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원이 부수찬 윤구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니 체직시키를 청하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간원이 또 아뢰기를,
"부수찬(副修撰) 윤구(尹衢)는 처음 시종의 직에 제수될 때 사람들이 자못 불만스럽게 여겼으나, 연소하므로 행동을 고치기를 바라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하는 짓이 대부분 바르지 못하고 허물을 고치려는 실상도 없으니 체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에 앞서 정승 자리가 비자, 상이 여러 신하들의 바람을 좇아 안당(安瑭)을 정승으로 삼고자 묻자, 영상 정광필(鄭光弼)과 좌상(左相) 신용개(申用漑)가 대답하기를 싫어하였다. 상이 더욱 마음을 기울여 특별히 이상(二相)에 초배(超拜)하려 하자 이에 사람들은 상의 뜻 둔 바를 알고 기뻐하였다. 얼마 후 상이 정승을 제배하려 할 때 용개는 마침 병으로 집에 있었기 때문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다시 그 의논을 자문토록 하였다. 대개 용개의 생각은, 본래 위차(位次)의 순서에 구애되고 또 정승의 재질로 안당을 깊이 허여하지 않아서 그가 답한 것은 김전(金詮)·이계맹(李繼孟)·남곤(南袞)을 중하게 여겼다. 윤구(尹衢)가 당시 주서(注書)로서 수의(收議)하고 돌아왔는데, 안당이 평소에 촉망(屬望)을 받는다고 믿고는 뜻을 맞추어 변사(變辭)하여 도리어 용개가 당(瑭)을 중히 여긴다고 아뢰었는데, 상과 용개는 실상 그런 줄을 몰랐다. 당시 구수복(具壽福)도 주서로서 그날 일을 적으려고 문의초(問議草)를 찾아 쓰려 하니 구가 듣지 않고 숨겼다. 그러나 봉교(奉敎) 유희령(柳希齡)이 무슨 일로 용개의 집에 갔다가 마침 구와 함께 그때의 일을 자세히 들었었는데, 변사하였다는 것을 듣고서는 통분해 하여 그 일을 하번(下番) 검열(檢閱) 심사손(沈思遜)에게 부탁하자, 사손은 그 시말을 대강 적어 두었다. 당시 채세영(蔡世英)도 검열이었는데, 그 말을 구에게 누설하여 구는 이 때문에 사손이 적어두었다는 것을 알고는 심히 원망하였다. 일찍이 사손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동료가 그대의 기사(記事)를 황당하다고 하니, 그대는 확실히 수상한 사람이다.’ 하여 은연히 꾸짖으면서 기록한 것을 몰래 고치려는 것 같았다. 하루는 둘이서 같이 은대(銀臺)에서 숙직하는데, 밤에 중금(中禁)의 가동(歌童)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서로 즐겼다. 사손이 장난삼아 묻기를 ‘내수(內竪) 가운데 누가 쓸 만한가?’ 하니, 가동이 답하기를 ‘오직 박 영공(朴令公) 뿐입니다.’ 하였는데, 대개 명을 전하는 환자(宦者) 박승은(朴承恩)을 가리킨 것이다. 사손이 또 묻기를 ‘어찌하여 박 영공을 어질다 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무슨 일이든 가장 어집니다.’ 하였다. 이때 구가 자는 체하다가 갑자기 일어나 꾸짖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환시(宦侍)를 영공이라 칭하는가?’ 하니, 사손이 말하기를 ‘내가 먼저 스스로 칭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가동의 말을 따라 그랬을 뿐이오.’ 하였다. 그후에 구가 다른 사람에게 헐뜯기를 ‘사손은 박승은에게 아부하느라 입궐할 때면 매양 박 영공의 안부를 사알(司謁)에게 묻는다.’ 하여 이로부터 듣는 자는 사손을 비루하게 여겼다.
얼마 안 있다가 수복은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그 뒤에 구가 본직에 제수되었는데, 식자들은 구가 불행하다 하고 결국 출서(出署)하게 되었으나 사람들은 대부분 괴이하게 여겼다. 오래 있다가 사손이 또한 주서(注書)에 제수되자, 대사간 박호(朴壕)·정언 권운(權雲) 등이 구의 이간질인 줄 모르고 원(院)에서 의논하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병필(秉筆)하는 자리에도 합당하지 않았는데, 지금 또 어찌 주서가 되겠는가.’ 하면서 서로 월서(越署)006) 하려 하였다. 사손이 듣고 곧 구가 거짓 헐뜯음을 알고 틈을 만들고 원한을 품어서 스스로 해명하는 데에 급하여, 그 경위를 심달원(沈達源)과 그의 친우에게 말하여 해명하였다. 달원은 즉시 제배들에게 전파하여 수일 사이에 사림들은 다시 구의 음사하고 교활한 상황을 알고는 심히 미워하기를 마지않았으나 도리어 미안한 점이 많이 있음을 염려하였다. 이제 와서 간원(諫院)이 탄핵하였는데, 당시 이조 좌랑 이충건(李忠楗)·이희민(李希閔) 등은 바로 외교수(外敎授)를 제수시키자고까지 의논하였으나, 어떤 이는 시종(侍從)에 있는 자를 이렇게 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그 의논은 중지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정원일기(政院日記)》에는 복상(卜相)의 의논은 없었다고 되어 있다.
또 사신은 논한다. 사가(史家)의 일필(一筆)이란 생살 여탈(生殺與奪)의 권리가 있으므로 예로부터 중시하여 비록 인주(人主)의 위엄으로도 오히려 펴 볼 수 없는데, 누설과 같은 일은 그 죄가 법률에 실려 있다. 지금 채세영은 사관(史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비록 구에게 아부하는 마음은 없더라도 사국(史局)의 중요한 일을 누설하여 두 사람 사이에 원수같이 보는 틈을 조장하였으니, 어떻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대개 그 사람됨이 마음에는 줏대가 없고 용렬하고 경박하여 추기(樞機)를 조심하지 않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또 옛날 벗을 사귀는 데는 반드시 서로 취할 만한 도(道)가 있은 연후에 벗으로 삼고, 한번 벗으로 허여한 다음에는 비록 절교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서로 왕래는 하여 충후(忠厚)한 뜻을 붙여두는 것이다. 그런데 사손이 처음 윤구를 사귄 것은 과연 어떤 소견이었기에 정이 깊기가 단술 같았을까. 이에 이르러서 비록 잠시 윤구가 잘못되었더라도 분명 밝은 공론(公論)이 있어 가리울 수가 없는데, 서로 반목하여 갑자기 헐뜯기까지 하는가. 벗을 가려 잘 대할 줄 아는 자는 오직 군자뿐임을 알겠다. 구수복(具壽福)은 정언(正言)에 있으면서 평소에 윤구가 사람됨이 부드러운 척하면서 음흉하여 양명(陽明)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았고 또 그 실상을 자기만큼 아는 자가 없었다면 마땅히 작은 죄라도 탄핵해 내쫓아 옥당(玉堂)과 같은 중한 자리를 맑고 엄하게 하여야 하는데 역시 무슨 소견으로 출서(出署)케 하여 이런 사람으로 그런 자리에 섞이게 하고 이런 논의가 있게 하였을까. 의논하는 자는 구가 변사(變辭)하여 회계(回啓)하였더라도 역시 인망(人望) 때문이었고 아무 뜻이 없는 데에서 나온만큼 하자가 될 것은 없다 하였다. 대체로 왕명을 받들고 왕래하는 사이에 마땅히 그 뜻을 임금과 신하가 서로 상대하는 것처럼 하여 문답해야 옳거늘 어찌 그 사이에 조그마한 사사로운 뜻이라도 용납될 수 있겠는가. 구로 하여금 난세(亂世)에 처하게 한다면 필시 아첨하는 데에 예민할 것이니, 의논하는 자의 말은 정론(正論)이 아니다. 【구의 사람됨은 기질이 좁고 또 큰 도리에 어두워 시배(時輩)들은 음험하고 간사하다고 지목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501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註 006]월서(越署) : 서경(署經)에 통과되지 못함을 말한다. 당하관(堂下官)을 임용할 때 이조에서 피임자의 이력 등을 양사(兩司)에 내면 양사는 이를 심사, 결점이 없으면 서경 즉 서명하고 결점이 있으면 서명하지 않는다.
○臺諫啓前事。 諫院又啓: "副修撰尹衢, 初授侍從之職, 頗有不滿之意。 但以年少, 望其改行而存之, 近日所爲, 率多不正, 而無改過之實。 請遞。 不允。"
【史臣曰: "先是相位有闕, 上從群望, 欲以安瑭爲相而問之, 領相鄭光弼、左相申用漑不悅其對。 上愈爲傾意, 特超拜二相, 於是人知其上意所注而喜焉。 旣而上將欲拜相時, 用漑適以疾在私第, 命遣史官, 更咨其議。 蓋用漑之意, 本拘位次先後, 且不以相才, 深許安瑭, 其所答, 歸重於金詮、李繼孟、南袞, 而尹衢, 時以注書, 收議而返, 以爲安瑭, 素自屬望, 迎意變辭, 反以瑭歸重而啓之, 上與用漑,實不知其然。 時具壽福, 亦以注書, 當記其日事, 索問議草而欲書, 則衢不許而匿之。 然奉敎柳希齡, 曾以事偕衢, 詳聽於用漑第, 及是聞其變辭, 甚痛憤, 囑其事於下番檢閱沈思遜, 思遜粗記其始終。 時, 蔡世英亦爲檢閱, 漏其辭於衢, 衢因此知思遜所記, 甚銜之, 嘗語思遜曰:‘汝之同僚, 以汝記事爲荒唐, 汝固殊常人也。’ 隱然托詆, 似欲密改所記。 一日相與同直銀臺, 夜召中禁歌童, 飮酒相娛, 思遜戲問曰: ‘內竪中孰爲可人?’ 童曰: ‘惟朴令公而已。’ 蓋指傳命宦者朴承恩也。 思遜又問曰: ‘何謂朴令公賢?’ 答曰: ‘凡事最賢。’ 時衢方假寐, 遽起而罵之曰: ‘汝何敢稱宦寺爲令公?’ 思遜曰: ‘吾不先自稱道, 因童所言而然耳。’ 其後衢毁於人曰: ‘思遜阿附朴承恩, 入闕, 每問朴令公安否於司謁云。’ 由是聞者冷鄙之。 未幾, 壽福拜正言, 其後衢授本職, 識者以衢爲不幸, 終得出署, 人多怪之。 久之, 思遜又除注書, 大司諫朴壕、正言權雲等, 不知衢行間, 議於院中曰: ‘此人曾不合秉筆之地, 今又何爲注書?’ 相與欲越署, 思遜聞之, 乃知衢所讒, 構隙怨憤, 急於自解, 語其由於沈達源及他友以明之, 達源卽播於儕輩間。 數日之中, 士林復知衢淫邪狡獪之狀, 痛疾不已, 然猶慮其有未安, 多矣, 至是諫院劾之, 時吏曹佐郞李忠楗、李希閔等, 議欲直除外敎授, 或以爲: ‘在侍從者, 不可如是’, 其議遂寢。 至今《政院日記》, 無卜相議云。"】
【史臣曰: "史家一筆, 任生殺與奪之權, 自古重之, 雖以人主之威, 尙不得開見, 而如有漏洩, 罪著於三尺。 今蔡世英, 得處史官, 雖無比衢之心, 然漏史局重事, 萌兩家讎隙, 烏得辭其罪? 蓋其爲人, 中無所主, 庸妄輕薄, 不愼樞機之致也。 且古之取友者, 必有所相取之道, 然後友之, 一許以友, 雖有必可絶之由, 令其可交, 以寓忠厚之意焉。 思遜之取結尹衢也, 果何所見, 而情深若醴耶? 及至於是, 雖或暫屈, 當有昭昭之公論, 理不可久掩, 而纔相反眼, 遽至踶嚙? 知取友而善待者, 其唯君子乎! 具壽福, 身處正言, 素知爲人陰柔, 非陽物, 而詳其實者, 又莫如己, 則當以微罪彈去, 使玉堂重地, 淸嚴可也, 亦何所見而出署, 致斯人間廁於其地, 而有是論也? 議者或以爲衢雖變辭回啓, 亦因人望, 而出於無情, 不足爲訾。 夫將命往復之間, 當使其意, 如君臣相對, 而問答可也, 豈容一毫私意於其間哉? 使衢處亂世, 其必銳於侫矣, 議者之言, 非正論也。" 【衢之爲人, 氣性則隘狹, 且暗於大理, 時輩以淫邪目之。"】 】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501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