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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38권, 중종 15년 1월 11일 경자 1번째기사 1520년 명 정덕(正德) 15년

남곤 등이 현량과의 파방하는 일에 관해 아뢰다

조강에 나아갔다. 집의(執義) 유관(柳灌)·헌납(獻納) 남효의(南孝義)가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현량과(賢良科)를 파방(罷榜)하는 일에 대하여는, 내 뜻에도 불가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사(私)를 용납한 실상이 현저하고 또 조종의 법이 아니므로 파한 것이다. 그러나 별시(別試)는 여기에 견줄 바가 아니니, 만약 파방한다면 뒷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하매, 영사(領事) 남곤이 아뢰기를,

"비록 공평하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았더라도 파방할 수 없는 것이므로, 전에 송영(宋英)이 장원(壯元)하였을 때도 고문(古文)을 전사(傳寫)한 것이라고 하여 물론(物論)이 비등하였었으나 끝내 파방하지 않았는데, 이제 어찌 그 글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으로 갑자기 파방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시강관(侍講官) 유보(柳溥)는 아뢰기를,

"신 등의 의논은 헛소문을 듣고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곤이 비록 시관(試官)이기는 하였으나 역시 그 아래 시관이 공평하게 하지 않은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 사실에 대하여는 참시관(參試官) 소세양(蘇世讓)이 상세히 말하였습니다만, 상께서 그 일이 이 지경으로 공평하지 못했던 것을 어찌 다 아실 수 있겠으며 대신도 어찌 이렇게 심하였을 줄 알겠습니까? 만약 범론(泛論)한다면 파방은 신중히 하여야 하지만, 소세양의 말로 본다면 어찌 그대로 용인(容忍)한 채 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전시(殿試)028) 의 책문을 출제할 때에는 시관이 각각 지어 수점(受點)029) 하는 것이 예(例)이나, 이번 시험의 책문 출제를 비록 남곤이 냈다고는 하지만 그 실은 남곤의 자의(自意)로 낸 것이 아니라 곧 김식(金湜)의 뜻이었습니다. 김식(金湜)이 사습(士習)이라는 것으로 책문을 내자고 할 적에 남곤이 반대하였으나 결국 못하고 마침내 출제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남곤(南袞)은 아뢰기를,

"이 말이 옳습니다. 신이 출제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유보(柳溥)는 아뢰기를,

"문자(文字)는 비록 남곤이 썼지만 그 출제의 본의는 김식에게서 나왔으니, 미리 의논하였던 출제의 뜻을 거자(擧子)들에게 누설하였다는 말이 과연 헛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거자들만 말하였을 뿐 아니라 시관도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릇 출제할 적에는 여러 사람이 같이 의논하는 것이나, 주의(主意)는 본래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요 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지금 시관들이 출제를 의논할 때에 한 시관의 주의를 출제한들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매, 유보가 아뢰기를,

"이뿐만 아니라 거자(擧子) 권진(權璡)이 ‘시일(試日)에 앞서 기준에게 들으니 「이번 과거의 책제(策題)는 사습에 대하여 묻는 것으로 날 것이니 그리 알라.」하였는데, 시장(試埸)에 들어가 내건 출제를 보니 과연 전에 들은 출제의 뜻과 같았다.’ 하였다 합니다."

하고, 유보가 또 아뢰기를,

"김식이 ‘시권(試券)은 피봉(皮封)할 필요가 없다. 피봉하는 것은 공정(公正)하게 하려는 것이니 마음이 공정하다면 피봉은 없어도 된다.’ 하니, 소세양(蘇世讓)이 ‘이렇게 한다면 반드시 뒷폐단이 있을 것이니 봉(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합니다. 김식(金湜) 등이 꺼림없이 자행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또한 무슨 짓인들 못하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진이란 자는 합격자인가 불합격자인가?"

하매, 유보(柳溥)가 아뢰기를,

"권진(權璡)은 곧 이번 방(榜)에 든 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거를 파방(罷榜)하는 것은 경솔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매, 유관(柳灌)이 아뢰기를,

"신이 초시(初試)의 시관(試官)이었는데, 성수종(成守琮)의 초시 시권(試券)을 보니 역시 문리(文理)가 제대로 되지 않았었습니다. 승지(承旨) 조옥곤(趙玉崑)도 그 때 시관이었으니, 하문(下問)하시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유보는 아뢰기를,

"만약 거자(擧子)의 과실로 파방한다면 불가하지만, 시관이 말썽을 일으켜 공정하게 하지 않은 허물로 본다면 파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파방하지 않는다면 전조(前朝)의 홍분방(紅粉榜)030) 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뒷날 무엇으로 공도(公道)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남효의(南孝義)는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오랫동안 잠저(潛邸)031) 에 계셨으므로, 세간(世間)의 일을 모르시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학문을 하는 선비가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공부하여 학술(學術)이 비록 정통(精通)하였다 하더라도 일생 동안 등제(登第)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형세로 말한다면 재상의 자제들이 반드시 먼저 등제할 것이니, 초야(草野)의 천한 선비가 어떻게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초야의 선비가 등제하기도 하고 부귀한 사람의 자제가 등제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은 공도(公道)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거가 중한 줄 알게 되고 따라서 공도도 보존되는 것인데, 근일에 이르러서는 혹 현량(賢良)이라 일컬어 과(科)를 설치하기도 하고 혹 천거(薦擧)라는 것으로 초자(超資)하여 발탁하기도 하므로 도리어 과거를 경시하여 소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조종조로부터 유지되어 온 공도가 이에 쓸어버린 듯 없어졌으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하고, 유보는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과연 파방한 예(例)가 없었습니다만, 이렇게 공평하지 않은 과거도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거자의 허물이 아니라 시관의 허물이다. 만약 그 그름을 지척(指斥)한다면 먼저 시관을 추문(推問)해야 하며, 성수종을 삭과(削科)한 일에 대하여는 역시 조종조에서도 있었던 예(例)이다. 반복하여 생각하여 보아도 파방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다."

하매, 유보가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전에 현득리(玄得利)라는 자는 곧 유양춘(柳陽春)의 외숙(外叔)이었는데 현득리의 글 재주가 유양춘만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응시할 적에 현득리가 몰래 유양춘(柳陽春)명지(名紙)032) 를 가져다가 그 이름을 지워버리고 자기의 이름으로 고쳐 써가지고 마침내 등제(登第)하였었습니다만 일이 발각되자 현득리만 삭과(削科)하였었습니다. 지금 성수종(成守琮)을 삭과한 일은 그 예와는 같지 않습니다. 시관(試官)이 성수종 한 사람에게만 사심(私心)을 쓴 것이 아니라, 혹 미리 의논한 출제(出題)를 누설하기도 하고 혹 시권을 채접할 때에 아무가 지은 시권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서 선취(選取)하기도 했으니, 방(榜) 전체가 거의 모두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재이(災異) 때문에 걱정하니, 남곤(南袞)이 아뢰기를,

"마땅히 자신의 도리를 다해야 할 뿐입니다. 조정의 상하를 화목하게 하는 것이 곧 상계(上計)인데 근일 연소한 사람들에게 죄를 가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각기 달라서 조정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고 둘로 나누어졌었으므로 화(禍)를 예측할 수가 없었으니 매우 두려웠습니다. 조정이 화목한 것밖에 믿을 것이 없으니 지금 힘써야 할 일은 화평(和平)하게 하는 데 있으며 바야흐로 닥쳐오는 일을 더욱 밝게 수거(修擧)한 뒤에라야 화난이 없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이 고집을 세워 우겨대는 것은 매우 불가하다."

하매, 남곤이 아뢰기를,

"근래 홍문관(弘文館)이 말을 내면 대간(臺諫)이 덩달아 붙좇고 대간이 말을 내면 홍문관이 그대로 동조하여 서로 구차스럽게 같이함으로써 감히 이의(異議)를 세우지 않으니 이는 매우 불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 지평(持平) 오준(吳準)·이영부(李英符)도 이의를 세웠다는 것으로 파직당하였었으니, 지금 마땅히 서용하는 것이 가하다. 만약 이의를 세웠다는 것으로 파직시켜 버리고 서용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구차스럽게 동조하여 사기를 떨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의론에 대하여 뇌동(雷同)하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니다."

하매, 유관(柳灌)이 아뢰기를,

"논계(論啓)하는 일이 옳으면, 어기고 이의를 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안당(安瑭)이 정승(政丞)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일인데, 이영부·오준안당을 두려워하여 의기(疑忌)해서 감히 이의(異議)를 세운 것이라, 그 소행이 사특(邪慝)하므로 논계하여 파직시킨 것이니 빨리 서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을 죄주지 않았으면 조정이 또한 이에 이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유보(柳溥)는 아뢰기를,

"근일의 일을 만약 소요(騷擾)하다 하여 그대로 버려둔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논하는 바는 시비(是非)와 호오(好惡)가 분명하니 그 사람들의 곡직(曲直)과 사정(邪正)을 상께서 반드시 아실 것입니다. 만약 고집하여 우겨대는 것이라 하여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매우 불가합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김극핍(金克愊)은 아뢰기를,

"지난번의 사람들은 입시(入侍)할 적에는 경학(經學)을 말하였으나 밖에 나가서는 저와 같았으니, 재변이 온 것은 반드시 이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형정(刑政)이 지나친 것이 재이를 부르는 원인이 아닌가 염려하시는데 이는 매우 불가합니다. 과연 대간의 말과 같이 조견없이 붙좇은 사람들을 죄준 뒤라야 인심이 모두 화(和)하여 거의 추향(趨向)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단 신임하여 탁용(擢用)하였다가 하루아침에 죄주는 것이므로, 여러 사람들은 어째서 그러는 줄 모르는 것뿐 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 사람들033) 의 일은 모두 고집하여 우겨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대간이 이렇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매, 동지사(同知事) 이행(李荇)이 아뢰기를,

"저들이 용사(用事)할 때에 조정에 있던 사람치고 누군들 오늘 같은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몰랐겠으며, 신 또한 어찌 몰랐겠습니까만 형세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능히 사력(死力)을 다하지 못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 옛날 왕안석(王安石)의 일은 그로하여 송(宋)나라가 망할 때까지 화(禍)가 그치지 않았고 오랠수록 더욱 커졌는데, 왕안석(王安石)도 스스로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그 여파가 이에 이를 줄은 자신도 몰랐었으니, 송나라의 경우로 보더라도 처치(處置)에 있어서 더욱 백배의 노력을 더한 뒤에라야 나라가 무사할 것입니다. 전자에 인물을 서용할 적에 구장(舊章)을 따르지 않고 함부로 하였으므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안석이 나라를 그르친 것은 모두 조종(祖宗)은 본받을 것도 없다는 말 때문이었으니, 이번 일을 왕안석과 비교할 것은 아니나 당연히 노성(老成)한 신하를 임용하여 기강(紀綱)을 세워야 합니다. 진실로 기강이 서지 않으면 반드시 송(宋)나라의 일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강은 마음만으로는 떨쳐지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간계(奸計)를 미리 방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의 분별은 마음 쓰는 데에 달린 것으로 군자는 화(和)하되 뇌동(雷同)하지 않고 소인은 뇌동하되 화하지 못하는 것이니, 노성한 신하의 말을 따르고 조종의 법을 준행한다면 화평(和平)에 마음을 두지 않아도 불화(不和)가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마음만으로는 불가한 것이요, 마음을 두지 않게 된 뒤라야 될 수 있다."

하고, 또 이르기를,

"과거(科擧)는 조정의 중대한 일이므로 이미 조정 대신과 의정(議定)하였으니, 지금 비록 다시 의논하더라도 반드시 파방(罷榜)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매, 이행(李荇)이 아뢰기를,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한 일을 가벼이 바꿀 수는 없습니다. 지난날의 폐단은 마땅히 신중히 그 처음을 살펴보아야 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남곤이 아뢰기를,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에 대한 기미(機微)는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 대사(大事)034) 를 결단할 적에도 그 위의(危疑)스러움이 바로 정국(靖國)035) 하였던 처음과 같았으니, 다스려지거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상(上)께서 행하는 바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명령(命令)과 작상(爵賞)에 대하여 마땅히 전날보다 더욱 힘써 삼가야 다스려질 수 있는 것이며, 치란과 안위 또한 여기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재변이 어찌 헛되이 생기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재변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있는 덕(德)을 잃지 않는다면 또한 재변이 변하여 상서(祥瑞)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재변이 있더라도 실상으로 응하면 절로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하였다. 유관(柳灌)이 아뢰기를,

"독서당(讀書堂)036) 은 인재(人材)를 양육(養育)하는 곳이요 나라를 빛낼 문장(文章)이 배출되는 곳이니, 국가에서 이를 설립한 뜻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근래 성리(性理)와 경술(經術)로 명분을 삼아 붕류(朋類)를 끌어들이고 재주 없는 사람들을 뒤섞여 진출시켜 그 수가 쓸데없이 많아서 한갓 늠공(凜供)만 허비할 뿐 아니라 남는 것을 가져다가 곤궁한 사람에게 보태주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진재(眞才)를 정선(精選)하여 5∼6인이 넘지 않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재능을 배양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이 말과 같았다. 지금 대제학(大提學)은 반드시 정선하여야 한다."

하매, 남곤(南袞)이 아뢰기를,

"사장(詞章)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를 문헌(文獻)의 나라라고 일컬는 것은 빛나는 문장(文章)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근간에는 음풍 영월(吟風詠月)을 모두들 그르다 하여 이단(異端)이라고 지목하므로 문장이 보잘것없어지고 경술도 황망(荒莽)하여졌으니, 만약 중국에서 문사(文士)가 사신으로 나아온다면 누가 그 책임을 맡아 화답(和答)하겠습니까? 오직 이행만이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고, 유관(柳灌)은 아뢰기를,

"비록 덕행(德行)은 근본이요 문장은 말단이라고 하나, 말단 또한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향약(鄕約)에 대한 일은 이미 대신(大臣)과 의논하였다. 환난에 서로 구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밖의 잡된 조목(條目)은 거행해서는 안 된다. 근일 듣건대 조광조 등이 환난에 서로 구제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면서 도망한 사민(徙民)도 놓아 주었다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향약은 파하는 것이 낫다."

하매, 남곤이 아뢰기를,

"무지(無知)한 사람들에게 약정(約正)의 법을 가르쳤으므로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이니 어찌 패란(悖亂)한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중(京中)에서 향약을 시행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는 위에서 뜻 둔 바 없었다. 다만 서울이나 지방이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겨 그 조문(條文)을 반포하였기 때문에 경중에도 시행하는 것뿐이다."

하매, 유관이 아뢰기를,

"사류(士類)라면 시행하는 것이 가하지만, 무지한 사람까지 다 시행하게 하였으니 어찌 그들의 본의(本意)를 알 수 있겠습니까? 경중에서는 시행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남곤은 아뢰기를,

"지금은 비록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행할 줄 알고 있으니 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환난에 서로 구제한다는 그 본의를 모르고 죄수(罪囚)도 놓아 주는 것이 가한가?"

하매, 유관이 아뢰기를,

"이렇게 모여서 남의 과실과 죄악에 대하여 말하게 하고 형벌(刑罰)까지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저들을 죄줄 때에도 광화문(光化門) 앞에 모였다가 결죄(決罰)할 때에 이르러는 달려들어와 울부짖었으므로 거의 장(杖)을 때릴 수 없었는데, 그 가운데 유생(儒生)들도 많이 끼어 있습니다. 지금같이 태평한 때에는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웃의 환난을 서로 구제하지 않은 데 대하여는 그 나름대로 거기에 대한 죄가 있으므로, 비록 향약이 없더라도 절로 서로 구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빈한(貧寒)하여 아침저녁 끼니도 못잇는 사람의 경우에도 재물(財物)을 내어 구제하지 않았다 하여 형장(刑杖)까지 쓰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빈한한 사람까지 재물을 내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렇다면 파하는 것도 가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8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610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註 028]
    전시(殿試) : 문무과의 초시(初試)·복시(覆試)에 합격된 자에 대해서 임금이 친림하여 등급을 정하는 시험으로 문과는 갑과(甲科) 3인, 을과(乙科) 7인, 병과(丙科) 23인과 무과는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0인의 등급을 판정하였다.
  • [註 029]
    수점(受點) : 임금의 재가를 받는 것.
  • [註 030]
    홍분방(紅粉榜) : 나이 어린 권문(權門)의 자제가 부당한 방법으로 과거에 급제한 것을 비웃는 뜻으로 고려 우왕(禑王) 11년 시관(試官) 윤취(尹就)가 뽑은 99인 가운데 세가(勢家)의 젖내나고 붉은 옷입은 아이들이 많았었던 데서 온 말. 분홍방(粉紅榜).
  • [註 031]
    잠저(潛邸) :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 [註 032]
    명지(名紙) : 시권(試券).
  • [註 033]
    저 사람들 : 조광조 등을 가리킨다.
  • [註 034]
    대사(大事) : 조광조 등을 숙청하는 일.
  • [註 035]
    정국(靖國) : 중종 반정(中宗反正).
  • [註 036]
    독서당(讀書堂) : 문관 가운데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 학업을 닦게 하던 서재(書齊). 호당(湖堂).

○庚子/御朝講。 執義柳灌、獻納南孝義啓前事, 不允。 上曰: "賢良科罷榜事, 予意猶以爲不可, 然顯有容私之實, 又非祖宗法, 故罷之矣。 別試則非此之比。 今若罷榜, 則後弊必多矣。" 領事南袞曰: "雖顯知不公, 而不得罷, 故其在前時, 爲壯元, 皆以爲傳寫古文, 物論喧騰, 而終不罷。 今亦豈以其文之不美, 遽罷乎?" 侍講官柳溥曰: "臣等之論, 非因虛傳而發也。 南袞雖入試官, 亦未知其下試官不公之至此極也。 其實參試官蘇世讓詳言之。 上豈盡知不公之至此, 大臣亦豈知如此其甚耶? 若泛論, 則罷榜爲重, 以世讓之言見之, 則亦豈容忍而不罷? 凡殿試策題, 試官各製受點, 例也, 此試策題, 雖云南袞所製, 而其實則非南袞主意, 乃金湜之志也。 欲以士習發問, 南袞欲止不得, 乃許爲文。" 曰: "此言是也。 臣乃許文耳。" 曰: "文字雖出於南袞, 而題之本意, 則出自金湜。 其所預議, 且以題意, 漏通擧子云者, 果不虛矣。 此非但擧子言之, 乃試官言之也。" 上曰: "凡製題之時, 衆人共議, 而主意則本自一人出也, 非衆人所共爲也。 以此言之, 則今之試官議題時, 一試官主意出題, 有何妨耶?" 曰: "非徒此也, 擧子權璡曰: ‘先於試日, 聞諸奇遵, 「今科策題, 當問以士習, 諸子其知之。」 及入場見掛題, 則果如前所聞題意。’" 又曰: "金湜云: ‘試券不須皮封。 其爲皮封者, 欲其公正也。 若心公, 則無皮封可也。’ 世讓言: ‘如此, 則必有後弊, 不可不封。’ 等恣行無忌如此, 亦何所不至也?" 上曰: "所謂權璡, 中者歟? 不中者歟?" 曰: "乃今榜中者。" 上曰: "科擧之罷, 不可輕易爲也。" 曰: "臣爲初試試官, 見成守琮初試之文, 亦不成文理。 承旨趙玉崐, 其時亦爲試官, 若下問則可知其實也。" 曰: "若以擧子之罪, 罷之則不可, 以試官紛亂不公正之罪見之, 則不得不罷。 若不罷則與前朝紅粉榜, 何異? 後日何由得見公道耶?" 孝義曰: "聖上久在潛邸, 世間事無不知之。 爲學之士, 自少勤業, 學術雖精, 而終身不得登第者有之。 以勢而言, 則宰相子弟必先得焉, 草茅賤士何可望也? 然而草茅之士有得焉, 膏梁子弟有不得焉者, 以其有公道也。 以此世人, 皆知科擧之爲重, 而公道於是乎存焉。 及至近日, 或稱賢良而設科, 或以薦擧而超拔, 反以科擧爲輕賤而忽之。 自祖宗朝維持之公道, 於是乎掃地, 甚所未安也。" 溥曰: "祖宗朝, 果無罷榜之例, 然祖宗朝, 亦無如此不公科擧也。" 上曰: "此非擧子罪也, 乃試官之罪也。 若斥其非, 則當先推試官也。 成守琮削去事, 亦祖宗朝所有例也。 反覆思之, 未知其罷榜之爲可也。" 曰: "果然。 前有玄得利, 乃柳陽春舅也。 得利之文, 劣於陽春。 及其應擧, 得利乃潛去陽春名於其名紙, 而改書已名, 終獲登第, 事覺只削得利。 今守琮削去事, 非其例也。 試官非徒私一守琮也, 或預議題漏通, 或臨文先知某也之作, 而選取之, 一榜擧皆不公也。" 上以災異爲憂, 曰: "當盡在我之道而已。 朝廷上下輯睦, 則此上計也。 近日年少人加罪時, 朝廷之議不一, 人心各異岐而爲二。 禍在不測, 甚可懼也, 朝廷輯睦, 則此可恃也。 在今務在和平, 而方來之事, 益修明, 然後庶無患矣。" 上曰: "人之執拗, 甚不可。" 曰: "近來弘文館出言, 則臺諫從而和之, 臺諫出言, 則弘文館亦從而和之, 相與苟同, 不敢爲異, 甚不可也。" 上曰: "近日持平吳準李英符, 亦以議異見罷。 今則可宜敍用。 若以議異, 罷去不用, 則人皆苟同而委靡也。 議論雷同, 非國之福也。" 曰: "論啓之事, 是則不可違異, 而安瑭不合爲政丞, 國人皆知, 李英符吳準畏縮疑忌, 乃敢有異議。 其所行邪慝, 故論啓罷職, 不可速敍也。 不罪彼人, 則朝廷亦不得至此也。" 溥曰: "近日之事, 若以爲騷擾而捨之, 則何以爲國? 今之所論, 是非好惡分明, 其人曲直邪正, 上必知之。 若以爲執拗而不允, 則甚不可。" 特進官金克愊曰: "曩時之人, 入侍則以經學爲言, 出外則如彼。 災變之來, 必由此等人也。 今以刑政濫重, 慮其以爲致災之由乎? 此甚不可也。 果如臺諫之言矣。 罪其和附之人, 然後人心皆和, 庶知趨向矣。 但信任擢用, 而一朝罪之, 故衆人不知爲何如也。" 上曰: "彼人之事, 皆由執拗也。 臺諫如此, 則不可也。" 同知事李荇曰: "彼人用事之時, 朝廷誰不知有今日之事, 臣亦豈不知? 然勢不能爲也。 其不能盡死力者, 此臣之罪也。 昔王安石之事, 終之世, 禍猶不絶, 久而愈大。 安石亦不自以爲誤國也, 自不知其至於此也。 以觀之, 處置益當百倍, 然後國家無事矣。 前者快用人物, 不遵舊章, 故致此矣。 王安石誤國, 皆由於祖宗不足法等語也。 此雖非安石之比, 當任用老成之臣, 以立紀綱而已。 苟不立紀綱, 則必如宋朝之事也。 然紀綱非可以有心振之, 亦不可預爲周防耳。 君子、小人之分, 在用心。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聽老成之言, 遵祖宗之法, 則無心於和平而自無不和矣。" 上曰: "果有心則不可, 無心然後乃可爲也。" 又曰: "科擧乃朝廷重事, 已與朝廷大臣議定。 今雖更議, 亦必以爲不可罷也。" 荇曰: "與大臣議定事, 不可輕變。 頃日之弊, 當愼審其初而已。" 曰: "治亂安危之機, 不可不審。 頃斷大事, 危疑正如靖國之初。 治與不治, 在上之所爲如何耳。 命令、爵賞, 宜加勉於前時, 乃可爲治。 此治亂安危之所由也。 災變豈虛生哉? 雖有災變, 在我之德不失, 則亦可變爲祥矣。" 上曰: "雖有災變, 而應之以實, 則自可消矣。" 灌曰: "讀書堂, 養育人材之處, 華國文章之所自出, 國家設立之意, 豈偶然哉? 近以性理、經術爲名, 援引朋類, 雜進非才, 其數冗多, 徒費廩供, 或取嬴以資窮人。 自今精選眞才, 毋過五六人, 以養其才何如?" 上曰: "果如此言矣。 今也大提學, 必當精選。" 曰: "詞章, 國家重事。 古稱吾國爲文獻之邦者, 以其有文章之華也。 近間吟風詠月者, 皆非之, 指爲異端。 以此文章蕭索, 經術亦爲荒莽。 若天使文士出來, 則誰任其責而和答耶? 唯李荇可當其任矣。" 曰: "雖云德行本也, 文章末也, 然末亦不可棄也。" 上曰: "鄕約之事, 已與大臣議之。 患難相救, 猶可爲也, 其外雜目, 不可擧行。 近日聞趙光祖等, 以患難相救爲言, 而徙民逃亡者, 亦放之云。 若然則不如罷之之〔爲〕 愈也。" 曰: "以無知之人, 授之約正之法, 故至於如此, 豈無悖亂之事乎" 上曰: "京中爲鄕約之事, 無上旨也。 但以爲京外無異, 而頒其文, 故京中亦爲之耳。" 曰: "如士類之人, 爲之可也, 率令無知之人, 盡爲之, 豈知其本意乎? 都中則不可爲也。" 曰: "今雖不令而自知之矣, 不須罷也。" 上曰: "不知患難相救之意, 而罪囚亦放, 可乎?" 曰: "如是聚會, 而人之過惡, 皆得言之, 至用刑罰。 頃日罪彼輩之時, 聚會光化門前, 及其決罪時, 奔走叫呼, 幾不得下杖, 儒生亦多聚會。 在今昇平時, 固無可疑, 不然則必生變也。 隣家患難, 不相救, 自有其罪。 雖無鄕約, 自不得不相救也。 貧寒而朝不及夕之人, 若不能出財救之, 至用刑杖, 亦甚不可。" 上曰: "至令貧寒之人出財, 不可。 雖罷之, 亦可。"


  • 【태백산사고본】 19책 38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610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