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사를 다시 보내는 일, 관리 임명때의 선제, 영흥 판관의 혁파 등 여러 가지를 의논
영의정 정광필·좌의정 신용개·우의정 안당·예조 판서 이계맹·좌참찬 이장곤·호조 판서 고형산·공조 판서 김극핍·우참찬 김안국·이조 판서 신상·예조 참판 권벌·참의 박호 등이 빈청(賓廳)에 모여, 주청사(奏請使)를 다시 보내는 일 및 관리를 임명할 때의 선제(宣制), 문화(文化)·봉산(鳳山)·재령(載寧) 등의 고을의 읍을 이배(移排)하는 일,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가족을 데리고 가는 일, 영흥 판관(永興判官)을 혁파하는 일, 마전(麻田)·적성(積城)을 합병(合倂)하는 일에 대한 편부(便否)를 의논하였다. 광필 등에게 전교하기를,
"내 뜻은 사왕(四王)에 대한 일은 비록 준허를 받지 못하였으나 종계(宗系)에 대한 일은 이미 칙지(勅旨)가 있었으니, 이제 준허를 받은 일에 대하여 사은할 것이요 반드시 사왕에 대한 일이 개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아울러 사례할 것은 없겠다. 먼저 종계의 일에 대하여 사은하고 곧 주청사를 보내어 조정(朝廷)101) 에 말하기를 ‘종계의 일은 이미 준허를 받았으나 사왕을 시해(弑害)하였다는 일은 아직도 예대로 고치지 않았으니, 기필코 준허를 받아야겠다.’ 하는 것이 어떠한가? 사은표(謝恩表)의 내용도 익히 의논하여야 한다. 이는 중대한 일이니 부경(赴京)하는 사신이 비록 번거로울 듯하나 사은사(謝恩使)에게 주청(奏請)을 겸하게 할 수는 없다."
하매, 광필 등이 아뢰기를,
"칙서(勅書)에 실려 있는 것을 본 사람은 모두 미진하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초 예부(禮部)에 들어가 주청할 때에 사왕의 일도 아울러 들였는데도 칙서에는 없습니다. 이제 다시 주청하여 억울함을 씻으려 하시는 것은 지극한 효성이기는 하나, 조종(祖宗)께서 혁대(革代)102) 하는 즈음에 미진한 일이 없지 않은데, 억지로 밝히려 하면 말이 궁하고 논리가 정연하지 못하게 됩니다. 처음 주청사(奏請使)를 보낼 때에 미처 의논에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은 혹 주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도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입을 모아 ‘다시 주청해서는 안 된다.’ 합니다. 그러니 표사(表辭)는 종계 변무(宗系辨誣) 등의 일로만 범연히 사은하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예부가 복주(覆奏)할 적에 비록 두 가지 일을 아울러 말하였으나 황제(皇帝)는 한 가지 일만 준허하였으니, 범연히 사은할 수 없다. 처음에 주청하지 않았다면 모르거니와 이미 두 가지 일을 거론하였는데도 한 가지 일만 준허를 얻었으니, 이제 다시 주청하지 않고 그대로 아울러 사은하는 것은 성심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사신을 보내어 다시 주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매, 광필 등이 또 아뢰기를,
"칙서를 지으면서 사왕에 대한 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에 대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주청한다 하여도 반드시 외국(外國)의 말을 좇아 다시 칙지(勅旨)를 내리지는 않을 것이며, 또 조종의 일이 어찌 다 선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거절하고 준허하지 않는다면 또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표사(表辭)에 대하여는 비록 사은할 뜻이 없으시더라도 이미 예부(禮部)의 복본(覆本)이 있으니, 미사(微辭)103) 로 사은해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조정이 의논한 바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나도 감히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겠으나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다. 만약 마땅함을 얻지 못하면 일세(一世)에 의논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후세의 기롱을 받게 될 것이다. 대신의 뜻은 ‘다시 주청하였다가 준허를 얻지 못하면 뒷일이 곤란하다.’ 하지만, 중조(中朝)에서 ‘너의 선조(先祖)가 사왕(四王)을 시해하였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가 정성을 다하여 개정하여 주기를 청한다면 황제가 어찌 ‘너의 선조가 참으로 사왕을 시해하였다.’ 하겠는가? ‘조종(祖宗)께서 정한 조장(條章)이니 개정하기 어렵다.’ 하는 데 불과할 것이다."
하매, 광필 등이 아뢰기를,
"이제 만약 다시 청하였다가 우사(優辭)로 답한다면 모르거니와, 만일 불미(不美)스런 말이 있게 된다면 이는 스스로 조종(祖宗)의 일을 폭로하는 것이니, 매우 불가합니다. 혁명(革命)할 때에 미진한 일이 있는데도 억지로 변명하여 주청(奏請)하는 것은, 상국(上國)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 또한 불경(不敬)이 됩니다. 태종(太宗)조(祖) 때에도 마땅히 두 가지 일을 아울러 주청해야 했을 것이로되, 종계(宗系)에 대한 일만 주청한 것은 반드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표사(表辭)에 종계 등의 일을 개정하게 한 데 대하여 범칭(泛稱)하여 사은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태종조에서 발명(發明)하지 않은 뜻에 대하여는 내가 미처 모르겠거니와, 대신들은 이미 나의 뜻을 알았고 나도 대신의 뜻을 알았다."
하매, 광필 등이 의논드리기를,
"영흥부(永興府)에는 옥송(獄松)이 번거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고을 백성이 혁파하자고 청하는 데 따라 혁파하는 것은 사체에 합당하지 못하니 거행하지 마소서. 만약 혁파하여야 하겠으면 감사(監司)가 반드시 아뢸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선제(宣制)는 조종조에서 하지 않던 것이니, 행하는 것이 무익합니다."
하고, 광필·용개·장곤·안국·신상은 의논드리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일에 관하여는 법전(法典)에 실려 있으며, 행하여 온 지도 이미 오래니 가벼이 고칠 수 없습니다. 단 영노비(營奴婢)가 적지 않은데 부노비(府奴婢)를 부리는 것은 과연 미편합니다. 이 뒤로는 영변(寧邊) 본영(本營) 및 창주(昌州) 행영(行營)에 분방(分防)할 때에, 아속(衙屬)·우후(虞候)·평사(評事)·군관(軍官)·심약(審藥)·영리(營吏)·육방(六房) 등 모든 대행인(帶行人)에 대한 지공(支供)은, 영노비를 번(番)을 나누어 부리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봉산(鳳山)·재령(載寧)·문화(文化) 세 읍(邑)에 여질(癘疾)이 마구 번져 읍인(邑人)만 요사(夭死)할 뿐이 아니라 수령(守令)도 많이 사망하는지라 구제할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으니, 본도(本道) 관찰사가 아뢴 바에 따라 봉산은 속초두등(束草豆等) 【지명(地名).】 으로, 재령은 한정리(閑井里)로, 문화는 간지천(看之川) 등지로 풍년들기를 기다려 읍을 옮기는 것이 어떠합니까? 또 이제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의 계본(啓本)을 보건대, 마전(麻田)·적성(積城) 두 읍을 합병하여 이배(移排)하면 소복(蘇復)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나, 단 연혁(沿革)에 관한 일이 중대하니 가볍게 의논할 것이 아닙니다. 적성은 지역이 넓고도 비옥하므로 역역(力役)을 늦추어 주면 소복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으나, 마전은 잔폐가 매우 극심하여 거의 지탱할 수 없으니, 우선 화진리(禾津里)의 50여 호(戶)가 사는 지역과 민호(民戶)를 할급(割給)하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단 옮겨 예속시킨 백성이 소읍(小邑)의 역사(役事)를 꺼려 몰래 다른 지경(地境)으로 옮겨가는 자가 혹 있을까 염려되니, 관찰사로 하여금 엄하게 금단(禁斷)하게 하는 한편 존휼(存恤)하여 편안히 업에 종사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모두 따랐다. 광필 등이 또 아뢰기를,
"지금 사은표(謝恩表)는 비록 지을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하나, 최숙생(崔淑生)은 젊어서부터 이 일에 정통하였으니 숙생으로 하여금 짓게 하소서. 그런데 직(職)이 없는 자를 패소(牌召)할 수는 없으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오늘 의논한 바의 뜻을 효유하고 짓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52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101]
○領議政鄭光弼、左議政申用漑、右議政安瑭、禮曹判書李繼孟、左參贊李長坤、戶曹判書高荊山、工曹判書金克愊、右參贊金安國、吏曹判書申鏛、禮曹參判權橃、參議朴壕等會賓廳, 議更遣奏請使事及命官時宣制, 文化、鳳山、載寧等官移排, 平安兵使挈家, 永興判官革罷, 麻田、積城合幷便否。 傳于光弼等曰: "予意四王事, 雖未蒙允, 宗系一事, 已有勑旨。 今但謝蒙準事而已, 不必待改四王事, 然後竝謝之也。 先謝宗系之事, 卽遣奏請使, 言于朝廷曰: ‘宗系一事, 旣蒙準矣, 弑四王事, 尙依舊不改, 將以得請爲期’ 云, 何如? 謝恩表辭, 亦可熟議。 此乃大事, 赴京使价, 雖似煩擾, 不可以謝恩使, 兼奏請也。" 光弼等啓曰: "見勑書所載, 則人皆有未盡之心。 當初禮部入奏時, 竝入四王事, 而勑書則無之。 今欲更奏洗雪, 孝之至也, 然祖宗革代之際, 不無未盡之事, 强欲辨之, 則辭屈而理不直矣。 初遣奏請時, 未及參議之人, 或謂其不可不奏, 而今則同辭, 以謂不可更奏云。 表辭則當以宗系辨誣等事, 泛然以謝可也。" 傳曰: "禮部覆奏, 雖竝稱兩事, 而皇帝則只許一事, 不可泛然謝之也。 初若不奏則已, 旣擧二事, 而只得準一事, 今不更請, 又從而竝謝, 似不以誠也。 予意以爲不可不遣使更請也。" 光弼等又啓曰: "製勑而不及四王事者, 必有其意。 今雖更請, 必不從外國之言, 而復降勑旨也。 且祖宗事, 豈能盡善? 假令絶之而不許, 則又將何辭? 表辭則雖無謝旨, 旣有禮部覆本, 可以微辭謝之也。" 傳曰: "朝廷所議, 豈偶然乎? 予亦不敢自斷, 然事甚重大。 若不得其宜, 則非徒有議於一世, 抑亦取譏於後世也。 大臣之意以爲更請而不得, 則後事爲難。 中朝雖曰: ‘爾祖乃弑四王, 我國當以誠請改’, 皇帝亦豈必曰: ‘爾祖眞弑四王’ 乎? 不過曰: ‘祖宗所定條章, 難可改之’ 而已。" 光弼等啓曰: "今若更請, 而優辭以答則已, 如有不美之辭, 則是自暴白祖宗之事, 大不可也。 革命之時, 有所未盡, 而强辨奏請, 其於事上之道, 亦不敬矣。 在太宗朝, 宜若竝奏兩事, 而只請宗系一事者, 必有其意也。 表辭則泛稱改正宗系等事, 而謝之何如?" 傳曰: "太宗朝不發明之意, 予未及知, 大臣已知予意, 而予亦知大臣之意也。" 光弼等議啓曰: "永興府獄訟, 則似不煩擾, 然因其邑百姓之請革而革之, 不合於事體。 請勿擧行。 若可以革, 則監司必將啓之矣。" 又啓曰: "宣制, 祖宗所不爲, 行之無益。" 光弼、用漑、長坤、安國、申鏛議曰: "平安兵使 挈家赴任, 載在法典, 行之已久, 今不可輕改。 但營奴婢, 不爲不多, 而役及府奴婢, 果爲未便。 今後在寧邊本營及昌州行營分防時, 衙屬、虞候、評事、軍官、審藥、營吏、六房等, 一應帶行人支供, 皆以營奴婢, 分番使役何如? 鳳山、載寧、文化三邑, 疾癘興行, 非但邑人多致夭扎, 守令亦多死亡, 不可不爲救之之方, 依本道觀察使所啓, 鳳山則束草豆等, 【地名。】 載寧則閑井里, 文化則看之川等地, 待豐年移邑何如? 且今觀京畿觀察使啓本, 麻田、積城兩邑, 合倂移排, 似可蘇復。 但沿革事重, 未可輕議。 積城地廣且饒, 寬其力役, 則蘇復可冀, 麻田殘弊尤甚, 幾不可支。 姑以禾津里五十餘戶所居之地, 竝民戶割給, 以紓民力爲當。 但慮移屬之民, 憚於小邑之役, 潛移他境者, 間或有之, 令觀察使嚴加禁斷。 且加存恤安業何如?" 悉從之。 光弼等又啓曰: "今之謝恩表, 雖有可製者, 然崔淑生, 自少精於其業, 宜使淑生製之, 而無職者, 不可牌召。 遣史官諭以今日所議之意, 令製之何如?" 傳曰: "可。"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52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