, 勿使輕動。’ 處諴先出, 臣欲辭出時, 處謙勸臣坐之。 處諴先出來, 促臣以出。 臣辭之, 處謙曰: ‘余意則時未定矣。’ 臣與處諴, 偕往家, 安珩, 之四寸, 已到。 時未起寢, 良久, 出來。 臣進坐側, 欲發言, 俯問之, 臣答曰: ‘處謙初九日擧事。’ 云, 俄而, 處諴繼至。 曰: ‘然則吾當啓達矣。’ 安珩曰: ‘如此則不可說也。’ 勸止之。 曰: "吾不勝痛心, 而言也。’ 處諴安珩曰: "斯速率往, 則有何事乎?’ 卽馳書, 招處謙處謹, 則處謙處謹卽來。 , 明日發行事卽定, 處謙卽欲還家辭妻, 不許。 初九日發行時, 往隣居長兄安璋家, 其父母神主前告辭, 時, 處謙不來。 令招之, 不往, 出前路時, 處謙又不從出, 駐馬, 再三招致, 率去。 臣亦偕到漢江, 乘船, 臣馬則在此邊。 令臣隨往, 故持馬到樂生驛同宿。 翌日, 臣欲辭還京, 處謙亦欲見妻入京云。 曰: ‘汝妻雖死, 棄老父何以往乎?’ 處謙垂泣曰: ‘余雖往, 爲何事乎? 何不信如此乎? 如此則父子之間, 亦當恩絶。’ 瑭曰: ‘汝若强往, 吾當自盡。’ 臣辭出時云: ‘中路晝飯則不須爲也。 肉物裹給, 則當持去, 路食之。’ 處謙出冊匣內休紙, 給臣云: ‘此可裂裹。’ 臣裂而裹之, 到中路良才驛近處見之, 前端列書人名, 後面題日也, 臣意爲荒唐也。 當初, 樂生驛相別時, 處謙謂臣曰: ‘父妾及婢山非孝代, 奴漢丁孝同等輩皆知之, 將百分, 九十九分發露之勢, 一分未發之勢也。’ 臣於安瑭, 異姓三寸姪也, 鄭瑺, 臣之妻娚也。" 啓曰: "前年冬節間, 安處謙宋祀連家, 乃言曰: ‘鄭瑺乃四寸之同生, 何不見乎?’ 遂令請之, 臣往同宿。 問臣云: ‘汝能射乎; 能馳馬乎?’ 臣答曰: ‘射則未能矣, 騎果善矣。’ 處謙, 令我到家相見, 此後, 連續往來相見。 去七月, 處謙令臣偕往廣州墓所, 詩山正亦至。 詩山正曰: ‘汝等若初一日向墳所, 則吾當餞之。’ 初一日, 詩山正先到濟盤橋傍, 臣亦繼至, 處謙已而又至, 同坐飮酒間, 處謙曰: ‘吾妻問太子巫, 巫曰: 「彼邊面暫縛而頣尖者作頭, 欲除汝曹, 納諸他人所閉之門, 但汝類寔繁, 故不能耳。」’ 詩山正曰: ‘不須出此言也。’ 是, 不肯臣之聽, 而發也。 令臣馳馬, 臣馳馬, 詩山正曰: ‘今姑假捧矣。 汝身可惜, 謹愼而行, 可也。’ 遂與處謙, 偕往廣州。 臣語處謙曰: ‘大令公, 臺諫尙論啓乎? 不啓乎?’ 處謙曰: ‘所啓者, 書諺簡而入, 上何不允?’ 留三、四日入來後, 處謙水原農所, 臣與宋祀連安處謹延安白川農所, 畢打作, 就宋祀連家。 翌日, 與處謹往梵山窟寺, 談話間, 處謹謂臣曰: ‘巫云: 「趙光祖之鬼, 捉洪景舟而去, 洪舜福之鬼, 捉李蘋奴子而去, 李蘋之奴死矣。」 聽魂時巫云: 「洪舜福捉我而去, 非吾命短也。 今將捉吾上典云, 上典夢見喪者, 則上典必死矣。」 李蘋, 其後夢見喪者, 俄而得病而死。 年少者之鬼, 有驗。」 云。 其後, 三人到京, 臣往見處謙, 處謙水原已到京矣。 處謙《宋鑑》 岳飛名付處, 乃曰: ‘岳飛秦檜所殺。 自古, 君子爲小人所害。’ 已而臣問云: ‘大令公事不啓乎?’ 處謙曰: ‘二十七日已依允, 余二十八日入京矣。’ 留臣饋夕食。 臣到宋祀連家, 傳處謙之言。 其初六日, 到苧前洞 盧繼蹤家留宿。 其翌日朝, 宋祀連路見臣奴, 通處謙欲見臣之意, 臣遂往家, 處謙處謹宋祀連同在處謙先謂臣曰: ‘爾鄕徒有幾人哉?’ 臣答曰: ‘李壽堅外皆下鄕。’ 令臣聚李壽堅黃俔等武士, 到余家, 餞我下鄕。 臣到慕華館武科開場處, 見黃俔朴詢崔世寬, 請當夕到臣家,路入鄭松年家, 亦請之。 又往李壽堅家, 壽堅則不在, 令其奴, 語臣當夕欲見之意, 又到處謙家, 處謙處謹權磌詩山正同坐食矣。 處謙語臣曰: ‘汝招友人乎?’ 臣答曰: ‘只招五、六人耳。’ 處謙答曰: ‘今日則吾入京矣。 初九日三淸洞餞我事, 汝與友等期會。’ 臣與宋祀連遂往臣家, 李壽堅黃俔鄭松年繼至, 初九日三淸洞期會。 其夕, 朴洵崔世寬又至, 亦期會: ‘其日乃擊毬日也, 似不能往參。’ 云。 初八日, 遇祀連安瑭家前路, 臣徒往, 故祀連下馬云: ‘汝爲長子, 吾亦獨子, 何得爲如此大事乎? 歸高陽可也。’ 臣已聞處謙處謹, 令臣請武士, 雖不顯言, 臣亦知其荒唐, 聞祀連之言, 乃覺也。 臣語祀連曰: ‘見處謙, 說吾輩歸高陽之意, 可乎?’ 歸處謙家, 處謙出去, 次往處諴家, 處諴云: ‘如此大事欲爲之, 兄則勢不得止之, 當告家君, 勸向鄕家。’ 遂與處諴祀連, 還到處謙家, 處謙已到矣。 令臣在翼廊庭, 處謙處謹祀連, 歸北庭相與語。 其後, 其洞內武輩四人亦到, 處諴曰: ‘欲往門外父家矣。’ 處謙曰: ‘汝可往矣, 吾則時未定矣。’ 詩山正到門外路, 請招處謙曰: ‘我見汝後, 歸仍火島。’ 處謙出來, 臣亦繼出。 詩山正曰: ‘明日欲擧大事, 而何在家耶?’ 處謙答曰: ‘處諴, 不可爲之事告父, 而勸父下鄕。 汝出去鄭瑺家待我, 我當出歸。’ 又曰: ‘盧永孫鄭丁介, 覆宗絶嗣也。’ 臣與詩山正, 偕往臣家。 臣謂詩山正曰: ‘明日餞會進賜欲往乎?’ 詩山正曰: ‘當往。’ 是時, 處謙奴來, 招臣輩。 臣與詩山正安瑭家, 處謙處諴宋祀連安珩等共坐翼廊。 處謙處諴: ‘若有刀則我當刃, 汝亦自刃焉。’ 處諴開笑。 處謙曰: ‘汝包藏而敢笑乎?’ 臣出來則處謙, 先臣出來, 坐房內, 與詩山正相話時, 處謙曰: ‘安珩黨屯一處, 吾等屯一處, 我於其間往來, 以觀氣象, 則可以占知從與不從。’ 仍語朝廷之不淑: ‘欲痛哭。’ 云。 處謙又曰: ‘家下有築墻空舍, 屯聚武士, 驅入其家, 仍稱傳敎, 盥手展讀, 使汝輩佩劎、持杖, 環入墻底, 應從者錄其名, 不從者擊其頭, 相率而擧事可也。’ 翌日, 又往家, 則權磌亦已到矣。 處謙曰: ‘君陪父翁下鄕, 其事將何以爲之?’ 處謙曰: ‘當依俗離山之語, 爲之耳。 臣遂與權磌返臣家語臣曰: ‘吾與爾, 身雖二, 心則一也。 吾爲正, 言時上疏, 傳曰: 「此, 古今所無之人也。」仍令書啓。 余貌雖拙, 文與謀略過人矣。 以柳庸謹朴世熹爲將才, 然此人皆薪薪。 比輩若爲彼邊將帥, 而我爲此邊將帥, 則當生擒來矣。’ 又曰: ‘汝可晨昏以來當出見妻子。 設有生事, 只以其身當之不當及於他人。 處謙雖無, 而餘人若存, 則後必有擧事者。 處謙雖下鄕, 若聞擧事, 則數日之內, 尙且徒步而來矣。’ 臣往家, 處謙, 陪其父發行矣。 臣追往漢江, 已渡江坐江邊矣。 與處謙泣別也。"


  • 【태백산사고본】 22책 43권 3장 B면【국편영인본】 16책 65면
  • 【분류】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