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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40권, 중종 15년 9월 29일 계미 1번째기사 1520년 명 정덕(正德) 15년

시강관 임추가 문과 무를 치우치게 권려하지 않을 것을 청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시강관(侍講官) 임추(任樞)가 아뢰기를,

"송(宋)나라의 장식(張栻)이 ‘문(文)과 무(武)는 참으로 치우치게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문과 무는 워낙 모두 써야 마땅하나, 숭상하는 것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근래 변방(邊方)의 일이 허술한 것을 염려하여 무사(武事)를 권려하고 자주 상을 내리시니, 뒷날 하나에 치우칠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또 한때 매우 정예하여도 이어 나가지 못한다면 역시 옳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장구한 계책을 생각하여 문과 무가 각각 그 도리에 맞도록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과 무는 본디 본말(本末)과 경중의 구분이 있으나 근래 무사가 너무 해이하므로 그렇게 권려하였을 따름이고, 무사를 치우치게 숭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무비(武備)에는 아직도 해이한 일이 많다."

하매, 임추가 아뢰기를,

"한 번 마음에 두면 형세가 자연히 편중(偏重)하게 됩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이항(李沆)이 아뢰기를,

"근래 문사나 무사가 모두 해이합니다. 신이 요즈음 전시(殿試)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또 성균관(成均館)에서 보니, 제술(製述)618) 하는 사람이 예전의 반에도 못 미치고 강경(講經)하는 사람이 열 중에서 한둘도 없었으며, 식년시(式年試)에서도 액수에 차지 않았으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무재(武才)라면 사람들이 다 보는 것이므로 쉽게 흥기(興起)하여 몇 달 사이에 재주를 성취할 수 있으나, 글을 익히는 것은 마음에서 얻는 데에 말미암으므로 한 몇해 몇달로 한정하여 성취할 수 없으니 미리 기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학교가 매우 허술하여 선비를 뽑은 것이 근년처럼 적은 것이 없었다. 사표(師表)의 책무를 맡은 자가 마음을 다하여 가르친다면 공효(功效)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매, 이항이 아뢰기를,

"고무(鼓舞)하는 것을 진작한다 하는데,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고 흥기하는 자는 뛰어난 선비이고, 여느 사람은 모두 가르쳐야 성취하는 것이니, 이제 인재를 고무하여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하고, 사간(司諫) 정백붕(鄭百朋)이 아뢰기를,

"접때 【근년에 조광조(趙光祖) 등이 집정(執政)하던 때를 말한다.】 학교의 일은 마음을 다하여 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재사(齋舍)와 공궤(供饋)의 일까지도 정결하였지만 사습(士習)이 궤이(詭異)하였던 것은 묵좌(默坐)하여 마음 닦는 것을 높이 여기고 부지런히 애써 글을 배우는 것을 낮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폐혜가 마침내 온 세상이 학술에 종사하지 않게까지 되었습니다."

하고, 이항이 아뢰기를,

"공자(孔子)는 성인인데, 《역경(易經)》을 많이 읽어서 그 책을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고, 또 ‘내가 일찍이 종일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고서 생각하였으나 무익하였으니 배우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이것은 학자가 배우지 않는 폐단을 구제하려는 말이었습니다. 요즈음은 성인의 말을 경멸하고 한낱 자기만을 믿으니 몹시 한탄스럽습니다. 지난 과방(科榜)에는 회강(會講) 때에 입격(入格)한 자가 얼마 안 되어 33인619) 을 채우지도 못하였으며, 올해 선비를 시취(試取)할 때에도 강서(講書)를 잘하는 자가 없고 제술(製述)에 있어서도 혼란하고 졸렬해서 볼만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모두가 글을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한형윤(韓亨允)이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사습(士習)이 성리(性理)의 학문을 핑계삼아 사장(詞章)의 아름다움을 숭상하지 않으니, 매우 그릅니다. 우리 나라는 중국과 언어가 같지 않은데도 존중받는 까닭은 문아(文雅)하기가 중국보다 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단의 기예(技藝)이기는 하나,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는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장령(掌令) 소세량(蘇世良)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세종·성종의 조정에서는 권장하는 방도를 다하여, 학자뿐 아니라 조정 조관에게도 말미를 주어 글을 읽게 하고 은사(恩賜)가 매우 후하였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감동하여 흥기해서 재기(才器)가 있는 선비가 빛나게 배출된 것이, 후세에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니, 이제 그 법을 준수해야 권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성리와 사장은 두 가지 것이 아닙니다. 문사(文辭)에 통달하면 어찌 성리의 학문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일에 통달한 것을 선비라고 하는 것이니, 참된 선비라면 모르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항이 아뢰기를,

"도덕은 문장보다 워낙 중하나, 재주가 완전하고 덕이 갖추어진 사람은 예전부터 드물어서 융성하던 삼대(三代)에도 이윤(伊尹)·주공(周公)이 있었을 뿐이니, 후세에서 어떻게 많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등용하는 길을 하나뿐이 아니니, 한 재주나 한 기예를 취해서 써야 합니다. 또 이학(理學)이 어찌 문장을 떠나서 있겠습니까? 하치않은 풀 하나나 나무 하나를 읊더라도 궁리(窮理)하여 격물 치지(格物致知)하는 방도를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송(宋)나라의 정자(程子)주자(朱子)는 이학에 독실하고 또 시(詩)에 능하였는데 대저 《시경(詩經)》의 3백 편의 시도 다 시가를 읊는 일로서 사무사(思無邪)의 성실함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공(劉珙)이 말하기를 ‘형주(荊州)·양주(襄州)는 사지(四肢)이고 조정(朝廷)은 원기(元氣)이다.’ 하였거니와, 변방의 일을 잘 조치하더라도 조정에서 베푸는 일이 마땅하지 못하면 무슨 잘될 일이 있겠는가?"

하매, 한형윤·이항 등이 아뢰기를,

"조정의 일은 인재를 얻는 것이 선무입니다. 변방의 일을 조정에서 어찌 낱낱이 조치하겠습니까? 한 사람의 어진 장수를 얻어서 변방의 일을 맡기면 자연히 일이 마땅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소세량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양장(良將)은 장성(長城)이라 하였고 또 북문 쇄약(北門鎖鑰)620) 이라 하였거니와, 변방이 중한 것은 마땅한 사람을 얻기에 달려 있고, 인재를 얻는 근본은 조정에 있습니다."

하고, 임추가 아뢰기를,

"인재를 얻는 일은 가려서 맡기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있는데, 이것은 임금의 일입니다."

하고, 이항이 아뢰었다.

"사람을 등용하는 일은 본디 임금의 일이나, 구중(九重)안에 깊이 거처하므로 외인(外人)의 현부(賢否)를 두루 알기 어려운 형세이니, 반드시 어진 정승이 천거하여 등용하는 데에 힘입어야 합니다. 예전에도 ‘네가 아는 사람을 천거하라.’ 한 말이 있거니와, 그렇게 하고서야 인재를 얻는 아름다움을 다할 수 있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40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694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註 618]
    제술(製述) : 글을 짓는 것. 여기서는 과시(科試) 과목의 하나로, 사서(四書)의 의(疑)·의(義)와 논(論)·부(賦)·표(表)·대책(對策) 등의 글을 짓는 것.
  • [註 619]
    33인 : 식년 문과(式年文科)·증광 문과(增廣文科)의 급제자의 액수(額數).
  • [註 620]
    북문 쇄약(北門鎖鑰) : 북방의 수어(守禦)를 뜻한다. 송(宋)나라 구준(寇準)이 대명부(大名府)를 맡아 지킬 때에 요(遼)나라 사신이 와서 구준에게 ‘상공(相公)은 명망이 높은데 어찌하여 중서(中書)에 있지 않고 여기 있느냐?" 하니, 구준이 "임금이 북문의 쇄약은 구준이 아니면 안 된다 하시기 때문이다." 하였다. 《송사(宋史)》 구준전(寇準傳).

○癸未/御朝講。 侍講官任樞曰: " (張拭)〔張栻〕 言: ‘文武誠不可偏廢。’ 文武固當竝用, 然所尙不可不愼。 近來慮其邊事疎漏, 勸勵武事, 屢爲賞賜, 恐有後日偏一之弊也。 且一時太銳, 而不能繼之, 則亦不可也。 願慮長久之計, 使文武各得其道可也。" 上曰: "文武固有本未輕重之分。 近來武事, 太爲解弛, 故如是勸勵耳, 非以偏尙武事也。 然今之武備, 尙多解弛之事。" 任樞曰: "一有着念, 其勢自然偏重。" 同知事李沆曰: "近來文武之事, 俱爲解弛。 臣近爲殿試試官, 又於成均館見之, 製述之人, 半不及古; 講經之人, 十無一二。 去式年, 亦不準數, 此非小事也。 若武才, 人所共見, 易於興起, 而數月之間, 可能成才, 學文之習, 由於心得, 非歲月可就, 不可不預養之。" 上曰: "近來學校, 至爲虛疎, 取士之少, 莫如近年。 若任師表之責者, 盡心敎養, 則可以成效矣。" 李沆曰: "鼓之舞之之謂作。 不待文王而興者, 豪傑之士也。 其在凡人, 莫不有敎而後成, 今宜鼓舞人才而作成之時也。" 司諫鄭百朋曰: "彼時 【言近年光祖等執政之時。】 學校之事, 無不盡心爲之, 至於齋舍、供饋之事, 亦爲精潔, 而士習詭異, 以默坐治心爲高, 以勤苦學文爲鄙。 其弊終至於擧世不事學術也。" 李沆曰: "孔子, 聖人也。 讀《易》, 至於韋編三絶。 又嘗曰: ‘終日不食, 終夜不寢以思, 無益, 不如學也。’ 此乃救學者不學之弊也。 今者蔑棄聖言, 惟一己之是信, 可勝嘆哉? 去榜會講時, 入格者無幾, 至於未充三十三人也, 今年取士時, 亦無能講者, 至於製述, 冗拙不足觀, 皆不讀書之故也。" 特進官韓亨允曰: "近年以來, 士習托以性理之學, 而不尙詞章之華, 至爲誤也。 我國之於中國, 言語不似, 而所以見重者, 以其文雅不讓於中華也。 此雖末技, 我國之人不可廢也。" 掌令蘇世良曰: "臣聞世宗成宗之朝, 其勸奬之道, 無所不至, 非徒學者, 至於朝官, 賜暇讀書, 恩賚甚重, 當時之士, 感動興起, 才器之士, 彬彬輩出, 非後世之可及也。 今當遵守其法, 有以勸勉也。 且性理、詞章, 非二事也。 若通暢文辭, 則豈有不知性理之學乎? 通天、地、人曰儒。 若眞儒, 則無所不知也。" 李沆曰: "道德固重於文章, 然才全德備之人, 從古所罕, 三代之盛, 只有伊尹周公而已。 後世何能多得乎? 用人非一途, 取其一才、一藝而用之可也。 且理學, 豈在文章之外? 雖詠一草一木之微, 亦可以窮理而盡格致之方。 是以, 篤於理學, 而又能於詩。 《詩》之三百篇, 皆吟詠之事, 而有思無邪之誠也。" 上曰: "劉珙言: ‘四支也, 朝廷元氣也。’ 邊方之事, 雖善措置, 朝廷施設失宜, 則何可之有?" 韓亨允李沆等曰: "朝廷之事, 得人爲先。 邊方之事, 朝廷何可一一措置? 若得一賢將, 責其邊事, 則自然事得其理矣。" 世良曰: "古人以良將爲長城, 又以爲北門鎖鑰。 邊鄙之重, 在得其人也, 而得人之本, 又在朝廷也。" 任樞曰: "得人之事, 在於擇任之如何, 此是人主事也。" 李沆曰: "用人, 固是人主之事, 然深居九重之內, 外人賢否, 勢難周知, 必賴賢相爲之擧用耳。 古亦有言: ‘擧爾所知。’ 如此然後, 可以盡得人之美矣。"


  • 【태백산사고본】 20책 40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694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