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헌 조광조·대사간 이성동이 합사로 정국 공신에 대해 아뢰다
대사헌 조광조·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 등이 합사(合辭)로 아뢰기를,
"정국 공신은 세월이 오래 지나기는 하였으나, 이 공신에 참여한 자에는 폐주(廢主)583) 의 총신(寵臣)이 많은데, 그 죄를 논하자면 워낙 용서되지 않는 것입니다. 폐주의 총신이라도 반정(反正) 때에 공이 있었다면 기록되어야 하겠으나, 이들은 또 그다지 공도 없음에리까! 대저 공신을 중히 여기면 공을 탐내고 이(利)를 탐내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다 여기서 말미암으니,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지게 하려면 먼저 이(利)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성희안(成希顔)은 그때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으나, 유자광(柳子光)이 제 자제·인아(姻婭)584) 를 귀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였으니, 대저 이것은 전혀 소인(小人)이 모의에 참여하여 만든 일입니다. 지금 상하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때에 이(利)를 앞세워 이 일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유지 할 수 없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아래는 2등·3등 중에서 더욱 개정할 만한 자이므로 서계(書啓)합니다. 【2등은 유순(柳洵)·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덕진군(德津君) 이활(李𤂾)·이계남(李季男)·구수영(具壽永)·김수동(金壽童), 3등은 송일(宋軼)·강혼(姜渾)·한순(韓恂)·이손(李蓀)·정미수(鄭眉壽)·박건(朴楗)·김수경(金壽卿)·윤탕로(尹湯老)·신준(申俊)이다.】 4등은 50여 인인데, 다 공이 없어 함부로 기록된 자입니다. 이우(李堣) 등 【이우(李堣)·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 은 다 이미 훈적(勳籍)에서 삭거(削去)하였으니 이들도 삭거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면대(面對)를 허가하시면 하정(下情)을 죄다 아뢸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585) 에 나아가고, 대간(臺諫) 전원이 입대(入對)하였다. 조광조가 아뢰기를,
"정국 공신은 이미 10년이 지난 오래된 일이지만 허위가 많았습니다. 성희안은 그리 용렬한 자는 아니나 그 기량이 원대하지 않으니 큰 공이 있기는 하나 그 인물은 칭찬할 것이 없습니다. 박원종(朴元宗)은 순직(純直)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으나 공신의 기록을 유자광이 홀로 맡아서 하였으므로 이렇게까지 외람하였습니다."
하고, 정언(正言) 김익(金釴)이 아뢰기를,
"유자광이 제 자제를 기록하려고 먼저 성희안·유순정(柳順汀)의 자제를 기록하였습니다."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사람은 다 부귀(富貴)를 꾀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利)의 근원이 크게 열렸으니, 이때에 이의 근원을 분명히 끊지 않으면 누구인들 부귀를 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겠습니까? 지금 쾌히 좇지 않으시면 뒤에는 개정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성동이 아뢰기를,
"사류(士類)가 이 공신들 때문에 마음이 불쾌하여 늘 울분을 품습니다. 인아의 무리까지 다 공신이 되었으니 이것은 매우 마음 아픕니다."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박원종·성희안은 창도(倡導)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공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하고, 헌납(獻納) 송호지(宋好智)가 아뢰기를,
"공은 큽니다. 그러나 인력이 아니라 천명(天命)과 인심이 자연히 돌아간 것입니다."
하고, 사간(司諫) 유여림(兪汝霖)이 아뢰기를,
"조종조의 논공(論功)은 이러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스스로 공신이라 하여 삽혈 동맹(歃血同盟)586) 하고 천지 신명(天地神明)에게 고하였으니, 그 기망(欺罔)이 무엇인들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강혼(姜渾)은 지극히 간사한 사람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빌붙었습니다. 유순(柳洵)은 반정 때에 어쩔 줄 몰라 했던 꼴 때문에 이제껏 사람들이 다 웃습니다. 구수영(具壽永)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는데도 오히려 공을 누릴 수 있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권균(權鈞) 등은 다 도성 문밖에 있으면서 공을 얻었습니다. 이제 쾌히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면 어떻게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언(正言) 이부(李阜)가 아뢰기를,
"자신이 1등 공신이 되고 그 자제는 다 4등에 기록되었으니, 여기서도 그 허위를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집의(執義) 박수문(朴守紋)이 아뢰기를,
"지금은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시니, 이와 같은 허위의 일은 본디 쾌히 결단하실 수 있습니다. 태조조(太祖朝)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은 10여 인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의 공신은 어찌하여 이토록 많습니까?"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성희안도 어찌 허위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역시 스스로 뉘우쳤다 합니다."
하고, 장령(掌令) 김인손(金麟孫)이 아뢰기를,
"이는 되지 못한 소인 유자광(柳子光)이 한 일입니다. 성감(聖鑑)이 이미 환히 아셨으니 유난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고, 지평(持平) 조광좌(趙廣佐)가 아뢰기를,
"이 때에 용단(勇斷)하지 않으면 후폐(後幣)가 많아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공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공이라도 이미 공을 정하고서 뒤에 개정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이(利)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고 논한 일은 번번이 경연에서 아뢰었는데, 그 뜻은 매우 착하나 이의 근원은 차차 막아 가야 한다. 어찌하여 갑자기 이것으로 이의 근원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매, 송호지(宋好智)가 아뢰기를,
"일에 잘못이 있다면 열 번 고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추개(追改)할 수 없다."
하매, 이성동이 아뢰기를,
"노간(老奸) 유자광이 한 일에 대해 인심이 울분하여온 지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하고, 이부가 아뢰기를,
"그때 뇌물을 쓰거나 울면서 청하여 된 자가 많으니, 이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반우형(潘佑亨)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다가 녹공(錄功)되었거니와, 신준(申浚) 등이 녹공된 것은 더욱 우습습니다. 이 일은 홍경주(洪景舟)에게 물어서 공이 있는 자를 기록해야 합니다."
하고, 김인손이 아뢰기를,
"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이 유자광의 술수에 빠졌었습니다."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환시(宦寺)가 녹공에 참여된 것은 더욱 옳지 않습니다."
하고, 유여림이 아뢰기를,
"환시에게 작은 공로가 있더라도 상사(賞賜)만 해야 합니다. 어찌 녹공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조정에 물어서 처리해야 합니다. 또 김감(金勘)·유순(柳洵)·강혼(姜渾)·구수영으로 말하면 다들 임금을 음란한 데로 인도하고 아첨하여 총애를 얻은 자입니다. 민효증(閔孝曾)은 사람이 못되고 간사하므로 중벌에 처해져야 할 터인데 도리어 대훈(大勳)을 주었으니, 지극해 마음 아픕니다. 유홍(柳泓)은 유순정의 아들로 향시(鄕試)587) 에 응시하러 가 있었는데 녹공에 참여되었고, 성율(成瑮)은 겨우 17세인데 원훈(元勳)에 참여되었으니, 이것은 더욱 통탄할 일입니다."
하고, 승지(承旨) 박훈(朴薰)이 아뢰기를,
"이는 국론(國論)이 오래 쌓여서 발의된 것이니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듣건대 박원종이 부경(赴京)하였다가 돌아왔는데, 그때는 불안하므로 구차하게 인심을 기쁘게 하려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논공(論功)하였다 합니다."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그때 이계맹(李繼孟)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규탄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이 흉포(凶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574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註 583]폐주(廢主) : 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 [註 584]
인아(姻婭) : 혼인한 집안.- [註 585]
사정전(思政殿) : 경복궁(景福宮)의 편전(便殿).- [註 586]
삽혈 동맹(歃血同盟) : 피를 바르고 함께 맹세한다는 뜻. 예전에는 동맹할 때에 희생(犧牲)의 피를 입에 바르고 맹세를 지키겠다는 뜻을 표하였다.- [註 587]
향시(鄕試) : 각도(各道)에서 설행(設行)하는 초시(初試). 과거(科擧)에 있어서 맨 처음 단계의 시험을 초시라 하는데, 그 중에서 성균관(成均館)에서 설행하는 것을 관시(館試), 한성부(漢城府)에서 설행하는 것을 한성시, 각도에서 설행하는 것을 향시라 한다.○大司憲趙光祖、大司諫李成童等合辭啓曰: "靖國功臣, 歲月雖久, 參此功臣者, 多是廢主寵臣, 論其罪則固不貰矣。 雖廢主寵臣, 若有功於反正時, 則可錄之, 此則又甚無功乎? 大抵重其功臣, 則貪功冒利, 而弑君、簒國之事, 皆在於此。 人主若欲致治, 須先防利源, 可也。 成希顔則其時亦不欲如此, 而柳子光欲貴其子弟姻婭, 乃使之然也。 大抵專是小人參謀之事也。 今方上下求治之時, 以利爲先, 而不改正此事, 則恐不能維持國家也。 此則二三等中尤甚可改者, 故書啓耳。 【二等, 柳洵、雲水君 誠、雲山君 誡、德津君 𤂾、李季男、具壽永、金勘、金壽童; 三等, 宋軼、姜渾、韓恂、李蓀、鄭眉壽、朴楗、金壽卿、尹湯老、申浚也。】 四等則五十餘人, 皆無功冒錄者也。 李堣等皆已削籍, 【堣、尹章、曺繼衡。】 則此亦削去何難? 若面對則下情可盡達也。" 上御思政殿, 臺諫全數入對。 趙光祖曰: "靖國功臣, 已至十年之久, 事多虛僞。 成希顔, 不甚庸者, 而其器不遠大。 雖有大功, 其人不足尙也。 朴元宗, 純直人也。 此等人則不爲如此也, 功臣磨鍊, 柳子光, 專主爲之, 故至此濫也。" 正言金釴曰: "子光欲錄其子弟, 而先錄其成希顔、柳順汀子弟矣。" 光祖曰: "人皆有圖富貴之心, 利源大開。 不於此時, 洞斷利源, 則孰不有富貴之心乎? 今不快從, 則後無可改之日。" 李成童曰: "士類以此功臣, 不快於心, 常懷憤鬱。 以至姻婭之類, 皆爲功臣, 此甚痛心也。" 光祖曰:"元宗、希顔, 只倡導之耳。 然其功豈不大哉?" 獻納宋好智曰: "功則大矣。 然非人力也, 天命人心, 自然歸之矣。" 司諫兪汝霖曰: "祖宗朝論功, 不如是也。" 光祖曰: "自以爲功臣, 而歃血同盟, 以告天地神明, 其爲欺罔孰甚焉? 姜渾, 至邪之人, 以文章媚世。 柳洵當反正時, 惶惑之態, 至今人皆笑之。 具壽永死有餘罪, 而猶得享功, 何也? 權鈞等皆在門外而得功。 今若未蒙快斷, 則何可中止也?" 正言李阜曰: "身爲一等功臣, 而其子弟則皆錄於四等。 於此亦可知其僞也。" 執義朴守紋曰: "今則聖學高明, 如此虛僞之事, 自可快斷。 太祖朝開國功臣, 不過三十餘人, 今之功臣, 何以至此?" 光祖曰: "希顔亦豈不知僞事哉? 亦自悔之云。" 掌令金麟孫曰: "此無狀小人柳子光之事也。 聖鑑已洞照矣, 不宜留難。" 持平趙廣佐曰: "不於此時勇斷, 則後弊至多。" 上曰: "功之有無, 未可知也, 雖小功, 旣定功而後改之, 甚不可。 所論防其利源之事, 每於經筵啓之, 此意甚善。 利源當以漸杜之, 何遽以此防利源乎?" 好智曰: "事若有誤, 則雖十易之, 未爲不可。" 上曰: "今不可追改之也。" 成童曰: "柳子光老奸之事, 人心憤鬱, 已十年矣。" 李阜曰: "其時或以賄賂, 或泣請而得者多矣。 此甚可愧。" 光祖曰: "潘佑亨, 以大司憲居功矣。 申浚等錄功, 尤爲可笑。 此事須問於洪景舟, 以有功者錄之可也。" 麟孫曰: "順汀、希顔等, 陷於子光術中矣。" 光祖曰: "宦寺參錄, 尤不可也。" 汝霖曰: "宦寺雖有微勞, 只可賞賜。 豈可錄功也?" 光祖曰: "須問于朝廷而處之。 且如金勘、柳洵、姜渾、具壽永, 皆導君淫荒, 媚諂得寵者也。 閔孝曾無狀奸詐, 當置重典, 而反加大勳, 至爲痛心。 柳泓則以順汀子, 赴鄕試參錄, 成瑮則年才十七, 而參元勳, 此尤可痛。" 承旨朴薰曰: "此乃國論久積而發, 不可遲疑也。 臣聞之, 朴元宗赴京還來, 而其時危疑, 欲以苟悅人心, 故如此論功耳。" 光祖曰: "其時李繼孟爲大司憲, 而不糾之, 其心凶暴可知。" 上不答。
- 【태백산사고본】 19책 3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574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註 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