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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33권, 중종 13년 5월 7일 을사 5번째기사 1518년 명 정덕(正德) 13년

우의정을 임명하는 과정에 윤구가 좌상 신용개의 말을 잘못 전하는 내막을 논하다

정광필이 아뢰기를,

"전에 아뢴 김전(金詮)·이계맹(李繼孟)·남곤(南袞)·안당(安瑭) 네 사람 중에서 상께서 참작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좌상 신용개(申用漑)가 병으로 집에 있었으므로 주서(注書) 윤구(尹衢)를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는데, 윤구신용개의 말로써 아뢰기를,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사람이 없으니 상께서 스스로 결정하소서. 신 등이 지난번에 의계(議啓)한 세 사람 중에서 참작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전번에 상께서 안당을 정승으로 삼을 만하다 하셨을 때 신 등이 분부를 받들지 못한 것은, 그 때에는 직질(職秩)이 아직 좀 낮기 때문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올라서 1품이 되었으니, 이 네 사람 중에서 고르소서. 그러나 취하고 버리는 것은 오직 상에게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구가 수의(收議)할 때에 한림(翰林) 유희령(柳希齡)이 주청(奏請)에 관한 일을 수의하기 위하여 또한 좌상의 집에 갔다가 이 일을 함께 들었는데, 좌상이 이르기를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사람이 없으니 상께서 스스로 결정하소서. 그러나 신의 뜻은, 지난번에 아뢴 세 사람 중에서 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때에 상께서는 안당을 정승으로 삼을 만하다고 분부하셨지만 신의 뜻은 전번에 아뢴 세 사람 중에서 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한다. 그러니 신용개의 뜻은 안당에게 비중을 둔 것이 아니라 세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구가 상께 아뢰려 할 때에 승지 이자(李耔)김정(金淨)이, 촉망한 사람을 물으면서 ‘좌상도 반드시 안당에게 비중을 두었겠지?’ 하므로, 윤구(尹衢)는 한참 동안 주저하다가 끝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좌상의 본뜻과 윤구가 아뢴 것과는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상은 신용개안당에게 비중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을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아뢰고 나서 윤구가 한림(翰林) 심사손(沈思遜)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뢴 것이 좌상의 말과 다르게 된 것은, 승지가 먼저 묻기를 「좌상도 안당에게 비중을 두었겠지?」 하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자네가 역사에 기록할 때는 이 뜻을 알고서 기록해 달라.’ 하였다 한다. 윤구가 왕명을 전하여 정승을 고르는 중대한 일을 수의(收議)하면서 그 말을 신용개 앞에서 기록하지 않고 이리저리 물어 가지고 와서 아뢰었으니 그것이 잘못임을 알 수 있고, 말을 변개하여 회계(回啓)한 데 대해서는 상이 비록 본래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고 또 여러 사람의 뜻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더라도, 명을 받들고 왕래할 때에는 털끝만큼도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신용개는 대신으로 병중에 하문(下問)을 받았는데, 어찌 그 뜻을 적어 가지고 봉해서 보내지 않았는가? 김전남곤·이계맹을 정승에 제수해도 좋겠는가 하는 것은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니 논란할 필요가 없다.

또 사신은 논한다. 윤구는 천성이 본시 허소(虛疎)한 사람인데, 재예(才藝)만 가지고 사림(士林)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승지 등이 안당을 정승으로 미는 뜻에 영합하여 어기지 않고, 대신(大臣)의 의논을 중간에서 막아서 상달되지 못하게 하여 천청(天聽)을 속였으니 그 무식함을 알 수 있다. 윤구는 또 그 일이 드러나 사가(史家)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나와서 심사손에게 말하기를 ‘좌상의 본뜻은 세 사람에게 비중을 두고 있었지만, 승지 등이 급히 재촉하는 데 못 이겨 서계(書啓)한 말이 안당에게 비중을 둔 것이니, 사책(史冊)에서는 사실대로 써 달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신청(宸聽)을 속였으니 사실대로 쓴들 무엇하겠는가? 교묘하고도 어리석도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33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431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光弼啓曰: "前啓四人金詮李繼孟南袞安瑭之中, 上自斟酌。" 時, 左相用漑, 病在私第, 命遣注書尹衢問之, 用漑語啓曰: "知臣莫如君, 上自裁斷。 臣等前所啓, 議啓三人之中, 斟酌之可也。 向者上以安瑭爲可相, 而臣等不能承其敎者, 以其時職秩尙稍卑耳, 今則陞爲一品, 幷此四人之中, 其取舍, 直在於上矣。"

    【史臣曰: "尹衢收議時, 翰林柳希齡以奏請事收議, 亦到左相家, 參聽是事。 左相曰: ‘知臣莫如君, 自上裁斷, 然臣之意, 前啓三人之中, 定之可也。’ 其時上敎以安瑭爲可相, 然臣意則前啓三人之中可定云, 蓋用漑之意, 不歸重於安瑭, 而在於三人矣。 及尹衢臨啓之時, 承旨李耔金淨, 以有屬望, 問曰:‘左相亦必歸重於安瑭矣’, 遂依違, 不以實對。 以此左相本意, 與今所啓異, 上固不知用漑不歸重於安瑭之意也。 旣啓之後, 謂翰林沈思遜曰: ‘吾之所啓, 與左相所言不同者, 蓋承旨先問曰: 「左相亦歸重安瑭」云, 而然矣。 君之書於史也, 知此意而記之’ 云。 傳王命收議, 卜相重事, 而不書其言於用漑之前, 參質來啓, 其舛妄可知, 而至於變辭回啓。 雖上素所注意, 而群意已定, 承命往復之間, 不當有毫髮之差也。 況用漑以大臣, 臨疾承問, 何不書其意, 封緘付進乎? 若其金詮南袞繼孟之可授相位與否, 自有可觀之地, 不須論之。"】

    【又曰: ", 性本虛疎, 但以才藝, 側於士林, 又附承旨等屬望安瑭之意, 承順無違, 至使大臣之議, 中沮不達, 以誣天聽, 其無識可知。 又怵其事覺, 得罪於史家, 出語沈思遜曰: ‘左相本意, 歸重三人, 而迫於承旨等急催, 書啓之辭, 歸重安瑭。 史冊須以實書之’ 云。 旣誣宸聽, 則雖以實書之, 何益哉? 巧且愚矣。"】


    • 【태백산사고본】 17책 33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431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