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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34권, 중종 13년 7월 12일 기유 3번째기사 1518년 명 정덕(正德) 13년

찬집청 당상 신용개·김전·남곤 등이 찬수한 《속동문선》을 올리다

찬집청 당상(撰集廳堂上) 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남곤(南袞) 등이 찬수(撰修)한 《속동문선(續東文選)》391) 을 올렸는데, 그 진전(進箋)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뜻을 잇고 신명(神明)의 도리를 잘 헤아리니 성주(聖主)께서 광명한 길을 열었고, 부화(浮華)함을 물리치고 아담함을 숭상하니 많은 선비들이 성리(性理)의 관문을 엿보았다. 제가(諸家)의 문장 정종(文章正宗)을 모아서 태평 세대의 문교(文敎)를 빛내도다.

생각하건대 문장의 근본은 천지(天地)의 시초에서부터 비롯되어 광대하고 혼륜(混淪)392) 하니 이미 정수(精粹)한 기운을 길렀고, 움직여 발산하니 어찌 밝게 나타남을 숨기랴. 선명(善鳴)393) 에 의탁하여 나타난 것이 사화(辭華)394) 가 되고 예전 서적(書籍)에 실어서 후세에 전하도다. 시운(時運)에 따라 혹 다르나 도의(道義)와 배합하여 길이 흘러간다. 순임금 조정의 갱재가(賡載歌)395) 는 태평스런 치세(治世)를 징험할 수 있고, 낙수(洛水) 물굽이에서 원망하며 지은 오자가(五子歌)396) 또한 난망(亂亡)의 시초를 보겠도다. 대개 권선 징악(勸善懲惡)에 권병(權柄)이 있는 것이니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감발(感發)하였는가? 정교(政敎)는 이로 말미암아 펴지고 예악(禮樂)은 여기서 밝아지도다. 대아(大雅)397) 가 행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니, 잡스러운 글이 다투어 일어나도다. 문장은 진한(秦漢) 때까지도 오히려 종횡가(縱橫家)의 습속을 답습하고,398) 시(詩)는 제(齊)·양(梁) 때에 이르러 이미 경박하고 부화(浮華)한 형태를 이루었도다.399) 화조(華藻)400) 는 경술(經述)에 근본하지 않고 문사(文詞)는 도리어 배우(俳優)와 같도다.

우리 조선국은 옛부터 예의(禮義)의 교화를 입었는데, 당초에는 어두운 길을 헤매었으나 뒤에 와서는 점점 높은 경지에 옮겨갔도다. 고려 운기가 다시 빛남에 미쳐 애연(藹然)히 문풍(文風)이 크게 변하였으며, 분란(紛亂)을 푸는 것이 대부분 사명(詞命)에 힘입었고 나라를 빛냄도 풍요(風謠)에 말미암았도다. 5백 년 고려의 왕기(王氣)가 이미 사그라지고 1천 년의 문운(文運)이 크게 진작하도다. 시대가 태평하니 조정에는 다 훌륭한 인재이고, 영재(英材)를 교육하니 학교에는 다 훌륭한 선비로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께서는 학문을 늘 생각하시고 도(道)는 천지를 미봉(彌縫)하는 데 합치하였습니다. 영재(英材)들을 망라하니 당 태종(唐太宗)의 등영주(登瀛州) 선발401) 보다 훌륭하고, 신한(宸翰)이 빛나니 한 무제(漢武帝)의 횡분사(橫汾詞)402) 를 졸렬한 글로 여기도다. 돌아보건대 역대의 풍소(風騷)403) 는 실로 도(道)를 전하는 우익(羽翼)이라, 동방의 문장 중에 좋은 것을 가져다가 사신(詞臣)404) 에게 명하여 부문을 나누셨도다. 선철(先哲)들 박은 책이 환히 세상에 나왔고, 후생의 모범이 갖추어졌도다. 그 뒤 40년이 지났으매 작자(作者)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도다. 옹용(雍容)405) 히 끌어올려서 일세를 아송(雅頌)406) 의 아름다움으로 이루었고, 온유(溫柔) 돈후(敦厚)하여 삼대(三代) 때 제작(制作)의 풍도(風度)407) 를 따랐도다. 폐조(廢朝)에서 쇠퇴하였으나 오도(吾道)408) 가 없어지지는 않았도다. 정신은 실로 노(魯)나라를 들름으로 해서 더 증가하였고,409) 호걸은 주 문왕(周文王)을 만남으로 해서 많이 일어났도다.410)

지금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성인의 영역에 마음을 두시고 도(道)의 맥(脈)을 손수 북돋우셨도다. 시서(詩書)가 다시 나오며 진갱(秦坑)에서 성한 불길을 구하였고,411) 금슬(琴瑟)이 다시 벌어지매 연곡(燕谷)에서 옥률(玉律)을 조화하였도다.412) 이를 두고 ‘도가 장차 행해지리라.’고 할 수 있으니, 어느 누가 ‘문(文)이 이에 있지 않느냐?’413) 고 하라. 풍아(風雅)414) 는 바야흐로 창성한 시기에 일어나고, 단확(丹雘)415) 은 마땅히 전인(前人)의 공업보다 더 빛나리로다. 이에 성묘(成廟)의 유의(遺意)를 조술(祖述)하여 문선(文選)의 뒤를 잇게 하도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자질로 외람되이 융숭한 부탁을 받아, 제가(諸家)의 난고(亂藁)를 펼쳐 보고 전의 문선(文選)을 따라 더 편수하도다. 매양 정선(精選)하려는 성의는 간절하였으나 오히려 좋은 문장을 빠뜨릴까 염려하였도다. 대롱 구멍으로 표범의 일부분을 엿보는 격이고, 태양 아래에서 구름의 빛깔을 식별하지 못하는 격이라, 옛글을 탐구하는 큰 재간이 없고 작은 식견만으로 세상에 크게 드러내지 못함이 부끄럽도다. 애오라지 좋은 문장을 뽑아서 한번 임금님께 바치도다. 그 중에 우수한 것을 선발하여 능력껏 성의를 다하였으나, 글의 일부분만 발췌하였으니 어찌 본서(本書)의 참뜻을 구하는 큰 기대에 부응하랴." 【찬성 최숙생(崔淑生)이 지은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34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461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어문학-문학(文學)

  • [註 391]
    《속동문선(續東文選)》 : 성종(成宗) 이후의 시문(詩文)을 모아 엮은 책인데 21권이다. 《동문선(東文選)》은 성종의 명을 받아, 서거정(徐居正)이 신라로부터 조선 성종조에 이르기까지의 시문을 모아 1백 30권으로 엮었다. 성종 9년(1478)에 출간하였다. 그 뒤 40년 만인 중종 13년(1518)에 이 《속동문선》을 편찬 출간하였다.
  • [註 392]
    혼륜(混淪) : 원기가 나누어 지지 않은 상태.
  • [註 393]
    선명(善鳴) :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맹동야(孟東野)를 전송하는 서문’에서 나온 말이다. 대범 일체의 물체는 불평스러움이 있으면 우는 것 즉 소리를 나타내게 마련인데, 음악은 팔음(八音)을 빌어서, 하늘은 사시(四時)를 빌어서, 문사(文辭)는 사람을 빌어서 울게 된다. 예를 들면 맹자(孟子)나 순자(荀子) 같은 이는 도(道)로, 양주(楊朱)나 소진(蘇秦) 등은 술책으로, 사마천(司馬遷)·양웅(揚雄) 등은 문장으로, 두보(杜甫)나 맹동야(孟東野) 등은 시로써 각기 능한 바대로 소리를 나타낸 것을 잘 우는 것[善鳴]에 비하여 서술하였다.
  • [註 394]
    사화(辭華) : 화려하게 수식한 문장.
  • [註 395]
    갱재가(賡載歌) : 순(舜)임금과 신하인 고요(皐陶)가 창화(唱和)한 시가(詩歌). 순임금이 시가를 지어 고요에게 권면하자, 고요는 순임금의 시가를 이어 시가를 지어 임금을 권면하였다. 군신간이 서로 권면하고 토의하여 정치한 대표적 시가이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
  • [註 396]
    오자가(五子歌) : 하(夏)나라 태강(太康)의 아우 5인이, 형이 향락과 사냥에 빠져서 돌아오지 않음을 원망하여 지은 시가(詩歌).
  • [註 397]
    대아(大雅) : 《시경(詩經)》 시체(詩體)의 하나. 왕정(王政) 폐흥(廢興)의 자취를 읊은 연향(宴饗)의 악가(樂歌)이다. 여기서는 《시경》의 대아 같은 바른 시가 없음을 말한다.
  • [註 398]
    문장은 진한(秦漢) 때까지도 오히려 종횡가(縱橫家)의 습속을 답습하고, : 종횡가(縱橫家)는 구가(九家)의 하나로 시세를 살펴서 임금을 유세(遊說)하는 것인데 전국(戰國) 때 소진(蘇秦)은 합종(合縱)을 주장하고 장의(張儀)는 연횡(連橫)을 주장하였다. 귀곡자(鬼谷子)·공손연(公孫衍)·소대(蘇代)·소여(蘇厲)·주최(周最)·누완(樓緩) 등도 이에 속한다.
  • [註 399]
    시(詩)는 제(齊)·양(梁) 때에 이르러 이미 경박하고 부화(浮華)한 형태를 이루었도다. : 제(齊)·양(梁)은 남조(南朝) 때의 국명. 제·양 때의 시풍(詩風)은 교묘하게 꾸며 맞추는 따위의 기교적이었고, 색채가 화려하였으며, 시문(詩文)은 대우(對偶)를 맞추고 또한 엄격한 성률(聲律)의 제한을 받았다. 당시의 시체를 영명체(永明體)라 하였다. 당시의 유명한 시인으로는 사조(謝脁)·심약(沈約) 등이 있다.
  • [註 400]
    화조(華藻) : 문장을 화려하게 꾸밈.
  • [註 401]
    당 태종(唐太宗)의 등영주(登瀛州) 선발 : 당 태종이 천책상장군(天策上將軍)으로 있을 때에 문학관(文學館)을 지어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 등 18인을 학사(學士)로 삼고, 염입본(閻立本)에게 그들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저양(褚亮)에게 찬(贊)을 짓게 하고서 그들을 18학사라 불렀다. 그리고 서고(書庫)에 간직하여 어진이를 예우(禮遇)하는 것이 중요함을 나타냈는데, 이때 여기 선발된 사람을 천하 사람이 향모(向慕)하여 등영주라고 했다. 영주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 영주에 오른다는 것은 선계(仙界)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당서(唐書)》 권120 저량전(褚亮傳).
  • [註 402]
    한 무제(漢武帝)의 횡분사(橫汾詞) : 한 무제(漢武帝)가 지은 추풍사(秋風辭)를 말한다. 추풍사에 "누선(樓船)을 띄워 분하(汾河)를 건너서 중류를 가로질러 흰 파도를 날린다. [泛樓船兮濟汾河 橫中流兮揚素波]"고 하였다.
  • [註 403]
    풍소(風騷) : 풍요(風謠)와 시소(詩騷)를 말한다. 풍(風)은 《시경(詩經)》의 국풍(國風), 소(騷)는 굴원(屈原)의 《이소(離騷)》가 유명하다. 소(騷)는 운문(韻文)의 한 체(體)로 시가 변하여 소(騷)로, 소가 변하여 사(辭)가 되었다.
  • [註 404]
    사신(詞臣) : 글 맡은 신하.
  • [註 405]
    옹용(雍容) : 온화하고 조용한 모양.
  • [註 406]
    아송(雅頌) : 《시경(詩經)》의 아(雅)와 송(頌)의 시(詩). 아(雅)는 정악(正樂)의 노래이고, 송(頌)은 선조(先祖)의 공덕(功德)을 찬탄한 노래이다. 풍(風)·흥(興)·비(比)·부(賦)와 함께 《시경(詩經)》 육의(六義)에 든다. 여기서는 성종의 정치가 주(周)나라 전성기처럼 태평하였음을 말한다.
  • [註 407]
    삼대(三代) 때 제작(制作)의 풍도(風度) : 삼대(三代)는 상고(上古)의 하(夏)·은(殷)·주(周)이다. 삼대 때의 온유(溫柔)하고 돈후한 고풍(古風)을 따라 제작했다는 뜻이다. 삼대의 글로는 육경(六經)이 이에 속한다.
  • [註 408]
    오도(吾道) : 유학(儒學)을 말한다.
  • [註 409]
    정신은 실로 노(魯)나라를 들름으로 해서 더 증가하였고, : 진 시황(秦始皇)이 책을 불사르고 유생(儒生)을 묻어 죽이며 유학(儒學)을 폐지하였었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진(秦)을 멸망하고 천하를 얻은 뒤에 다시 예악(禮樂)을 제작하고, 노(魯)나라에 들러서 공자(孔子)의 사당에 제사지내는 등 유학을 부흥시켰다. 여기서는 연산군 때 쇠퇴한 유학을 중종이 다시 진작함을, 한 고조가 진(秦)나라 이후에 유학을 부흥시킨 데 비한 것이다.
  • [註 410]
    호걸은 주 문왕(周文王)을 만남으로 해서 많이 일어났도다. : 주 문왕(周文王) 때 호걸이 많았다 한다. 여기서는 중종 같은 성군을 만나서 인재가 주 문왕(周文王) 때처럼 많음을 비유한 것이다.
  • [註 411]
    시서(詩書)가 다시 나오며 진갱(秦坑)에서 성한 불길을 구하였고, : 진 시황(秦始皇)이 시서(詩書)를 불사르고 유생(儒生)을 묻어 죽이며 유학을 금지한 것처럼, 연산군이 유학의 본거지인 성균관(成均館)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유학하는 문관(文官)을 욕보이는 등 유학을 외면하던 것을 중종이 반정하여 유학을 다시 진작시킴을 말한다. 진갱(秦坑)은 진 시황이 유생을 묻어 죽인 구덩이라는 뜻이다.
  • [註 412]
    연곡(燕谷)에서 옥률(玉律)을 조화하였도다. : 연곡은 연(燕) 땅에 있던 한곡(寒谷)이었는데, 추연(鄒衍)이 옥률(玉律)을 불었더니 따스한 기운이 나왔다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논형(論衡)》 정현(定賢).
  • [註 413]
    ‘문(文)이 이에 있지 않느냐?’ : 이 구절은 공자(孔子)가 한 말로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문왕(文王)이 죽었으니 문(文)이 이에 있지 않느냐?" 하였는데, 주에 "문(文)은 도(道)가 나타난 것으로 예악제도(禮樂制度)를 이르며, ‘이[玆]’는 공자 자신을 아른다." 하였다.
  • [註 414]
    풍아(風雅) : 풍은 민요이고 아는 정악(正樂)이다.
  • [註 415]
    단확(丹雘) : 단청, 즉 문채.

○撰集廳堂上申用漑金銓南袞等, 進所撰《續東文選》。 其進箋曰:

繼天測靈, 聖主開光明之路; 黜浮崇雅, 多士闖性理之關。 肆輯諸家之正宗, 用贊昭代之文敎。 竊惟文章之根本, 肇自天地之權輿。 磅礴渾淪, 已蓄精粹之氣; 動盪發越, 豈掩昭著之輝? 寓於善嗚而發爲辭華, 載諸往牒而垂之後葉。 隨時運而或異, 配道義而長流。 庭賡載之歌, 足以驗雍熙之治; 汭咸怨之作, 亦以觀亂亡之萌。 蓋勸懲之有權, 豈感發之無自? 政敎以之而宣朗, 禮樂於是乎昭明。 久矣大雅之不陳, 紛然衆作之競噪。 文逮, 尙襲縱橫之餘; 詩到, 已成輕浮之態。 苟華藻不本於經術, 而文詞反類於俳優。 粤我朝鮮之邦, 舊被禮義之化。 當初雖索塗而摘埴, 厥後漸出幽而遷喬。 迨運之重熙, 藹文風之丕變。 解紛多賴於詞命, 華國亦由於風謠。 五百年王氣已消, 一千載文運大振。 翽翽其羽, 朝著盡鳳鳴之才; 菁菁者莪, 學校皆豹變之士。 恭惟成宗康靖大王, 學典終始, 道合彌綸。 網羅群英, 勝唐宗登瀛之選, 昭回宸翰, 陋 橫汾之詞。 眷言歷代之風騷, 實是傳道之羽翼。 載取東文之入室, 乃命詞臣而分門。 先哲之剞劂粲然, 後生之模範備矣。 邇來過四十載, 作者非一二家。 雍容揄揚, 陶一世雅頌之美; 溫柔敦厚, 追三代制作之風。 在廢朝雖經陵夷, 顧吾道未嘗泯滅。 然精神實增於過, 且豪傑多興於遇。 今我主上殿下, 心潛聖涯, 手培道脈。 詩書復出, 救烈焰於坑; 琴瑟更張, 調玉律於谷。 是之謂道之將行也, 孰不曰文不在玆乎? 風雅方興於昌期, 丹雘宜賁於前烈。 爰述成廟之遺意, 俾續《文選》之餘音。 伏念臣等, 側以庸資, 叨承隆寄。 披諸家之亂藁, 踵前選而增修。 每切揀金之誠, 尙懷遺珠之念。 管中窺豹, 僅能覩其一班; 日下望雲, 忽已迷於五色。 愧無汲古之脩綆, 徒持撞鍾之寸筳。 聊薄采於衆芳, 庸一奏於九闥。 拔其尤者, 縱殫知馬之微能; 斲而小之, 曷副求木之厚望? 【贊成崔淑生所製】


  • 【태백산사고본】 17책 34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461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