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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40권, 중종 15년 9월 13일 정묘 2번째기사 1520년 명 정덕(正德) 15년

특진관 김세필이 조광조에게 사사까지 내린 것은 지나쳤다 아뢰다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논어(論語)》를 강독(講讀)하였다. 특진관(特進官) 김세필(金世弼)이 아뢰기를,

"여기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허물은 일식(日蝕)·월식(月蝕)과 같아서,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고, 고치면 사람들이 다 우러러본다.’ 하였습니다. 사람은 다 요(堯)·순(舜)이 아니니, 어찌 매사에 진선(盡善)할 수 있겠습니까? 필부(匹夫)일지라도 허물이 있으면 고치려고 생각해야 하는데, 더구나 온 백성의 위에 있는 임금이겠습니까? 임금이 잘못하고서 능히 고친다면 백성이 우러러보는 것이 어찌 해와 달이 광명만할 뿐이겠습니까? 근래 조정(朝廷)에서 경화(更化)한 일이 많은데, 변경하더라도 어찌 죄다 알맞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5∼6년 동안 상께서 뜻을 기울여 잘 다스리려 하시매, 새로 사진(仕進)하여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옛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 채용되게 하여 조종(祖宗)의 구법(舊法)을 변경하여 이로부터 어지러워졌으나 대신이 그 폐해를 보고도 감히 말을 내지 못하니 그 폐해는 상하가 괴리(乖離)하여 정의(情意)가 통하지 않아서 마침내 구제하지 못하게까지 되었으므로, 부득이하여 조정에서 처치하여 개변(改變)하였으나, 어찌 알맞게 하여 뒷폐단이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조광조(趙光祖)는 새로 사진하여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어찌 간사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학문이 모자라므로 마침내 나라의 일을 그르치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처음에는 총애가 비길 데 없다가 하루아침에 단연히 사사(賜死)하셨으니, 이 일을 사책(史策)에 써서 만세에 전하면 만세 뒤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신은 이 사람을 몰랐었는데, 접때 경연(經筵)에서 보니 사람됨이 경박하여 대신의 말일지라도 반드시 가로채서 제 마음대로 하므로, 신이 속마음으로 변변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홍문관(弘文館)의 5∼6품 줄에 두었고 육조(六曹)에 출입시켜 쓸만한가를 시험하였으니, 어찌 쓸모 없는 재주였겠습니까? 잘못이 있거나 죄가 있으면 내쳐서 징계하는 것이 옳았을 것인데, 사사까지 하셨으니 지나칩니다. 김식(金湜)과 같이 간사한 자라면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겠으나, 조광조 같은 자야 어찌 간사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상께서 이것을 지나치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은총이 저러하다가 하루아침에 사사하셨으니, 일이 매우 참혹합니다. 미세한 죄수일지라도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이후로는 조정(朝廷)의 기색(氣色)이 암담해질까 염려됩니다. 지우(智愚)의 신하가 있더라도 어떻게 안심하고 스스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일을 그르친 까닭은 그 시초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대우를 알맞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당초의 의논들이 괜찮다 하였고 혹 그가 어질다고 천거하기도 하였으므로, 이력이 없기는 하나 차서에 의하지 않고 등용하였던 것이다. 사사한 것으로 말하면, 조정에서 그 죄명을 정한 것이 이미 가볍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조광조 등은 행사가 지나치기는 하였으나 그 속마음은 간사하지 않았는데, 이제까지 한 사람도 쟁론(爭論)하여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뜻 있는 선비들이 슬프고 분하게 여겼다. 김세필은 학문과 강개(慷慨)가 있어서 비로소 이런 논의를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격절(激切)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봉황(鳳凰)의 울음에 견주기까지 하였으나, 하옥(下獄)되자 살기를 바라서 말을 바꾸었으므로 지식 있는 사람들이 변변치 않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40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689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御夕講, 講《論語》。 特進官金世弼曰: "此云: ‘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 過也, 人皆見之, 改也, 人皆仰之。’ 人非 , 何能每事盡善? 雖匹夫, 有過則要思改之。 況人主處億兆之上哉? 人主過而能改, 則百姓之仰之, 豈啻若日月之光明乎? 近來朝廷更化之事, 多矣。 雖變, 而豈能盡得其中哉? 去五六年間, 自上銳意思治, 新進喜事之人, 爭以好古之說見用, 而變更祖宗舊章, 從此亂焉。 大臣雖見其弊, 而不敢發言, 其弊至於上下乖離, 情意不通, 終莫之救。 不得已而朝廷處置改變, 然豈能得中而無後弊哉? 趙光祖, 新進喜事之人也, 然豈有奸心? 但未涉世, 而學問不足, 故卒至於誤國事爾。 初則尊寵無比, 而一朝斷然賜死。 書之史策, 以傳萬世, 萬世之下, 謂之何如? 臣未曾識此人, 頃於經筵見之, 爲人輕浮, 雖大臣之言, 必奪而自專之。 臣之私心以爲不肖人也。 然置之弘文館五六品之列, 出入六曹而試可, 則豈是不用之才哉? 有過有罪, 則斥逐而懲之可矣, 至於賜死過矣。 若金湜之奸妄, 不可不置刑, 如光祖者, 豈有奸心? 然未知自上以此爲過乎? 恩寵如彼, 而一朝賜死, 事甚慘酷。 雖微細罪囚, 豈忍如是乎? 自此以後, 臣恐朝廷氣色慘慘也。 雖有知遇之臣, 何能安心自恃?" 上曰: "所以誤朝廷事者, 由其始也。 待遇之失宜爾。 其初議論稍可, 而或薦其賢, 故雖無踐歷, 而敢登用不次耳。 其賜死, 則朝廷定其罪名, 已非輕矣, 不得不爾。"

【史臣曰: "光祖等事, 雖有過, 中心則無邪, 至今無一人爭論暴白, 志士悲憤。 世弼有學問、慷慨, 始有此論, 辭甚激切, 聞者至比於鳳鳴, 及其下獄, 求生變辭, 識者小之。"】


  • 【태백산사고본】 20책 40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689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