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를 두는 문제와 어진이 천거하는 문제 및 주청사를 파직하는 일에 대한 논의
조강에 나아갔다. 《속강목(續綱目)》을 강하다가 동지사(同知事) 김안국(金安國)이 아뢰기를,
"여기에 태후(太后)와 신종(神宗)이 말한 일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규문(閨門) 안의 말이라 사관(史官)으로서는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여사(女史)162) 가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여사는 규문 안에서 임금의 거동과 언행을 모두 다 기록하므로 외인(外人)이 그 일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사책(史策)에 기록하여 놓음으로써 뒷사람이 그것을 보고 선악(善惡)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규문 안의 일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은 여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규문 안 임석(袵席)에서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어떻게 자세히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고제(古制)에 따라 여사를 두어 그로 하여금 동정(動靜)과 언위(言爲)를 기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하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장령(掌令) 기준(奇遵)은 아뢰기를,
"안국의 말이 합당합니다. 임금은 깊은 궁궐 속에 거처하므로 그 하는 일을 바깥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여사를 두어 그 선악을 기록하게 하였으므로, 비록 깊숙한 궁궐 속의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에서일지라도 감히 방과(放過)하지 못했던 것이니, 모름지기 고제에 따라 여사를 두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여자(女子)들이 모두 글을 지을 줄 알았으므로 올바른 여사를 얻어서 궁곤(宮壼)의 일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도록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글에 능한 여자가 아마도 적은 것 같으니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을 얻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매, 안국이 아뢰기를,
"여사는 반드시 글에 능해야만 될 수 있는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문자를 조금 해득할 수 있다면 규문의 일을 보는 대로 기록하여, 후왕(後王)과 후현(後賢)으로 하여금 선왕(先王)은 규문 안 혼자 있는 곳에서도 잘못하는 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하면 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권징(勸懲)되는 바가 클 것입니다. 밖에서는 좌우에 시종(侍從)·사관(史官)이 갖추 있으면서 안에는 여사(女史)가 없으니, 치도(治道)의 큰 흠절(欠節)입니다. 규문 안 임석(袵席)에서의 일에 대하여 후세의 자손들이 어떠하였는지를 모르게 하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하고, 시강관(侍講官) 이청(李淸)은 아뢰기를,
"세속의 이른바 언문(諺文)으로 기록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어찌 문자(文字)163) 로만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여사의 직임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기록하는 것이니, 반드시 마음이 올바른 여자를 얻는 뒤에라야 가하다. 뿐만 아니라 사관(史官)도 모름지기 정직(正直)한 사람을 가려야 한다. 사필(史筆)을 잡는 것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매, 이청이 아뢰기를,
"사관은 여사와 다릅니다. 사관은 공의(公議)를 유지(維持), 포폄(褒貶)을 명백하게 하여 만세(萬世)에 보이는 것이 직무이고, 여사는 규중 안에서의 임금의 일상 생활을 기록하는 것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진이를 천거(薦擧)하는 것이 대신의 직임인데, 근일 대신들이 어진이 천거하는 도리에 있어 미진한 것 같다."
하매, 안국(安國)이 아뢰기를,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은 임금에게 있고 어진이를 천거하는 책임은 대신에게 있으므로, 재상이 올바른 적임자여서 현능(賢能)한 사람을 다 천거 하였다면 임금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서도 지치(至治)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근일 천거별시(薦擧別試)에 대하여 상하가 모두 인재(人材) 많이 얻은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만, 낙방한 사람도 모두 쓸만한 사람들입니다. 시책(試策)하여 취사(取捨)하는 이유는 모두다 뽑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혹 재기(才器)는 우수하지만 문학(文學)에는 부족한 자가 있기도 한 것이니, 비록 하제(下弟)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이조(吏曹)로 하여금 그 재행(才行)이나 연치(年齒)에 따라 서용하게 함으로써 인재를 잃었다는 탄식이 없도록 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 대간이 남곤(南袞) 등의 상전(賞典)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니, 영사 안당이 아뢰기를,
"남곤·이자·한충(韓忠)은 애당초 모두 뽑아서 보낸 사람들이니 어찌 성의를 다하지 않았겠습니까? 10개월 간을 머물렀으니 반드시 익히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상전을 거행하지 않았다면 모르겠거니와 이제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는데도 또 환수하게 한다면 조정의 대체(大體)에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안국은 아뢰기를,
"이와 같은 일에 관하여는 비록 황제의 준허(准許)를 받았다 할지라도 신하된 마음에 어찌 상(賞)을 바랄 리가 있겠습니까?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된 것이므로 상께서 기뻐하시어 상을 내린 것이니, 이는 조정(朝廷)이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이제 공의(公議)에 따라 또 환수하라 하신다면, 임금의 명(命)은 이와 같이 구차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일164) 을 다 준허받았다면 상을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상줄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대간이 공서린(孔瑞麟)·이응(李膺)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69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52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신분(身分) / 어문학-어학(語學)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사(宗社) / 외교-명(明)
- [註 162]여사(女史) : 천관(天官) 소속으로 왕후(王后)의 예(禮)를 맡고 규문(閨門) 안의 일을 기록하는 직임이다. 《주례(周禮)》 천관(天官) 여사(女史).
- [註 163]
문자(文字) : 한문(漢文).- [註 164]
두 가지 일 : 종계(宗系)와 사왕(四王)의 일.○乙酉/御朝講, 講《續綱目》。 同知事金安國曰: "此記太后與神宗言論事, 甚詳。 此乃闔門之言, 非史官所得記, 必出於女史之筆。 自古女史, 於閨門之內, 人君擧動言行, 皆悉書之, 故外人知之, 而書之於策, 後人見之, 而知其善惡。 國朝之事, 未詳得之, 閨門之內, 袵席之間, 一動一靜, 豈能詳記之乎? 臣意可依古制, 置女史, 使得記動靜言爲可也。" 掌令奇遵曰: "安國之言, 當矣。 人主處深宮之中, 其所爲之事, 外人所不能知。 必有女史, 以書其善惡, 故雖深居九重之中, 幽獨得肆之地, 而不敢放過。 須依古置女史可也。" 上曰: "古者女子, 皆能屬文, 故女史得其人, 而宮壼之事, 詳記無遺, 今則能文之女蓋寡, 似不得易爲也。" 安國曰: "女史不必能文, 然後爲之。 若稍解文字, 則閨門之事, 隨所見以記, 使後王、後賢, 知先生之於閨門之內, 幽獨之中, 無所闕失。 如此則其爲勸懲大矣。 外則左右侍從、史官俱在, 而內闕女史, 大欠於治道。 閨門袵席間事, 後世子孫, 不知其何如, 甚不可也。" 侍講官李淸曰: "俗所謂諺書不妨, 豈必以文字爲哉?" 上曰: "女史之任, 記善惡之事。 必得心正之女, 然後可也。 非特此也, 至於史官, 要須擇正直之人, 可也。 操史筆者, 類非人人所得爲也。" 李淸曰: "史官與女史有異。 史官持公議明褒貶, 以示萬世; 女史則只記其閨闥之中人主日用所爲之事而已。" 上曰: "薦賢, 大臣之職也。 近日大臣薦賢之道, 猶未盡焉。" 安國曰: "致治之本, 在於人主, 而薦賢之責, 在於大臣。 相得其人而盡擧賢能, 則人主垂拱仰成而已。 近日薦擧別試, 上下皆喜多得人材, 然其下第者, 又皆可用之人。 其所以試策, 而取舍之者。 不可悉取之故也。 然人或優於才器, 而短於文學者, 雖下第之人, 令吏曹隨其才行年齒而用之, 使無遺才之嘆可也。" 臺諫請還收南袞等賞典, 領事安瑭曰: "南袞、李耔、韓忠, 初皆擇遣, 豈不盡誠? 留至十朔, 凡事必熟計之矣。 初不擧賞典則可也, 今則已有成命, 而又令還收, 於朝廷大體, 未知爲何如也。" 安國曰: "如此之事, 雖得請, 在臣子之心, 豈有要賞之理乎? 事關宗社, 自上有喜而賞之耳。 此非所以議於朝廷也。 今因公議, 又令收之, 人主命令, 不可如此苟且也。 然兩事皆得請, 則可賞, 不然則不必賞也。" 臺諫啓孔瑞麟、李膺等事, 不允。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69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52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신분(身分) / 어문학-어학(語學)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사(宗社) / 외교-명(明)
- [註 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