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일을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접때 조광조·김정·김식·김구·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 등이 서로 붕비가 되어 자기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고 권세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후진을 이끌어 궤격(詭激)이 버릇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朝政)이 날로 글러가게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크다. 왕법(王法)으로 논하면 본디 안율(按律)하여 죄를 다스려야 하겠으나, 특별히 말감(末減)하며 혹 안치(安置)하거나 부처(付處)한다. 대저 죄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데 벌은 경중이 없이 한 과조(科條)로 죄주는 것은 법에 어그러지므로 대신들과 경중을 상의하여 조광조는 사사(賜死)하고 김정·김식·김구는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극변(極邊)에 안치하라."
사신은 논한다. 대간이 조광조의 무리를 논하되 마치 물이 더욱 깊어가듯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일을 날마다 드러내어 사사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즉위한 뒤로는 대간이 사람의 죄를 논하여 혹 가혹하게 벌주려 하여도 임금은 반드시 유난하고 평번(平反)하였으며, 임금의 뜻으로 죽인 자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대간도 조광조를 더 죄주자는 청을 하지 않았는데 문득 이런 분부를 하였으니, 시의(時議)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짐작해서 이렇게 분부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또 사신은 논한다. 조광조의 죽음은 정광필이 가장 상심하여 마지 않았으며, 남곤까지도 매우 슬퍼하였다. 성세창(成世昌)의 꿈에 조광조가 살아 있을 때처럼 나타나서 시를 지어 성세창에게 주었는데 ‘해가 져서 하늘은 먹 같고, 산이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군신의 의리는 천년토록 변치 않는 것, 섭섭하다 이 외로운 무덤이여![日落天如墨 山深谷似雲 君臣卑載義 怊悵一孤墳]’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 가엾이 여겼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논의는 성세창이 경솔하게 퍼뜨린 것을 옳지 않다고도 하였다. 조광조는 온아(溫雅)하고 조용하였으므로 적소(謫所)에 있을 때 하인들까지도 모두 정성으로 대접하였으며, 분개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음로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아꼈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유엄(柳渰)이 사사(賜死)의 명을 가지고 이르니, 조광조가 유엄에게 가서 스스로 ‘나는 참으로 죄인이오.’하고 땅에 앉아서 묻기를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글은 없소?’ 하매, 유엄이 글을 적은 쪽지를 보이니, 조광조가 ‘내가 전에 대부(大夫) 줄에 있다가 이제 사사받게 되었는데 어찌 다만 쪽지를 만들어 도사에게 부쳐서 신표로 삼아 죽이게 하겠소? 도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믿을 수 없을 뻔하였소.’ 하였다. 아마도 유엄이 속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겠다. 조광조의 뜻은, 임금이 모르는 일인데 조광조를 미워하는 자가 중간에서 마음대로 만든 일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따라서 누가 정승이 되었고 심정(沈貞)이 지금 어느 벼슬에 있는가를 물으매 유엄이 사실대로 말하니, 조광조가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 없소.’ 하였다. 아마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다 당로에 있으므로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는 뜻이겠다. 또 묻기를 ‘조정에서 우리를 어떻게 말하오?’ 하매, 유엄이 ‘왕망(王莽)의 일에 비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니, 조광조가 웃으며 ‘왕망은 사사로운 일을 위해서 한 자요. 죽으라는 명이 계신데도 한참 동안 지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오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겠소? 내가 글을 써서 집에 보내려 하며 분부해서 조처할 일도 있으니, 처치가 끝나고 나서 죽는 것이 어떻겠소?’ 하기에 유엄이 허락하였다. 조광조가 곧 들어가 조용히 뜻을 죄다 글에 쓰고 또 회포를 썼는데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 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하였다. 또 거느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하였다. 자주 창문 틈으로 밖을 엿보았는데, 아마도 형편을 살폈을 것이다. 글을 쓰고 분부하는 일을 끝내고, 드디어 거듭 내려서 독하게 만든 술을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 당초에 능성(綾城)에 가자 고을 원이 관동(官僮)의 수인을 보내서 쇄소(灑掃)의 일에 이바지하게 하였는데, 조광조가 죽을 때에 이들에게 각각 은근한 뜻을 보였다. 또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네 집에 묵었으므로 마침내 보답하려 했으나, 보답은 못하고 도리어 너에게 흉변(凶變)을 보이고 네 집을 더럽히니 죽어도 한이 남는다.’ 하였다. 관동과 주인은 스스로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고, 오래도록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지금도 조광조의 말을 하게 되면 문득 눈물을 흘린다.
또 사신은 논한다. 당시의 언론으로서는 정해진 의논이 있어 이의가 없었으나, 혹 평번(平反)하자는 논의가 있고 심정의 무리도 더욱 심하게 하지는 않을 뜻을 보여 가혹한 의논이 없을 듯하였는데, 아부하는 자들이 위의 뜻을 맞추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날마다 새로운 의논을 내어 반드시 조광조를 죽이고야 말게 하였다. 조침(趙琛)은 조광조 등이 패하기 전에 서로 허여하지는 않았으나 불화하지도 않았는데, 정언(正言)이 된 뒤에 마치 원수의 집처럼 논치(論治)하여 숨은 흠을 찾아내어 죄에 빠뜨린 것은 심정 등도 너무 심하다 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드날릴 계제가 되는 길을 얻었다. 당초에 경세인(慶世仁)이 조침의 이웃에 세들어 살았는데, 조침은 경세인이 당시 사람들에게 추중(推重)되는 것을 알고 드디어 사귀어 그 환심을 샀다. 경세인도 자기에게 후하게 대하는 것을 달갑게 여겨 조침을 추어 칭찬하였으므로 머지않아 이름이 드러날 뻔 하였는데 이윽고 이 변이 일어났으니 그 반복이 이처럼 말할 수 없었다.
또 사신은 논한다. 유용근(柳庸謹)은 병사(兵使)로 있을 때에 형벌이 분명하고 호령이 미더우므로 군민(軍民)이 경외하고 사모하였으며, 경흥(慶興)에 흉년이 드니 군영(軍營)의 먹을 것을 덜어 굶주린 백성에게 먹여서 흩어져 떠나지 않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7권 63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602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傳曰: "頃者趙光祖、金凈、金湜、金絿、尹自任、奇遵、朴世熹、朴薰等, 交相朋比, 附己者進之, 異己者斥之, 聲勢相倚, 盤據權要, 引誘後進, 詭激成習, 使國論顚倒, 朝政日非, 在朝之臣, 畏其勢焰, 莫敢開口, 其罪大矣。 論王法則固當按律治罪, 而特從末減, 或安置、付處。 大抵罪有大小, 而罰無輕重。 一科罪之, 有違於法, 故與大臣商論輕重, 光祖則賜死, 金凈、金湜、金絿則絶島安置, 尹自任、奇遵、朴世熹、朴薰則極邊安置。"
【史臣曰: "臺諫論光祖之徒, 如水益深, 日發其所未發, 以至賜死焉。 上自卽位之後, 臺諫論人之罪, 或欲從苛峻, 上必留難平反, 未嘗以己意誅殺者。 今者臺諫, 亦於光祖, 無加罪之請, 而忽有是敎, 無乃揣知時議之所在而至此乎? 前日之昵侍左右, 三接寵遇, 情意如父子至親之無所間者, 而一朝變起, 嚴治不饒, 今殺之, 又出於宸斷, 無少憐惜矜惻之心, 與前日眷注寵待, 如出二君焉。"】
【又曰: "光祖之死, 鄭光弼最傷念不弛, 雖南袞, 亦甚嗟焉。 成世昌夢光祖如平生, 作詩與世昌曰: ‘日落天如墨, 山深谷似雲。 君臣千載義, 怊悵一孤墳。’ 聞者莫不憐之, 至有潛下淚者。 然時議或以世昌之輕播, 爲不可。 光祖, 溫雅從容, 在謫雖廝役, 皆待以誠, 且未嘗有憤憾之語, 人皆敬而愛之。 及義禁府都事柳渰, 將賜死之命而至, 光祖詣渰自謂曰: ‘吾固罪人也。’ 坐於地, 因問曰: ‘但有賜死之命, 而無賜死之文乎?’ 渰以小紙所錄示之, 光祖曰: ‘吾曾在大夫之列, 今至賜死, 豈但爲一小紙, 付都事爲信, 而令殺之乎? 若非都事之言, 似乎不可信也。’ 蓋以渰爲必不欺也。 光祖之意, 疑上之所不知, 而嫉光祖者, 從中有制也。 因問誰爲政丞, 沈貞今爲何官, 渰言之以實, 光祖曰: ‘然則吾之死無疑。’ 蓋以嫉己者, 皆在當路, 必殺無疑也。 又問曰: ‘朝廷以吾輩爲何如?’ 渰曰: ‘似有以王莽事爲言者。’ 光祖笑曰: ‘莽則爲私者也。 有命死之, 而尙延良久, 無乃不可乎? 然死不出是日, 則何如? 吾欲修書, 送于家, 且有分付措處之事, 竢處置畢而死何如?’ 渰許之。 光祖遽入, 從容修書盡意, 又書其懷曰: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且屬所率人曰: ‘吾死棺宜薄, 毋令重厚。 遠路難歸。’ 屢從窓隙窺外, 蓋察變也。 修書分付畢, 遂引重燒毒酒, 多飮乃死。 聞者無不泣下。 初至綾城, 縣倅送官僮數人, 令供灑掃之役, 及將死, 各致慇懃焉。 且召主人曰: ‘吾寓汝舍, 竟欲有報, 而報則未矣, 反使汝見凶變, 而有汚於汝舍, 雖死猶有恨焉。’ 僮與主人, 悲不自勝, 泣下沾襟, 久不食肉, 至今言及光祖, 則便下淚焉。"】
【又曰: "時之爲言論者, 有定議, 不復爲異同, 然或有爲平反之論者, 沈貞輩亦示不爲已甚, 似無苛峻之議, 而阿附者希旨爭攘臂, 日出新議, 必至於殺光祖而乃已。 如趙琛, 在光祖等未敗時, 雖不相許, 亦無所軋, 及其爲正言, 論治如仇家, 摘疪覓瑕, 而中陷者, 雖貞等, 亦以爲太甚。 然以此得階揚顯之路。 初慶世仁, 僦舍與琛爲隣, 琛知世仁爲時流所推重, 遂納交得其懽心。 世仁亦甘於厚己, 嘗右琛延譽, 幾於發跡, 俄有此變。 其反覆無狀如此。"】
【又曰: "庸謹爲兵使, 刑簡令信, 軍民畏慕, 慶興年饑, 除營供賑飢, 使不流離。"】
- 【태백산사고본】 19책 37권 63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602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